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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오산 이야기(8)
벌음동, 탑동, 두곡동에서 가수동, 청학동까지
이 원 규
오산의 남쪽 끝이다. 남부대로 넓은 길로 걸었다. 송전탑이 지나는 산 아래는 싸리나무 숲이다. 목장이 있는 건너편으로 탑동/벌음동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 음말이다. 200여 기가 넘을 듯한 많은 묘지이다. 그러나 지명 유래가 음말이지만 마을이 음지가 되어 있지는 않았다. 남부대로가 뚫리면서 오히려 양지가 된 듯하다. 마을에서는 윗말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탑동대교 앞에 탑동과 두곡동 표지판이 있다. 남부대로 뻗어가는 탑동대교 사이로 오산천이 흐르고 오산시환경사업소와 우신골프연습장이 건너편에 있다.
남부대로 지하도를 건너서면 다사랑교회가 있다. 그 맞은편 알매뿌리산은 늘샘목장 길이다. 종축을 생산하는 시범목장이라는 표지판이 있다.‘도시계획 강제 수용 반대’현수막이 탑동슈퍼 앞 네거리에 걸려있다.
두곡동 마을로 가는 길은 평밭머리에서 큰마레올로길(1리)와 말여울길(2리)로 갈라진다. 두공2동 노인회관은 말여울길 마루턱 고개 위에 있었다. 오산시내와 멀리 무봉산(208.6m)의 모습도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 독골뿌리산은 마치 항아리를 눕혀놓은 듯하다. 오산환경사업소공원 부근의 냇가를 황새포라고 불렀다. 이름 그대로 황새 떼들이 하얗게 앉아있는 독골산은 서탄면 수월암리와 오산시가 경계이다. 오산시의 경계는 황새포 아래 고압송전탑이 지나는 곳까지 뿐이다. 넓은 평야지대는 대부분 평택시의 땅이다.
최정린 효자 정려문은 당산 중턱에 있다. 이 마을에는 대부분 수성 최씨들이 약300여년을 살아온 집성촌이다. 특히 효자문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하다.
최정린 선생은 어릴 적부터 부모를 잘 공양하고, 형제간에 화목하였으며 이웃들을 돌보며 청빈한 삶을 살았다. 나이 40세에 세상을 떠나니 주민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선생의 효행이 뛰어남을 표창하기 위해‘조봉대부동몽교관(朝奉大夫童蒙敎官)을 하였고, 자손들이 당산에 효자문(정문)을 세워 지금도 그 뜻을 교훈삼고 있다.
탑동 돌모루길로 올라갔다. 주원빌라와 하이츠빌라가 있는 돌모루길을 올라갔다. 탑이 세워졌었다는 타마루에서 내려다보면 누읍동과 오산천이 눈앞에 보인다. 둑길을 따라 오래 전부터 공단이 조성되어 있다. 신호제지, 피어리스, 쌍방울 물류센터, 대광다이캐스팅공업, 대림제지, LG전자 등 공장들이 오안교 오거리 앞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열병합발전소도 공단의 중간쯤에 듬직하게 있다.
타마루길에서 누읍동 쪽으로 내려오면 가장천이 휘어져 흐르는 곳에 1994년 7월 30일에 준공된 탑동교가 있다. 그 옆 둑길 우측에 벌판 한 가운데에 커다란 은행나무도 있다. 그 길은 이림아파트 쪽 신시가지로 닿는다. 탑동마을쉼터(노인회관) 옆 너머들길 아래에는 논과 논 사이로 널찍한 직선도로가 누읍동 큰말로 연결된다. 그 가운데에 2001년 3월에 준공한 탑루교라는 다리가 있다. 탑동와 누읍동을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은 것으로 보인다.
누읍동의 지명 유래는 마을의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이라고 하여 눕새골이라고도 부른다. 즉 누운소→누은소→누음소→누음새→누읍새→눕새로 구전되면서 누읍리(樓邑里)로 구전된 오래된 마을이다.
