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강. 군계일학(群鷄一鶴) (아가 6:4-12)
아 6:4-12=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5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6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7 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쪽 같구나 8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10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11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12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기뻐하는 자! 주님이 사랑하는 자가 어떤 자인지 깨닫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세상에서 제일 흔하디 흔한 말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사랑을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왜? 그리 사랑에 목말라 할까요? 행복하고 싶어서입니다.
자기가 행복하고자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찾는 사랑은 자기중심에서 나온 사랑관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은 곧 그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다는 뜻입니다. 이게 우리 인간들의 사랑법입니다.
원래 사랑이란? 이타적(利他的)인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기적(利己的)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죄가 변개시켜 놓았어요. 그러니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내 기쁨을 위해서 상대를 사랑한다는 말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흔히 연예인들이 팬들을 향하여 “여러분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것은 “저를 사랑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팬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팬들을 자기에게 붙잡아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귀찮게 해 보세요. 사랑한다고 하지 않아요. 미워해요.
내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라야 사랑한다고 말을 해요. 결국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은 곧 그 사람을 통하여서 내가 기쁘고 행복해지고 싶은 겁니다. 이는 사랑이 아니고 좋아하는 거에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남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비워 남을 사랑할만한 여유가 있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남을 배려하지 않아요. 오로지 자기밖에 몰라요.
그러니 무엇을 해도 자기 유익을 챙기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 이외 더 귀한 것은 없어요. 오로지 나 밖에 없어요. 내가 신(神)이에요.
인간들은 자기가 갖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사랑하고 살아요. 그러니 사랑한다는 말 속엔 당신은 내게 필요한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얻을 것이 있습니다! 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 행복을 위해서 남을 사랑한다고 포장하고 있어요.
그러니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내가 저 사람에게 이용가치가 있는가 보다! 저 사람이 내게 얻어 낼 것이 있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있어요.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다 알면서도 묵인하고 사는 겁니다.
목사가 성도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다 목사의 말에 동조하고 그 교회에 나와 주니까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말 안 듣고 다른 교회 가 보세요. 속으로 저주 합니다. 신선(神仙)처럼 성화된 목사들은 안 그럴지 몰라도 전 그래요. 제 마음엔 저를 싫어하는 사람을 포용할만한 선(善)이 없어요.
누가 시비를 걸어 보세요. 옳고 그름은 나중이고 미운 감정이 먼저 앞서요. 이건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만약에 여러분에게 잔소리를 하면 여러분도 저를 미워할 겁니다. 잔소리 듣고 좋아할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인간의 본성은 남에게 잔소리를 들으면 듣고 돌이키기보다 반발심이 먼저 생겨요.
이건 목사나 교인이나 마찬가지에요. 교인들도 목사가 자기 편 안 들어주면 교회 옮겨요. 복음은 뒷전이에요. 우린 복음을 좋아하지 않아요. 다만 이용할 뿐이에요. 복음을 핑계 삼아 안주하고 싶어 해요.
복음이란 자기를 부인하게 하는 것인데도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기 보단 도리어 복음을 빙자해서 자기 유익을 구하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아니 생각해 보세요. 우리를 철저하리만치 무시하는게 복음인데 어떻게 복음을 좋아 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데 어찌 좋아한단 말입니까. 자기 밖에 모르는 죄인이 자신의 죄를 지적하고 죽이는 복음을 좋아한다는 것은 사기(詐欺)에요.
복음의 능력 앞에 어찌하지 못하니 좋아하는 척 하는 것뿐이에요. 속으론 싫어하면서 겉으로 좋아하는 척 웃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조폭 세계에서 약한 자가 강한 자 앞에서 속으론 분노와 미움이 가득하면서도 강자의 힘 때문에 듣는 척 좋아하는 척 하는 것과 같아요.
이를 잘 알고 사도 바울은 인간은 바른 교훈을 듣기 싫어한다고 했어요.
딤후 4:2-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바른 교훈이란? 복음이에요. 우리가 복음을 믿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에요. 복음이 우리를 덮쳐 와서 구원이 된 것입니다. 마치 엄마가 시장 통에서 징징거리고 우는 아이의 손을 낚아채고 질질 끌고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과 같아요.
구약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가는 여정이 곧 우리의 신앙생활의 여정이에요. 그들은 기뻐하면서 가지 않았어요. 항상 악악대면서 하나님께 덤볐어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했어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였다는 것은 질질 끌고 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지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했지요. 이는 인간들은 스스로가 생명의 길로 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생명의 길로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질질 끌고 가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에게 알아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했으면 단 한 사람도 갈 사람은 없어요. 다 애굽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나셔서 모가지를 끌고 악악대든 말든 개의치 않고 질질 끌고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그들 속에 약속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심어 놓은 그 약속 때문에 속 터져 가면서도 끌고 가는 겁니다. 약속은 하나님이 심어 놓았지 우리가 심은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지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부모가 자식이 속을 섞여도 자기 배로 낳았기 때문에 키우는 것과 같아요. 부모가 낳았기 때문에 자식들이 부모에게 말 안 듣고 대 들어도 키우는 겁니다. 이게 창조주의 사랑이에요.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구원이 취소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디모데전후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편지에요. 디모데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목사에요. 바울은 예수님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야! 디모데 목사야! 교인들 믿지 말라! 그 인간들은 본질적으로 바른 말 듣기 싫어하는 종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너는 그들 눈치 보지 말고 욕을 들어먹더라도 바른 교훈(십자가 도)을 전하라고 합니다.
왜? 오래 참고 경책(警責)하고 경계(警戒)하고 권(勸)하라고 합니까. 말을 안 듣기 때문입니다. 이는 돌이키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이렇게 악질이라는 것을 고발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를 더욱 더 들추어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격동하지 말고 근신하면서 고난을 받더라도 전도자의 길을 걸어가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른 소리를 하면 욕을 들어 먹게 되어 있으니 각오하라는 겁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미움을 받고 욕을 들어 먹는 것과 같아요.
