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자야 노~올자
25.교복입은 시라소니
2학년이 되어서는 공부도 잘 되지 않고 가슴속에 뭔가 응어리가 지는듯한 느낌에 운동만 열심히 하였다. 대련 시간에도 하급자의 사정을 봐주는 일이 없이 두들겨 팼다. 허리에 붉은띠를 두른 나에게 검은띠를 두른 유단자들도 대련을 꺼려 할 정도 였다. 추석 명절 귀성객 때문에 버스를 탈수가 없어 혼자 30리길을 터덜 터덜 걸어서 껄렁패들이 많은 안궁리 근처를 지나 집으로 가는데 내 또래쯤 되 보이는 자칭 깡패라는 애들 셋이서 숫자를 믿고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
“얌마 너 이루 와봐”
“왜요?”
“임마 오라면 왔지 왠 잔말이야 쌔~끼 너 임마 평고 2학년이야?”
“그런데요?”
“이름이 뭐야 임마”
“여기 이름표에 있잖아요”
하면서 한문으로된 이름표가 붙은 가슴을 쑥 내밀었다. 한문이 어려운지 못알아보고 저희들 끼리 얼굴을 처다 보더니
“이름이 뭐야 임마 난 천식이형 밑에 있는 왔다야 임마”
웃음도 나고 장난기도 발동을 했다.
“아 그러세요 난 갔다라고 해요”
“어라 이새끼 봐라”
하더니 2단 옆차기가 들어 온다. 운동좀 한 모양인데 난 옆차기 돌려차기는 유단자에게도 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슬적 앉았다 일어서면서 다리를 잡아 사타구니를 걷어차 버렸더니 나 딩굴어 지면서 아구구 죽는다고 난리고 한놈이 또 뜨길래 같이 떠서 돌려 차기로 턱주가리를 날려 버렸다. 그놈도 한방에 나가 떨어지고 나머지 한놈의 멱살을 움켜 잡으니 무릅을 꿇고 싹싹빈다.
“형님! 저희가 잘 몰라 뵈었습니다. 용서 해주세요.”
“별 것도 아닌 시키들이 까불고 있어. 술사 이시키들아”
나는 교복을 입은채 술집에 들어가 놈들이 딸아 주는 술을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고 비틀 걸음을 치며 30리 길을 걸어 왔다.
“형님 이름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형님”
“그래? 나 사라소니라고 한다 임마. 늬이 형님 한테 가서 물어봐라”
그놈들 저희 왕초 한테 가서도 아마 주어 터졌을 게다. 교복입은 시라소니가 어디 있느냐고.
26.이수일과 심순애
추석때 마다 우리 동네에서는 콩쿨 대회도 하고 연극도 한다. 내가 콩쿨 대회를 나가 기만 하면 1등도 문제 없을 것 같은데 나이가 어리다고 신청을 안받아 준다. 봉자가 옆구리를 찌르면서 좀 따라 오란다. 둘이는 달빛에 이슬이 영롱히 빛나는 수로 옆 길를 따라 걷다가 수문 위에 걸터 앉았다. 봉자가 나를 빤히 바라 보더니
“정애 오빠 구두 닦이 한다며?”
“누가 그래? 지금은 안해 짤렸어”
“대학교 갈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괜히 옆에 있는 잡풀의 모가지만 뽑아서 훑어 내버렸다.
“정애 오빠 대학교에 꼭 가야되 입학금은 내가 준비 할게”
“네가 왜?”
“나중에 이자 쳐서 갚아 아버지가 고등학교도 안보내 주려고 했는데 대학교를 보내 주겠어? 서울엔 돈 벌어서 학교 다니는 사람들이 많데. 내가 돈벌어 보니까 생각보다 어려운거 같지 않아 정 힘들면 얘기해 내가 투자 하는 셈치고 빌려 줄께”
절대 헛소리 하거나 농담을 할 봉자는 아니었다. 그러면 이게 무슨 소린가?이수일과 심순애 얘기가 생각 났다.
