이순신에 대한 다섯가지 이야기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한나라의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 하더라도 과연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왜구를 토벌한 공로는 백세토록 영원히 그 덕택을 입고 있고, 변방의 방비를 규획하는 데 방략이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그의 명성과 의열은 아직도 사람에게 늠연히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정조, <홍재전서> 중에서
4월 28일은 충무공탄신일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출생일은 정확히는 1545년 음력 3월 8일로, 이 날을 현재 사용하는 그레고리우스력으로 환산한 날짜지요.
충무공탄신일인만큼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매체에서 들려주겠지요. 5분 한국사 이야기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한때 논란이 되었던 이야기에 대해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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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순신은 역적의 자손이다?
이순신의 본관은 덕수 이씨로서, 임진왜란 이전까지 덕수 이씨는 문반으로 유명했는데, 할아버지가 기묘사화 때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해 상대적으로 격이 낮은 무반 집안이 되었다는 설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은 기묘사화 이후에 관직에 진출한 인물입니다.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이유로 파직된 것을 보면 훌륭한 인물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역적은 아니었지요. 애초에 역적의 자손이면 무과고 잡과고 간에 과거 자체를 볼 수가 없습니다.
간혹 이순신의 어록이라고 떠돌아다니는 것 중에서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건 근거가 없는 소리입니다. 정확히는 언론인 김종래 씨가 쓴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게 김종래 씨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칭기즈 칸의 어록으로 둔갑했다가 이순신 어록으로 변화한 것이지요.
2. 이순신의 무예
이순신이 불세출의 전략가라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순신의 무예는 뛰어났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일단 무예를 닦기 시작한 나이가 22세이고, 무과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경험도 있습니다. 이순신이 급제한 것은 32세 때의 일이지요.
<난중일기>에는 활쏘기를 하면 보통 15발 중 10~11발 정도를 맞췄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무반은 물론 문반들에게도 활쏘기가 기본 소양이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명궁이라고 보기는 힘들지요. 참고로 충무공 이순신과 이름이 같은 무의공 이순신은 명궁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기록에서 ‘이순신이 무예가 뛰어났다.’라는 이야기는 보통 무의공 이순신을 말하는 것이지요.
3.이순신의 검
현재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는 이순신의 장검은 2m에 가까운 길이입니다. 오래 전에는 이 검의 길이를 근거로 이순신의 키가 2m 50cm가 아닐까란 추측을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 검은 군기 확립을 위한 장식용으로 실제 전투에서 사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이순신이 실제로 전투 때 사용한 것은 두 자루의 환도로, 보통 ‘쌍룡검’이라 부릅니다. 이순신 사후 행방이 묘연했다가 1810년경에 훈련대장 박종경이 발견해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요. 그러나 일제강점기 직후 쌍용검은 사라져 현재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4. 만들어진 영웅 이순신?
박정희 대통령이 군인 출신이었기에 이순신을 의도적으로 띄워주었고, 그래서 현재의 성웅 이순신이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군사정권시절 적극적으로 이순신 추승 사업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업적을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애초에 훨씬 이전부터 이순신을 영웅으로 여기는 사례는 여럿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 한참 후인 <순조실록>에는 통영 백성들이 이순신의 기일에 모두 소복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요. 또한 백성들이 자비를 털어 충무공의 사당을 세운 적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거기다 이순신을 높게 평가하는 인물들의 어록도 넘쳐나도록 많지요. 같은 시대의 사람인 류성룡, 이항복, 이원익 등은 물론 윤휴, 효종, 숙종, 정조, 박문수와 같은 사람들이 그의 위대함을 칭송했습니다.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경우에는 좀 재미있는 일화가 존재합니다. 그가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일하던 시절 중국인들이 벌이는 불법 어업 및 밀무역을 단속하기 위해 함선을 만들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돈이 부족해 조정에 예산 지원을 요청하지요.
이 요청을 들을 영조는, “이순신은 전란의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함대를 만들었는데, 경은 고작 400냥을 마련하지 못해서 손을 빌리는가? 알아서 돈을 마련해 배를 만들라!” 라는 내용의 회신을 전하지요. 박문수의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만합니다. 비교 대상이 이순신이라니요.
하여간 추승 사업 이전에도 이순신의 명망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군사정권이 이순신을 영웅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영웅으로 추앙받던 이순신을 군사정권이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5. 이순신 자살설?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납니다. 워낙 극적인 죽음이라서 그런지 이순신 자살설이 오랫동안 제기되었지요.
자살설은 이순신의 행장에 기록된 ‘면주(免胄)’란 표현 때문입니다. 직역하자면 투구를 벗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 말이 확장되어 이순신이 죽기위해 일부러 갑옷을 벗었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면주를 직역해서 번역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면주란 표현은 중국의 책인 <춘추좌씨전>에 등장하는 말로, ‘사력을 다해 싸우다’란 의미를 가지는 관용어지요. 즉, 이순신이 갑옷을 벗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이 갑옷을 벗고 북을 치며 지휘하다가 총에 맞는 장면이 나오지요. 물론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겠지만 역사적으로 본다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불멸의 이순신’은 고증적인 면에서 오류가 많았던 작품이기도 하지요.
자살설의 또 다른 배경에는 선조의 존재가 있습니다.
원래 선조는 임진왜란 직전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순신을 승진시킨 경력이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파격적인 진급이었지요. 그러나 이순신의 활약과 그를 지지하는 민중들을 보며 훗날에는 견제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지요. 이순신은 이런 선조의 행태를 보고 전쟁이 끝나면 분명 누명을 씌워 자신을 죽일 것이라 예감하고 자살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이순신의 평소 성품을 완전히 무시한 것입니다. 이순신은 평소에 “적들을 몰아내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자주 말하곤 했습니다. 이는 곧 일본군을 몰아내기 전에는 죽을 생각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물론 노량해전을 끝으로 일본군은 완전히 물러갔으나 이건 결과론적인 이야기고, 당시에는 이 해전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이순신도 죽을 생각이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요.
또한 선조의 부당한 대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음에도 이순신은 왕에 대한 충의를 저버린 일이 없습니다. 그는 언제나 국가에 충성하는 진정한 유교적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괜히 충무공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순신이 훗날의 모함을 두려워해 자살을 선택했다? 이건 이순신에 대한 모욕입니다.
사실 자살설은 조선 후기에도 널리 퍼져있던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맞이한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민중들의 아쉬움이라고 보는 편이 맞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