모든 인간은 이 말씀 앞에서 고발당하고 있어요. 복음 전하는 목사도 예외일 수 없어요. 목사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의한 은사적인 것이지 목사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목사가 복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목사를 주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목사는 자기가 전한 그 복음으로 자기가 책망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동일하게 말씀 앞에서 고발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귀가 가려운 것은 목사나 성도나 동일해요. 귀가 가렵다는 것은 남에게 칭찬 받고자 한단 말입니다. 저 역시도 여러분에게 좋은 말을 듣고 싶어 하고 여러분도 저에게 좋은 말을 듣고 싶어 해요. 이건 인간의 본성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자기편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 날 알아줄 사람 없나요! 어디 내 편을 들어 줄 사람 없나요! 날 사랑해 줄 사람 어디 없나요! 나도 사랑받고 싶어 하고 여러분도 사랑받고 싶어 해요. 우린 일평생 나를 사랑해줄 사람을 찾아다녀요. 그러므로 우린 모두가 복음과 상관없이 자기 밖에 모르는 악당들인 겁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세요.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로 진(陣)을 치고 있나요. 내 편을 들어 주는 사람들로 포진되어 있잖아요. 전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잖아요. 나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내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잖아요.
자기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부모이든, 자식이든, 형제이든, 이웃이든, 친구이든지,,, 목사이든, 성도이든지,,, 모두가 내게 좋은 말을 해주고 편하게 해 주는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나를 기분 상하게 하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미워하잖아요.
인간이란? 틀려도 옳다고 해 주어야 좋아해요. 솔직히 인간들에겐 옳고 그르냐는 별 의미가 없어요. 내게 유익이 되느냐 안 되느냐만 중요해요.
서로간의 사귐도 옳으냐! 그르냐! 보다 내 편을 들어 주느냐! 안 들어 주느냐! 로 사귐을 가져요.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주변에 옳은 말을 해 주는 사람은 다 잘라 내고 자기 비위를 맞추어 주는 사람들만 배치해 두는 겁니다.
마치 철없는 아이들처럼 자기편을 들어주는 친구들과만 사귀는 것과 같아요. 아이들을 키워보면 알듯이 이 놈들은 무슨 짓을 해도 부모에겐 의논하지 않고 꼭 자기 또래들하고만 의논하잖아요. 자기 또래와 의논한다는 것은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인정받고 싶은 거에요. 무슨 일이든지 자기 생각이 거부당하는 것을 싫어요. 그러니 자기하고 수준이 같은 친구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친구에게 물을 땐 이미 난 이렇게 할거야! 라고 다 결정해 두었어요. 다만 자기가 하는 일을 추인 받고 싶은 것뿐이에요. 인간이란? 단 한 사람이라도 자기편을 들어주면 그 일이 합당하다고 생각해요. 담대함을 얻어요.
지난번에 자동차 타이어를 교체하고자 갔어요. 어떤 청년이 먼저 와서 흥정을 하고 교체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보통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 입장에선 이윤이 많이 남는 것을 추천을 하잖아요. 그래서 주인이 일본에서 수입한 타이어를 권해서 교체 작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청년이 사무실 안에 들어와서 자기가 아는 차량 정비 업자에게 전화를 하여서 타이어를 일제로 교환한다고 말을 하니까 저쪽에서 왜? 그랬느냐고 한 모양입니다. 아마도 자신은 일제 타이어로 교환하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전화를 했나보아요. 그런데 저쪽에선 잘못했다고 하는 겁니다. 한국 타이어가 일제보다 오히려 질도 좋고 값도 싼데 왜? 비싼 돈 주고서 일제로 했느냐고 한 것 같아요.
그러자 전화를 받는 얼굴이 금새 일그러지는 겁니다. 밖에선 이미 타이어 교체 작업을 시작해서 한 개는 끼우고 두 개째 시작을 하고 있어요. 이미 시작한 일이니 중단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자 전화를 끊고 또 다른 분에게 전화를 거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분도 왜? 중고차에 비싼 수입 타어어를 끼우느냐고 한 모양입니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해요. 그 자리에서 내리 4 사람에게 전화를 하는데 자기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나 봅니다. 그러자 똥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 못하는 겁니다.
밖에선 이미 타이어 교체 작업을 마무리를 해 가고 있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자기 친구에게 전화를 하는 것 같아요. 그러자 저쪽에서 말하는 친구가 일제를 끼운다고 하니 부러워하고 좋다고 한 모양이에요.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큰 소리로 그럼 국산보다 일제가 좋지! 그러면서 이젠 자기가 타이어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저쪽 친구에게 일제 타이어를 자랑을 해 대는 겁니다. 이제 자기 편 들어 주는 친구를 만났으니 기분이 한층 업(up)이 되었어요. 기분이 좋은지 저쪽 친구에게 내가 곧 갈 테니 술 한 잔 하자고 약속을 합니다.
전화를 끊고 저에게 묻습니다. 아저씨! 아무래도 국산보다 일제가 좋겠지요. 제가 기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 청년의 판단에 동조해 주었어요. 그럼요. 물 건너 온 것이니 비싸게 받겠지요. 제가 호의적으로 말하니 좋아서 얼굴이 환해요.
그러면서 아저씨 저 먼저 갈게요. 일 보고 가세요! 라고 인사를 깍듯이 하고 가는 겁니다. 예! 청년도 운전 잘 하세요!
여기서 그 청년에겐 타어어가 수입 산이 좋으냐! 국산이 좋으냐! 는 중요치 않아요. 자기가 결정한 것을 남에게 옳다고 인정을 받고 싶은 겁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인정해 주면 되어요.
이 청년은 아마도 앞으로 어떤 일을 결정하고자 하면 자기 생각에 동조 해준 그 친구랑 의논을 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결정을 옳다고 인정해 준 친구는 그 청년에겐 사랑하는 친구가 되는 겁니다. 이게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이에요. 날 기분 좋게 해 주잖아요.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이런 관계 안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기설기 얽혀져 있어요. 모두가 자기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교제를 하고 있어요. 이는 모두가 사랑받고자 하는 자기사랑 때문이에요. 우리는 타인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을 사랑한다고 해요.
