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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년 5월 25일 수요마음공부방>
강사: 신성해 선생님
제목: 유물 ‘수장고’
타이핑: 초벌)이하은, 유정인 완성)김도권
반갑습니다. 오늘 수요 마음공부방 초청 특강 오늘 지난주에 이어서 원불교 박물관의 오늘은 유물 수장고라는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유물 수장고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백주년인데, 우리가 백주년이라는 생각을 어디서 갖출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어봐야 할 것같습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60이면 엄청 늙어서 뭐 하나 할까 주의해야할 나이인줄 알았는데 지금 내가 60이 되니까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을 시행하는데 너무 짧은 시간인거예요. 사람도 하물며 세상에서 봤을때 모두 미물인거예요. 그 중에 나는 진짜 바닷가 모래알 같겠죠. 저만해도 내가 살아서 죽을 때, 내가 어떻게 죽었을까. 삶의 형태가 어땠느냐 하는 것을 따져보고 싶은게 요즘 드는 생각이더라고요. 그런데 하물며 내가 가장 존경하고 또 존경할 뿐만아니라 전대미문한 분의 제자라고 알고 생활하고 있는데 내가 과연 그분에 대해서 어떻게 느껴볼 수 있을까, 보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 교도로써 불성이 있잖아요. 불성이 있는데 그걸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우리는 과연 그 불성을 일깨워주어서 '세상에 내가 불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라고 느낄 수 있겠끔 그 한 종단의 교도의 제자로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에요. 그런 가운데 나는 역사적인 나가 아니겠어요. 앞으로도 100년 500년 5만년 그 와중에 100년의 역사에 내가 있었다. 라는 생각만으로도 엄청 행복한 것이에요. 이렇게 내가 100년이라는 기간동안 내 위치가 이렇게 되고 불성을 가진 사람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교주를 닮아가야 할 때 과연나는 얼만큼 어떻게 해야하는 건가 생각해볼 때 저는 유물을 다루는 사람으로써 늘 가슴 싶이 늘 깨어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기원을 매일 심고 모실 때 해요. 저는 맨 처음에 박물관에 왔을 때 말씀드릴려고 한게 이겁니다. 저는 세상사람 부러울 것없이 많이 가져봤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를 위해서 원불교 교단에 와서 내가 할것이 무엇인지 찾다보니까 교단이 너무 가난한거에요. 여러방법을 시도해야했는데, 시간은 둘째치고 너무 소모적인 일이 많다보니 제가 이렇게 빌었습니다. '저에게 혜안을 주실 때에 다시 하지 않게 그렇게 해 주십시오' 라 유일한 심고를 그렇게 하고 제가 느낄 때.. 사실 그 어떤 유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들이 없어요. 가장 중요한건, 각 나라마다 특징이 있잖아요.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을 보고 어떨 거라 상상이 갈 정도의 정해진 것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게, 바로 그 나라의 기후대라든가 가장 종교문화적인 것들이 굉장히 커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원불교, 그 세상에 많은 종단 중에서 원불교단 그 중에 대종사님을 내가 얼만큼 닮아가고 대종사님이 원하는 문화세계에서 가지고 있어서 '내가 원불교단에서 보여지는 것이 뭘까? 대종사님을 받아들일 때 그 느낌이 나는 몇프로나 주어져있을까 앞으로 내가 몇 프로나 갖춰서 죽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 대종사님의 유물 수용의 흔적을 가졌던 이런 것들이 만에 하나라도 상처가 난다거나 만에 하나라도 지금보다 더 부숴지거나 상한다던가 없어진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그런 두려움이 생겨요. 그런데 제가 20년 전 관심을 가져서 이렇게 하기 전에 진짜 와서 보면서 유물의 완품을 봤어요. 그 기억이 아직도 있어요. 그런데 20년 지난 지금 3분의 1도 안 남아 있어요. 예를들어 '대산종사님 서원서' '전무출신 서원서' 저는 당시에 완품을 다 봤어요 그때는 필사로 교단에 있는 원본을 보고 써 가지고 코사인까지 딱 하는 이런 완품을 봐서 정산종사님 것도 보고... '그 때는 이런 마음으로 하셨구나' 사인해주신 어머님이 '아들과 며느리 손자까지 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정산 아들은 전무출신에 전념하도록 할 테니까 걱정말라고... 써놓은 3분의 1도 안남았어요. 그것밖에 안남았다고 할 때 여러분들은 어떤...마음에 들었을 것 같아요? 뚜껑열기가 두려울 때가 있어요. 현재도 박물관에 있지 않고 각 부서들에 있는 것들이 아직도 많아요. 박물관에 있는 것들은 그 상태에 있는 게 대부분이예요. 그게 '1년 지나면 어떨까 5년 지나면 어떨까' 실험을 하면 좋겠어요? 내가 죽을지 안죽을지 실험한다고 하면 어떻겠어요. 그런마음인 것같아요. 지금 이것들은 한번 잘못되면 그냥 영원히 없어지는 겁니다. 다시 했다가 물에 젖었다가 말리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 유물들이 그냥 상해지는 것들도 보고 이래요. 이럴 때 정말 유물은 대종사님의 분신이예요. 대종사님은 다른 종단의 교조하고 굉장히 다르다 그랬어요. 저번에 말씀드린 것 같이 창립주, 상징주예요. 그런데 대종사님은 정전 쓰시면서 어떻게 했어요. 사실주 우리가 상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교전에서 사실주라고... 그리고 그것 가지고 훈련을 시키는 훈련주세요. 그렇게 때문에 다른곳에서 눈이 어떻고 코가 어떻고 초상화 그린 거 하고는 완전 다른 차별화되는 교주를 모시는 특별한 교도라는 것을 느끼셔야 해요. 상상 속의 상징주가 아니란 거예요. 교전에 살아서 대각한 사람은 세상에 많아요. 그런데 이렇게 교전에 살아있으시면서 우리한테 모든 것들을 화신으로 보여주시는 분은 대종사 뿐, 전무후무하다는 거.. 이거를 느끼면서 그런 분의 제자다. 라고 할 때 세상의 모든 일들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일인 듯 쉽겠어요. 대종사님의 그늘로서 봤을 때 그 제자가 못하는 게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거예요. 해봐가지고.. 어느 정도까지 한다고 할 때 두려움이 절대로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그런데 그 분이라고 하면 대종사님의 모든 것 ,육신이 그렇게 되셨다고 우리에게는 살아계신 거예요. 그분의 수용품은 그분의 분신이예요 .그런데 그 분신이 사라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100주년에 우리교단이 다른교단에 비교해 그거 하나 못 살린다는 건 교도들의 오만이라고 생각해요. 만약에 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에는 유물 많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원불교도로서 대종사님의 유물, 대종사님의 수용품이라고 하는 유물에 대한 걸 생각한다고 할 때,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유물을 봐야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뜻에서 '유물 수장고'라는 거예요. 