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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2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다섯째 주일)
숨을 쉬고 있는 동안, 생기는 있다
겔37:1~14; 롬8:6~11; 요11;25~27,38~44
우리는 오늘 구약의 말씀 가운데 어쩌면 가장 강력한 메타포라고 볼 수 있는 소위 마른 뼈 환상을 보았습니다.. 골짜기에 널려 있던 마른 뼈들에 힘줄이 뻗고 살이 입히고 뼈들이 서로 이어지고, 마침내 주님께서 보내신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 큰 군대가 되는 에스겔의 환상입니다. 또 오늘 요한복음서의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시는 장면도 우리에게 매우 강력한 이미지를 불어넣어 줍니다.
여러분, 이 두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멸망에서 희망으로, 무력함에서 활력으로, 매임에서 풀려남으로의 근본적 전환, 다시 말해, 메타노이아를 보게 됩니다. 늘 바라고 갈망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종종 삶이 주는 무게에 눌려, 어떨 때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삶이 마른 뼈와 같고, 베옷에 꽁꽁 감싸여 무덤에 묻힌 것처럼 산다고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언제 생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몸과 정신의 에너지가 소진되어 푸석거리는 삶을 붙잡고 힘겨워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오늘 에스겔서와 요한복음의 말씀은, 우리 삶의 근원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그야말로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에스겔서가 들려주는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뻔한 얘기로 건성으로 들리지 않고, 우리 가운데도 불어오는 “생기”(바람, 영, 루아흐, 프뉴마)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들려주는 말씀이 그저 글자로 쓰여진 진부한 기사가 아니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외치시는 예수님의 외침을 우리 깊은 중심에서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이런 “생기”를 늘 불어넣어 주시고, 이런 “영”을 불어넣어주시며, “나사로야 나오너라”와 같은 “외침”을 외쳐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생기와 영과 외침을 수신하지 못합니다. 가장 깊은 영의 탄식을 듣지 못합니다. 오늘 주님의 영이 우리의 귀를 “들을 수 있는 귀”로 열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 밭”으로 바꾸어 주시며,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해주셔서, 에스겔이 본 환상과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능력이, 종종 마른 뼈와 같고 무덤에 매인 것 같은 우리에게 새로운 비전과 생명력으로 다가올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들이 구약의 에스겔서를 자세히 읽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언자 에스겔은 제1차 바빌론 포로 때 바빌론으로 잡혀온 포로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스겔서1장 1절 이하를 보면, 에스겔이 서른 살이 되었을 때(또,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 온지 5년 째)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과 그발 강가에 있었는데, (그발 강가는 바빌론에 잡혀 온 포로들이 예배를 드리던 처소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 보여주신 “환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또 “주님의 권능이 나를 사로잡았다”라는 말도 합니다.
여기서 “환상”을 보고, “주님의 권능이 나를 사로잡았다”는 표현은 에스겔의 예언활동을 특징짓는 중요한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주님께서 권능으로 나를 사로잡으셨다”라는 말로 시작하지요. 여기서 “환상”(<마르아>)이라는 단어는, 막연하게 헛것을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똑똑히 본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영어로 하면, “illusion”이 아니라, “vision”이지요. 이 <마르아>라는 단어는 “거울”이라는 뜻도 있는데, 거울이 앞에 없는 헛것을 보여주지는 않지요. 앞에 대상을 그대로 비춰주는 것이 거울입니다.
또 “주님의 권능이 나를 사로잡았다”는 말은, 직역하면, “주님의 손이 거기서 내 위에 임했다”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주님의 손이 에스겔 자신을 잡아서 어떤 현장, 즉 보여주고자 하는 현장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의미를 띠게 됩니다. 가서 직접 눈으로 똑똑히 보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권능으로 나를 사로잡으셨다”라고 한 후에 뭐라고 합니까? “주님의 영이 나를 데리고 나가서, 골짜기의 한 가운데 나를 내려놓으셨다. 그런데 그곳에는 뼈들이 가득히 있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그 뼈들이 널려 있는 사방으로 다니게 하셨다. 그 골짜기의 바닥에 뼈가 대단히 많았다. 보니, 그것들은 아주 말라 있었다.” 얼마나 생생합니까?
