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3.hwp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지혜" (잠 9:10)
1950년 6.25일
전쟁이 발발하고, 1953년 7월 27일 3년 1개월 만에
전쟁이 끝났다. 올해는 6.25 전쟁 69주년이 되는 해이다. 세계전쟁사에서 6.25 전쟁을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이라고 한다. 2차
대전의 대승과 월남전의 대패 사이에 아무런 결론 없이 끝난 전쟁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될 전쟁이다.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역사의 어리석은 전철을 되밟는다고 했다.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안다는 뜻이 아니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지식의 지는 '알지'(知)이고, 지혜의 지는
'지혜로울지'(智)이다. 영어로도 지식은
'Knowledge'이고 지혜는 'Wisdom'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하지 '지혜자'라고 하지 않는다. 지식은
아는 것이고, 지혜는 힘이다. 지혜는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는 힘이다. 진리란 시공간을 뛰어넘는 일관된 이치와 원리이다. 역사를 통해서 배운다는 것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얻는 것이다.
역사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과거의 사건을 오늘의 사관(史官)이 기록한 것을 역사(歷史)라고 한다.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랑케'는 '역사란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입장에 따라 가감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사료에 대한 고증을 통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역사가 '크로체'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주관적인 견해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했다. 두 관점을 중재한 인물이 '에드워드 카'(EH Carr)이다. 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1, 6.25 전쟁
1945년 8월 15일은
광복과 동시에 나라가 분단된 날이다. 우리민족의 의지와 관계없는 분단이었기에 남한도, 북한도 통일을 원했다.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한국은
미국의 영향권 밖에 있다"라고 말했다. 소위 애치슨라인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 후 김일성은 침공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소련과
중국의 지원 하에 주일 새벽 4시 탱크를 앞세워 남침을 감행하였다.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7월 말에는 낙동강까지 진출한다. 총사령관인 맥아더의 지휘 하에 유엔군은 9.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말에는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빼앗기고 한강 남쪽으로 후퇴하게 된다. 2월 서울을 되찾고 북진을 하지만, 전투는 38선 부근에서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이었다. 이후 2년간의 전쟁은 '고지전'이었다. '고지전'이란
영화가 있다. 휴전협상의난항을 거듭되자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고지전'을 영화화하였다.
1951년 7월부터
휴전 논의가 있었으나 2년이 지난 1953년 7월 27일에야 이루어진다. 휴전협정에서
유엔과 공산군의 가장 큰 쟁점은 포로교환 문제였다. 유엔군이 잡고 있던 공산군 포로는 13만이 넘었는데 공산군이 밝힌 유엔군 포로는 11559 명에 불과했다. 만약 무조건적으로 포로를 송환할 경우, 공산군은 132474명의 병력을 충당하는 반면, 유엔군은 만여 명에 불과한
병력만 충당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 송환 협정이 조인되기 직전인 1953년 6월 6일, 헌병사령관 원용덕 중장을 은밀히 불러 '반공포로석방'을 지시했다. 6월 18일 02시를 기점으로 작전은 개시되었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치고 27000 여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할 수 있었다. 북한은 국경선을 38선으로 주장하였으나 유엔군은 휴전 시점의 국경선을 주장하였다. 결국
유엔군의 제안이 받아 들여져 오늘의 휴전선이 만들어 졌다. 당시 땅에 관한 협정은 이루어 졌으나 바다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이것을 구실로 북한은 잊을 만하면 한번씩 북방한계선(NLL, Northern Limit Line)을 침범하고 있다.
2. 그린 중령(Lt. Colonel Charlie Green)
그린 중령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호주 육군 3대대 대대장으로 참전하였다. 제
3대대는 1950년 9월 28일 부산에 상륙했고, 영연방 제
27연대에 소속되어 '연천전투', '박천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다. 이후 북진을 거듭하여, 1950년 10월 29일
정주의 치열한 전투 끝에 또 한 번의 승전고를 울렸다. 10월 30일
달천강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을 때 북한군이 쏜 포탄의 파편이 그린 중령의 복부를 관통했다. 안주에
있는 미군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1950년 11월 1일
오후 8시에 전사했다. 그린 중령의 부인은 시드니에 살다, 지금은 딸이 사는 멜버른의 요양원에 계신다. 그녀와 2010년과 2017년에 두 번 인터뷰를 했다. 첫 번째 인터뷰할 때의 87세였다.
그녀의 집을 찾았을 때, 노트북 앞에 앉아 이 메일을 보내고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 글을
쓰고 있었다. 남편이 전사하고 마음 둘 곳이 없어 공부하기 시작했고,
특별히 '니체'를 좋아했다. 두 번째 인터뷰는 그녀를 전도하기 위해서 갔다.
하나님은
내입에 할 말을 넣어 주셨다. "Charles는 분명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입니다. 70년 전 호주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여사께서
돌아가시면 육신이 찰리와 함께 합장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영혼도 찰리와 함께 있으려면 예수를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분명 천국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를 믿지 않으면 사랑하는 남편을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결혼 후 찰리와 함께 교회를 다녔습니다." 드디어 그녀는 마음의 문을 열었다. "우리 집에 성경이
있습니다." 그녀는 성경을 가지고 왔다. 이때다
싶어서, 나는 구원과 관련된 성경구절을 알려 주었다. 요한복음 3:16절, 요한복음 20:31절, 행4:12절, 행16:31절 등. 그녀는 한 구절 한 구절 공책에 적어 놓았다. 이제 나는 씨를 뿌렸고, 멜버른에 사는 그 누군가가 물을 주면, 하나님은 그린 여사의 마음을 아름답게 가꿀 것이다. 함께 동행한
크리스찬리뷰 권순형 발행인은 즉시 멜버른에 사는 Dr. Barbara Martin 선교사에게 전화하여, 통화하게 하였다. 마틴 선교사는 산부인과 전문의로 31년(1964-1995) 동안 부산 일신병원에서 사역하신 분이다. 그린 여사와 통화한 후 그녀는 나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좋은
소식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린 여사를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3. 김석태 사령관
김석태 사령관은 1926년 1월 23일 생이다. 그는
평안남도 영원에서 태어났다. 전통적인 유교가정에서 자랐지만 소학교 때 교회를 다닐 수가 있었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알고 교장은 양자택일을 하라고 했다. 그는 신앙을 택하고 교사를 그만두었다. 6.25가 발발하자 인민군으로 징집되었다. 인민군으로 내려와 반공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서 3년, 석방 후 국군으로 3년 복무하던 중 춘천에서 구세군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제대 후 구세군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구세군 사관이 되었다. 그는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은퇴하고
5년마다 책을 출간하여 지금까지 5권을 썼다. 고희에
발간한 첫 번째 책은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이다. 자신의 70 인생을 되돌아보니 한마디로 "내가 산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음"을
간증한 책이다. 마지막 페이지는 85세인 갈렙의 고백으로
마무리했다.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14:12)
75세 이후에 쓴 책은 '예수傳家' 시리즈이다. '예수
전가'는 언젠가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나면 해야 할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는 평안남도 영원에서 태어났다. 6.25가 발발하고 인민군으로 징집되자, 그는 총을 들고 기도했다. 이 총으로 아무도 죽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에 응답인가, 그는 포로가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제도 수용소에서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국군에 입대했다. 그는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예수전가를 쓴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언젠가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상봉할 기회가 온다면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예수를 믿었고 또 전하며 살았다는 말을 이 책이 대신하여 말하리라" 김석태 사령관은 2021년 95세가 되는 해에 발간할 6번째 책을 위해서 지금도 펜을 놓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