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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골목들
이 남 희
나는 이따금 꿈속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속죄성당을 보곤 한다.
그 꿈에서 나는 시에스타*로 잠든 고딕 지구를 방황하고 있다.
고딕 지구란 이름 그대로 매연에 그을린 우중충한 중세의 건물들이 남아 있는 바르셀로나의 항구 부근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는 로코코* 양식의 건물들이 아름답다거나 장엄하다고 하는 의견에는 한 번도 찬성해본 적이 없다. 어찌된 일인지 그것들은 나에겐 중세의 그로테스크한 밤을 연상하게 한다. 마녀사냥이라든지, 검은 미사라든지, 화형과 같은 것들을…… 건물 외면에 새겨진 조각들은 고양이가 먹다 토해놓은 생선 내장처럼 보이기도 하고 더 역겹게는 부스럼투성이의 문등병 환자를 떠올리게 하는 적도 있다.
지중해 연안의 시에스타는 이방인들에겐 혹독한 경험이다. 열두 시가 되기 무섭게 모든 문은 닫히고 살아 있는 것들은 그늘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이방인 자신의 그림자조차 없다. 텅 빈 거리에서 서투른 여행자만 남아 당황하고 만다. 덧창까지 꼭꼭 닫은 숨죽인 집들, 뜨겁고 텅 빈 골목길들, 염열(炎熱),* 달아오른 공기 때문에 시야는 신기루처럼 흐느적거린다.
고딕 지구의 중심인 카데드랄 광장은 환각처럼 백열⁕되어 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이 있다. 세네갈 남자. 정말 새카맣다. 그는 리코더*를 불며 동전을 구걸한다. 리코더 소리는 텅 빈 광장 위로 물무늬를 그리며 퍼져간다. 애수에 젖은 가락. 그는 피부색을 돋보이게 하는 흰 마직 셔츠와 조록빛 바지를 입었다. 고향 아프리카에서 스페인까지 그 험난한 항로를 증명하듯 옷은 낡고 초라하다. 그가 문득 나를 노려본다. 리코더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로. 흰 자위가 많은 눈이다. 그 시선에 나는 자꾸 위축되고 그는 부풀어 오른다. 그가 종탑만큼이나 거대해지려 하자 나는 도망친다.
고딕 지구의 미로와 같은 골목길을 헐떡거리며 달려간다. 리코더 소리는 나를 놓치지 않고 쫓아온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랜다. 골목들은 갈수록 더 복잡하게 엉켜든다. 어디서 결음을 멈추든 그 끝에서 항상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미완성인 모습과 마주치게 된다. 뒤로 돌아서서 달려봐도 마찬가지이다. 세네갈 남자처럼 시커먼 네 개의 종탑이 흉물스럽게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숨을 몰아쉬며 성당 문전을 기웃거린다.
아치* 그늘에서 수도사가 나타나 나를 제지한다.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완공된 후라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갈색 승복을 입었고 옷자락 사이로 빠져나온 손은 매 발톱 같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짓을 하며 덧붙인다.
“이 성당이 완공되는 날이면…….”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 한편으론 뇌 저켠에서 딴생각이 난다.
‘이건 또 뭐야. 영화 「장미의 이름」에나 나올 법 한 수도사잖아.’
그러나 그 영화에는 이처럼 현기증 나는 밝음은 없다. 얼마나 백열되어 있는지 이건 빛과 어둠이라는 두 가지 명도만 존재하는 싸구려 사진 같다. 네 개의 종탑 사이로 노란 크레인*이 솟아 있다. 그 성당이 여전히 공사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듯이. 착공한 지 1백 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건축 중이라는 기묘한 성당. 짜증과 조급함이 북받쳐 내가 묻는다.
“그렇담 이 성당은 언제쯤이나 완공될 작정이라는 거죠? 이렇게 무한정 기다려야만 하는 거예요? 이렇게 뜨거운데?”
도대체 그와 한국어로 대화하는지 스페인어로 하는지 모른다. 현실에서 나는 스페인어라면 알파벳조차 모른다. 그런데도 수도사는 알아들었고 나는 그가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자연히 안다. 꿈이란 으레 그런 법이다. 갑자기 네 개의 종탑에서 일제히 종소리가 터져 나온다. 고막에 대고 고함을 치는 것처럼 멍멍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뇌수가 그대로 폭발하는 것만 같다. 종들은 그치지 않고 계속 울린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꿈에 본다는 것은 그로테스크한 악몽이다. 바르셀로나는 몇 년 전에 한 번 여행했을 뿐이지만 아직도 몸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마음이 심란할 때면 그 성당을 꿈에 보곤 한다. 나를 산산조각 내던 그 종소리도.
그 꿈에서 내 심장을 바싹 죄어오는 것은 단순히 지중해적인 밝음과 중세의 때에 절어 우중충한 건물들 사이의 극단적인 명암 대비만은 아닐 것이다. 혹 몸을 산산조각 낼 것 같던 성당의 종소리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다른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명확히 말로 붙잡아두지 못해서 애먹고 있는 무엇인가가.
시인 김남주* 씨의 일주기 추모식을 치르느라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 있을 때 문득 그 성당의 종소리를 들었다. 추모식에는 참석하겠다고 작정했던 그 전날도, 광주로 내려간 그날 새벽에도 연이어 이틀이나 김남주 씨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그런 꿈을 꾸긴 했었다. 하지만 김남주 씨의 묘비 앞에서 비감스런 묵념에 잠기는 대신 무연히* 그 꿈의 종소리를 다시 들은 것은 추모식 때의 심경이 꿈에서 심장을 죄던 고통과 얼마쯤은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과, 초목이 잿빛으로 시든 묘지들 사이사이에 검은 우산을 받쳐 들고 우줄우줄 서 있는 추모객들이라는 일그러진 풍경 이 그로테스크해 보였던 것은 아닐는지.
그날 광주에선 가느다란 겨울비가 끈질기게 내렸다. 가는 빗발은 때로는 안개처럼 공중을 부유하며 시야를 가리기도 했고 몸을 적실 정도로 흠뻑 내리기도 했으나 종내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라곤 듣지 못했을 정도로 조용한 비였다. 하루 종일 내 귓전에선 누군가 추적추적 신발을 끌며 세상 끝까지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끝없이 맴도는 것 같던 그런 한심한 날씨이기도 했다.
