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naver.com/idaero47/223741561310 광화문 역사와 광화문 한글현판 달기 운동 발자취(1) 광화문 역사와 광화문 한글현판 달기 운동 발자취(1) 광화문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 정문이며 오늘날 대... blog.naver.com
광화문 역사와 광화문 한글현판 달기 운동 발자취(1)
광화문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 정문이며 오늘날 대한민국 서울 중심이고 얼굴이다. 경복궁은 조선시대 임금이 있던 궁궐이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경복궁은 보여주려고 지은 관광용 궁궐 모형이다. 이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은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 운명과 같이 했다. 조선이 일어나면 함께 빛났으며 조선이 쓰러지면 함께 사라지기도 했고, 오늘날 대한민국 역사와 운명과도 같은 꼴이다. 세종 때에 광화문이란 이름을 짓고 나라가 일어나고 빛났으며 나라가 망하면 광화문이 사라지거나 불탔다. 광화문이 이름 그대로 빛나게 되면 이 나라도 빛난다. 그런데 요즘 지저분하고 부끄럽다. 이 경복궁 광화문 발자취와 한글현판 달기 발자취를 살펴본다.
가. 광화문 역사
1. 광화문이라는 이름은 세종 때 지었다.
광화문은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으로, 1395년 태조(7) 때에 처음 세워졌는데 그때 이름은 궁궐 남쪽 문이란 뜻을 가진 '오문(午門)'이라고 했다가 1425년 세종 때에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光化門)이라고 지어 바꾸어 부른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광화문이란 “임금(세종)의 덕이 온 나라와 백성을 비춘다.”라는 뜻을 담았다고 하는데 光化門(광화문)이란 글자 뜻이 나라와 임금 덕이 빛나게 되는 문이란 것이다. 중국 북경 자금성에 가면 지금도 오문이 있다. 처음 태조 때에 우리도 중국식으로 그렇게 지었으나 세종 때에 우리 자주정신을 담아 이름을 지은 것부터 우리는 우리다운 나라로 가겠다는 뜻과 꿈을 담은 이름이다. 중국 자금성에는 지금도 오문(오른쪽)이 있다. 처음에 중국식으로 우리도 오문이라고 했는데 세종 때에 우리식으로 광화문으로 지었는데 세종 꿈과 뜻인 자주정신이 나타난 것이다. 2. 세종대왕은 경복궁에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세종은 조선 건국 초기 오늘날보다 더 흔들리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진짜 어질고 덕이 많은 임금으로서 국방, 과학, 문화, 산업 들 여러 면에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겨서 나라를 튼튼하게 해서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임금이었고 정치지도자였다. 세종 때에 과학은 중국 일본보다도 앞서가는 나라였으며 많은 업적 가운데 한글을 만든 것은 가장 나라와 겨레를 빛나게 한 일로서 우리 자주문화를 빛나게 하고 인류문화발전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만든 업적이다. 광화문이란 이름대로 세종의 덕이 나라와 백성들을 비추었고 빛나게 했다. 세종은 우리 겨레의 복이고 보물이며 겨레의 스승이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 만든 우리글자 훈민정음(왼쪽)과 세종 때에 장영실이 만든 해시계(오른쪽)
3.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과 광화문은 불타서 사라졌다.
세종의 덕과 세종정신, 세종이 만든 한글은 그 손자인 성종 때까지 50여 년 동안은 살리고 빛내려고 했으나 연산군 때부터 한글을 천대하고 당쟁만 일삼다가 나라가 기울어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경복궁과 광화문은 불타서 사라졌다. 그리고 270여 년 동안 경복궁은 폐허로 내깔려 두었고 임금의 덕은 비추지 않았고 사대주의와 당파싸움만 일삼았다. 그리고 임진왜란 뒤 임금들은 세종처럼 정치를 잘하고 나라를 빛낸 것이 아니라 다른 궁궐을 옮겨 다녔고 신하들은 당파싸움만 일삼아서 나라는 기울고 흔들렸으며 백성들은 고통 속에 살았다. 영조, 정조 때 겸재 정선이 그린 경복궁 모습(왼쪽)인데 광화문도 지붕은 없고 경회루도 기둥만 보이고 나무만 무성하다. 오른쪽 사진은 조선이 망하고 일제 때 교태전 뒤 아미산에 풀이 무성한 모습인데 임진왜란 뒤에는 이보다 더 폐허였을 것이다.
4. 고종 때 경복궁을 복원하고 광화문도 다시 세우다.