따지고 보면 인간은 타자(他者) 속에 투영(投影)되어 있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타자 속에 자기 이미지를 심어 놓았어요. 자기가 그려 놓은 이미지가 있어요. 상대방이 자신이 바라는 그 기대에 맞아 떨어 질 때 행복감을 느껴요.
부모는 자식에게 자기 이미지를 새겨 놓았어요. 넌 공부 잘해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 이는 부모의 바램입니다. 자신의 바람을 자식에게 심어 놓았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달달 볶아 대는 겁니다. 자식은 부모의 연장선이에요. 부모의 꿈을 자식이 대신 이루어주기를 바래요. 그러므로 부모는 아이의 성공과 실패에 따라서 희비가 교차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거는 기대가 깨어지면 속이 상하고 화가 나요. 그럼 원수가 되어요. 그 자식을 볼 때마다 속이 상해요. 자기가 심어 놓은 이미지를 손상 시켰기 때문입니다.
이건 부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친구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이웃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나 성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드라마에서 흔히 보면 부모가 자식의 결혼 상대자를 보고선 마뜩치 못하게 생각하잖아요. 왜? 하필 저런 사람이냐! 라고 하잖아요. 이는 부모 눈에 차지 않다는 말입니다. 자식이 살 배우자를 부모가 고르고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자신이 속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가 행복하기 위해서 자식의 배우자까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결정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인생까지도 자기 행복을 이루고자 이용하고 있어요.
이처럼 사람들은 그 누구라도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어 놓은 이미지가 있어요. 자기가 바라는 기대치가 있단 말입니다. 그 기대치를 이루기 위해서 사랑한다고 하는 겁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은 곧 당신은 나의 기대치에 부응해 달라는 뜻이에요. 날 실망 시키지 말라는 의미를 사랑으로 포장시켜 놓은 겁니다. 부부간에도 이 기대치가 무너지면 이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뉴스를 보니 연예인들의 이혼에 대한 기사를 보았어요. 재미있는 것이 누가 최 단기로 이혼을 했느냐 라는 기사에요. 기사를 보니 결혼한지 10일 만에 이혼한 것이 제일 빠르다고 나왔어요. ‘이찬’ 과 ‘이민영’ 이라는 탤런트끼리의 결혼인데 열흘 만에 파경을 맞이하였다고 해요. 그 다음이 ‘김청’ 이라는 배우인데 13일만 이구요. 1-2년 안에 이혼한 사람이 수두룩해요.
왜? 그 빠른 시간에 이혼을 했을까요? 한마디로 자기가 바라는 것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부족한 것을 상대로부터 얻고자 했는데 막상 결혼해서 보니 없는 겁니다. 그럼 결혼을 한 목적이 상실이 되는데 어찌 살겠어요. 빨리 버리고 다른 짝을 찾아야지요. 죄인인 인간의 결혼은 애초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을 얻기 위한 거래의 대상일 뿐이에요.
이게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법이에요.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남을 끌어 들이는 것이 인간들이 하는 사랑이에요. 그러므로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남을 이용하는 거래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달라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들의 사랑법과 반대에요.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겁니다. 타자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는 거에요. 이건 창조주만이 할 수 있어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는 것은 곧 이타적(利他的)이란 말입니다. 이타적이란? 남을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이는 곧 남의 유익을 위하여 내가 희생하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과는 정 반대이지요. 인간들의 사랑은 자기를 위하여 남에게 희생을 요구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에요. 죄인이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을 일컬어 이단이라고 해요. 그러므로 죄 아래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이단으로 태어나는 겁니다. 이단이라서 창조주의 뜻과 반(反)하는 모습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이기주의(利己主義) 인간을 만들지 않았어요. 죄가 이기주의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죄가 하나님도 이용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린 거에요.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된 자가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가 되었으니 이단인 겁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절거리고 있다구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사기(詐欺)성 사랑을 폭로하시려고 인간들 세상에 없는 하늘에 사랑 법으로 다가오신 겁니다. 인간과 전혀 다른 사랑으로 인간의 사랑이 죄라는 것을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법은 세상에서 보면 낯설어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 여기에 속하였어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을 인간적인 사랑으로 보고 순애보적 감상주의로 접근하면 안 되어요. 이건 하늘에 사랑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계시사적인 이야기에요.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왕인 솔로몬이 천한 노예인 술람미를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이 죄인을 이렇게 사랑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일방적으로 술람미에게 주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일부러 되돌려 받을 수 없는 여자를 택한 겁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에게 받아도 줄 것이 없어요. 그러나 궁중에 있는 1000명의 여인들은 배경들이 화려해요. 솔로몬의 사랑을 되돌려 줄 수가 있어요. 이건 사랑이 아니고 거래에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누군가에게 대접을 하려거든 갚을 수 없는 자에게 하라고! 그 이유는 그래야 부활 시에 네게 복이 된다고 하였어요. 이건 누구 밥 사주고 대접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 나라의 사랑은 거래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랑은 일방적인 거에요.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거예요. 무조건 탕감해 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은혜로 남게 하고자 함입니다.
왕에게 대접을 받았다고 해서 왕에게 되갚음을 하고자 하는 것은 왕을 모욕하는 겁니다. 왕이 대접을 한 것은 은혜를 입으라는 말이에요. 그러므로 왕의 대접을 되갚고자 하는 것은 은혜를 욕되게 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왕의 아들에 잔치집이에요. 그래서 왕은 갚을 수 없는 자들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왕의 아들에 잔치 집엔 축의금이 필요가 없어요. 축의금 내는 것은 왕의 은혜를 모욕하는 겁니다. 천국엔 빚진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솔로몬의 이름이 뭡니까! “여디디아” 에요. “여디디아” 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이에요. 즉 하나님의 긍휼을 담고 있는 자란 말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있어요. 그래서 그 은혜를 술람미에게 쏟아 부어주는 겁니다. 감히 왕의 자리를 넘볼 수 없는 서자(庶子)가 왕이 되는 은혜를 입었듯이 감히 사랑 받을 수 없는 천한 노예가 왕에게 은혜를 입은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 속에는 자신을 위한 것이 없어요. 모두가 사랑 한다는 대상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것을 쏟아부어주겠다는 말입니다. 우린 그냥 받으면 되어요. 이게 신앙이에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처럼” 이라는 말이 중요해요. “이처럼” 이란 말은 광야에 놋 뱀이 장대에 달린 것을 말해요.