그 전날 저녁, 서울에서 이미 추모 문학의 밤을 가졌기 때문에 광주까지 내려간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들은 광주 문인들과 섞여 묘지 주변에 추운 듯 몸을 옹송그리며 서 있었다. 누군가는 쿨럭거리며 밭은기침을 했고 누군가는 몰래 발을 굴렀다. 독경*이 있었고 노래도 불렀다. 쓸쓸했던 지난해를 뒤돌아보는 이야기가 들렸고 김남주 씨의 인품과 문학을 기리는 추모사도 나왔다. 과거완료형의 단어들이 귀에 툭툭 걸렸다.
“그는 험난한 이 시대를 꿋꿋이 건너갔고, 아름다운 시를 썼었다……”
그렇다, 그는 이미 이 시대를 건너, 가버린 것이다.
어둠 속에다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듯 그런 생각을 하자 그가 뒤에 남겨놓은 이 세상이 멍멍한 정적 속으로 한없이 침몰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는 두터운 유리가 가로막힌 것만 같고, 아무도 입을 열 수 없게 된 것만 같고, 그래서 소리 없이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펴지는 것만 같은 그런 착각이었다. 적막하고 쓸쓸했다. 조심하지 않으면 와락 울음을 터뜨리고 말 것 같았다. 묘비 앞에다 횐 국화를 놓으며 눈물을 참느라 고개를 젖히자 저편 잡목 숲이 비에 젖어 거무스레하니 빛나는 것이 보였다. 순간 꿈의 그 성당이 선연히 떠올랐다가 스러졌다. 종소리가 멍멍하게 울려 펴졌다. 환한 빛으로 눈 멀어버리듯 그 종소리는 나를 압도했다.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고 주르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김남주 씨와 특별한 친분이라도 있었던 것 같지만 사실 나는 그를 잘 알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 글도 김남주 씨를 추모하기 위해 쓰는 것도 아니다.
전부터 김남주라는 이름은 듣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만난 것은 1990년 여름부터 같은 곳에서 문학강좌를 하나씩 맡았다는 그런 인연이 전부였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지하에 있던 어두컴컴한 그 강의실이 눈에 선하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을. 늘 어둡고 썰렁해서 들어가려면 절로 어깨가 웅크려졌고, 층계에서 인기척이 나면 시력이 나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게 되었다. 그러나 김남주 씨만은 유독 안경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환하게 미소 짓곤 했다. 어두침침한 지하에서 번져가던 잔잔한 햇살 같은 미소……
지금 그곳을 떠올리면 잃어버린 꿈을 추억하듯 안타까운 심정이 된다. 지금은 그 강의실들이 어떻게 변했을까? 여전히 어두울까? 썰렁했던 그때처럼 조그만 소리마다 우렁우렁 정적의 꼬리가 달려 되돌아오곤 할까? 그때 그 공간을 채웠던 웃음소리들, 열띤 토론들, 우리가 사랑했던 열정과 꿈은 다 어디로 숨어들었을까? 더 깊숙이? 하긴 그때도 학생들만 빠져나가고 나면 웅웅거리는 형광등 소리 때문에 심해에 갇힌 기분이 들곤 했다. 어쩌면 지금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어두운 그곳에 소록소록 먼지 쌓이는 소리가 들려올 듯도 하다.
어두웠던 그곳에 부족했던 것이 비단 햇빛만은 아니었다.
그 강의실은 처음에는 볕이 환히 드는 건물 위층에 있었다. 그 문학강좌의 시작은 참 성대했다. 넘쳐나던 지원자의 숫자가 그러했고, 넉넉한 강사진이 그러했으며, 때로는 다른 회사의 회의실까지 빌려야 할 정도로 자주 모였던 학생들의 열성이 그러했다. 그 무렵 학생들이 써내는 숙제는 명확한 공식을 가졌기 때문에 처리하기가 참 간단했다. 희망, 어제의 날들과는 다른 나날이 앞으로 찾아오리라는 확신, 열정. 8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희망이 그대로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잇닿아 있다고 믿던 그런 아주 짧은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80년대의 흔적은 빠른 속도로 사위어* 들었다. 갈수록 80년대와 90년대 사이에는 깊은 도랑이 패어갔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 가로놓인 날짜변경선처럼 실체는 손에 잡히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시곗바늘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경계선 같은 것이 그어지고 있었다. 동구권이 무너지고 소련이라는 나라는 사라졌다. 희망도 빛이 바랬다. 부스럼 딱지가 앉듯 불감증은 널리 퍼져갔다. 마치 무성한 여름 숲이 어느새 낙엽 이 되어 지고 그 낙엽은 순식간에 썩어 부식토가 되듯 그렇게 변해갔다.
그 강좌들은 사회라는 물에 담가놓은 리트머스 시험지 같았다.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곧 강의실은 지하로 이사하게 되었고 겨울 숲처럼 헤싱헤싱*해져갔다. 숙제들은 절망과 우울을 이야기하느라 점점 더 회색 페인트가 두텁게 칠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빛은 늘 부족했다. 어느 땐가 나는 단 다섯 명을 앉혀놓고 소설작법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갈수록 그곳은 낡은 버스가 돌투성이인 비포장도로 위로 힘겹게 굴러가는 것처럼 항상 무엇엔가에 걸려 덜컹거리며 운영되어갔고 부르릉대는 신음소리도 노상 들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 김남주 씨는 시를 가르쳤고 나는 소설을 가르쳤다.
처음 김남주 씨를 만나 인사하던 때가 기억난다.
우선 나는 그의 외모가 시를 무기로 삼은 전사처럼 날래 보이지 않고 세파에 시달린 선량한 농부처럼 투박해 보이는 데 놀랐다. 그런 놀라움을 표시하자 그는 그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아직은 몸이 나쁜 것이라고.
“아직은? 차차로? 이제부터? 도대체 언제요?”