“고맙긴 한데 그런일은 없을거야”
“아무튼 지금 부터라도 코피 터지게 해봐 정애 오빠는 우리 동창들의 희망이잖아 난 정애 오빠가 잘 됬으면 좋겠어.나 정애 오빠 대학 포기 하면 다시 안봐.”
그 말이 내가 대학에 꼭 가야겠다고 결정하게된 자극제가 되어 다음달에 있을 합기도 승단 심사를 포기하고 공부에만 전념 하게 되었다. 덕분에 3학년 2학기 예비고사에 좋은 점수로 합격을 했고 꽤 괜찮은 공과 대학에 합격 할 수있었다. 물론 입학금은 아버지와 형들이 준비해 주었고 무었 보다 셋째형이 군대에를 가기로 하고 입학을 하였다. 셋째형은 재주도 남달리 많아서 군대에서도 정훈 병과로 연무대 방송국에서 3년간 아나운서로 군복무를 마쳤다.
27.징병검사
대학 생활은 자유가 많아 좋았다. 돈이 없어서 그렇지 매일 술도 먹을수 있어 좋았고 고등학교때 보다 공부도 덜해서 좋았다. 싼집을 찾아가느라고 서울에서도 가장 변두리 산골 동네인 정릉 배밭골 시장 근처에 두명이서 자취방을 구해 자취를 했다. 자취집 앞으로는 그해 준공을 앞둔 북악터널공사와 터널 입구에 들어설 국민대학교가 한참 공사중이었고 우리는 새벽엔 약수터에가서 주변 청소도 하고 노인들이 나누는 정치 경제 역사 얘기등도 어깨너머로 듣고 저녁엔 길음 시장에 가서 왕 대포를 한잔씩 하고 오기도 하고 노는 날은 동시 상영관인 미도 극장에가서 싼값에 영화 두편을 보고 오기도 했다. 자유라는 것은 그것을 관리 할 수 있을때 주어져야 한다. 불규칙한 식사에 막걸리, 대학에 들어오면서 배운 담배등은 아직도 성장기에 있는 내 건강을 망가트렸다. 2학년 개강때부터 잠잘때 사타구니에 땀이나고 어깨가 매일 뻐근하며 매사에 의욕이 없고 가끔 미열이나고 잔 기침을 자주 했다. 그런 상태가 지속 되던 초여름에 징병검사 통보가 나왔다. 온양 온천의 어느 학교 운동장에서 면 단위로 1박 2일간 신체검사를 실시하는 중에 내과 검사 담당 중위 계급장을단 군위관이 나를 포함한 몇 명을 호명 하더니 재검사를 해야 된단다. 하루를 더 자면서 보건소에가서 X-레이를 직촬로 한번 찍겠단다. 다음날 군위관이 날 부르더니 당장 치료를 받아야 될 폐결핵이란다. 폐결핵은 그당시 법정 전염병으로 폐병쟁이는 환자뿐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도 사람들이 멀리 했다. 보건소에 가면 무료로 치료를 해주니까 내일 당장 보건소에 등록을 하란다. 치료를 해서 내년에 징집에 응하라고 하면서 3급을의 판정을 내려 주었다. 다음날 군 보건소에 등록을 하려 했으나 징병검사 관계로 바쁘며 우리집에서는 온양보다 평택이 더가까우니 그곳 보건소엘 가도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해(1972년)부터 폐결핵 환자의 대학입학이 허용되지 않았고 망국병이라고 해서 환자는 즉시 휴학을 해야만 했다.
나는 당장 휴학을하고 귀향하여 나이드라짇 과 황산스트렙토 마이신은 보건소에서 무료로 받고 유파스짓은 구입하여 치료에 들어 갔다. 부모님들도 걱정이셨다. 고모 두명이 폐병으로 죽었고 이모는 폐병을 앓는중에 뱀을 두가마니나 먹었는데도 결국 죽었다는 것이다. 잘 먹어야 되는 병이라며 아버지가 매일 비계가 많이 붙은 돼지고기를 사다 놓으시면 고추장에 볶아 먹으며 막걸리 한잔하고 평택장날은 도살장에가서 소피도 얻어 마시곤 했다.