알다시피 모세가 광야에서 놋 뱀을 장대에 단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려서 죽어가는 자들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요.
우리 같으면 원망하는 자를 죽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원망하는 자들을 죽이고자 불 뱀을 보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니에요. 하나님은 자신을 원망하는 자를 죽이고자 불 뱀을 보내지 않았어요. 도리어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보냈어요. 그들 속에 은혜를 남기고자 보냈어요. 그래서 불 뱀에 물려서 죽어가는 자들을 살리려고 놋 뱀을 장대에 달게 한 것입니다.
장대에 달린 놋 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놋 뱀을 달아서 원망하는 자를 살린 것처럼 “이처럼” 자기 백성들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게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를 죽인 자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죽인 그 예수를 통해서 살려주셨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살아남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만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이에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자기 백성들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죄인을 죽여야 하는데 도리어 죄인을 살리려고 아들을 죽이는 사랑을 하나님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이 사랑을 받았어요.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 우리를 살려주는 사랑을 베풀었어요.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 속에는 하나님의 희생이 담긴 사랑이 있어요. 성령은 이 사랑을 성도에게 적용해 가십니다.
그래서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면 상대의 유익을 구하여야 하잖아요. 그럼 상대가 누구입니까?
사랑이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곧 진리를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쉬운 말로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진리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진리가 무엇인줄 알면 해답이 나옵니다.
진리란? 예수님이세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을 사랑이라고 해요.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뭔가를 한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증거하고 사는 것이에요. 난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사는 자입니다! 라고 증거하는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란? 예수님과 연관이 되어 있어요. 고린도전서 13장에선 그 어떤 일을 한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지요.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은 꽝이란 말입니다. 헛짓이란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을 의인화(擬人化) 하면 사랑은 곧 예수님이에요. 그럼 무슨 일이든지 예수가 없으면 헛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알맹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반지의 보석과 같아요.
우리 삶에 적용하면 예수가 있으면 성공이고 예수가 없으면 실패란 말입니다. 세상 적으로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예수님만 있으면 다 있어요. 반대로 세상 것 다 가져도 예수가 없으면 모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공과 실패는 예수를 소유하였느냐 못 하였느냐 로 판단이 되어요. 자기 안에 예수님이 주신 사랑을 담고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되어요.
예수를 소유하지 못한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부자를 일컬어 어리석은 부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가치로 보면 부자는 어리석지 않아요. 세상 적으로 지혜로우니까 부자가 되었어요.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볼 때 어리석은 겁니다. 하나님과 화목할 화목 제물이 없으니 어리석은 겁니다. 화목제물이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죄인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기 위함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성도와 화목을 하셨어요.
그런데 어리석은 부자는 제물만 모았지 예수를 몰랐어요. 예수가 없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요. 그러므로 예수를 모르는 인생을 어리석은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습니까! 그럼 모든 것을 가진 겁니다. 예수를 안 믿습니까! 그럼 모든 것을 잃은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잃으면 절반을 잃고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를 잃으면 다 잃는다고 해요. 예수가 찐빵의 앙꼬에요. 우리 인생이 찐빵이라고 한다면 예수는 앙꼬에요.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 않는 인생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은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럽니다. 사람들의 눈엔 사도바울이 불쌍해 보였어요. 유대인들로부터 이단이라고 정죄 당하여서 쫓겨났으니 모든 것을 다 잃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바울은 너희들 눈엔 내가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나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어요.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있을 땐 장래가 촉망 받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난후 인생이 곤두박질치고 말았어요. 그러니 옛 동료들인 바리새인들의 눈엔 바울이 실패한 인생으로 보이고 불쌍한 겁니다. 하지만 바울의 눈엔 바리새인들이 실패한 인생이고 불쌍해요. 서로가 서로를 불쌍하다고 하고 있어요.
이 역설적 안목은 영과 육의 차이에요.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가치로 판단을 해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물을 창조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만물의 생명인 겁니다. 예수 없는 만물은 죽은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없는 자들은 쓰레기로 취급해서 지옥 불구덩이에 집어넣어 버리는 겁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하나님께선 인간의 조건으로 인간을 판단치 않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인간을 판단하세요. 예수 안에 있는 인생은 성공한 인생으로 인정하고! 예수 밖에 있는 인생은 실패한 인생으로 인정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나요. 그럼 성공한 것이니 감사하고 사세요.
예수님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선 사랑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예수님의 사랑은 찐빵 속의 앙꼬와 같은 겁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은 앙꼬가 가득한 찐빵이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아요.
사실이 이러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아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내가 이끌어 낼 수가 없어요.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사랑해도 소용없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셔야 해요.
우리 사랑은 자기 육신에 조건 따라 시절을 따라서 변해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건 내 사랑이지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 주어야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 주어야 우리의 허물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아요. 중간에 이혼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사랑이 되어요.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이에요. 끝까지 란? 예수님이 책임져 준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이 끝까지 책임 져 주는가요.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조건과 상관없이 사랑을 지켜 주는 것입니다.
남녀 간의 결혼을 보면 연애결혼과 중매결혼이 있어요. 보통 연애결혼은 그 바탕에 사랑이 깔려 있고 중매결혼은 조건이 깔려 있어요. 흔히들 연애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첫 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그냥 좋다고 해요.
영화배우 ‘성동일’ 이라는 사람은 식당에 밥 먹으로 갔다가 홀에서 서빙하는 아가씨가 너무도 아름다워서 한 눈에 반해서 결혼을 했다고 토크쇼에 나와서 말하는 것을 보았어요. 진행자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묻자! 자신도 모르겠대요. 그냥 보는 순간 뭔가 확 이끌더라는 거예요.