나의 조급한 반문에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무턱 대고 농담처럼 말하는 버릇이 있다. 잔인한 현실에 우울해질수록 농담은 부풀어 오른다. 우울은 효무이고 농담이 빵 반죽인 것처럼 ―그는 귀찮아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앞으로, 머지않아 괜찮아지겠지, 라고.
그건 그의 입버릇인 듯했다. 그 후 절망이 점점 부풀고 우울이 깊어질수록 나는 김남주 씨에게서 그런 위로의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그렇게 조급하게 좀 굴지 마. 생각을 해보라구, 역사상 절망이 아니었던 시대가 있었는가? 그래도 세상은 조금씩 나아져왔지. 앞으로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내게는 그 말이 무책임한 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들렸다. 단순히 말, 말, 말일 뿐. 나는 갈수록 그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되어갔고 나중에는 그딴 소리는 지겹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온화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의 웃음은 멀리서 안경 없이도 알아볼 만큼 유니크했다. 난 그처럼 소리 없이 함박 웃을 줄 아는 사람은 죽은 외삼촌을 빼고는 본 적이 없다. 어둑어둑하던 그곳을 환하게 밝히고 싶다는 양 소리 없이 퍼지던 미소. 마주칠 때마다 김남주 씨는 내게 비밀의 불을 몰래 건네주듯 환하게 웃어 보였지만 내가 보기엔 그건 맥없는 밝음이었다. 내겐 그래 보였다. 창백하고 여윈 겨울 햇살 같았다.
지금에 와서 곰곰 생각해보면 그 무렵 난 우울증에 걸려 있었던 것 같다. 특히 92년 12월에 치렀던 대통령선거는 그 우울증을 한층 더 깊게 만들었다.
선거가 끝난 뒤 나는 노상 암담하다는 표정으로 돌아다녔고 입만 열면 절망적이라는 소리를 내뱉곤 했다. 웃어른에게도 투정 부리듯 칭얼댔다.
“이건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구요.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패배한 거라구요.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되나 하는 걱정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요.”
김남주 씨 앞에서도 나는 마구 주절거렸다.
“어떻게 살다니?”
김남주 씨가 물었다. 여전히 빙그레 웃으면서.
“앞으로는 전 세계적으로 보수화의 물결이 더욱 거세질 텐데 그 속에서 제정신으로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하는 소리예요. 어쩐지 이것으로 한 시대가 가버렸다는 실감이 나지 않아요? 앞으로는 정의를 위해서라든가, 자기희생, 역사와 함께 산다든가 하는 등등의 소리는 농담이 되어버릴 거예요. 도대체 예전의 자부심 강하고 굽힘이 없던 청년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거죠? 왜 내 눈엔 칠팔십 년대만이 시대착오처럼 남은 것으로 보일까요?”
“사람이 왜 화는 내고 그러는가?”
김남주 씨가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나를 꿰뚫어 보는 눈빛을 하고. 정말 그의 말대로였다. 나는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후보의 낙선이 단순히 일개 당파의 패배가 아니고, 80년대를 관통했던 세대 간의 전쟁을 패배로 종결짓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을 하고 생각 좀 해봐. 선거에서 자기가 찍은 사람이 당선된다는 건 운이 좋은 거야. 행운은 드물지. 하지만 그렇게 짧게 보고 화를 내면 뭘 하나? 길게 보자구. 아무리 그래도 갈수록 세상은 좋아지고 있는 거야.”
“듣기 싫어요. 이젠 그딴 입에 발린 소리는 지겹다구요.”
그래도 그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엾어하는 것도 같고, 아니, 슬퍼하는 것 같은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그렇게 우울증에 등을 떠밀려가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강좌를 그만두어 버렸고 더 이상 그를 만나지도 못했다.
아마도 나의 우울증은 그 이전부터도 싹을 틔우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은밀히 진행되어 눈치 채지 못했을 따름이다.
환경문제에 천착하던 끝에 도달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 유럽까지 달려가 살펴보아도 출구라곤 보이지 않던 전 지구적 독점자본의 맹렬한 식성. 그러한 나날들 중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강경대* 군의 죽음이었다. 투명한 유리병에 갇혀 조금씩 공기를 빼앗기는 것 같던 그때의 가슴 터질 듯한 분노…… 어느 정신분석학자가 그랬던가, 우울증이란 응축된 분노라고.
나뿐 아니라 그해 겨울에는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우울하고 지쳐보였다. 그 무렵 나는 익선동에 작은 작업실을 갖고 있었는데 그곳으로는 우울하다는 전화들이 자주 걸려왔다. 한번은 동료 소설가가 전화를 걸더니 인사도 없이 불쑥 내뱉었다.
“정말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아. 한국을 폭파해버리고 싶어.”
나는 침묵을 지켰다. 나도 동감이야, 하는 말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터이기에. 그때 나는 이미 썰물처럼 분노가 빠져나가고 무기력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그 작업실은 빌딩 옥상이어서 바람소리는 귀를 찢을 듯 날카로웠고 때때로 전화선 속까지 바람이 파고들어 와 잉잉거리며 울부짖었다. 우리는 한참이나 거친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침묵이 이어진 뒤 그가 어조를 누그러뜨리며 조용히 말했다.
“나, 다 때려치우고 중국에 가서 한의학이나 배율까 봐. 그러는 사람도 많다던데.”
그러곤 끊었다. 멍해졌다. 그렇게 소설 쓰기를 간단히 그만둘 수도 있었구나!
포기할 수도 있는 그가 부러웠다. 나도 밤마다 부대꼈지만 태엽을 풀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살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예전이나 다름없이 작업실에 나갔고 마감에 맞춰 너절한 콩트를 쓰거나 서평으로 부탁받은 시시한 추리소설을 읽거나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거기서 조금만 더 압력이 가해지면 정수리가 팡 하고 터져나갈 것 같았다.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긴장을 풀었다간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낮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었고 침대에 누우면 불현듯, 긴 휘파람 소리처럼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들을 듣곤 했다. 그해 겨울 내내 내게 말을 걸어왔던 목소리들. 죽은 사람들.