그만큼 대종사님의 유물을 모시고 있는 상황에서, 집안에 있는 것처럼 보고 놔두는 게 아니라 오늘 비교를 실로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것과 비교를 해보고 싶어서 오늘 강좌에 '유물 수장고'라는 단순 명쾌하게 제목을 정해 봤어요. 저는 유물이 좋아서 고고학 발굴을 하면서 진짜 세상에 어떤 즐거움 나를 정말 기쁘게 하는 것이 뭘까? 세상에 나와 있는 그 좋대는 거 이런 것보다는 내가 이 사이트라는 거 유물을 봤을 때 저는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그게 오늘까지 저를 만들었는데, 과연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어떤 유물이 나올까? 이러면서 생각하고 유물의 일부가 나오고, 저녁 때가 돼서 그게 더 이상 발굴 할 수 없고 숙소로 들어갈 때, 되면 잠을 못잘 정도였어요. 상상을 하느라고... '완제품일까 어떻게 됐을까' 이런 것을 해 보면서 조그만 것에 땅 밑에 있는 절대다수의 미확인된 것들을 확인해보면서 아침은 설치고 아침에 일어나서 밥도 먹을 수도 없고 막 이러면서 발굴 현장에서 발굴 하게 되면서 그 때 너무나 기뻤어요. 누구도 알지 못한 그 기쁨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박물관을 맡고 나서 대종사님 유물을 한 번도 근대 유물을 만져보진 않았댔어요. 그런데 내 종단 내 교단의 창립주인 교주의 유품을 발굴 할 때, 전율을 느낀다는 거죠. 진부한 표현인데 대종사님이 저를 하루하루가 감싸고 계신 거 같아요. 유물 작업을 하다 보면 어떤 때 정말 그 보통때보다도 다른 기운 이런 걸 느끼면서 내가 진짜 눈이 감아지지 않아야겠다. 그런 생각도 들고 참 많은 수장고 들어가서 작업할 때 별별 생각이 다 들어요. 내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누가 이만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뭘 보고 행복할 수 있으며, 더한 기쁨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늘 교무님들한테 강의할 때 '당신들은 모르실 거라고 얼마나 기쁘게 타임캡슐 타고서 갔다왔다는 것'을 생각을 하면서 혼자 하다가도 울고 그래요. 왜냐면 이게 막 다른 데서도 아니고 수장고에 모셔진 것들중에 상한 것을 발견했을 때 그래요. 그게 언제 얼마나 갈까 복제품 만드는 것들에 대해, 이런것들이 한편으로는 많은 요행수를 바래요. 그런데 내가 죽을 때까지, 단명적인 게 아니잖아요. 5만년 대운이 튼 교단인데, 대운만 5만년인데 얼마나 오래가겠어요. 그때까지 갈 수 있을까? 너무나 안타깝고 알아들을 수 있을까? 너무나 안타깝고.. 그랬어요. 제가 1년을 보존처리를 하면 앞으로 100년, 1000년을 더 보관이 될 텐데... 왜 이거를 이만큼 상하고.. 두게 뒀는지.. 아무리 똑같은 형태래도 기운 빠졌을 때 특히 살이다 녹았을 때 다르잖아요. 유물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날 확 상해버리고, 이런 걸 보면 단순히 터진 말을 어떻게 해야될 줄 모르겠어요. 아마 우리 박물관이 3남 2남에서 최고로 클 거예요. 유물도 엄청나게 많아요. 무조건 열반하시고 나면, 유물 먼저 교단적인 것들, 그리고 개인의 위상상으로 필요한 것들, 특징적인 것 이러한 것들을 빼놓고 나눠갖기도 하고 처리하고... 한 교무님들 한 사람의 일생을 봤을 때, 그 문화라고 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풍기는 게 아니잖아요. 그 주변에 다 아는데, 우리 원불교 교무님들 100주년 내 산 분들은 100주년 이후의 교무님들과 완전히 다를 거예요. 지금도 원로 교무님들을 보면 7-80, 90대 분들 그냥 할머니죠. 그분들이 자식들에게 변하게 할 만한 힘으로 말씀하시는 경우 드물 거예요. 그런데 우리 원로님들은 현역 교무님들 보다도 더 빨리 알아내요. 유물에 대해서 그 당시의 원로님들 그 당시의 사회적인 것들 얘기하면, 얼만큼... 어떻게 저렇게 영리하실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감히.. 그렇게 영리하실 수가 없어요. 그만큼 사회적으로 살아오셨다는 거예요. 그만큼 지금 5-60대사람들보다도 더 치열하게 교도들을 위해서가 아니겠어요? 본인을 위해서 했겠어요? 교도들과 숨쉬고 하기 위해서 줄달음질 친 분들이라는 걸 느껴요. 내가 이 방에 들어가면, 내 방엔 안 왔다가니 말씀하세요. 그렇게 전체 방 안을 돌게 되면요. 교무님이 이거 박물관에 가져가면 좋겠는데.. 라고 하세요. 그분 당신들은 그게 부끄러운 거지만 아주 큰 작품인거죠. 당신이 해 놓은 뭐한 것은 저는 이게 어쩜 이렇게까지 해 놓으셨을까 노트 한 장에 까만거 빨간거 파란거 쓰면서 많은 것들을 말해주고 이런 걸 해 놓은 건데. ' 아이 이거 내가 그냥 생각하면서 한 건데 뭐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런데 교무님들이 100년을 만들 때 쌓아온 실력 겸양하는 거 아니겠어요. 이런 것들이 너무나 많은 거예요. 노트에 보면, 교무님들만이 가지는 지나가다가도 한번씩 내가 어떤 말이라도 교도들에게 법회 때 해주리라고 쓴 것 이런 걸 보면서, 정말 보통사람들하고는 다르게, 연세가 드셨어도. 일반사람들하고는 다르게 살아온 것을 저는 하나하나마다 느껴요. 그러니 교무님들이 얼마나 귀하겠어요. 우리가 말하는 교단에서 말하는 공도주의, 이소성대 이런 것들이요. 그냥 눈으로 외고 눈으로 봐서 외고 말로 이런 것들만이 아니예요. 그분들을 보면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이런 것들을 저절로 알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을 보관해야 되는 게 그게 수장고인 거예요. 지금 수장고가 너무 작기도 하고... 요즘 한 단어로 표현할 때는 무서워요. 맨 처음에는 가 가지고 막 만들면 되는 건데요. 안에 했던건 막 해놓고 유물 지정 안된 것도 지정하는데 이제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가는 거에요. 지나갈 때에는 어느것이든지 내가 만족하는 단계로 가는 데, 여러분이 생각하는 거 상상하는 거 보다도 더하게 그럴 때마다 유물은 굉장히 많이 찾아졌어요. 찾아졌는데... 그것을 다루어야 하는데 사람도 부족하고, 공간도 부족하고.. 이렇게 되니까 점점 두려워지는 거예요. 요즘에는 무섭다는 생각이 더 많이 표현돼요, 자다가도 '수장고' 그러면 번쩍 눈이 뜨이는 수장고인 거예요. 개인에게도 수장고라는 개념을 보게되면, 엄마만 따로 쓰시는 창고같은 건데.. 이제 정말 창고같은 개념이예요. 우리 집안의 모든 역사를 다 말해주는 거잖아요. 역사도 말해주고 취미도 말해주고 경제상황도 말해주고.. 그런.. 통폐합할 수 있는 역사를 꿰고 있는 그런 게 그런데, 이런 수장고를 보면서 오늘도 종단이 다 모이고 문화재청 따라 모이면서 용산역에 회의실에서 회의를 하고 오면서,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런 사람들 이런 교단의 사람들한테 했다는 자부심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이런 것들이 정말 공인이 잘 받아져가지고 우리것들이 등록문화재로 되는 것들이 이순간 백주년 되니까 문화재청에 등록되는 작품이 몇 점 되기 위해서 다른 데 보다도 아마 이제 지금은 원불교의 유물이 어떤 걸 보관하고 있냐가 핵심이기 때문에 민족종교 목록을 작성하려고 하는 거 같아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서서히 우리가 초기부터 100주년 내에 정리가 돼서 그런 것들이 등록문화재로 한두점씩 올라가게 되면, 이런 다른데서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교단보다도 문화재청 이런 데서 원불교가 어떻게 하고 있나 수장고가 보고 싶대고.. 이렇게 만드는 것이 기존에 있는 사람들이 봤을 때 원불교는 아마 이런 것들이 굉장히 잘 돼 있고, 굉장히 많은 거라고 오늘 말이 헛나와서.. 여기서 90프로는 원불교학과가 될 텐데 이러더라고 하더라구요.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그 기대치에 진짜 부응을 할 뿐만 아니라 상상 이상의 그런 걸 해 놓고 싶다 라는 다짐을 하고 그러는 거죠, 수장고 할 때 실록과 비교하면서 이제 해보려고 합니다.