전 그 소리를 듣다가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이 해 보았어요. 솔로몬도 술람미를 그냥 한 눈에 훅 가벼렸어요. 일방적으로 사랑했어요. 솔로몬이 아무 조건 없이 술람미를 끌어당긴 겁니다. 솔로몬이 일방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이 사랑은 끝까지 지켜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술람미에 대한 칭찬을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하는 칭찬은 곧 예수님이 성도에게 하는 칭찬이에요.
그럼 솔로몬이 술람미를 향한 칭찬을 한 번 들어봅시다.
아 6:4절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솔로몬은 술람미의 아름다움을 “디르사” 와 “예루살렘” 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디르사와 예루살렘은 도시 이름이에요. 그럼 디르사와 예루살렘이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빗대어서 칭찬을 하는가요.
“디르사” 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이고! “예루살렘”은 남 유다의 수도입니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디르사는 북한의 평양과 같고 예루살렘은 남한의 서울과 같은 곳이에요. 디르사와 예루살렘은 모두가 왕궁이 있는 곳입니다. 왕궁이 있다는 것은 그 나라에서 가장 좋고 으뜸으로 아름다운 성읍이란 뜻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의 아름다움을 왕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왕궁으로 묘사하는 것은 다른 성읍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왕궁은 여타 성읍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디르사와 예루살렘이 온 나라 도읍 중에서 으뜸이듯이 술람미가 남과 북 온 나라를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란 말이기도 합니다.
8절을 보면 더 잘 나타나고 있어요.
8절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왕후가 육십이고 비빈이 팔십이란 말은 왕의 여자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왕들은 자손의 번창을 위하여 수많은 여인들을 맞아 들였습니다. 솔로몬에게도 왕후가 300명이고 비빈이 700명이나 있었어요. 1000명의 여인이 있었어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했지요. 성경에서 1000이라는 숫자는 이 세상에서의 만수(滿數)를 뜻합니다. 꽉 찬 숫자에요. 그러므로 솔로몬이 1000명의 여자를 차지하였다는 것은 온 세상의 여자를 차지한 것과 같아요.
솔로몬은 예수님의 예표적인 왕이니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것이란 뜻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에서의 왕이란?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에요. 그렇다면 왕의 여자는 곧 하나님의 백성 전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온 세상 백성들은 곧 하나님 백성인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이라고 합니다. 여자 중에 여자란 말입니다. 한마디로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에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수많은 닭 속에서 한 마리 우뚝 서 있는 고고한 하얀 학(鶴)의 모습을 그려 보세요. 얼마나 출중하게 빼어나고 아름답겠습니까! 그냥 한 눈에 쏙 들어오잖아요.
솔로몬은 지금 일천 궁녀 중에서 사랑하는 여인은 오직 술람미 뿐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여인들 중에서 오직 술람미만 사랑하고 있어요. 어떻게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요.
알다시피 술람미는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에요. 흠모할 만한 매력이 없어요. 노예이고 검둥이에요. 그런데 솔로몬이 사랑하고 있어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솔로몬의 일천 궁녀들은 모두가 정략적으로 혼인한 관계에요. 서로 사랑해서 결혼 한 것이 아니고 조건적으로 결혼을 했어요. 순수성이 없어요.
그러니 일천 궁녀는 자손을 낳기 위한 일종의 씨받이와 같아요. 씨받이는 사랑의 대상이 어니에요. 자손을 번창하는 도구에 불과해요. 그러니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이걸 일전에 교미(交尾)라고 했어요. 교미는 종족을 번성하기 위한 행위에요. 그래서 짐승의 암컷과 수컷이 나누는 사랑을 교미라고 하는 겁니다. 교미란? 꼬리끼리 나누는 사귐을 말해요. 말뜻이 참 의미심장하지요. 그러니 교미는 머리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몸뚱이로만 사랑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사랑 없이 자손을 낳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꼬리로 나눈다는 의미에서 교미인 겁니다.
솔로몬은 1000명의 여인과는 사랑을 하지 않고 교미를 했어요. 종족 번성을 위한 동물적인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술람미하고는 사랑을 했어요. 영적인 말이니 잘 이해하세요.
사랑은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을 말해요. 사랑은 꼬리로 나누는 것이 아니고 머리로 나누는 거에요.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거에요. 이는 서로가 동질이어야만 가능해요. 그래서 솔로몬은 술람미를 내 어미의 외동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건 조금 후에 살펴볼게요.
사랑이란? 한 몸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술람미를 향하여 내 비둘기라고 하고 완전한 자라고 하는 겁니다. 비둘기를 일부일처제로 사는 새에요. 그러니 솔로몬의 여인은 오직 술람미 하나라는 말입니다. 술람미만 사랑의 대상이란 말입니다.
그럼 왜? 술람미만이 솔로몬의 사랑의 대상이 될까요?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속성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이타적(利他的)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타적(利他的)이라 함은 도움을 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건 창조주로서의 생명을 주는 행위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잘난 사람에겐 주어지지 않아요. 하나님은 잘난 사람은 사랑하지 않아요.
잘난 사람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을 말해요. 마치 에서처럼 부모 도움 없이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를 말해요. 하나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을 말해요. 성경에선 이런 자들을 애굽인이라고 해요.
이게 신약으로 오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로 나타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잘난 자들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잘난 자는 진멸의 대상이에요. 이런 자는 지옥에 가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은혜의 나라에요. 인간의 자랑거리가 일절 용납되지 않는 곳입니다. 오로지 천국의 주인인 예수님의 의(義)만 가진 자라야 살 수가 있어요. 예수님의 의(義)는 자신에겐 의(義)가 없음을 아는 자에게 주어져요. 마치 세리와 창기들 같이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술람미는 세리와 창기와 같아요. 자기 의(잘남)라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어요. 술람미는 오직 솔로몬의 긍휼만이 살 수가 있는 사람이에요. 한마디로 불쌍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져요.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셔서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아 부으시는 겁니다. 그러니 세리와 창기들이나 술람미와 같이 못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둘둘 말려져 있는 겁니다. 이들에게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흘러넘쳐요.