몇 해 전 내가 소설 공모에 당선되자 평범한 농부였던 외삼촌은 축하 대신 화두를 하나 주겠다고 말했다. 외갓집의 가족사. 독립운동 자금의 전달 통로를 만드느라 도박에 손대었다가 패가망신하고 후사*도 없이 감옥에서 죽은 외종조부* 이야기. 그걸 가슴에 품고 있다가 때가 닿으면 써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때가 올지 모르겠어요.’
좌익이라는 점 때문에 나는 미심쩍어했었다. 외삼촌은 환히 웃었다. ‘아무려면. 언젠가는 때가 오겠지. 안 그러냐? 세상은 점점 나아지게 마련인걸.’
학교 근처라곤 가본 적이 없는 외삼촌의 소박한 신념. 정말 그럴까? 그 뒤 내가 제대로 관심을 보일 겨를도 없이 외삼촌은 심장마비로 죽었고 화두는 화두로 남아버렸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뉴욕에 사는 친구 민이가 잠시 놀러 오곤 했다. 크리스마스카드처럼 당연하게 기다려지는 귀국이었다. 그해 겨울에도 민이는 어김없이 왔고 정기 동창회가 열리듯 일 년 만에 친구들이 모여 점심을 먹었다.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민이가 와야 만나게 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지껏 공부를 하고 있는 민이와 소설 쓰는 나를 제외하곤 모두 결혼해 있었다. 다들 안정된 직장에 몸담은 남편과 하나나 둘쯤의 아이를 가졌다. 심지어는 학부형인 친구들도 꽤 있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며 정신없이 수다를 떨었다. 우리가 차지한 테이블 주변이 텅 빌 정도였다. 잡다한 것이 화제로 올랐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화제에 오르지는 않았다. 이젠 정치적 가십조차도 관심 밖이었다. 주로 돈 문제나 남편, 아이 자랑, 시집 식구에 대한 불평들. 예전엔 역사와 인생을 논했던 그들은 이젠 오로지 자식과 차종과 아파트 평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경기국민학교는 추첨에서 떨어져도 오백만 원만 넣으면 입학이 된다는 거야. 하지만 돈이 문제는 아닌데…… 편법으로 아이를 넣는다는 게 어떨까 몰라.”
“어떠니? 니가 무슨 투사라구. 하나뿐인 자식인데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문득 이 레스토랑으로 들어올 때 본 횡단보도 부근에 걸린 현수막이 떠올랐다. ‘교통사고 목격자를 찾습니다.’ 대낮에 일어난 뺑소니 차 사고. ‘졸지에 아버지를 잃게 된 어린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애절한 호소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채로 매연에 절어 회색빛으로 팔럭이고 있었다. 예전엔 눈에 띄지 않던 풍경이었다.
정치적 무관심은 도덕적 불감증으로 변하며 암세포처럼 점점 번져간다.
나는 먹는 밥이 체할 것 같아 가슴을 꾹꾹 눌렀다.
하긴 불평불만 없는 삶이 어디 있으며 한 번쯤은 ‘내가 언제?’ 하고 뻗대어보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지금 돌이켜보면 그해 겨울 우리의 대화에서 두드러졌던 것이 자식과 아파트 평수가 아니라, 사실은 나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끝에 있는 골목길처럼 점점 좁아져가는 우리 나이에 대한 두려움을 그런 것들로 덮어보려고 하는 것이리라.
“……혜자 남편이 제발 애를 떼어버리라고 울기까지 했대. 사정사정해도 혜자가 안 떼겠다고 버티니까 말야.”
“왜? 걔네는 자식이 하나뿐이잖아. 둘이라도 안 될 건 없을 텐데 왜 그랬대?”
“혜자 남편은 나이가 우리보다 일곱 살인가 위잖아. 사십 대야. 그래서 그런지 이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끝까지 책임질 자신이 없다나 그러더래. 세상이 무섭 대나 어쨌대나. 그렇다고 엉엉 울기까지 했대. 그래서 결국 혜자가 양보해서 애를 떼고는 내내 몸이 안 좋아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 거야.”
이 자리에 못 나온 친구들에 대한 소문이 오갔다.
“정말 끔찍하다, 얘. 사십 대하고 삼십 대하고 그렇게 다를까? 무섭다고 울기까지 한다는 건 처절하다고 해줘야 되나.”
“하긴 정란이 남편은 삼십 대지만 암으로 죽었잖니? 그러니 사람 일은 장담 못해.”
“참, 너 김원경이 오빠 기억나니? 공부 잘한다고 내내 자랑이더니 대학 가선 운동권으로 도망 다니고 그랬잖아. 그 사람도 지난 가을에 암으로 죽었다더라. 간암이었대.”
“정말…… 요즘은 사는 게 다들 불안한 거 같아.”
민이와 나는 따분하다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문득 그런 눈짓이 통할 또 한 친구가 그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이도 없고 중산층도 아닌 희연이.
희연이는 교사 생활을 했고 평범한 우리와는 달리 세 살이나 어린 운동권 남자와 결혼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었다. 처음에 그 소식을 듣고는 모두들 그 용기에 감탄한다고 쑥덕거렸다. 그러나 점차 운동이라는 신화는 빛이 바랬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 쪼들려 늘 아슬아슬해 보였다. 우리들은 감탄을 거두어들였다. 그들은 교사 월급에 기대어 살았으나 전교조 건으로 해직된 후론 희연이가 이런저런 세일즈에 나서게 되어 모두들 피하고 싶어 하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참, 희연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니? 연초에 편지가 왔을 때는 남편이 운동 그만두고 취직 했다고 기뻐하는 것 같았는데. 그 후로는 주소가 바뀌었나 소식 이 끊겼어.”
민이가 화제를 돌렸다.
“어머, 너 모르니? 요새 희연이네는 난리야. 남편이 이혼하겠다고 집을 나갔댄다.”