누읍동에는 마을 앞의 신주우물, 잿말우물, 늠말우물, 홍골우물 등 여러 곳에 우물과 옛날에 배가 닿았다는 선창들, 고비들, 초평들, 김수구들, 보아지 등 넓은 벌판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마을에서 지내는 우물 제사 즉 정제(井祭)는 보통 음력 7, 8월에 지내지만 이 마을에서는 농한기인 정월 대보름날에 두레를 놀고 떠들썩하게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물이 마르지 않도록 기원한다고 한다.
누읍동 마을에서 오산초등학교로 넘어가는 홍골산을 넘으면 가수동이다. 일명 쇠죽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오산장을 보려오는 사람들이 쇠죽을 먹이며 쉬였다고 하여 붙인 가수동의 옛 명칭이다. 또한 예전부터 물맛이 좋고 아름다운 물이 흐른다고 하여 붙였다고도 한다. 물 뿐이 아니라 높고 낮은 산과 들판과 아파트들이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마을이다.
신동아아파트 뒷산 능선으로 난 산책로는 청학동과 경계에 있는 가감이산에서 쌍용제지 서편의 감투산이라 불리는 관봉산까지 이어진다. 아직도 숲이 우거진 산책로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다른 산에서 느끼지 못하는 적막함을 그곳에서 느낄 수 있다. 멀리서 산을 바라보면 산의 모양이 기기묘묘하다. 용마루는 승천하는 용을, 감투봉은 벼슬아치들이 머리에 쓰는 감투처럼 생겼다.
오스카빌 늘푸른주택 건설이 한창인 현장의 변전소와 오산초등학교 앞으로 내려왔다. 오산초등학교 정문 우측을 타고 올라가면 영문교회에 닿는데 그 옆에 청해백사가 있다. 오산시내에서 올라올 때는 성심학교 정문 좌측 꽃집 영선농원의 정원수 묘목을 심어놓은 뒤편이다. 농원과 성심학교 담 사이에 침목 두 개를 깔아놓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언덕 위에 흙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그 아래에 사당이 있고 앞 언덕에 잔디를 깔아놓았다.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인 청해백 이지란은 몽고인 퉁두란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원래 여진(몽고)에서 출생했으나 고려 공민왕 때 고려로 귀화하여 청해를 본관으로 하는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 태조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고 개국을 도와 1등공신 되었다.
이지란(퉁두란)은 이성계와 쌍벽을 이루는 활솜씨를 가졌다고 전한다. 이지란이 적장의 투구를 떨어뜨리면 이성계가 적장의 머리를 화살로 꽂았다고 하고, 이지란이 지나가는 아낙네의 물동이에 구멍을 내면 이성계가 솜뭉치를 쏘아 그것을 막았다고 한다.
가수동은 비록 몇 가구되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청해이씨의 집성촌이었다. 개국공신에 대한 예우는 대단하여 아무리 높은 지위의 사람이 말이나 가마를 타고 지날 때에도 이곳에서는 내려서 걸어가야 화를 면하기도 했다고 한다. 청해백 이지란 묘는 북한 함경도 북청에 있고, 그의 다섯 아들 중 녯째인 무후공이 이곳에서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오산에서도 원래는 누읍동에 있었으나 6 ․ 25 때 소실되어 이곳에 사당을 새로 건립하였다. 후손들은 곧은 정신과 의리를 소중히 여기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훈도‘진지보국(盡志報國)’으로 정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 영당이 세워져 있는데 포천에도 이지란을 봉안한 사당이 있다고 한다.
성심학교에서 근무하는 진길장 시인은 요즘 사당을 말끔히 정리해 놓았다며 학교 내에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성심학교 교실에서 보면 사당이 빤히 내려다보인다고 한다.
오랜만에 그를 만났는데 요즘 작고한 이규황 시인의 시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오산고등학교 전교조 회원을 비롯한 20여 명의 교사들이 7년 동안 350만원 정도를 모금해 두었다고 한다. 오산시에 지원도 요청하고 각계각층에 모금운동도 전개하겠다고 말한다.