이들이 살아가는 그 바탕엔 온통 하나님 은혜와 사랑이에요. 술람미가 사는 바탕엔 온통 솔로몬 왕의 은혜와 사랑만 가득해요. 술람미는 내어 놓는 것마다 솔로몬이 준 것이에요. 그러니 술람미는 곧 솔로몬 자신과 같은 겁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것으로 칭칭 감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궁궐에 있는 1000명의 궁녀들은 모두가 자기 것으로 둘둘 감고 있어요. 모두가 자기들이 만든 옷(의)을 입고 있어요. 자기들이 만든 노리개로 치장하고 있어요. 솔로몬의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솔로몬의 사랑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서는 솔로몬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준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모두가 잘났기 때문에 솔로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솔로몬이 사랑을 줄 필요가 없는 겁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혼자서도 잘하니 예수님의 줄 것이 없어요.
궁궐 속에 있는 수많은 여인들 중에서 오직 술람미만 솔로몬의 것으로 치장하고 있어요. 솔로몬의 은혜를 입고 있는 여자는 술람미 하나뿐이에요. 그러므로 솔로몬은 나의 완전한 자는 술람미 하나뿐이라고 하는 겁니다. 온전한 사랑은 술람미 하나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비둘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술람미를 온전하다고 합니까? 이는 솔로몬의 것으로 치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너는 나의 온전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왕의 것으로만 채움을 입었으니 온전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신앙이에요. 성도는 예수님 것으로만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김을 입고 있어야 해요. 예수님의 의(義)로 폭 감싸져 있어야 합니다.
마치 탕자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버지의 용서로 감겨져 있어야 합니다. 탕자에겐 자기 것이라고 하나도 없어요. 옷에서부터 시작해서 신발이니 반지니 심지어 먹고 마시는 음식과 기거하는 집까지 온통 아버지 것이에요. 자기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탕자는 곧 술람미와 같은 자인 겁니다. 세리와 창기들 같아요.
반면에 맏아들은 궁궐에 있는 1000명의 궁녀들처럼 자기 것으로 두르고 있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의(義)로 가득 찼어요. 예수님의 의(義)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그러니 이들이 토해내는 것은 전부가 자기들 것입니다. 자기 행함이고 자기 자랑뿐인 겁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기움을 받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기움을 받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랑해 주지 않으면 벌거벗은 적신으로 있어야 할 불쌍한 죄인이기 때문에 긍휼로 감싸주시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긍휼로 감싸고 있어요. 그러므로 여자들 중에서 여자라고 예뻐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에게서 자기 냄새를 맡고 있어요. 술람미가 솔로몬의 냄새로 가득채워져 있으니까 예뻐하는 것입니다. 술람미의 몸에서는 솔로몬이 좋아하는 냄새가 나요. 그러니 기뻐하는 것입니다.
“디르사” 라는 말은 “기쁘게 한다” 는 뜻이고! “예루살렘” 은 “평화” 라는 뜻입니다.
그럼 솔로몬은 술람미를 통하여서 기쁨을 얻고 평화를 누린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솔로몬이 왕으로서 집무를 하면서 지치고 쌓인 심신(心身)을 술람미의 품에서 쉼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술람미 품에서 한 숨 푹 자고 나면 지친 몸이 상쾌함을 얻어요.
술람미의 품은 곧 침실과 같아요. 온통 솔로몬이 좋아하는 향내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솔로몬이 술람미의 품에서 평화를 맛보는 겁니다.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왕궁에 있는 1000명의 여자들은 솔로몬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이리떼와 같아요. 솔로몬이 좋아서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구중궁궐의 각종 암투는 임금의 사랑을 받아내고자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요. 임금의 사랑을 받으면 그것으로 권력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선 각종 암투와 시기와 모함이 들끓었어요. 그러니 조건적으로 결혼한 1000명의 여인들에게선 쉼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골치만 아파요.
서로 왕을 차지하고자 하는 싸움만 일어나요. 그러니 쉴 수가 없지요. 모두가 정략적인 관계로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잠자리를 해도 온갖 청탁이 오갔어요. 그러니 무슨 평화가 있고 쉼이 있겠어요.
하지만 술람미는 계산이 없어요. 아무런 조건이 없어요. 그러니 쉼이 되는 겁니다. 다투는 여자의 품은 가시와 같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품은 포근한 어미의 품과 같아서 쉼이 있는 곳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랑하는 여인과 한 숨 푹 자고나면 주어지는 그 상쾌한 기분을 상상해 보세요. 기지개를 펴면서 양 손을 들고 야~ 잘 잤다! 이런 곳이 바로 천국이에요.
솔로몬에게 있어서 술람미는 자기 방과 같아요. 술람미에겐 자기 코에 익숙한 냄새가 있어요. 자기가 준 것으로 치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 침실과 같이 편한 겁니다.
술람미는 술람미 것이 없어요. 모두가 솔로몬 왕이 준 것이에요. 그러니 기쁜 겁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들여다보면 그 속에 자기가 보여요. 결국 솔로몬은 솔로몬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과거 ‘쥴리아로버츠’ 라는 배우가 나오는 ‘귀여운 여인’ 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네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에 적절한 것 같아서 비유로 듭니다. 여기에 보면 남자는 ‘리차드기어’ 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재벌이에요.
영화내용은 재벌이 매춘부를 사랑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재벌이 매춘부를 사랑하는가 라고 의아해 하겠지요. 그러나 의외로 간단해요.
매춘부는 재벌이 해 주는 대로 해요. 재벌은 그 여자에게 온통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코디를 해 주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색상에 옷을 입히고! 신발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신기고! 각종 액셔서리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하고! 머리도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꾸몄어요.