은주가 냉큼 받았다. 어머, 어머 하는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진 것을 보면 은주만이 아는 사실이었나 보다. 나도 금시초문이었다. 시선이 은주에게로 집중되었다. 은주는 주목을 즐기며 충분히 뜸을 들인 다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바람이 났대. 나이가 남편보다 두 살인가 어린 여자래. 같은 회사에서 눈이 맞았대나 봐. 그런데 거기까지는 그래도 봐줄 만하지. 톡 까놓고 말해서 바람 한번 안 피우는 남자가 어디 있겠니? 하지만 정말 기가 막힌 건 피우려면 마누라 모르게나 피우지, 뻔뻔스럽게 희연이에게 털어놓고 그러더래. 자긴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 여자를 만나 세상에 대해 새로 눈을 뜨게 되었다고. 이혼해달라고. 사람 미칠 노릇이지 뭐니. 아마 그래도 희연이는 이혼 못 해준다고 버텼나봐. 그렇다고 집을 나가 버렸다지 뭐니.”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은 벌 떼처럼 흥분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만큼 자극적인 화제도 없었다.
“어쩌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그동안 희연이가 고생한 건 다 어쩐다니? 운동합네 하고 희연이를 잔뜩 고생만 시켜놓고선…… 운동하는 사람이라고 인간성은 좀 다른가 했더니 별수 없나 봐.”
“운동이 사람 만들어주는 줄 아니? 인간성 더러운 건 암만해도 안 변하지. 암튼 바람을 피우려면 몰래 피우지 어쩜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니?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놈이잖아.”
“그 여자 만나서 눈을 떴다면 희연이랑 살 때는 눈을 감고 있었다는 거니 뭐니. 미친 놈. 그래서 이혼한대? 나 같으면 안 해주겠다.”
“치사하게 뭘 그래. 붙잡아 봐야 추접하기나 하지.”
“아냐, 길게 잡아서 삼 년만 기다려보라지. 틀림없이 그 여자한테 싫증이 나서 돌아올 거야. 남자란 다 그런 법이거든. 얘는 누구 좋은 일 시키려구 이혼을 해주니?”
그 소식은 커다란 일렁거림이 되어 나를 덮쳤다. 그 무렵 나는 희연이와는 반대 입장에서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이와 나는 은주에게서 바뀐 희연이의 주소를 알아냈다. 은주가 사는 상계동으로 이사해 있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의외로 목소리가 싹싹했다. 민이가 왔다니 반갑다며 호호 웃기까지 했다. 순간 은주가 괜한 헛소문을 퍼뜨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나자고 했더니 거기서부터 목소리가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피곤하다, 춥다 등등 우물쭈물했다. 민이랑 나는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희연이는 우물거리기만 할 뿐 딱 부러지게 된다, 안 된다 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집에 들어서자 첫눈에 희연이의 상태가 매우 나쁨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고층인 데다 좁은 평수여서 그 아파트는 허공에 매달린 새장 같았는데 난장판이었다. 혼자 쏘는 내 집보다 더 어질러져 있었다. 벗어놓은 옷가지며 잡동사니가 잔뜩 얹힌 의자를 쓱 밀치더니 우리더러 거기 앉으라고 했다. 식탁 유리는 먼지가 더께로 앉아 손자국이 날 정도였다. 나는 몰래 내 앞을 휴지로 닦았다. 우리는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다. 멀건 개숫물 같은 커피. 희연이의 커피 끓이는 솜씨도 변해 있었다. 집 안 풍경처럼 희연이의 내면도 산산조각 나버린
듯했다. 무엇을 물어봐도 희연이는 건성으로 응응거리기만 했고 일 년 만에 온 민이에게 반가움조차 표시하지 않았다. 우리가 찾아온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은연중 우리에게 매달리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어쩌면 희연이는 우리가 찾아 갔을 때까지 혼자 지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 혼자 남겨진 것처럼.
정작 해야 할 이야기는 젖혀둔 채 민이가 한참이나 뉴욕 생활을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긴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그런 일에 대해 뭐라 말할 형편은 아니었다. 민이가 이끄는 대로 그저 희연이를 보러 찾아갔던 것뿐이다. 무엇 때문에? 잔뜩 엉켜버려 불감증에 이른 내 연애……침묵이 사정없이 우리를 내리눌렀다. 그러다 희연이가 불쑥 말했다.
“세상이 다 무너지고 있는 거 같애.”
그러고는 쓸쓸히 웃었다. 그렇게 두 번만 웃으면 세상의 습기란 습기는 다 증발해서 사막으로 변해버릴 정도로 쓸쓸한 웃음이었다. 무색해져서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민이가 낯을 찌푸리며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희연이가 고개를 저어 가로막으며 말을 이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거 있지.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을까? 어제는 소중했던 것이 오늘은 그렇게 쉽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 있다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 정말 쓸쓸해. 하긴 사람 사는 게 다 사기 치고 사는 거지 뭐니.”
사기라는 단어에 나는 찔끔했다. 그 무렵 남자에게 사기당하는 한편으로는 그 남자와 공모하여 다른 여자를 사기 치느라 나도 불감증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내가 뭐 하러 민이를 따라왔을까?
우리가 일어나려 하자 희연이는 붙잡지 않았고 식탁에 앉은 채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제 생각에 골똘히 빠져든 눈치였다. 어쩔 줄 모르고 엉거주춤 망설이는데 갑자기 희연이가 눈을 치켜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흰자위가 많은 번들거리는 눈빛이었다.
“너, 지난여름에 스페인에서 내게 그림 엽서를 보낸 적이 있지? 그거 아직도 붙여놓고 매일 본단다.”
웬 뚱딴지같은 소린가 하고 희연이가 가리키는 대로 냉장고 문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모습을 담은 엽서가 붙여져 있었다. 컬러였지만 햇빛 밝은 거리와 검은 건물의 대비가 흑백사진처럼 보이게 했다. 위로 위루 치솟아가는 종탑들, 그 사이로 삐죽 보이는 노란 크레인……
“그 뒤에 뭐라고 썼었는지 너 기억하니?”
“글쎄…….”
그해 여름에 내가 여행 갔던 나라는 스페인만이 아니었고 그림엽서를 보낸 것도 수십 통은 될 터였다.