이게 우리 '수장고'예요. 보시는 바와 같이 가스, 불이 나면 이렇게 진압가스가 나와서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그리고 여기는(왼쪽은) 일반 수장고에요. 또 특별 장이 있어요. 이쪽에 있어가지고, 특별장에 대종사님 유물이 모셔지고 지금 이제 또 보전처리를 해서, 중성지 박스에다가 넣어서 이 장으로 이런 장으로 들어가기 전단계로 해놓고, 물론 여기에 다 회충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방지하는 것들를 하고 밖에 있었던 거는 다른 방에서 약품처리를 해 가지고 들어와서.. 이 각자가 있는 자리에 올 수 있게끔 하는 거고 작은 규모에 유물이 얼마나 들어가겠어요?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 대산종사님의 유물 중에 거의 다 작업이 돼서 여기에 모셔져 있어요. 그리고는 밖으로 일반 수장고에 정리가 된 것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도 우리는 항습, 항온이라던가 이런 기능을 갖추어서 이 자체가 외벽으로 보이는 거는 이렇지만 안으로 요쪽으로 50에서 70배 정도가 주족벽들을 쌓아서.. 다 해놓고 한 것이 사실은 맨 처음에 2000년 새롭게 할 때에는 국립박물관에 버금가도록 규모는 작지만 정말 손색이 없게끔 해 놨는데 너무 작아가지고 꽉 차가지고 일부 유물들은 저 방으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중요도에 따라서, 일반 수장고에 모시고 처리하는 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우리 유물들이 될 때에는, 수장고에서 보관돼야 된다. 이렇게 하고 있잖아요. 그 개념이 1960-70년 정도 우리나라 기준으로 봤을 때, 또 외국기준으로 1950-60년대 이런 거.. 여러분들이 아는 세계문화유산이 정해진게 1945년 1-2차 세계대전 거치면서 생겨났는데 인간이 만든 유산들이, 정말 하루아침에 다 없어질 수 있겠구나. 하는 강박관념이 지식인들 예술인들, 세계적인 모임에서 말하기 시작을 했어요. 그래서 그렇다고 하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나라 사람들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그걸 느끼는 사람들이, 대종사님 표현으로 지자본위의 사람들이, 아는 국가의 사람들이, 중요도있는 것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들자 라 합심해서 유네스코에서 정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당시 전쟁통이고 이런 걸 거치고 남의 나라의 핍박을 받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유물을 다루고 보존한다고 이러는 데에 우리 지식인들이 고고학하는 사람들이 다 회원으로 등록을 해 가지고, 사실 2004년도에 세계 박물관 문화협회,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일본을 다 제끼고 먼저 실시 했어요. 이게 전쟁통이고 이런 데도 우리가 등록을 해 놔서 다른 나라보다.. 그런 아주 얘기하자면 올림피아드 같이 지식인 올림피아드 같은 거죠. 전세계에서 20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와서, 한국이 정말 문화도시다 이런 걸 느끼고 갔어요. 사실 그 때에 일본만 해도 2000개 넘는 박물과 있을 때 200개가 안될 때였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 등록 박물관이 700개까지 됐어요. 10몇년동안. 영국으로 치면 4만개 있고 미국도 2만개 넘고.. 굉장한 박물관들 많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느끼지는 못했지만 수집이라든가 이런 걸 알고, 박물관들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문화기구를 만들게 되면 유물 절세 효과가 있기 때문에, 대기업도 많이 참여하고 유물의 소중함을 더 느꼈어요. 찬반도 있었지만 좋은 점 쪽으로 봤을 때 사람들이 직접 많이 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게 됐죠. 집 안에서만 보관하고 이러던 것들이 밖으로 나오는 때가 됐어요. 우리나라를 비교해보면 이런 개념으로라기 보다는 국가의 존폐라든가 이런걸 할 때에 저는 1대 2대 왕들의 왕의 것을 기록해서 보관해야 한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수많은 나라에서 왕의 기록이라는 건 다 있는 얘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같이 사초를 근거로 해 가지고 사초를 제일 중요하게.. 그때 사관이라 하는 사람들이 쓴 기록, 직책이 높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또 다른 청정한 직책으로 있으면서 했어요. 그런데 사초도 두 가지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거로는 보통 그 사람들이 중요한 사람 옆에 붙어 다니면서 왕의 그림자를 자처하게 되는 거죠. 근데 그런 것 뿐만 아니라 집안에 사초를 자기가 써가지고 자기가 볼 수 있고 아무도 권력자도 보지 않게 개인이 둔 사료를 쓰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것까지... 승정원 일기라든가 이런 거 몇 가지 등등이 다합쳐져서, 그 당대의 왕이 죽게 되면 다음 왕이 있는 기간 중에 만들어 내요 가장 중요한 힘이 됐던 사람이 두 사람이예요. 태조 이성계 등 많은 사람이 말해주고 있는 건데, 조선왕조 초기 왕이 왕 아들 태종에게 말할 때 살아있을 때, 바로 그 왕이 끝나면 끝날 때에, 바로 한 두 대를 거치지 말고, 바로 그 당대에 그 시대에 있었던 모든 일을 기록해서 남기라고 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반대하고 상소도 올리고 했는데 아주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 했고, 태종이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죄책감이 있어서 태종때에 1413년인가요 확실하게 그거를 만들었던 거죠. 태종 때 태조것을 완성을 시켰어요. 그다음에 정종과 태종 것은 세종이 병계를 해서 많은 상소가 올라오고 그랬는데도 두 왕 걸 완성을 다 시켜요. 이렇게 강력한 왕의 힘에 의해서... 그 때부터 아주 정착이 돼서 왕조실록이 25대 총 472년간의 기록이 완벽하게 기록 됐는데, 아마 기록문화유산으로 1997년에 우리로서는 151호 국보로 돼 있지만, 세계인들에게도 이렇게 중요한 거라는 걸 알릴 때 가장 큰게 이 편년체.. 시대별로 왕의 역사를 시대별로 다 이렇게 연도에 입각해서 해 놨는데 그 것를 한번에 일시에 기록을 쓴 게 아니라 하루하루 한때한때 기록을 다 한 거를 편집만 해서 만든... 아마 전 세계에 없는 일중의 하나예요. 이것은 왕도 제대로 못본 게 바로 실록이예요. 실록인데,. 그게 무소불위의 힘들이 있었을 땐데도 열려지지 않았죠. 살짝 보면서 크게 터진 게 무오사화예요. 그 당시에는 못 밝히고 이런 게 아니라 역사의 흐름에서 누가 잘못하고 누가 잘하고, 어느 편이 어떻게 되고 이런 것 때문에... 열어보지 못하게 하는 이런 게 있었는데 몇 번은 보수된 게 있었어요. 당쟁 일으키고 쓴 것에 있어서는, 당시 주류에 있던 사람들이 그다음대에 가서 주류가 안 됐을 때는 몇 번에 고쳐지는 건 있었더래도.. 거의 아무나 맘대로 열어보지 못한 채로 기록됐기 때문에,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었죠. 이것의