여인은 자기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모두가 재벌이 해 준 것들이에요. 재벌은 자신이 해 준 것으로 치장한 그 여인을 보면 너무도 행복해요. 기분이 좋아요.
그래서 데리고 다니면서 자랑하는 겁니다. 파티에 까지 데리고 나가서 내 여자라고 자랑을 하는 겁니다. 재벌의 눈에는 그 여인이 너무 예쁜 겁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아요. 이게 사랑이에요.
마치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와 같지 않나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코디해 준 것과 같아요. 술람미는 마네킹처럼 가만히 있었어요. 솔로몬이 다 가꾸어 주었어요. 술람미의 몸에 솔로몬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솔로몬의 손길이 묻어 있어요. 그러니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은 겁니다. 그래서 궁궐의 잘난 여자들 앞에서 이 사람이 내 여자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내 말을 안 듣지만 이 여자는 내 말에 순종하는 여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요. 자기 것이라곤 없어요. 이게 신앙이에요.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의 것으로 치장하는 겁니다. 마치 야곱이 에서의 옷으로 치장하고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과 같아요. 야곱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리브가가 다 해 주었어요.
믿음이란? 내 것이 없어요. 오로지 믿는 대상인 예수님 것만 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수님 것으로 둘둘 감고 있어야 해요. 예수님은 우리를 코디하는 코디네이터에요. 우린 마네킹이에요. 코디네이터인 예수님이 코디를 하게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엄마가 입혀주는 대로 입으면 되어요. 자기 생각이 개입되면 안 되어요. 예수님은 우리 엄마에요. 그냥 예수님 마음대로 코디를 하도록 하여야 해요.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의 적(敵)이 무엇인지 알겠지요. 자기 생각이에요.
궁궐에 있는 여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것으로 코디했어요. 그러니 솔로몬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다. 보면 거북스러워요. 기분이 언짢아요.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 주는 거에요. 연애 할 때 그랬잖아요. 애인이 뭘 좋아할까! 거기에 맞추고자 했잖아요.
애인이 기뻐하는 옷을 입고! 애인이 기뻐하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애인이 기뻐하는 화장을 하고! 애인이 기뻐하는 행동을 하는 겁니다.
애인이 정장을 입으라고 하면 정장을 입고! 애인이 치마를 입으라고 하면 치마를 입고! 애인이 긴 머리를 좋아 하면 머리를 기르고! 애인이 단발머리를 좋아하면 단발머리를 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애인이 기뻐하는 것을 한다는 것은 난 당신 것이라는 의미에요. 난 내 생각이 없고 오직 당신의 생각뿐입니다! 난 당신의 여자입니다!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라는 고백이에요.
‘김수희’ 가 부른 ‘애모(愛慕)’ 라는 노랫말을 보면 참 복음 적인 것이 있어요.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세월의 강 넘어 우리사랑은 눈물 속에 흔들리는데 얼 만큼 나 더 살아야 그대를 잊을 수 있나 한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설 수 없는 사람아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드는데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여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드는데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여 당신은 나의 남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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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개사해 보세요. 난 주님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사라지는가! 주님 등 뒤에 서면 나는 왜 행복해지는가! 주님의 사랑 때문에 난 침묵해야만 하는 나는 주님의 여자입니다. 주님이 내게 심어놓은 약속이 있는 한 주님은 나의 남자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불러 보세요. 참 은혜가 되어요.
주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냥 우세요. 감사하다고 우세요. 나 같은 창기를 신부로 삼아 주셨음에 울란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새겨 놓은 새 언약이라는 것이 있는 한 나는 예수님의 영원한 여자입니다. 내 몸에 십자가의 피가 뿌려져 있는 한 예수님은 영원한 나의 남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에 새겨 놓은 흔적이 있어요. 사도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흔적을 가졌다고 했어요. 이 흔적이 있는 한 우린 영원히 예수님의 여자이고 예수님은 나의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그리워하면서 애모(愛慕)를 불러 보세요.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몰라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치장하고 사세요. 은혜를 훼손하지 마세요. 우리 몸에 예수님의 흔적만이 오롯이 남아 있게 하세요. 그게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가 해야 할 싸움입니다. 주님의 사랑 이외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못하도록 싸워야 합니다.
술람미는 이 싸움을 했어요. 그리고 이겼어요. 자기 것이 없으니 솔로몬이 해 준대로 그대로 간직하고 맞이하는 겁니다. 이게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인 겁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눈을 말해요. 사랑하는 눈으로 보니 모든 것이 예뻐 보이는 겁니다. 이 눈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보는 눈과 같아요. 수많은 아이들이 있지만 부모 눈엔 자기 자식만큼 예쁜 아이가 없어요.
객관적인 기준으로 따지면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사랑은 주관적인 거에요. 그래서 제 눈에 안경인 겁니다. 사랑의 안경을 쓰고 보니 온통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람의 눈과 귀를 멀게 해요. 온통 그 사람만 보이고 그 사람 목소리만 들려요. 그래서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일방적인 거예요. 인위적으로 막을 수가 없어요. 자기 몸을 상해 가면서도 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그러므로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요. 모든 것이 예뻐요.
솔로몬은 술람미의 눈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어요. 술람미의 눈이 솔로몬을 사로잡고 있어요.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만 보이는 겁니다.
술람미 눈 속에 비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눈도 예쁘고! 머리카락도 예쁘고! 이(齒)도 예쁘고! 뺨도 예뻐요.
어째서 그리 예쁜가요. 이는 어미가 낳은 외동딸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미가 가장 귀하게 기른 딸이기 때문입니다.
9절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하나 뿐인 자가 그 어미의 외동딸이라고 합니다.
어미란? 낳아준 자를 말해요. 술람미를 낳아 준 자에요. 낳아 주었다는 말은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술람미가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었느냐? 그 사랑 받게 된 원인이 곧 술람미의 어미인 셈입니다.