연산군 뒤부터 세종 때 만든 우리 글자인 한글을 살려서 쓸 생각은 안 하고 천대하고 사색당파싸움만 하다가 선조 때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이 불타고 백성들은 임금의 덕을 보지 못했다. 인조 때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삼전도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항복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래도 영조, 정조 때에는 외국 침략을 받지 않고 평화로운 시대였는데 이때라도 자주 국가를 만들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중국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박제가와 중국을 닮자는 박지원, 한문으로만 글을 슨 쓴 정약용 같은 사대모화사상에 빠진 실학자들이란 자들을 총애해서 얼빠진 나라가 되고 세도정치에 나라가 기울고 흔들렸다. 그러니 고종 때 대원군이 왕권을 강화하겠다고 경복궁을 복원하고 광화문을 다시 세웠다. 그러나 무리하게 집을 짓다가 나라살림이 어렵게 되고 민심을 잃어 나라 망하는 원인이 된다. 고종 때에 경복궁을 복원하고 광화문도 다시 지었으나 본래 보다 더 많이 집을 짓느라 나라 재정이 파탄 나고 일본에 빚까지 지어 나라를 일제에 빼앗겨서 다시 경복궁과 광화문 앞이 풀이 무성한 폐허가 되었다. 그때 광화문 문패를 한글로 달았더라면 아쉬움이 있다. 5. 경복궁에 일제 총독부가 들어서고 광화문은 제자리에서 쫓겨나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니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라는 것을 할 때에는 광화문이 박람회장 입구가 되기도 하고 경복궁에 일제 식민지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니 광화문은 제자리에서 동쪽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경복궁 안 건물들은 일본인들이 헐어서 일본으로 가져가기도 하고 사라진다. 세종정신과 업적을 살리고 빛냈더라면 이런 나라꼴이 안 되었을 것이다. 나라가 망하니 궁궐도 갈기갈기 찢기고 일본 침략자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백성들은 일본의 하등 국ᄆᅠᆫ 되어 온갖 고통을 겪는다. 근정전에 일장기를 걸리고, 광화문은 일본이 하는 조선박람회장 입구가 되어 그 앞이 가렸다. 6. 6.25 전쟁으로 경복궁이 폐허가 되고 광화문이 불타다.
1945년 하늘이 도와서 일제가 망하고 우리나라가 광복이 되었으나 바로 남북이 갈리어 남쪽에는 자본주의 나라가 서고, 북쪽에는 공산주의 나라가 선다. 그리고 1950년 남북전쟁이 일어나 포화에 경복궁이 다시 폐허가 되고 동쪽으로 옮겼던 광화문이 불타버렸다. 참으로 가슴이 아프고 슬픈 일이다. 광화문이 빛나지 못하니 나라도 국민도 가난과 어둠 속에서 살게 된다. 흔적도 없이 불타버린 광화문과 빈터가 된 경복궁 모습이 처량하다. 전쟁 때 불타버린 광화문(왼쪽)과 근정전과 경회루, 수정전과 중앙청만 남은 경복궁(오른쪽)
7. 1968년에 광화문을 다시 세우고 한글현판을 달다.
1961년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김종필 군사정부가 광복 뒤부터 한글로 만들던 교과서를 일본처럼 한자를 섞어서 쓰자고 해서 1967년에 대학생들이 국어운동대학생회를 만들고 그 잘못을 따지며 한글을 살려서 나라를 일으키라고 외치니 박정희 대통령이 그러기로 하고 광화문을 다시 세우면서 그 뜻을 담아 한글현판을 단다. 그리고 한글사랑, 나라사랑을 외치며 한글전용 정책을 펴서 국민수준이 높아지고 그 바탕에서 나라가 빨리 일어났다. 그때 한글이 태어난 곳인 경복궁 정문에 한글현판을 걸고 한글과 세종정신을 살린 것은 나라 앞날을 밝게 할 “신의 한 수”라고 할 빼어난 선택이었고 결정이었다. 한글은 백성을 위해 만든 민주글자요, 자주글자이며 과학글자로서 오늘날 꼭 살려야 할 글자이다. 나무가 없고 돈이 없어 시대상황에 따라 철근콘크리트로 세워 일본 식민지 총독부였던 건물을 가리고 지은 것은 민주, 자주, 과학시대 상징이다. 한글을 빛내어 국민수준을 높여주고 그 바탕에서 반세기만에 경제와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전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광화문은 산업화 상징으로 그때 그 누구도 한글현판을 탓하지 않았다. . 진짜 대한민국다운 모습을 찾았다. 나. 한글현판 달기 운동 발자취
2005년 광화문 한글현판 떼기 반대운동 - 글이 길어서 다음 쪽으로 다시 올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