보존을 보시면... 서울에 보관하고 그리고 충주본, 성주본, 전주본 등 4곳이 있는데 임진왜란 정유재란 거치면서 거의 다 불살라지고 남은 한 사고 전주 사고 것만 남아서 유생에 의해 남아서, 익산에서 가깝죠. 그것만 유생에 의해서 태인의 유생들이 금산으로 일본 사람들이 왜구가 쳐들어온다 할 때 경비정을 지키던 사람이 보호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의논을 해 가지고, 개인 유생 둘이서 머슴 30명을 이끌고 이것들을 다 실어서 당신들이 있는 고향 내장사에 다가 갖다 옮겨놨어요. 옮겨놔 가지고 내장사에서도 용골이라는 데 지금도 좀 불가사의 중의 하나예요. 사실은 동굴 그러면 습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거기를 굉장히 안전한곳이라 생각해서.. 또 상상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습하지 않다 그래요. 1년간 그걸 다 짐으로 해 가지고 수레에다 해 가지고 1년 동안 두 사람이 불침번을 서서 책을 만들었어요. 거기에 보면 기록이 있어요. 안의가 서울로 어디를 가고 불침번을 선 기록이 남아 있어요. 정부, 왕가에다 이걸 넘길 때까지 1년간 왜구가 물러나기전까지 다 물론 상처는 크게 났지만, 이건 무사하게 불침번 서면서 보호해 가지고 궁중으로 옮기게 돼죠. 이후에는 강화도로 옮겨서 하고, 혜주에서 의주까지 옮겨갔다가, 다시 강화도에 있으면서 그게 선조 때에 선조가 나라를 뻇길 뻔하고 그런 아차하는 마음에서 그랬는지, 그게 선조 때에 한부씩 그걸 다시 만들어가지고 다 보관을 하게 돼서 지금은 전주본 하나가 임란 때 불태워지지 않고 보관돼서 그거 하나가 여러곳을 옮기면서 사직이 존속된 것 만큼이나 기쁘게 된.. 세계문화유산까지 등록이 되었죠. 그 유생이 특별한 직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방에서 공부하던 개인 개인들의 소중함을 느꼈고 그 소중함을 정말 선택과 집중을 얼마나 강력하게 했느냐에 따라 보관이 잘 됐다는 거죠. 4대 실록이 소실 되었는데.. 나중에 5대 사고가 되죠. 이렇게 멋지게 산 속에 여러분이 상상하는 이런 것들이 만들어져 있는 걸 보시면 얼만큼 멋지게 된 거 뿐만이 아니라, 이 당시인데도 산 속에 건물을 짓는 데 굉장히 그 힘들고 노력을 요하는 것이죠. 그리고 스페이스를 하게 되면 그것에 견주어서 그 스페이스 다 쓸라고 할 텐데, 이렇게 그 당시에도 습기 때문에 1층은 쓰지도 않고... 이렇게 이게 600년 전에 만든 건물이 이래요. 그러니 어떻게 보면 우리가 더 바보같이 사는 거 같아요. 이 대명천지에 기계화 돼있고,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짧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런가요. 사명감이 없어서 그런가요. 건물이 수려하고 멋진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만들어진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만든 것들 그 다음에 해도.. 얼마나 다르겠어요. 멋지죠. 보기만 해도 멋지고 이런 건물이 산중에 몇 명의 사람들이 저것만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돼 있고 우리 왕들의 초상화들이 거의 없잖아요. 수없이 써져 있는데 왕 그림은 얼마나 많이 그렸겠어요. 그런데 몇 개 안 돼 그 중에서도 태조 거는 얼마나 상징적이예요. 같이 옮겨서 내장사에 옮겨져 가지고, 그게 지금도 물론 지금 모셔져 있는 건 명인본이지만 진품이 있다는 거... 개인에 의해서 이렇게 됐다는 거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문화유산이 됐다는 거 이걸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라는 거 저런 마인드를 우리가 본받아야 된다는 거죠. 우리가 알아서 그럴까요 몰라도 그랬을 까요. 이렇게 국보 151호 19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이것도 이제 보면 사실 6.25사변때 북한이 한지를 가져갔어요. 3개 중 하나를 안 가져갔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자신있게 밝혔는데, 3년인가 먼저 만들었어요. 우리 때는 실록이 완역이 안돼서, 이북에서 나온거 몰래 보고 이랬어요. 나중에 우리가 완역이 되면서 우리것도 있고 이렇게 됐는데, 이게 왜냐하면 북한군이 왔을 때 서울을 점령했을 때, 그 때는 다 돈 찍는 기계도 놓고 가가지고, 김윤식 초상화 돼 있는 판쇄기.. 돈 다 찍어서 인플레이션 확 오르게 해요. 사람들이 돈 있어도 물건 하나도 못사게 된 것 같이.,. 다놓고 간것이에요. 내가 맡은 지역의 어떤 것들을 무슨 유사시에 해야 되는 사명감 그런 것들 자부심을 느낀다고 하면, 아마 그렇지 않을거에요. 무의식 중에 놓고 간다는 건 내가 그런 자부심이 별로 없다는 걸 증명할 거예요. 유례없이 찾는 기록물이다 이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걸 통해서 내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거 원불교도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을 때 내가 있는 곳에 내 역할이 어떤 건간 유사시에 오게 되면은 알게 모르게 하는 행동은 생각이 어떠냐에 따라 다른 행동을 가져온다는 거죠.
지금은 시간이 흘러서 장비가 노후 되고 또 우리 삶 문화 옥당박물관도 이런 상태예요. 이상태에서 유물이 저런 시기들 또 국가적인 거지만 우리 교단적으로 봤을 때, 실록은 역사물로서 이렇게 국가를 대변하는 거고 왕조역사를 하는 거지만, 우리 원불교의 유물들은 대종사님의 유물과 함께 교단적인 유물 이런 것들은 세계 종교문화 유산에 이제 자리매김을 하게 되겠죠. 이럴때에 정말 교조의 유품이라서가 아니라, 그 한국의 교조가 한국 근대사에 끼친 영향을 봤을 때, 그 분이 했던 수용의 흔적의 모든 것들은 아마 얼만큼 중요하다 하기 이전에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그대로일 거예요.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분이 소중하다 느끼지 못할지라도, 이제 백주년 되니까 문화재청에서도 이런곳에도 우리 유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백년 이백년 삼백년 지나게 됐을 때 더 크게 되고 1700년 2000년 5만년 역사로 따지면 오차범위 안이라고 그랬어요. 유물들이 지금 있는 상태만 돼도 어려운데 더 상해갈 때 우리의 역사의식이라든가 우리원불교가 다른 교단과 비교했을 때 최상층의 칭호를 들으면서, 그 유물의 안위에 대해 물으면서 그 유물을 세계문화유산으로 하고자 할 때 원본이 지금같이 보관이 안된다면 너무나 황망하다는 거죠. 분명히 결과도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을텐데, 지금 내가 느끼지 못하고 그 길이 열려지지 않았다 해 가지고 무관심하기에는 우리의 미래에 예측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때야 되겠는가 이런생각을 100주년 역사적인 일은 어떻게 내가 해야 될까 하는 것들을 생각한다면,,, 정말 내가 얼만큼 알고 뛰어야 되는가... 정말 돈도 중요하지만, 그렇잖아요. 인식이 중요해요. 그 인식을 따라서 사람들이 알아질 수 있게 하면서 그 과정을 아는 그 사람들이 너무 부족하다는 거예요.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교무님들, 누구 특정한 사람만 하기에는 우리 교단이 이제 너무 크다는 거예요. 세계가알아줄 수 있는 교단으로 컸는데, 시간이 남지 않았는데 교조의 유품이 보관돼있는데, 다 없어진다고 가정하면 내가 살 가치가 있겠느냐는 거예요. 그렇지 않겠어요? 유물 수장고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집에 가서 안위를 느끼는 그런 전각하고는 정말 다른 거라는 걸 느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들이 뭔지도 알 거예요. 이런 것들이 사실 정말 한날 한시에 '나 이제 안 할 거야' 그런 게 아니라 가풍이 이런 것들을 유도하듯이 교풍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교단이, 샘플적으로 완성이 되면 좋겠어요. 다른 데서 부러워할 적으로 샘플적으로 일어났으면, 우리는 백년전에도 지자본위를 했어요. 그리고 소외된 계층 하나도 없는 사람들에게 원대한 꿈을 말씀해 주셨을 때, 다 믿고 따르고 그대로만 하면 나는 저렇게 그런 길로 가고 내가 그 역할을 하는 한 도구가 되리라 느낀 게 백년 전인데.. 우리들 지금은 할까,말까 발을 들일까말까 고민하는 게 아주 초라하다는 거죠. 