그럼 여기서 그 어미란?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받게 된 근본을 말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한 것은 오로지 긍휼이에요.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에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창세전 언약에서 나왔어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하나님이 성도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긍휼은 심판을 이기게 한다고 하였어요. 다시 말해서 긍휼이 구원을 이끌어 낸다는 말입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낳아짐을 입었어요. 결국 하나님의 언약이 성도를 낳은 어미와 같은 겁니다. 원천적으로 올라가면 창세전 언약이에요. 성도는 창세전 언약으로 낳아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창세전 언약이 바로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에요.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사라와 하갈을 가지고 두 언약이라고 했어요. 사라는 새 언약을 말하고 하갈은 옛 언약을 말해요. 그런데 새 언약인 사라를 일컬어 하늘 예루살렘이라고 하면서 우리 어머니라고 합니다. 사라를 일컬어 새 언약이라고 했으니 새 언약은 곧 우리 어머니와 같은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바울은 지금 사라를 새 언약이라고 하고 그 언약은 곧 우리 어머니라고 하고 있어요. 새 언약이 곧 어머니란 말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에서 나왔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고 새 언약을 주셨어요. 그러므로 그 어미의 외동딸이란 말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에서 나온 자란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낳아진 자들이에요.
예수님은 우리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우리의 남편이기도 해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고 구원해 주신 의미에선 어머니와 같아요. 반면에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하와로 비유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한 몸인 신랑이 되는 겁니다.
외동딸이란? 하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유일한 딸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피로 낳은 유일한 딸은 성도에요.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쏟고 낳아진 어미의 외동딸인 겁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이 희생으로 낳은 딸이에요. 희생이란? 피를 쏟고 얻었어요. 솔로몬은 술람미를 얻기 위해 왕이라는 신분에서 낮아지는 희생을 감내하였어요. 이건 마치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술람미에겐 솔로몬의 희생(피)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술람미를 맞이했어요. 그러니 술람미는 솔로몬의 은혜와 사랑을 가득 담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베푼 은혜와 사랑이 곧 그를 낳게 해준 어미와 같은 겁니다. 결국 술람미는 솔로몬이 낳은 외동딸과 같은 것이 됩니다.
왕궁에 있는 수많은 여인들에겐 솔로몬의 희생(피)가 없어요. 솔로몬은 그들을 위해 쏟은 피(희생)가 없어요. 모두가 정략적인 조건으로 혼인한 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서는 솔로몬의 희생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안에 솔로몬의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궁중 여인들에게서는 자신을 비우고 낮아지는 희생이 나오지 않아요. 솔로몬의 마음으로 보는 눈이 없으니 긍휼의 마음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선 자기들의 잘남이라는 것으로 남과 비교하는 법이 나오는 겁니다.
부부는 한 몸이에요. 그럼 부부에게서는 동일한 성정(性情)이 나와야 해요. 남편이 자비로우면 아내도 자비로워야 해요. 이게 부부에요. 술람미에게선 솔로몬의 마음이 나오는데 궁중의 여인들에게선 솔로몬의 마음이 나오지 않아요. 왜? 그런가요. 술람미는 솔로몬의 것으로 채워져 있고 궁중 여인들에겐 자기 것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한 몸이에요. 그러므로 술람미의 “눈”은 솔로몬의 것이고! “머리카락”도 솔로몬의 것이고! “이(齒)”도 솔로몬의 것이고! “뺨”도 솔로몬의 것이에요.
그러므로 술람미는 솔로몬의 눈으로 보았고! 술람미는 솔로몬의 영광으로 살았고! 술람미는 솔로몬의 말을 하였고! 술람미에게는 솔로몬의 언행심사가 나왔어요. 술람미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솔로몬과 닮았어요. 이는 한 어미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예수님과 성도의 모형적 사랑을 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솔로몬의 마음엔 곧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위하여 희생하여 사랑한 것은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한 것과 같아요.
성도의 구원 속엔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희생이 담겨 있어요.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피 흘리심은 곧 우리를 낳게 한 모태(母胎)와 같아요. 그러므로 성도에겐 예수님의 모든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마치 자식이 부모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듯이 성도에게도 예수님의 유전자가 있어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언행심사가 닮았다는 말입니다. 자식은 부모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일을 하셨어요. 예수님이 아들로 오셨다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말씀 하신다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에게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마음이 임합니다. 그럼 성도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과 같은 안목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예수님과 같은 말을 하게 되고!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갖게 되어요.
세상을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였으나 세상 사람이 아닌 자로서 살게 된단 말입니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늠름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당당하다는 말입니다.
신랑의 사랑을 받는 여인은 빛이 나요. 기품이 있고! 관대함이 있어요. 범사에 자신 감이 있어요.
사도 바울은 이런 삶을 살았어요. 우겨쌈을 당하여도 당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당하지 않고! 모든 것을 빼앗긴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았어요. 주께 받은 은혜가 그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담대하고 관대함이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풍부에 처하여도 잘난 척하지 않았고 비천에 처하여도 비굴하지 않았어요.
바울은 어떻게 이렇게 살았을까요. 모두 삼층 천에서 내려다보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삼층 천에서 내려다보니 세상이 작아 보인 겁니다. 그러니 인생살이를 주께서 맡겨준 배역이라 생각하고 그냥 연극 한편 하는 것처럼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술람미처럼 왕의 사랑을 받고 보니 예루살렘 여자들의 투기도 넉넉히 이겨 낼 수가 있는 겁니다. 이미 왕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아무리 투기한들 그 사랑은 변하지 않으니 악악댈 필요가 없지요. 바울처럼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먹고! 이단이라고 하면 이단으로 사는 겁니다.
같이 싸울 필요가 없어요. 저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어찌하겠어요. 그냥 불쌍히 여기는 수 밖에요.
우린 이미 사랑을 받았잖아요. 그러니 사랑받은 자답게 관용하면서 사세요. 이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에게서 나오는 당당함입니다.
여러분은 군계일학(群鷄一鶴)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든든히 서 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천사도 흠모할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너는 나의 하나뿐인 어여쁜 비둘기라고 하는 이름도 받았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믿어져서 우리의 삶 속에서 누림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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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울 산 목 양 교 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