28.땅꾼
엄마가 내게 뱀을 좀 먹였으면 좋겠다고 동네 뱀을 잘 잡는 황씨 할아버지에게 부탁을 하였더니 황씨 할아버지가 잘아는 땅꾼을 소개 시켜주었다. 석호라고 부르는 그 땅꾼은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땅꾼의 이미지 와는 사뭇 달랐다. 체구도 별로 크지 않고 얼굴도 곱상하고 말도 험상굳게 하지않았다. 그 땅군이 나를 이리 저리 보더니
“환자 같지 않은데? 꾀병 아냐?”
그러자 황씨 할아버지가
“예끼 이사람아 자네가 누워 있는 환자만 봐서 그렇지 이병은 들어 누우면 일어 나기가 힘들어 자네가 좋은 놈으로 좀 장만해봐 이놈은 재주가 아까운놈이여”
“예 영감님 이렇게 멀쩡하지만 일은 못 할테고 나 따라다니면서 좋은 공기도 쐬고 하면서 요양겸 다니면 어떨까요?”
어머니도 그게 좋겠다고 동의 하시고 당장 내일부터 따라 나서란다. 그 땅꾼 석호는 벼락바위에서 부엉골쪽 산 계곡 입구에서 뱀탕집도 겸하고 있으면서 가끔 꼬챙이 같은걸 들고 뱀을 잡으러 다니는데 독사 살모사 능구렁이 등은 보기만 하면 잡고 눈에 열이 있어 유열목이라 부른다는 화사는 가끔 잡는데 이놈은 정력 보강제로 쓰지 병을 치료하는데는 잘 사용하질 않는단다. 물뱀은 무자수 라고 부르며 아예 건드리지도 않는데 양심없는 땅꾼들은 이것도 다려서 살모사가 들어 간 것처럼 속여 판단다. 일단 나는 속아서 너불대를 먹을 염려는 없어졌다. 나는 매일 뱀탕집에 출근을 했고 가끔 땅군을 따라 산엘 가기도 했다. 이 땅군은 주문을 받아 뱀을 다릴때는 내것도 다려 공짜로 한사발씩 주는데 닭고기 삶은 것 같은게 약간 흙 냄새도 나는 듯 했지만 먹을만 했고 자주 먹으니 맛이 있다는걸 알았다. 땅꾼이 뱀을 다릴때는 정성스럽게 숯불을 피우고 오지 항아리에 밤새 다려 아침이면 버드나무로 만든 굵은 젓가락으로 저어서 삼베 보자기로 걸러 식기전에 자전거를 타고 배달을 해준다. 꼭 버드 나무 젓가락으로 저어야 뱀의 살이 풀어진단다. 땅꾼은 또 버드나무로 쿠사비라고 부르는 쐐기를 여러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걸 무었에 쓰나 봤더니 땅꾼도 영역이 있어서 근동의 뱀은 상강때 까지 잡고 먼동네의 뱀은 겨울에 뱀굴을 파헤쳐서 잡는데 자기 영역내의 뱀굴은 파지를 않는단다. 이 뱀굴을 파 헤칠때 한 굴에서 각종 뱀이 다 나온다 무자수 유열목이 순으로 나오는데 너불대라고 부르는 유열목이는 잡아서 눈밭에 던져 놓아도 설설 기어 다닌다.독사 살모사등이 중간서열이고 마지막이 능사 까치독사가 나오는데 공사 규모가 매우 커서 몇일을 작업하게 되는데 까치독사가 나올 때쯤에는 집에 갈 때 작은 돌 틈새라도 이 버드나무 쿠사비로 틀어 막아 놓고 간다. 그렇게 해놓고 갔는데도 다음날 와서 보면 뚫고 도망간 경우도 있었다. 꽤 굵은 뱀도 몸을 납작하게 만들어 돌틈에 숨어 있다. 이때 꼬리쪽을 송곳니로 꼭 물고 잡아 다니면 줄줄 끌려 나오고 넓은 굴에 들어 있는놈도 손으로 잡아 다니면 중간이 끊어지면 끊어졌지 딸려 나오지를 않아 이것도 물고 잡아 다녀야한다. 