유물로 봤을 때 사실 강의를 학교 학생들에게 하듯이 서론, 본론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가 대종사님 유품과 교단의 유품들이 감성적으로도 충분히 감성만으로도 흔들어질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걸 여러분들이 느껴주시기를 바라고 지자본위!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거 너무나 진부한 말인데 대종사님의 유품을 한번 처음봤을 때, 두 번봤을때 만졌을 때, 떨어진 사진들을 짜깁기할 때 기분이 얼마나 좋은데, 그런 작업들을 할 수 있는 그런 길이 되기를 이런 인문학 강좌에서 저도 미력한 힘이고, 유물 강좌만해서 유물이 좋아지나요? 아니잖아요. 대종사님이 추구하시는 끝내 이런 낙원세계라고 하는 그런 어떤 찬란한 자체가 과연 뭘 갖춘 것인가. 그 컨텐츠가 뭔가? 단순히 낙원세계라고 하셨겠느냐 거죠. 그 컨텐츠가 뭐냐를 개개인의 정도 차이에 대해서 너무나 다르다는 거예요. 그걸 느끼시기 위해서도 상당히 많은 것을 소화되시길 바라는 거죠. 여기 말씀 드린 대로 초기 유물에 대한 것들이 보존돼야 된다는 건 사실이예요. 왜그렇냐면 진짜 한번보고 두 번볼때, 내포된 의미는 굉장히 달라져요. 주관적 오류에 의해 앞선 거 못미친 거 있겠죠.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한, 두사람이 아니라 많은사람들에 의해 평가됐을 때, 굉장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거예요. 맨처음 박물관에 들어왔을 때에는 제가 일당백을 해야 되냐고 했어요. 일당백이 되면 뭐가 제대로 되겠냐. 그랬어요. 한 사람이 한가지하기도 부족한데 무슨 일당백이냐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오죽하면 일당백을 부르짖으셨겠느냐 하는 생각이 드는거죠. 그렇지만 정말 전문은 다른 것을 안 하는 게 전문이 아니라, 다른 것을 통해 우리가 보고자 하는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거예요. 일을 여러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저는 해석상으로다른 걸 해 볼 수 있다는 것을 우리것을 보게 됐을 때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보다 또다른 세계를 부처님의 큰 뜻을 어느 한 개인이 다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이 사람이 이 뜻 저 사람이 저 뜻 등 뜻을 짜깁기 해서 모을 수 있는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죠. 이런 것을 봤을 때 그걸 실행하는 면에서는 좀 다르다는 거 알고 대종사님이 하셨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그 길만 가리라 하면서 이렇게 하는데... 실상 ! 이렇게 하면서 감성을 더 느낄 수 있고 그 많은 것들이 샘솟아 오르는데 그 자체로는 ...백주년 외에 건드려지지 않고 있으니까. 그게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그게 너무 보여지고 그걸 느끼게 됐을 때는 사료에서 써놨을 때보다 더한 감응.. 이럴 때에 그 폭발적인 힘을 언제 기다릴까.. 언제나 만족할 수 있는 힘으로 기다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응집되서 터질 줄 알았는데.. 100주년에도 터지지 못했는데, 이게 나만의 생각인가요. 언제한번.. 우리는 너무 그래요. 큰데 빌려서 많이 채워져서 깨끗하게 해가지고 뒷소리 안 듣고 나왔다 하면 되는 것처럼 매우 단순한데 그 정도도 못하나요. 그런 거 아닌 거예요. 그거보다 더한 거는 우리는 너무나 빨리 체념.. 그 상태에 수긍을 한다는 거예요. 그거보다 더한거 더한거 이런거.. 사회는 경쟁력이 얼마나 더 하는데, 내가 인문학이 좋은 이유는 살아있는 백과전서가 돼요. 죽을 때까지, 비교하면서 살 수 있는데.. 자연과학은 이론이 그 다음날 뒤집어 엎어서 쓸모없어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근데 인문학적인 발상으로 인문학으로 세상봤을 때는 너무나 행복하고.. 뭘 연결을 시켜도 이자체에 뿌리에 연결해서 해석할 때 그 희열을 한사람이 써놓은 것에 만족하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원본, 1차 사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1차사료를 너무나 방치한다는 거예요. 나만 배불러서 되겠어요? 아니잖아요. 그 1차 사료를 봤을 때 우리가 논문 쓸 때도 몇차사료를 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는데 우리는 다른 교단과 다르게 우린 바로 모셔져 있잖아요. 여러분 몇 점이면 만족하시겠어요. 대종사님 유물이 몇 점이면.. 토리노님의 유품이 진품이다 가품이다 과학적으로 안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일년에 몇 만명의 사람들이 보러 가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바로 대종사님이 직접 수용한 사진까지 있으면서 그것을 증명한 사람들까지 살아있는 상태에서 그런 자료들이 몇 점 정도가 있으면 좋을거 같아요? 지금 몇 점 정도일 것 같아요? 제가 올 때 173점 정도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300점 정도가 넘어요. 한 20점 정도는 다른 사람일 거 같다는 정도로 증명이 안된 정도...인데요. 정말 대단해요. 이러게 교조 유품이 엄청 많고, 울고불고 하면서 하는데.. 그런 심정 알겠어요 하나라서 둘이라서 300개가 있어서 하나가 안 중요할까요? 아니예요. 그 하나는 모자이크 중 하나에요. 00님이 대종사님 뵈러 올 때 해 가지고 오신 모시 적삼서부터 일벌이 언제 때겠어요. 초기 교단에서 언제 때겠어요. 어느 것들을 보게 되면 유물 하나하나에 그 이력이 다되어있고 어느 집에서 왔기 때문에 이건 어디껀가 수직으로 한 건가 기계로 짠 건가 별것이 다 나와요.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데,... 단순히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우리 수용의 흔적으로 인해서 그 당시 갖다가 되짚어볼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거예요. 유물 단순히 남의 지역 남의 박물관에 있는 이런 게 아니라, 정말 우리나라를 근대사에서 정말 출중한 나라로 만들 수 있게끔하는 유사 이래 잘 사는 나라 였던 적 있어요. 그쵸? 그럴 때 그 기초가 우리에 의해서 만들어진거다. 라고 한다면 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거죠.
이웃종교와 비교돼지 않을만큼, 초기교단 유물 확보하고.. 원불교 역사박물관 보관 대종사의 유물은 몇점일까? 상상해 봤을 때 정말 요즘에는 뜻하지 않은데서 찾아가고 있어요. 오래 전부터 여러분도 집안에서 원불교를 알고 찾아다니고 이런 사람 있을 거예요. 지금은 아니래도 그들이 가진 사진 한 장 그런 게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스스로 유물 수집자가 돼야 해요. 오래 교도 하셔서 연세 되신 교도들이 가진 자료를 찾는 일 같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토리노 옷이예요. 여기까지 일단 하고 질문 받고 이렇게 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하면서 피피티는 끝났는데 교무님이 대종사님 유물 더 보여드리는 게 좋다고 해서 피피티로 대종사님 유물을 보여드릴게요. 보여드리면서 사실 사진 아까 말씀드리다가 말았는데 사진자료가 굉장히 중요해요. 사진이 우리는 굉장히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 암각화 유물이 이렇게 나오는 거 하고요 굉장히 다른 의미예요. 구석기, 신석기 이럴 때도 평소에 이런 측정으로 인해 가지고 어느 시기 거 뭐다 이럴 때 긴가민가 할 때가 있어요. 관계로 봤을 때 암각화로 보게 되면 전체적으로 나오잖아요. 옷부터 나오고 이렇게 했을 때 시기가 어떻게 되겠다 안정적으로 해줄 수 있는 거 마찬가지로 사진에서도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게 많죠.