“그 성당에 대해 많이 감탄한다고 썼어. 백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공사 중일 수 있는 그들의 인내심이 부럽다고. 넌 그 내력도 상세히 적어 보냈었지. 1882년 바르셀로나의 이름 없는 어떤 서점 주인이 시작해서 건축가 가우디가 맡아서 짓기 시작했는데, 사십 년인가 지나서 가우디는 죽었고 그래도 여전히 짓고 있는 중이더라고. 지금은 시민들의 헌금을 견축자금으로 삼아 조금씩 짓는다고 하더라고. 넌 미래에 대해 조급해하지 않는 넉넉한 그들의 마음씨가 놀랍다고 썼었지.”
“그게 왜?”
“그냥…… 요즘 그 성당 꿈을 자주 꿔. 무서운 꿈이야. 세상이 막바지에 이르러서 건물이란 건물은 다 파괴되어버렸고, 폐허 속에서 그 성당만 남아 여전히 공사를 하고 있는 꿈…… 유럽에서 니가 그런 엽서를 내게 보냈을 때는 아마 해직되어서 힘들어하는 나더러 현실에 너무 노심초사하지 말고 긴 안목으로 여유를 가지라고 말하려던 거였겠지. ……말이야. 그냥 말일 뿐이야. 그러는 너도 사실은 그런 거 안 믿지? 그렇지? 너도 다 사기 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희연이는 격렬하게 떨며 나를 노려보았다.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를 주시하였다. 눈빛만으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나는 확신이 없었고 자꾸 움츠러들었다. 민이가 살짝 내 옆구리를 찔렀다. 그대로 살그머니 빠져 나오고 말았다.
“희연이 재, 저러다 일 저지르는 거 아닌지 몰라. 난감해서 원.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할지 모.르겠고 말야…….”
민이가 혀를 찼다.
희연이에게 전염된 양 그때부터 나도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마주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항상 똑같은 상황이었다. 끝에선 항상 종소리에 귀가 멍멍해져서 땀을 흠뻑 흘리며 깨어나곤 했다. 오그라든 심장이 도로 펴지는 데 한참 걸렸다.
“이젠 그만 헤어져야 하겠어.”
꿈에서 깨어나면 나는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다 우리가 찾아간 지 일주일인가 지난 뒤, 희연이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즉사. 난 차마 그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민이 말로는 희연이의 시신은 머리가 으깨져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민이는 울먹이며 뉴욕으로 돌아갔다. 다신 한국에 오고 싶지가 않을 것 같다며.
그 일은 모든 것에 불감증이었던 나를 뒤흔들어놓았다. 나는 그동안 질질 끌어왔던 암담한 연애를 청산해버릴 결심을 비로소 하였다. 그리고 어렵게 그 남자와 헤어졌다.
그 후로 밤마다 내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희연이처럼 흰자위가 드러나도록 눈을 치켜뜨며 나를 힐문했고* 나는 쩔쩔맸다. 갈수록 환청은 낮에도 나를 따라다니게 되었고 이젠 소설 쓰기로 도피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렇게 그해 겨울을 보내는 동안 내 인내심은 바닥이 드러났다.
겨울이 가고 새로운 순환이 시작될 즈음 나는 견디다 못해 결심해 버렸다. 내가 포기할 수 없다고 매달리는 것들에서 깨끗이 손을 떼기 위해, 내 인생을 포기해버리겠다고 작정했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가슴이 후련했다. 나를 괴롭히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느낌이었다. 삼십 년이 넘는 내 인생의 시간들 가운데서 그때처럼 마음이 평화로워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고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듬해 봄을 병원에서 보냈다. 화창해서,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던 봄날이었다.
퇴원을 하자 작업실을 때려치웠고 정성 들여 가꾸던 뜰이 있는 집도 팔았다. 일부러 산꼭대기에 있는 고층아파트로 이사했다. 마치 ‘한번 네 멋대로 해봐’ 하고 자신을 조롱하듯이.
일 년여 나는 그곳에 틀어박혀 있었다. 마지못해 일주일에 세 번 정신과 의사를 만나는 것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아무와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가족조차도 만나지 않았다. 일기도 쓰지 않았고 신문도 읽지 않았다. 텔레비전도 보지 않았다. 밤마다 성당 꿈을 꾸었으며 낮 시간은 멍하니 보냈다. 그러다 저녁 무렵이 되면 베란다의 데크체어에 앉아 서서히 시가지를 물들여가는 석 양을 지켜보면서 키스 자렛의 스탠더드 넘버들이며 빌 에반스의 ‘서머타임’, 마일스 데이비수의 ‘쿨의 탄생’과 같은 앨범들을 듣고 또 들었다.
그 여름은 참 서늘하였다.
곰곰 되짚어본다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 듯했던 80년 여름 이후로는 처음 찾아온 차가운 여름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상이변을 깨닫지 못했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환경오염이니 냉해니 하는 말을 대문자로 떠들어댔으나 신문도 텔레비전도 보지 않던, 그리고 외출조차 하지 않던 나로서는 그런 정보를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산꼭대기로 이사 왔으니까 여름도 선선한 것이려니 하였다. 어쩌면 날씨가 이상하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여름 내내 데크체어에 늘어붙어 시가지를 지켜보는 일만 하였으니 말이다.
산꼭대기에 지어진 고층아파트, 그것도 맨 위층에서 산다는 건 허공에 매달린 것처럼 불안한 기분이었다. 내려다보이는 서울 시가지는 건축 모형도처럼 어설펐고 삶의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다 베란다 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와락 현기증이 일어나도 모르게 손마디가 아리도록 난간을 꽉 붙드는 거였다. 지상은 까마득히 멀었다. 그대로 몸을 내밀기만 하면 죽을 수도 있는 높이였다. 데크체어에 앉아 있는 일에도 진력이 나면 짐짓 난간에 기대어 서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현기증이 나서 도로 주저앉으며 성급하게 담배를 찾아 물곤 하였다. 어느새 담뱃불을 붙이는 손이 덜덜 떨고 있었다.