지난번에 오산시의 서쪽 지역을 돌면서 정문리에서 빙빙 돌다가 이규황 시인의 묘소를 찾지 못하여 되돌아온 적이 있다. 필자는 그의 제자 김태우 시인과 다시 찾아가 보기로 약속도 했다. 그들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을 느낀다. 이규황 시인은 명이 짧은 것 빼고는 복이 많다고 하니 진길장 시인도 다들 그렇게 말한다며 웃었다. 하여튼 규모와 관계없이 시인들의 시비를 세운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가수동 입구부터 남쪽으로 직선도로가 남부대로까지 시원하게 뚫리고 있다. 멀리 들판 너머에는 오산비행장이 있다. 오산에는 비행장이 없다. 다들‘오산비행장’이라고 하지만 평택시 송탄에 있는 미군과 함께 쓰는 군사 비행장을 말한다.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난 작품‘황구지천 4’에서 몇 소절만 발췌한다.
밤이 내리지 않는 나라
황구지천 강안개가 자욱히
활주로 부근으로 상륙해도
주둔군 전투기들은 활주로
휘황한 꽃등길따라 무사히 착륙한다
밤이 깊을 수록
조선족 처녀의 자궁깊이 새겨지는
신제국 아메리카의 꿈들이 부메랑되어
동두천 보산동 판잣집에서 난도질 당했다지
오늘도 어김없이
쑥고개 활주로 따라 황구지천이 흐르고
전투 비행 편대가 이륙할 때마다
일제히 소름 돋는 강둑의 억새풀들이
마른 풀더미에 번지는 들불
누가 지피는가
(이하 줄임)
이규황 시 <황구지천 4> 1994. 1월/경기민족문학협의회 문집 5호에서
문득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라고 부르던 고복수 선생의 ‘짝사랑’이 흥얼거려진다. 물론‘억새’와‘으악새’는 전혀 상관이 없다. 으악새는 왜가리를 평안도에서‘왁새’라고 하는데 노래의 리듬에 의해서 그렇게 발음되었다고 한다. 하여튼 저절로 불러본‘짝사랑’의 첫 구절이다. 요즘 오산시를 답사하면서‘억새’와‘갈대’가 구분되지 않는다. 산과 들에 자라면 억새, 물가에 자라면 갈대라고 하지만 산업 일변도의 지구환경에서 그 변화는 결코 자연스럽지 멋했다. 산에서 갈대도 자라고 강가에서 억새도 자라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제대로 구별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억새는 잎이 억세서 붙은 이름이다. 간식으로 잘 먹는 핫도그 비슷한 얼마가 있는 ‘부들’과 비교하면 쉽다. 부들은 억새와 달리 잎이 부들부들하다. 잎의 가장자리에 유리처럼 날카로운 톱니가 있고 잎맥에 흰 줄과 솜털 많은 흰색 꽃이면 억새이다. 그러나 억새와 닮은 물가에서 잘 자라는 물억새도 있어 헷갈린다. 그러나 물억새는 씨앗에 긴 털이 없는 것이 차이점이다. 갈대는 억새와 비슷하지만 입맥에 흰 줄이 없고 연한 갈색의 솜털이 있다. 물론 갈대와 닮은 달뿌리풀이 있다. 뿌리가 땅속에 있으면 갈대이지만 땅 위를 기면서 뿌리를 내리는 것은 달뿌리풀이다.
고물상 덕유상사에서 행복한교회를 보고 걸으면 사거리 골목 우측 가시미산 아래에 조원자 화랑인 카페 예인 갤러리가 있다. 즉 가수동 주공아파트 115동과 부여빌라 뒤편이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지장보살 1천80불을 봉안한 수월선원도 있다.
가수동 북쪽 가시미산이 있다. 산의 모양이 기러기의 가슴 가운데 모양이라고 부르는 이름이다 그 산에 아기 업은 바위라고 부르는 바위도 있다.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업고 있는 듯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 멀리 일을 나간 소식 없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아기를 업은 채 죽어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요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산들이 깎아내려져서 예전의 운치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산을 깎아 들을 메우는 공사는 수 억년 유지해온 자연을 삽시간에 무너뜨리고 있다. 자연친화적인 혹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공사 방법은 없는 것일까.
요즘 산과 들을 순회하면서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가는 아파트 단지가 늘어가는 것을 보면 자꾸 불안해진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저 오산 이야기 몇편만 더읽으면 오산 관광 가이드 해도 됄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나도 몰르는 오산 이야기 굉장히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