대종사님 시기에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법락을 직접 차시지는 않았잖아요. 법락을 한 이유는 여러분이 상상한 거고 많이 못 보셨을 거예요. 대종사님은 사실은 우리 생각으로 했을 때 활불이시면서 미륵불이시잖아요. 미륵불 개념이 많으신데 왜 이렇게 넘어가지 미륵불은 봤을 때 미륵불이 여러분 생각하신 거 같이 활동적이잖아요. 활동적이기 때문에 서계신 건데 이렇게 그 당시에 많은 것들이 또 있었을 거예요. 어쨌든 서 계신 사진이 있어서 대종사님을 초기 창립관에 모실 수가 있는 거죠. 그런 것들만 봐도 이 시기가 언제인가 언제 찍으셨을까, 사실은 딱히 몇 년 이렇게 써 있진 않거든요. 그럼 뭐 가지고 추정할 거 같아요. 대종사님 삭발하신 거 그 이후에는 머리는 기르셨어요. 아니 기르셨대요. 그런데 십상에서 봤을 때도 장항대각상하면 그땐 원기 9년 이후잖아요. 이때는 머리나 이런 것들이 굉장히 다르거든요. 이런면으로 봤을 때도 그림 하나가 굉장히 복합적인 거를 역사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다르다는 거죠. 사진으로 보면 그 말과 마찬가지라는 거죠. 언제 이렇게 하고 있었을까 볼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이 설명은 사실은 많이 설명되는 건데 대종사님은 바라보고 계신 분이 누구라 그랬죠 누구라 그랬어요. 안암교당 와 가지고 강의할 때는 새로 넣어진 사진일 수도 있어요. 대종사님 창립까지 만들어지고 나서 2009년 이후예요 이후 건데 이 때 상산종사님이세요 이 분이 이 분이 100주년 상산종사님 백주년전을 해 드리고 나서 가시자고 그랬어요. 근데 아휴 아니라고 안가신다. 그랬는데 다른 말씀 여쭙는데 나도 가고 싶다고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절대 폐 끼치는 거 안 하는 분이라 안 했는데 가시고 싶으셨나보다 해서 2월에 전시를 했는데 그 5월달에 대종사님 영상을 창립관으로 가셨는데 그걸 보시고는 자리를 뜨시지 않을라 그러더라고요. 이렇게 정말로 살아나오신 거 같더라고요. 아바타가 유행할 때예요. 창립관 할 때 3D하는 거 아바타가 나와가지고 움직이는 세상에 딱 서계시는 것만 하면 안 하겠다고 해서 작업하면서 웃긴 것중에 하나가 이런 거 같아요. 고개까지 젖히시고 하염없이 하면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모든 게 다 많이 됐다 그런 거죠. 교가를 한 번 불러주시겠냐고.. 교가를 불렀는데도 차마 자리를 못뜨시는 거 그 때 사실은 굉장히 건강상태가 안 좋으셔서 큰일이 날까봐 이랬댔어요 다들 알아듣지 못한다 그랬는데 박물관 옥당까지 가실 거냐고 했는데 옥당 가신다고 해서 한바퀴를 다 둘르시고 가신다음에 1년 후에 열반하셨어요 여기에서 그런 말씀들을 드렸어요. 백세 노인 60인데 40대 50대 지나면서 희로애락 참 많이 없어지잖아요. 담담히 없어지기도 하고 메마르기도 하고 그랬는데 80, 90, 100세인데 대종사님 어떤 분이세요? 그러자 뒤도 안들르시고 대각도 안 하시고 말씀도 안 하시니까, 절하지 말고 절 안 하고 급한 김에 그냥 어떤 분이세요 이렇게 했더니 고쳐 앉으시더니 고쳐 앉으시면서 손을 이렇게 하시고 아직도 내 가슴속에 그리움 다 듣고 계셨던 거예요 다 듣고 기력이 없으신 상태에도 해외교화는 어떤 식으로 하셨어요. 중요한 대목들은 다 여쭤보는 거예요. 네시간 여섯시간 법회보다가 밥도 못먹고 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고 와 가지고 교장에 온다고 이러면서 그 사람들이 얼마나 기특하기도 하고 그 생각이 항상 가슴속에 있다고 이런 말씀을 근거리 원거리가 아니라 있을 자리에 있을라고 하는 역사적인 교도들이 있었기에 박물관 유물들과 연결해서 볼 때에 오버랩 돼서 눈이 움직이고 이럴 때 대종사님은 뭐라도 다 해놓으셨다는 거예요. 앉아서 있는 사진은 이렇지만 당신이 원해서 해놓은 사진들 아무나 막 찍어서 해놓은 사진 사진사 불러서 찍었다. 그랬잖아요 찍은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박물관 만들 때 필요한 사진들 다 있더라고 교단적으로 그런 걸 볼 때 더 많이 할 수도 있었겠지만 없던 자료 글로 쓰이지 않은 거 있었던 거 만큼 자세히 재현을 해 볼 수 있는 이런 것들도 될 수 있다는 거죠.
이런 것도 보시면은 저 염주 염주들이랑 방석 그대로 남아 있다고... 토리노 옷이 그게 진짠지 가짠지 생각이 들 정도로 증거가 없잖아요 우리는 성의를 다 입고 찍으셨어요. 앞으로 있을 디지털 세계를 예측하신 분이라는 거죠. 아니라면 그 사진에 대한 중요성이 없으셨을 거예요. 대종사님은 시공을 하면서 누가 하고 좋은 것들을 다 잘 입으셨어요. 저는 가세가 가난한 교단의 부르주아라고 항상 얘기했어요. 옷태가 어떻게 저렇게 나요 그렇게 스타일리쉬할 수가 없어요. 옷조차 입었을 때는 풍채가 좋으신데 그 옷들을 감까지도 복제를 할라다 보니까 조사할 때 전공자가 아니니까 어디서 이런 재료를 구했는지 모르겠다고 누가 이런 걸 했는지 모르겠다고 동대문시장 옷 옛날 것들이 불 타기 전에 거기서 했대서 용케 중요한 것들이 복제가 됐어요. 사스 유명할 때 홍콩 이런 사람들이 보내서 찾고 이렇게 됐어요. 일본에 있는 선생님도 이건 우리나라에도 있고 왕가에서나 쓴 이런 거라는 거죠. 내 주변의 가장 최고의 것들 이런 것들이예요. 유물도 민속박물관에 없는 거 수공으로 한 건데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서 직접 한 거 이런 걸 봤을 때 가세가 가난하고 새로 일어난 교단인데도 준비된 교도 교무님들은 대종사님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거 같이 모시지 않았다는 걸 유물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가 얼마나 마르고 닳도록 하셨는지 유물 보면 많이 쓰고 안 쓴 거 표시가 나요. 미감이 특출 났을 거 같애, 대종사님은 참 이건 특출나다. 하면 수용한 흔적이 많이 나타나요. 매번 강의 때 말하지만 옷들 보면 보통의 옷들은 입어서 다 헤져서 고대랑 이런 데 다 헤지는데, 정말 품새나 이런 보여지기 위한 것들은 숨조차 안 죽었다고 표현을 하죠. 숨조차 안죽은 거 상의는 입고 찍으셨단 말이예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영원불사의 종교가 된다는 걸 알고 교조의 위풍당당한 사진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대종사님을 봤을 때 초기의 유물들을 보면 국가를 능히 다스릴 정도로 해서 국가를 완성하는 것처럼 만드는 것처럼 아직 만들어진 교단이예요 지방 종교로서 태어나려고 만든 게 아니라 국가 성립하려는 과정을 이것만 생각해도 종단만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 종교가 된다는 거 틀림없는 사실 아니곘어요. 대종사님이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해서 만들어진 유품들을 보게 되면 그 당시에 이런 것까지 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느낄 수가 있다니까요. 그런 것들을 보더래도 지금 이유물들이 만들어져서 이렇게 돼서 이렇게 봤을 때 이것보다 센세이션한 게 나오지 않았다는 걸 봤을 때 대종사님 당대에 완전히 포맷이 갖춰진 교단이 그런 것들이 유물 수장고를 하면서 이런 유물들 대종사님의 수용에 있는 유물이 모셔져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더 느끼시기를 바래요. 여기도 보면 케이포 옷이라 그러죠. 우리가 말하는 망토 아주 일본식이긴 한데 그 당시가 그러니까 많은 것들이 일제 강점기기 때문에 대종사님 일본식도 있고 정원도 일본스타일도 있고 그건 시대상황을 반영한 거기 때문에 우리 대종사님의 유물 중에서도 보면 일본식 촛대도 있고 그래요. 다른 것들도 일본 것들도 있고 서양식 것도 있고 보편적으로 시대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옷이 이 상의가 우리 대종사님 성의로 보관되고 있는 가장 낡은 옷이예요. 이렇게 이 때 하나도 손보지 않은 채로 모시고 있다는 거 보실 때 이제 성안을 보세요. 성안 20년간의 짧은 시기 20년 전의 그런데 앞에 해서 53세 얼마나 고달프시고 그랬으면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거 이런 걸 다 하면서 46짜리 허리가 나오는 반바지가 나오는 걸 보고 얼마나 복수가 차셨으면 다른 걸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입으셨을까 하고.. 그런데 그 옷이 황의천씨 집안에서 나왔어요. 그 분이 열반 후에 박물관에 기증되었는데 시공을 몇 년 간 그 분이 하셨을 겁니다.