에스겔서에서는, 예언서에 흔하게 나오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라는 표현이 아니라, 이렇게 예언자를 직접 어떤 현장으로 데리고 가서 그 현장을 똑똑히 보게 하는 방식으로 말씀을 전하십니다. 심지어 많은 경우에는 그 현장에서 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 현장을 직접 참여하는 방식으로, 예언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가령, 인분으로 빵을 구워먹게도 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처럼 보따리를 싸서 길을 떠나게도 하고, 떨면서 두려움과 근심에 싸여 빵과 물을 먹게도 합니다. 그리고 예언자는 이런 일을 직접 경험하지요. (이는 모두 포로민의 비참함을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에스겔이 보았던 장면도 하나님께서 그를 현장으로 데리고 가셔서 직접 그 현장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매우 강력한 “비전”(<마르아>)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본문을 읽을 때에 머리로 쓱 읽고 지나갈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현장에 가서 일어나는 일을 직접 보고 참여하는 방식으로 읽는 것이 에스겔서를 제대로 읽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적극적 상상이라고 하지요, 생생하게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아니 지금 여기서 우리 가운데 벌어지는 일처럼 읽는 것이 에스겔서를 제대로 읽는 비결입니다.
한번 마음으로 생생하게 그려보십시오. 아주 넓고 확 트인 계곡이나 산간의 평지에 내가 서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곳에는 바싹 마른 뼈들이 가득 널려 있습니다.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모두 말라서 구멍이 숭숭난 하얀 뼈들입니다. 살아있었다면 힘차게 움직였을 건장한 장정들이 앙상한 뼈만 남아 황량한 벌판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태양은 뜨겁고 그 벌판엔 황량한 마른 바람이 불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바람이 바뀌었습니다. 그 마른 뼈들 위에 하늘의 생기가 서서히 불기 시작합니다. 황량한 마른 바람 대신, 하늘의 바람이, 하늘의 생기가, 하늘의 영이 마른 뼈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뼈들이 맞춰집니다. 맞춰진 뼈들에 힘줄이 돋습니다. 그리고 살이 오르고, 살갗이 덮힙니다. 다시 하늘의 생기가 그 안으로 들어가 그 뼈들이 살아납니다. 마른 뼈들이 있던 그 황량한 벌판이 엄청나게 큰 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군인들의 우렁찬 함성이 계곡에 울려 퍼집니다.
여러분, 에스겔이 본 이런 비전이, 바싹 마른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생기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내 삶이 바싹 말라버렸다. 모든 생기가 떨어졌고, 에너지가 고갈되었다, 라는 생각이 들 때,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런 생기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때에, 여러분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눈을 감고, 여러분의 삭막하고 메마른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넣어지도록 적극적 상상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에스겔이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마른 뼈의 현장, 그 속으로 가서 그 마른 뼈 위에 불고 있는 하나님의 생기를 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는, 여러분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이미 하나님의 생기가 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생기로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다” 우리의 숨결은 이미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하나님의 날숨을 우리가 들숨으로 숨 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생기로 사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랬지요. “살아있는 동안, 희망은 있다”(“Dum vita est, spes est”). 마찬가지로, 숨을 쉬는 동안, 우리에겐 하나님의 생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은 왜 이렇게 메마르고, 때로 고통스럽고, 우리는 때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까요?