키스 자렛의 앨범들은 특히 즉흥연주 부분이 하이 플레이스한 느낌을 주었다. 그의 앨범에선 연주 도중 제 흥에 겨워 콧노래를 홍얼거리거나 발을 구르는 소리들이 곧잘 끼여들곤 했는데 그걸 들을 때마다 생명을 세상으로 연결짓고 있는 낚싯줄처럼 가느다란 끈이 팽팽히 잡아당겨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것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아니, 이 말이 과장스럽게 들린다면 적어도 그해 여름 동안 담뱃불을 붙이는 손이 떨리는 것을 진정시켜줄 정도의 위안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갔다.
김남주 씨가 췌장암으로 절망적이라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렇게 한 해를 보내어버린 연말이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축축한 날이었다.
“우리가 그 선생님을 너무 혹사해서 그런 것 같아. 나오시자마자 힘든 일만 잔뜩 떠맡기고 말야…….”
그 전화를 받고 나는 밤새도록 깨어 있었다. 의사가 처방해춘 약을 두 배로 해서 먹었지만 소용없었다. 밑바닥에서 미세한 떨림이 나타나 점점 번져가더니 나라는 전 존재를 뒤흔들었다. 멍했다. 어쩔 수 없어 담요를 둘러쓰고 데크체어에 앉아 어두운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지난여름에 듣던 레코드들을 듣고 또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시가지는 축축이 눈물을 머금고 어두워져갔다. 저 거리의 번다한 잡답(雜踏)* 속에 가로놓인 삶과 죽음들, 불가해한 인생.
아마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해야 하리라. 어떤 심술궂은 손이 잠든 척하려는 나를 세차게 때려 깨우며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일어나, 일어나. 이대로는 안 되는 거잖아. 너노 생각을 해봐얄 거 아냐?’
무엇을?
분명 김남주 씨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 때문이었다. 그 손은 어느 새 리와인드 스위치를 눌러 내 삶을 일이 년 전으로 되돌려놓고 곰곰 들여다보게 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 나를 참을 수 없게 했던 건 끝장내지 못했다고 전전긍긍하며 지내던 자신과 절망적이라는 병과 싸우고 있다는 김남주 씨, 두 사람의 극단적인 대비였다.
김남주 씨를 문병 가긴 해야겠지만 만나선 도대체 뭐라고 할 것인가?
‘축하해요’ 라고?
‘그래도 죽을 수 있으니 정말 당신이 부럽군요’ 라고?
아니다, 아니다. 절대 그건 아니었다. 아마 나같이 인생에다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를 만나면 힘을 내라고, 병을 이겨내야 한다고, 아무리 엉망진창일망정 사는 게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하게 될 터였다. 입에 발린 말일까? 뻔한 사기? 아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터였고 그런 말을 할 터였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나는 그가 살아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어떤 세상에서 어떤 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말이지 너무 부끄러웠다.
망설이던 끝에 경희의료원으로 그를 찾아갔다. 못 만났던 일 년 사이에 김남주 씨는 무섭게 변해 있었다. 몸이 시커멓게 죽었고 살갗 밑으로 살만 살짝 들어낸 듯 말랐다. 생명줄이 점점 가늘게 줄어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통증으로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었고 말도 잘하지 못했다. 잠시 통증이 진정된 듯 보였을 때 나는 침대 난간을 붙잡고 서서 그에게, 사는 편이 좋다, 제발 힘을 내서 병을 이겨야 한다는 식의 말을 중언부언 지껄였다. 그가 문득 내 손을 잡아 말을 멈추게 했다. 손은 힘이 없었으나 아직 따뜻했다. 그리고 그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 임 마, 지난봄에는 죽을려구 그랬었지…….”
나더러 들으라고 한 말 같지 않았다. 그저 혼잣말로 흘러나온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가슴이 턱 무너졌다. 말문이 막혔다. 그 작은 중얼거림 속에 드러났던 그의 깊은 상심. 우리의 가슴속에는 아무런 기척도 소리도 없이 소록소록 쌓이게 되는 상심들이 있다. 뭐라고 말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가슴 깊이 멍들어버리지만 남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치유할 수도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나도 그에게 그런 상심을 더해준 사람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마치 내가 그가 췌장암이라는 소식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번민하듯이. 사람은 모두 다 한 대륙의 부분들이라고 노래한 존 던의 시가 떠올랐다.
사람들이여
저 조종(弔鐘)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가 묻지 말라
바로 당신을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린 당신을 위하여
그리고 한 달 뒤 김남주 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추모식이 끝나자 각자 제 갈 길을 찾아 슬슬 흩어지기 시작했다. 숙연 했던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말소리들이 커졌다. 서울에서 내려간 사람들은 돌아가려고 점심식사를 서둘렀다. 마주치는 대로 김남주 씨 부인에게 주섬주섬 위로의 말들을 건넸다.
“감옥에서 나오셨을 때 쉬시도록 해드렸어야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큽니다……”
사람들은 상처에 어느 정도 딱지가 앉은 듯 제대로 인사를 차렸다. 나는 묵묵히 고개만 숙였다. 문병 갔을 때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부인은 나를 기억하겠다고 했다.
“그때 병원에 와서 눈물을 흘리다 갔었죠?”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땐 김남주 씨랑 많이 힘들었을 덴데 찾아가서 울기까지 했다,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적절한 말이 아니었던 듯 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웃음도 남편을 닮아버린 듯 맥없이 밝았다.
“뭐…… 지금 와서 생각하면 누구나 미안한 일이 있는 거겠죠. 나도 그땐 그 사람이 안됐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얄미워서 아픈 사람에게 자꾸 입바른 소리를 했던 게 미안해요. 당신이 세상 돌아가는 게 못마땅하다고 자꾸만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결국 암에 걸린 거라고…….”
그랬었구나, 단지 드러내어 불평 하지 않을 뿐이었구나.
점심을 먹으며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에서 일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아는 청년이 공주교도소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빚을 진 청년이었다.
몇 해 전 그 청년은 문인들을 만나고 다니며 모 시인이 병들었다는 구실로 돈을 걷어 이적단체의 자금으로 썼다는 죄목으로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그 청년은 내게 미안하다는 편지를 보내오곤 했었다. 다른 어떤 일보다 그때 내 통장을 탁탁 털어간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썼다. 그러나 난 한 번도 답장하치 않았다. 그럴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입원했고 이사했고 죽은 듯이 웅크리고 살아온 것이다. 그동안 그 청년도 이감되었다.