분명히 그거 나올 텐데 하는 걸 보면 의복이나 그런 걸 보면 총부 내에 보관되고 있을 떄 그 시기라든가 상황들 우리가 엿볼 수가 있겠죠. 임바네시 옷이라 그래서 털옷이예요. 빠져있을 때 됐는데 캐시미어라고 말했잖아요. 내가 만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거라고... 그 보면 보는 면에서도 그렇지만 시공할 때 마음들을 우리가 느껴볼 수 있을 거 같아요. 그 당시에는 최고로 귀한 거 구해볼라고 하신거 따뜻하게 하려고 속안에도 누벼져 있는 걸 보면서 대종사님을 향한 마음을 볼 수가 있어요. 부자고 뭐 왕가의 사람 아니라서 이런 걸 했을까 일반 사람들도 일반의 것을 했을 때 그에 못지 않은 큰 마음을 느껴볼 수가 있어요.
가사만 하더래도요.. 그 가사도... 가사 시공을 한땀만 하더래도 영생을 보존한다 그래요. 그때 그거를 이렇게 해서 받을 땀을 보고 가사가 이루어졌을 때 어떤 식인가 그 유물을 복제를 하면서 알았어요. 어떻게 하셨는지 이거를 했냐 안했냐는 대종사님 착용하셨으니까 알았는데 누구껀지 써 있지 않잖아요. 그 가사 나눠서 바느질 된 걸 보고 바로 종사님 칭호를 받으실 때 쯤에 받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더 할 때는 또다른 가사를 한다 그래요. 그러니까 바느질만 보고도 언제 입으신 건지 알 수가 있어요.
이런 유품들이 수장고에 모셔져 있는데 유물 수장고에 이런 것들이 천년만년 보관돼고 아무 때나 산화시키는 게 아니라 복제를 해 놓으면 아무 때나 이것과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볼 수 있고 체험을 할 수 있고 진품의 유물은 수장고에 보존처리를 해 가지고 모셔져 있는 채로 하게 된다는 거죠. 일반 수장고 거쳐서 특별 수장고 거쳐서 특별 수장고 장까지 보관하는데에 어려움이 있지만 대종사님 유품은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더 크게 보존하고 복제품 만드는 것도 상당히 많이 진행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유물 수장고라고 했을 때 말 하나가 굉장히 간단하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히려 감성에 호소할 수 있고 호소한 만큼 언제라도 오셔서 그거를 복제한 것들을 접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가진다면 바로 내 곁에서 항상 계시는 대종사님이 지금껏 해놓으신 거는 어느 개화사상 어느 독립사상가 그분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백만이 안되는 제자가 이런 대종사님을 우리가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알아가는 작업 알아야 담잖아요 아는 시기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질문 있으면 질문 받겠습니다.
먼저 나온 질문 하나 드리고 질문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물 보존에 대해 감수를 많이 하셨는데 저희들이 유물 보존 잘 되기 위해서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역할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도움이 되는 일이 뭐가 있을까..
여러분은 두가지를 할 수가 있는데 첫째는 주변에 태내에서부터 원불교인 사람 있으면 어머니 할머니 등 오래 교도가 되신 분이 있을 거예요. 그분들 짐속에 원불교도의 흔적이 남아 있을 거예요. 사실 저는 100년보다 108년이 더 중요할 때죠 초기에 있었던 그런 때보다 기념품 받았잖아요. 50년 할 때라든가 몇주년 할때라든가 사진찍은 거 이런 게 있을 거예요. 그 때 보면 상당히 많은 게 변해 있어요. 예를 들어 사진 속에서 복식전을 하려고 해도 백주기 할 때 되면 교무님의 의상 변화도 시대별로 해야 돼요. 박물관에 모셔져 있는 것들은 한시대의 몇 명 것이 합쳐져 있는지도 몰라요 그래도. 사진을 보면 할머니 몇세고 하는 거 보면 머리는 어떻게 되고 옷은 어떻고 위로 올라가 있고 내려가 있고 저고리고 긴게 있고 짧은게 있고 많아요. 사진에서 굉장히 정확하게 알 수 있어요. 저는 사실 여러분들같이 교당생활하고 유물한 사람이 아니예요. 사진을 보고 자료를 보고 교전을 외우고 2차적으로 했어요. 여러분들은 오셔서 가위라도 잡을 수 있었잖아요. 수많은 교무님들 지나오면서 강의도 해주고 이럴 때에 원불교 감을 잡울 수 있고 이럴 때 고고학 이런 거 유물을 하다가 정말 빠져들었어요. 그 바느질 한 땀에도 유물 하나에도 그 시대를 보면서 했을 떄 가세가 가난한 교단에서 완벽하게 준비를 해서 하나도 치우침이 없이 초기에 있었던 거 대종사님 형사출신 아니냐고 이렇게 물었겠어요. 왠줄 아세요? 신분검사라는 거 아세요? 신분검사를 봤어요. 세상에서 어때요 세상에서는 상중하 이런 식으로 돼 있잖아요. 보통 12345 5번쨰가 이상적이 잖아요. 아니다 기다 절대 아니다 절대 아니다가 나쁘고 절대 좋다가 좋고 이렇잖아요. 그런데 신분검사 보면 절대 좋다가 최고 점수가 아니잖아요. 이런것들을 했을 떄 수긍할 항목이 다 돼있는 거예요. 빚을 얼마나 지고 있는지 박물관 하나 하고 됐다 환락의 세월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할 떄 좌산상사가 뭐라고 하셨냐면 우리 교단의 우마뿐이 안된다 내가 나이 50이 돼서도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소름이 끼치더라고 우마뿐이 안된다는 거예요. 빚을 다 갚지 못하고 가기 때문에 수많은 복받고 잘먹고 잘산 사람이 박물관 하나 하면 나머지 90퍼는? 다른데 도망 못가고 우마된다고. 내가 그런 사람인가보다 왜 그렇잖아요. 세뇌가 될 때 확실하게 세뇌가 된거 그래서 정말로 무서웠댔어요.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도 했어요. 사진이 그냥이 아니예요. 인물 위주로 해서 예쁘게 나오고 예전에 찍은 사진을 보면 대종사님 유물들도 대종사님 영정에 있는 화분이 정산종사님 화분이 돼 있어서 대종사님 영정에 그 전에 있었던 걸 사용한 건데 대종사님 유물인지 다 그거 하나하나가 챙겨주고 제자리로 가게 되니까 대종사님 유품들도 상당히 많아 어떻게 영면에 계실 사진을 감히 찍겠어요. 어느 교단에 영정사진을 이렇게 찍었어요. 사진 찍는 사람이 좋아서 찍을 정도면 지존이 원하지 않으면 그 중요한 사진들이 아무 때나 찍히겠어요. 그분은 교화 활동 안했나요. 디지털 세계를 예측하신 대종사님 저는 부제로 항상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유물을 보면 딱 그 사진 그 성의 조차도 다 입은 채로 멋지게 풍채가 다르게 어느 면에서 봐도 어느 교단에 이런 사람들과 손색이 없게금 대종사님때 준비 다 해놓으셨다는 걸 느낄 수가 이거든요. 돈을 모아서 그것도 필요하지요. 누구한테나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수직 100주년 108년 위해선 지금껏 못할 수직..... 더 큰걸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올해 교도생활을 한 분들은 사진 속에도 진짜 같이 돼 있을 때 교단을 대표하는 것들이 많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질의시간-