가을엔 유열목이가 지게 작대기 만큼 자라는데 이때 이놈을 잡아 배를 가르면 유란이라는 겨우내 사용할 영양분 덩어리가 주렁주렁 달려 많이 나온다. 이걸 날로 나에게 먹이기도 하고 말려서 가루를 내어 캡슐에 담아 주기도 했다. 비싼뱀은 찌꺼기도 버리지 않고 말려 두었다가 가루내어 캡슐에 담아 주기도 하고 싼뱀 찌꺼기는 썩혀서 구더기를 내어 붉은 토종닭 몇 마리를 굶겼다가 풀어 놓으면 아주 깨끗이 먹어 치우고 온몸의 털을 홀라당 벗어 버리는데 그때 엄나무 황기 밤대추등을 넣고 삼계탕을 끓여 먹기도 했다. 어떤이들은 좋은뱀 몇 마리를 써서 해달라고 주문 하기도 하는데 해마다 이걸 해먹는 72세 된 노인은 그때도 여행중엔 혼자 못자고 직업여성을 부른단다. 나는 나중에 방위 소집 근무때 중대장에게 뺏기기 전까지 항상 이 땅꾼이 만어준 멋진 지휘봉을 가지고 다녔다. 유열목이 껍질을 벗겨 말렸다가 나무를 뱀처럼 깍아 씌운 것인데 비늘이 그대로 있어 살아 있는 뱀 같았다.
첫댓글 너무 지루하거나 재미 없다고 생각 되시면 댓글로 써주세요 즉시 중단 하겠습니다. 도대체 작가님들은 얼마나 힘들이 좋으시길래 책두 쓰고 그러실까요? 참 심 드는 작업이네요
제가 서상님 왕팬인거 아시면서,,,,, 아프로도 쭈욱 기대하겠습니다
그렇잔아도 글을 읽으면서 서상님의 노고를 생각 하엿습니다. 오죽했으면 혼불의 작가 최명희님도 글중에서 '글을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하시며 글의 어려움을 말씀 하셨고 한줄한줄 쓰시는 글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는 고통에 비유 하셨겠습니까...^^* 하물며 전업작가가 아니신 서상님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보면 능히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지요.. 그렇게 어렵게 쓴 글이기에 우리에게 이처럼 생동감 넘치는 활력을 주는것은 아닐까요?..^^* 감사드립니다..^^
재미가 없다뇨 클날 소리입니다 ^^ 쪼깐 힘들어도 유용한 정보도 있고 내용도 재미있고~~ 계속원고는 나와야 쓸건디~~ 독수리들이 허리가 아플테고 옆에 대서 해줄 조수한사람 키우세요^^
장문을 쓰시기도 어려운데 그냥 읽기가 미안해요 수고 료 (쇠주한잔 ) 이라두 대접해야될껏같아요 넘잼있어요 봉자는 서상님의 삶의지표?라면 좀그런가요 암튼 고마운 여인임에는 틀림이없군요 뱀도 그렇게 종류도 많고 정말 몸에도 좋은가봐요 뱀에는 또 일가견이 생기셨네요 그래도 운동하는 사람들은 나쁜길로 많이빠지던데 서상님은 거기서 끝인가요?
아고 엄지가 젤 무서워 하고 싫어하는 뱀... 서상님은 도대체 뭘 모르시는 게 있으십니까? 대단하십니다. 글을 일고 있노라면 자신이 주인공이 된 느낌으로 몰입한다니까요. 어쩜...서상님 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