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범 金元範 (1886 ~ 1909)】 "전해산 의병 중군, 조경환 의진 도포장"
1886년 1월 9일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당부면(當府面) 북촌리(北村里)에서 출생하였다.
13살 연상의 친형 김원국(金元國)과 함께 의병 300여 명을 규합하여 1906년 3월 광주 교외 무등산(無等山)에서 거의하였다. 1907년 12월 김준(金準) 의병부대의 휘하에 들어가 장성(長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봄 호남회맹소의 의병대장 기삼연(奇參衍)이 사망하고, 이어서 김준(金準)이 사망하자, 휘하의 오성술·조경환·전해산 등 부장들이 각기 의병장을 칭하면서 독립하였다. 그 해 (음)7월 전해산(全海山) 의병부대에 들어가 중군장으로 활약하다가 다시 조경환((曺京煥)·(敬煥))의 휘하에 소속되어 도포장으로 활약하였다. 당시 피신 중이던 형 원국도 광주군 선암시장(仙岩市場)에서 조경환을 상봉한 후 동생이 조경환 의병부대에서 활약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경환 의병부대의 선봉장이 되어 형제가 함께 활동하였다. 이해 창평(昌平) 무동촌(舞童村), 장성 낭월산(浪月山), 영광(靈光) 토산(土山), 함평(咸平) 오산(鰲山) 등지에서 일본군경과 교전하였다.
1908년 9월 의병 20명과 함께 영광군 황량면(黃良面)에 살던 일제 헌병의 밀정 변영서(邊永瑞)를 함평군 식지면 군평(群坪)에서 붙잡아 총살하였다. 이 일은 전해산의 명에 의한 것이다. 당시 조경환 의병진과 전해산 의병진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합동작전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09년 1월 의병장 조경환이 사망하자 다시 전해산과 합세하여 대동창의단(大同倡義團)을 조직하고 전해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중군장을 맡았다. 그 후 광주·나주·담양·장성 등지에서 형 원국과 함께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09년 2월 광주 무등산에서 일본군과 전투 끝에 붙잡혀 광주수비대에서 조사를 받던 중, 그 해 9월 2일 스스로 혀를 끊어 자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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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인쇄물에 대한 일제 측 보고(1909. 4. 29) [판형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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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병 전투지인 어등산(광주 광산구)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