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록수] 반가운 손님(1)
낙성식에 와달라는 영신의 청첩을 받은 동혁은, 저의 일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기뻤다.
‘아무렴 가구 말구. 오지 말래두 갈 텐데…..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벽에 붙은 일력을 쳐다보았다.
‘내일은 떠나야겠는걸.’
하고 노자를 변통할 궁리를 하였다. 추수라고는 하였지만, 잡곡을 섞어 먹는데도 내년 보리 때까지 댈 양식조차 없었다. 간신히 계량이나 하던 것을, 그야말로 문전의 옥답을 반나마 팔아서 강 도사 집의 빚을 청산하였기 때문에, 풍년이 들었어도 광 속에는 벼라고 겨우 대여섯 섬밖에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각종 세금과 비료대와 곗돈과 온갖 추렴이며, 동화가 각처 주막에 술값을 진 것과, 일 년 동안에 든 가용을 따지고 보면, 그 벼 몇 섬까지 마저 팔아도 회계가 닿지를 않는다. 노인을 모신 사람이 생선철이 되어도 비린내 조차 맡아보지를 못하고, 제법 광목 한 필 사들인 적이 없건만, 씀씀이는 논 섬지기나 할 때버덤 더 줄지를 않는다. 그것은 동혁이가 집안일에만 매어달리지 않는 까닭도 다소간은 있겠지만, 소위 자작농이 그러하니, 남의 소작을 해먹는 사람들은 참으로 말이 못 된다. 회원 중에도 건배는 실농군도 되지 못하지만, 남의 논 한 마지기도 못 얻어 하는 사람이라, 가을이 원수 같았다.
“난 타작마당에서 빗자루만 들구 일어서는 꼴을 당허지 않으니까, 베포만은 유허거든.”
하고 배를 문질러 보이지만, 그 뱃속에서는 쪼르륵 소리가 나는 것이다. 실상은 삼사 년씩 묵은 빚만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해서, 어떻게 해야 할는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를 않는 모양이다. 그는 입버릇처럼,
“노름허다 밤샌 건 제사 지낸 셈만 치구, 돈 내버린 건 도적맞은 셈만 치면 고만이지.”
하고 제 손으로 패가한 것을 변명하며, 낙천가의 본색을 발휘하지만, 실상은 어린것들의 작은 창자조차 곯리는 때가 많다.
생활의 안정을 얻지 못하는 그는, 동네일을 한다고 덜렁거리고 다니기는 해도, 노상 횃대에 오른 오리 모양으로, 어느 때 어느 바람에 불려서 어디로 떠 달아날지 모를 것 같은 기색이, 올가을부터 현저히 보일 때, 유일한 친구인 동혁의 마음은 어두웠다. 제 코가 석자가웃이나 빠져서, 물질로 도와줄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끼니를 굶고도 먹은 체하고 농우회 일을 보는 것이, 여간 마음 아픈 것이 아니다. 회의 일만 해도 그렇다. 회원들이 그렇게 집안의 반대와 괴로움을 무릅쓰고 일을 하건만, 실상 생기는 것이라고는 드러내어 말할 것이 못 된다. 공동답의 수확은 작년보다 대여섯 섬이나 늘었다. 개량식으로 지은 보람이 있어 재미가 나고, 구식만 지키는 사람들에게 자랑도 되지만, 한 마지기에 석 섬 마수[곡식의 양을 재는 말의 수량]나 타작을 하였대도, 반은 답 주인 강 도사 집으로 들어가니, 그것을 노느면 한 사람 앞에 한 가마니도 차례가 가지 못한다. 그것이나마 회관의 비용을 쓰려고 팔아서 저금을 하는 것이니, 실속을 다지고 보면 헛수고를 한 셈이다. 회원들은,
“이거 너무 섭섭해서 안됐는걸.”
하고 겨우 고무신 한 켤레와, 삽 한 자루씩을 사서 노났을 뿐이다.
그러나 한 길이나 되는 볏단을, 조리개로 큼직하게 묶어서 개상에다가 둘러메치자, 싯누런 몽근 벼가 와르르 쏟아질 때, 회원들은 재미가 쏟아졌다. 도급기[벼 따위의 곡식 껍질을 제거하는 기계나 기구]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바심꾼들의,
“어거—띠—읫읫.”
하고 태질을 하는, 그 기운찬 소리를 들을 때, 황금가루로 뫼를 쌓아놓은 듯한 볏 무더기 속에, 발을 푹 파묻고 벼를 끌어 담으며,
“…..두 말이요 — 두 말. 서 말이요—서 말—.”
하는 처량스러운 듯한 소리를 들을 때만은,
“아이구, 이걸 다 남을 주다니……”
하고 분한 생각이 들어 한탄을 마지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해서, 잘다란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노자를 변통할 궁리를 하던 동혁은,
‘적어도 십 원 한 장은 가져야 헐 텐데……’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 언뜻 눈앞에 나타난 것은 기만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치사하게 그자헌테 돈을 휘해가지구 가긴 싫다.’
하고 튼튼한 두 다리로 걸어서, 산을 넘고 물이라도 건너갈 결심을 하였다.
낙성식 전날 영신은, 십 리도 넘는 자동차 정류장까지 마중을 나갔다. 의외로 근친[친정에 가서 부모를 뵘]을 하였기 때문에, 그럭저럭 사흘 동안이나 빠져서, 갑자기 준비를 하느라고 잠시도 떠날 사이가 없건만, 별러별러 찾아오는 더구나 청해서 오는 사랑하는 사람을, 앉아서 맞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낮차에 헛걸음을 치고 돌아와서,
‘저녁 차에는 꼭. 오겠지.’