서울서 온 사람들 중 소설가 한 명과 시인 한 명이 황석영* 씨를 면회하기 위해 공주교도소에 들렀다 간다기에 나도 그들을 따라가 그 청년을 면회하고 가겠다고 즉석에서 작정해버렸다. 묵은 빚은 갚고 싶었다.
“그쪽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생각할 텐데 이쪽에서 괜히 너무 신경쓰는 거 아네요?”
다음 날 공주로 가며 소설가가 내게 말했다. 내가 너무 센티하게 군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럴지도 몰랐으나 그래도 그렇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나 자신을 위해서.
“감상적이라고 해도 좋아요. 안에 있으니까 더 답장이 기다려졌을 텐데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거 같은걸.”
나는 씩씩한 척 고집을 세웠다.
이튿날은 날씨가 개었다. 공주로 가는 길은 눈부시게 밝았다. 시골 길은 얼음이 녹아 질척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응달엔 얼음장이 남았으면서도 양지쪽에는 따뜻한 봄기운이 감돌았다.
그 청년을 면회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단지 스무 살 언저리의 앳된 청년이던 그가 이제 나이 들고 찌든 것을 보며 앉아 있는 게 힘들었다. 원래 안면만 있던 터여서 우리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었다. 그동안 터무니없이 많은 변화가 우리 사이에 가로놓여 있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세상 돌아가는 일을 잘 몰랐고 그 청년 쪽은 뉴스에 민감한지 많이 알았다. 아마 감옥에는 내 집보다 더 많은 종류의 신문들이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잦은 침묵이 찾아오곤 했다. 나는 자꾸 일어나려는 몸을 꾹꾹 누르며 억지로 말을 찾았다.
“언제 나오게 돼요?”
“형기를 다 채워야 내보내줄 것 같아요. 문민정부가 들어서고는 양심수*들은 형편이 더 나빠졌어요. 이젠 5공이나 6공* 때처럼 특사* 같은 것도 잘 안 해줘요. 신문에서 특사가 있을 거라고 나오는 거 있죠? 내용은 순 경제사범이나 교통사고 같은 치들을 내보내주는 거예요.”
“그래요? 따지고 보면 경제사범이 더 악질일 텐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담. 자본주의에선 가장 신성불가침인 사유재산을 침해한 게 경제사범이니까 더 나쁜 거 아네요?”
나는 순진한 소리만 했다. 그가 보기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덜 진화되었을 나에게 그 청년은 미소만 지었다.
“서른 살이 넘어서야 나오게 되면 억울하겠어요?”
“글쎄, 장래를 생각하면 마음이 어두워져요. 하지만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왠지 바깥에 있는 게 미안해졌다.
“그동안 답장 안 해서 미안해요. 그 안에 있는 것도 힘들겠지만 바깥에서 사는 것도 마음 편하지만은 않아요. 아주 엉망진창이라고 느낄 때도 많은걸. 어떨 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싶어요. 부끄러울 때도 많고…… 어제 김남주 씨 일주기 추모식이 있어서 광주에서 오는 길 이에요.”
우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윽고 그 청년은 아련한 눈빛이 되더니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여기서는 생각할 시간이 많죠. 그래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해봐요. 역사상 어느 시대나 절망적이 아니었던 때는 없었다고. 그러면서도 조금씩 발전되어온 거라고. 앞으로는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전 세계적으로 시민 연대운동으로 바뀌겠지만 형태만 달라질 뿐이지 인간이 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그치지 않을 거라고…….”
나는 그건 진부한 소리이고, 그딴 소리는 그동안 백 번도 더 들었지만 손톱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이제 그따위 소리는 듣기도 싫고 믿고 싶지도 않다고 말을 해주려다 참았다. 가슴에 무엇인가가 턱하니 걸려 말을 막았던 것이다. 내 말문을 막은 것은 상심이었고 눈물이었다. 사람 사이의 작은 사랑이었다. 김남주 씨가 나의 바보짓 때문에 상심 했던 것과 같은 그런 식의 사랑이었다. 옅을지는 몰라도 나도 분명 그 청년의 부자유가 마음에 걸렸기에 찾아온 것일 터였다.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 청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도 볼이 붉어 앳되어 보였다. 어쩌면 서른 살이 넘어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절망은 아닐 것이다. 인생이란 언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니까. 죽는 순간까지도. 그것이 그동안 내가 터득한 전부였다.
나는 거기서도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떠올렸고 종소리를 들었다. 그 종소리가 귀를 멍멍히 막았다. 괜히 눈물이 글썽거렸다. 황황히 일어나고 말았다.
"참, 여기서 읽게 선생님이 쓰신 책 좀 보내주세요.”
교도관에게 끌려 나가며 그 청년이 부탁했다.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응 하고 대답만 했다.
그날 저녁 서울로 돌아왔다.
참,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 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주변에서 스페인 청년과 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게 속죄성당이라는 말도 그에게서 들은 것이다. 멋진 청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로버두두 니로를 닮았고ㅡ하긴 스페인에는 그렇게 생긴 남자들이 길에 널려 있었다ㅡ머리를 길러 하나로 묶고 맨발에다 히피풍으로 옷을 입었다.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저 성당은 도대체 언제 완공되는 거냐고, 백 년이 넘도록 지어오고 있다니 지루하지도 않냐고. 그랬더니 그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른다, 완공되는 날짜 같은 덴 관심이 없다, 앞으로 오십 년이 더 걸릴지 백 년이 더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계속 지어지고 있으니까 그것으로 됐다는 거였다.
『문예중앙』(1995년 여름호); 『사십 세』 (창비 1996)
이남희(李男熙)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나 충납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저 석양빛』 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역사적 전망과 환경 문제, 지난 연대의 고통스런 기억,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자화상 등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
소설집 『지붕과 하늘』 『개들의 시절』 『사십 세』 『플라스틱 섹스』, 장편소설 『바다로부터의 긴 이별』 『산 위에서 거울을 나다』 『음모와 사랑』 『세상의 친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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