사실, 우리의 삶은 기본적으로 취약합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점점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사회 속에 던져졌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점수로 매겨지고 또 그 점수는 계속해서 남들과 비교됩니다. 성적순으로 사람의 등급이 매겨집니다. 세상은 계속 우리에게 어떤 성과를 원하고 우리가 성취한 만큼 우리를 대접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성과는 거의 우리의 수입으로 연결됩니다. 그것도 계속해서 남들과 비교되면서 말입니다. 물론 그 모든 일의 근원에는, 우리의 하드웨어에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작동합니다. 나도 그렇고 남도 그렇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의 생기는 쉽게 고갈되고, 우리는 무력감 속에서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그것을 “육신에 속한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영에 속한 생각” 즉 서로 배려하고 나누고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조금 관심을 갖고 배려하는 것 같다가도,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상 받는 일이 생기면, 그 관심과 배려는 곧바로 “자기애적 방어선”으로 철수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본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사실에 대해 부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이런 프로그램의 삶이 우리에게 분명 행복을 가져다 주시 못하고,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하지요.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여러분, 이런 우리의 조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너무 교리적인 언어가 되어 버려서 오히려 그 뜻이 모호하게 되었습니다만, “구원 받는다”(소조의 수동태)는 말은 본디, “어떤 구체적인 고난 속에서 건짐을 받는다, 해 받지 않게 된다, 병에서 나음을 얻는다, 건강하게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람답게 사는 것이지요. 옛날 사막의 교부들은 서로 만나면, “소테이스”라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구원받으십시오, 구원을 빕니다”라는 말입니다. 어디 많이 듣던 말 아닙니까? 스님들이 하는 “성불하십시오”라는 말과 다르지 않지요.
사도바울도 로마서7장에서 우리의 하드웨어에 깔려 있는 기본 프로그램으로 고통을 받다가,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 탄식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고 감격합니다. 그것은 그가 누구에게도 판단받지 않는, 심지어는 하나님께도 판단받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단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옛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발견한 이 정체성은, 오늘 본문으로 보면, “하나님의 영(루아흐/프뉴마, 바람, 생기)이 자신 안에(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다른 말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것”을 아는 것이고, 또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생기가 내 안에서 불고 있구나,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살아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에게도 벌어졌습니다.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생기가 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강력한 상징이 오늘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에서도 재현됩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었고, 사람들은 그를 캄캄한 동굴 무덤에 묻었고, 그 어귀는 돌로 막아 놓았습니다. 이제 죽음과 생명, 어둠과 빛, 절망과 희망은 이미 돌로 분명히 갈라져 분리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고, 이제 끝났다고, “뼈는 말랐고, 희망도 사라졌으며, 망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무덤 어귀를 막은 돌, 죽음과 생명을 갈라놓는 그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돌을 치우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 돌을 치워놓자, 그 캄캄하던 동굴에 신성한 밝은 빛이 비쳤고, 무덤에 생명의 바람(생기)이 불었습니다.
예수님은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무덤에서 나오고, 어둠에서 나오고, 사망에서 나오고, 과거에서 나오고, 절망에서 나오고, 낮은 의식에서 나오너라!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그를 풀어주어서, 가게 하여라.” 모든 속박과 집착과 착각에서 풀려나와 참된 자유인이 되어라!
여러분,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그를 방관하셨을까? 궁금합니다. 요한복음 11장 첫머리를 보면, 나사로가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마을로 곧바로 가지 않으시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묵으셨습니다. 베다니 마을에 살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친구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는 이미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곳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안타까워하며 말합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텐데요.”
마르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최악의 상황을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최악의 상황은 최악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탄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토머스 머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혹[난관]은 영적 잉태가 될 수 있는데, 그래서 새로운 탄생과 신비적 재탄생으로 이끌 수 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상황이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늦은 것은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오히려 그것은 더 크고 놀라운 영적 잉태를 위한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너무 늦었다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올리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는 것인지 모릅니다. 사실,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최악의 상황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주 엄청난 상황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어지간한 일로는 우리가 승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생기가 불고 있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고 있다면, 하나님의 생기는 우리 안에서 불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