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는 어떻게 역사를 왜곡했나] <7> 이승만 정권의 성격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감격적인 해방을 맞았으나, 일본군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 진주함에 따라, 식민 잔재 청산과 자주적인 독립국가 건설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해 말 열린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따라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열렸으나 결렬되었다.
이후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총선거가 결정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분단 정부가 수립되었다. 제헌국회는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회에서 무기명 투표로써 각각 선거한다."(제53조)는 제헌헌법에 따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1948년 7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후 4.19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12년간 장기 집권하였는데, 강만길 교수는 이승만 정권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성립 과정에서 좌익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독립당과 같은 민족해방운동전선 우익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다만 국내 지주 세력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민주당 세력과 친일세력 등을 기반으로 삼았을 뿐이다. 그러나 곧 한민당의 지지마저 잃고 그 세력 기반이 더욱 약해졌다. 1차 임기로 끝날 처지였다가 6.25전쟁 발발에 힘입어 그 명맥을 이을 수 있었던 이승만 정권은 이후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철저한 반공주의와 표면적인 반일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물리적으로는 경찰·군부와 청년 단체, 그리고 사조직이나 마찬가지인 자유당을 기반으로 하여 정권을 유지하면서 많은 폭정을 거듭했다."(강만길, 1994, 292쪽)
|
▲ 댜큐멘터리 <백년전쟁> 포스터. ⓒ민족문제연구소 |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주의를 내세워 헌정 질서를 짓밟고 인권을 탄압하며 부정선거를 일삼다 민주주의 사수를 위해 궐기한 4.19혁명에 의해 쫓겨난 독재자라는 주장으로, 이는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반면 뉴라이트 교과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주의 국제 세력의 공세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고, 대한민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 체제로 올바로 잡는데 동시대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158쪽)라고 하여, 역사학계와는 상반되는 평가를 내렸다. 이어 교과서는 이승만의 정치 이념과 정책은 "자유민주주의, 반공주의, 반일 정책, 북진통일로 요약된다"라고 하였다(158쪽).
이들 네 가지 가운데 반일 정책은 이승만 정권이 표면적으로 표방한 데 불과하였다. 이승만은 일제강점기에는 외교독립론에 따라 항일무장투쟁을 배척하였으며, 해방이 되자 친일파를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하였고, 반민특위를 불법적으로 해체시킴으로써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좌절시켰으며, 친일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독재자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이 그 권력 기초가 친일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정책을 표방한 것은 항일이 지니는 상징성과 정통성을 의식한 때문이었다. 민족해방운동의전통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정권임을 표방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형식적·표면적으로 내건 반일 정책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이념과 정책을 기준으로 이승만 정권의 성격을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