김진명) 대종사님 유물을 통해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 얘기를 해 주셨는데 선생님께서는 고고학자로서 오래된 유물을 보시고 만지시고 하시면서 그 느낌을 직접 전달 받으시고 시대 형평까지 다 이렇게 보셨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건을 사용하신 분들의 습관을 느끼실 것 같은데 대종사님 수장품을 발굴하고 연구하시면서 배워야 할 습관들이나 그러한 점들이 있으면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답: 배워야 되는 건 중요하다고 느낄 때 존엄성 그죠? 그 유물 하나하나 말씀 드린 대로 가치에 대해서 좀 더 깊숙하게 생각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사실 유물 사진들 보면 – 슬라이드로 유물 사진 보여줌 – 이 사진으로 설명을 드릴게요. 이 유물을 보세요(대종사님과 제자들 사진) 대종사님이 정좌를 하셨어요. 그런데 여기 다 보시면 지게를 양옆에 졌어요. 상상을 해보세요 엄마아빠랑 사진찍을 때 친구와 사진찍을 때 지게지신채로 사진 찍어요? 아니죠, 그건 의도가 있는 거예요. 유물 찾으면 가져와도 좋지만 상상을 해 보시라는 거죠. 하필 대종사님이 앉으셨는데 양옆으로 지게를 졌어요. 이청풍 교무님 보면 보자기 쓰고 빈 바구니 들고 앞에다 바구니 왜 놨겠어요? 그리고 여기 또 보시면 이거는 이 사진은 불법연구회 5주년 기념식 찍은 사진이예요. 같은 때 한 건데 다 기라성 같은 분들 아니예요? 이게 뭐냐하면 또 초기 교단에서 서류를 만들고 정산종사님 동생 주산종사님 문맹자들이 많고 해외교화도 이렇게 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원불교의 모든 이 사람들이 뭐하고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일들 하고 초기 교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 시기을 잊지 말라는 거예요. 원기 23년 이 때에는 5주년 기념식을 하면서 버선이예요. 버선 옷 다 입고 지게 지고 일할 상태냐고 연출인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대로 대종사님은 상징주고 사실주고 창립주고 훈련주고 했는데 대연출가셨습니다. 초기 교단에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너무나 이 사진이 이상해가지고 붙여놓긴 했었어요. 변산 지나서 해 놨는데 내가 7년이 지났을 때 이 사진을 해석을 한 거예요. 이 연출을 하신 초기교단의 불법연구회 5주년 익산에서 하시면서 변산과 영산에서 있었던 생활 시불법한 걸 잊지 말라는 걸 사진 한 장으로 딱 남겨놓으신 분이 대종사님인 거예요. 이런 사진이 어느 교단에 있곘어요. 주밀하게 초기 교단에서 대종사님이 살아계실 때 ..빈 지게 메고서 한 이유를 들었을 때 실사구시의 교단이라는 걸 뭐로 말할 수 있겠어요. 사진 한 장에 다 나온 걸 보면 대종사님이 어떤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그죠? 이 사진을 7년 후에 제가 읽을 때 내가 점핑을 할 수 있을까 싶었댔어요. 새벽 6시에 빨리 좌선 시간에 종법사님 쫓아가서 나와 보시라고 좀 너무나 기뻐하시는 거예요. 정말 이룰 수 있겠다 해석할 수 있는 사진들이 수많이 남아있다는 거 그런 거에서 배울 수 있는 시간을 갖추려면 적극적으로 유물을 알려는 노력이 있어야겠죠.
왜 학교는 조교서부터 학부생 석사 박사 다 있잖아요. 기획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쫄다구 한명도 안주고 자료를 하라고 할 때 깜짝 놀랬댔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런데 제가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보관 창고들 그 때 많이 가져왔죠. 눈치껏 가져와서 박물관에 보관된 것들이 지금은 그냥 놔두고 안주는 것들 있어서 상하는데 그 때 더 많이 가져왔어야 되는데.... 대각전에 가니까 저 낡은 상이 있는 거예요. 사진 속에서 너무 많이 본 거야 열반하셨을 때 등 보면 그냥 옆에 가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거 갖고 올라고 아무거나 갖고 와도 된다고 그래서 대각전에 서서 교무님들... 아무도 안 계시니까 이거하고 똑같이 하나를 떠서 갖고와야지 이 작업을 할 거 같아서 복제품을 그대로 있는 거예요. 다 유물로 하려면 솔로 털고 닦고 하는데 학생들에게 시켰으면 어쩌면 소홀하게 놓쳤을 수도 있을 거예요. 닦다가 보니까 이 부분도 여기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찍어서 막대기로 찍으면 자국나는 것들이 좀 많아요. 이렇게 많진 않은데 이쪽도 있어요. 보통 오른쪽으로 하잖아요. 법장을 두드리셨을 텐데 누가 옮기셨을까 싶을 거예요. 대종사님도 앉으셨을까 했더니 저 법상에는 대종사님 정산종사님 대산종사님이 앉으셨대요. 좌산종사님은 나는 한 번도 안 앉았다고 하셨습니다. 좌산종사님은 반백년기념관에 있어서 못 앉으셨지만 세분이 앉으신 거예요. 세분 중 한 분은 왼손잡이였겠죠. 두드린 자국이 한쪽엔 많고 한쪽은 적은걸 봐서. 대종사님 셋째 아드님이 우리 아버님 대종사님은 비빔밥을 비비실 때나 무거운 물건을 들을 때 왼손으로 들으셨다라고 하셨어요. 왼손으로 들으셔서 당신도 어렸을 때 지금도 나는 왼손이고 왼손으로 하는 걸 숙련했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이 자국은 대종사님으로 인해서.. 그래서 수위단원 분들 오셨을 때 그 얘기를 했더니 눈들을 내리까시고 똑바로 말씀을 안 하시더라고요. 대종사님 왼손잡이라고 하니까 왼손잡이를 달가워하시지 않더라고요. 실용적으로 한 건데 달가워 안 하셔가지고 대종사님 오른손으로 사인하는 거 봤다 그러시는 거예요. 봤을 때 유난히 더 적어요. 오른손으로 하셨을 수도 있겠고... 그래도 우리 교단은 우뇌, 좌뇌가 다 움직여서 합리적인 교단이 됐나 보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 증거가 또 뭐 있냐면 석굴암 갔을 때 지팡이 어느 손으로 잡으셨어요? 왼손이죠 보통 많이 쓰고 힘이 많이 가는 손으로 지팡이 잡잖아요. 왼손으로 짚고 계신 걸 봐 가지고 이걸 보여드리니까 아무 말씀 안하시는데 오른손으로 사인하신 것도 보셨다니까 양손 다 쓰신 분이라는 걸 알 수 있고...
-결론-
이렇게 사진은 상상력으로 다 풀 수 있게 해 주는 게 사진 자료예요. 주변에 있는 분들을 살펴봐 주시면 많은 것들이 나올 수 있어요. 옛날엔 그렇게 서신들이 많아요. 그 교무님한테도 편지를 그렇게 많이 썼대요. 답장도 그렇게 많이 쓰셨대요. 원불교 보물이 될 수 있고 그 때 교단 상황을 편지로 논의한 것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런 게 좀 더 찾아지기를 바래요. 대산종사님은 몇 만장을 쓰셨는지 모른다고 할 정도예요 화선지 이런 거 보면 그런데 박물관에 20점도 안돼요. 대산종사님 전시를 할 때도 너무나 초라하게 전시를 없어서.. 인쇄본만 갖고 하기에는 너무 부족해서 수많은 것들이 어떻게 봤을까요 저한테는 경매하는 것에서 전화가 와요.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경매사들이 다 알아가지고 원불교정전도 5만원이면 팔려요. 헌책방 봐도 저는 5권 찾았어요. 여러분들이 해외 교당이나 이런 데 갈 때 원불교 정전 하나 탁 갖고 있는 곳 아닌 곳 얼마나 달라요. 눈떠서 할 수 있는거 많으니 세상에 널려 있는 많은 공간들의 많은 교전들이 있을 수 있는 자리들은 많을 건데, 볼려고 하고 찾으려고 안 하면 그 자체가 우리한테 오지 않아요. 무슨 액션을 하지 않는데 큰 것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죠. 앞으로 다가올 108주년은 좀 더 결집될 수 있는 시기니까 더 많은 걸 준비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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