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의 난동을 바라보며
그들이 뭐라고 외치든, 무슨 소동을 벌이든 이제 관심없다. 그들이 어떤 변화를 할 것이라는 기대도 없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자기 안에 있는 어떤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 메커니즘은 문학적 상상력을 잃어버린 차디찬 논리의 언어로 만들어진 교리의 틀이다. 그 틀에 자신과 세상을 올려놓고 신앙이라는 이름의 작업을 반복할 때마다 저주와 죽음의 피가 흘러나온다. 그래서 그들의 모임은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결국 사람을 죽이는 자리가 된다.
그들은 소돔성의 죄악을 유포한다고 사람들을 비난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소돔성 사람들이 저지른 바로 그 죄, ‘집단학대’를 저지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오로지 정의롭고 거룩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전국에서 모여야 한다고 소리를 높인다. 그들이 세우고자 하는 정의의 깃발은 불의라는 깃대에 달려 있고,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조건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정의와 사랑을 모독한다.
전쟁의 상처가 민족에게 트라우마를 남기면 빨갱이를 처단하라는 목소리가 자주 높아지듯이, 율법주의라는 굴레에 오랫동안 갇힌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그 종교적 트라우마 때문에 이단을 찾아내어 정죄하는 마녀사냥에 몰두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실 자신이 입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냥이 끝나면 그들은 다른 사냥감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런 먹잇감은 얼마든지 있다.
그들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이 세상을 치료하시고 생명과 기쁨 가득한 곳이 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잔인하게 멸망시키시는 분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회복을 꿈꿀 수 없어서 저 세상에 진정한 낙원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런 난동은 신학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에게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아름다운 곳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그림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소동의 또 다른 원인은 천국에 대한 오해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미스바 성회로 선전하지만 사사시대에 미스바에서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벌여 그들을 진멸했고, 사무엘은 미스바에서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라는 고백으로 회개를 했다. 그렇게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와서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번 10.27 집회가 미스바 성회라면 누구를 진멸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국가적인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함일까? 우리의 진정한 위기는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는 미스바에서 베냐민 지파를 진멸한 이스라엘의 모습에서 드러나기보다는 베냐민을 위해 자신을 대신 구금하라고 요셉 앞에서 희생을 자처하는 유다의 모습에 더 가깝지 않을까? 우리나라를 진정으로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소수의 사람일까, 아니면 나와 다른 생각, 취향, 종교,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배제와 혐오일까? 이처럼 극렬하게 나뉘어진 갈등의 상황에서 화합과 관용을 실천해야 할 그리스도인이 갈등의 불씨에 기름을 끼얹는 일을 하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본질을 꿰뚫어 볼 지혜가 있었다면 아예 이런 일을 도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2024년 10월 27일 서울 광화문에서 벌어질 난동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