하고 저녁때 또다시 나갔다.
가슴을 졸이며 자동차를 기다리는데, 멀리서 엔진 소리가 들렸다.
영신은 신작로로 뛰어나가며 손을 들었다. 차는 브레이크 소리를 지겹게 내며 우뚝 섰다. 동혁은 벌써 알아보고 뛰어내릴 텐데, 만원도 아니 된 승객을 훑어보았으나, 땅이 두 쪽에 갈라져도 꼭 올 줄 알았던 사람은 그림자도 없다. 영신은 실망 끝에 어찌나 화가 나는지,
‘이놈아, 왜 그이를 안 태워가지구 왔느냐?’
하고 운전수를 끌어내려 퍽퍽 두드려주고 싶었다. 그는 그만 낭판[계획한 일이 어그러지는 형편]이 떨어져서, 가로수 밑에 가 펄썩 주저앉아서, 거진 한 시간 동안이나 뻘겋게 놀이 낀 하늘만 원망스러이 쳐다보았다.
‘못 오면 그 성실헌 이가 전보래두 쳤으련만……’
하고 여러 가지로 추측도 해보고 공상도 해보다가, 내왕 이십 리 걸음이나 곱팽이를 쳐서, 그만 풀이 죽어가지고 어둑어둑할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공연히 짜증이 나서, 학원에는 들르지 않고 바로 사숙으로 갔다. 낙성식 준비래야 지도책을 펴놓고, 만국기를 헝겊 조각에다 물감칠을 해서 달 것과, 상량할 때도 쓸쓸히 지낸 목수며, 저와 함께 죽도록 애를 쓴 청년들을 점심이나 대접하려는, 그 준비를. 하는 것뿐이다. 소위 내빈이라고는 청하지도 않았으나, 학부형들이나 모아놓고 그동안 경과를 보고하려는 것이다. 서울연합회에는 청첩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어, 회장이 못 오면 간사라도 한 사람 보내달라고는 했으나, 속으로는 오지 말았으면 하였다. 농촌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서울서 눈은 한껏 높은 ‘하이칼라’가 내려오면, 보여줄 만한 것도 없거니와, 대접하기만 거북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내빈의 총대표라고 할 만한 동혁이가 오지를 않으니 (건배 내외와 농우회원들에게도 형식적으로 청하기는 하였지만) 낙성식이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우고 싶도록 부아가 났다. 내일 온대도 정각인 아침 열 시까지는 도저히 대어 들어올 수가 없지 않은가.
영신은 컴컴한 중문간에서,
“원재 어머니!”
하고 불쾌히 부르며,
“서울선 아무두 않왔어요?”
하고 물으면서 운동화를 벗어 던졌다. 서울로 통한 길은 다른 방향인데, 그 길로는 원재를 보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자, 자기가 쓰는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혹시 서울서나 누가 왔나?’
하고 물었는데, 아무 대답이 없다. 영신은,
‘원재 어머니꺼정 어디루 갔을까?’
하고 입속으로 꾸짖으며, 방문을 펄썩 열고 들어서다가, 깜짝 놀라서 문칫 하고 뒤로 물러섰다.
“왜 서울서 오는 사람만 찾으세요?”
방 한구석에 앉아서 각반을 풀다가, 검붉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히 담고 돌려다 보는 것은, 동혁이다! 천만뜻밖에 떡 들어와 앉은 사람은, 틀림없는 동혁이다!
“아! 이게 누구서요?”
영신은 놀라움과 반가움에 겨워서, 가슴속은 두방망이질을 한다. 동혁은 벌떡 일어나 영신의 두 손을 덥석 쥐고 잡아 흔든다.
“아아니, 어디루 어떻게 오셨어요?”
“어떻게 오다니요? 이 두 바퀴 자동차를 타구 왔지요.”
하고 동혁은 제 다리를 탁 쳐 보인다. 영신은 혀끝을 내두르며,
“아이고 어쩌문! 배두 안 타고 돌아오셨으면, 한 삼백 리나 될 텐데……”
하니까,
“압다, 삼천 리는 못 올까요?”
하고 동혁은 그저 손을 놀 줄 모른다.
“그래 언제 떠나셨어요?”
“어저께 새벽에요.”
영신은 그만 동혁의 가슴에, 그립고 그립던 그 널다란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동혁은 두 팔로 영신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함께 한참 동안이나 말을 못하였다.
영신은 얼굴을 들었다. 등잔 불빛에 번득이는 두 줄기 눈물! 그것은 반가움에 겨워서만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다. 거칠고 어두운 벌판을 홀로 헤매다니다가, 어버이의 따뜻한 품속으로 기어든 듯한 느낌과, 살이 찢기고 뼈가 깎이도록 고생한 것을 무언중에 호소하는, 그러한 눈물이었다.
동혁은 눈을 꽉 감았다가 뜨며,
“신색[상대편의 안색을 높여 이르는 말]이 매우 못허셨군요.”
하고는 손등으로 눈물을 부비고 난, 영신의 얼굴을 무한히 가엾은 듯이 들여다본다. 반년 남짓이 만나지 못한 동안에, 영신은 그 탐스럽던 두 볼이 여위고, 눈 가장자리에는 가느다란 주름살까지 잡혔다. 더운 때도 아닌데 입살이 까맣게 탄 것을 보니, 그동안 얼마나 노심초사를 했나 —하는 것이 역력히 들여다보여서, 동혁은,
‘그래 집짓기에 얼마나 애를 쓰셨세요.’
하는 말이 입 밖까지 나오려는 것을 도로 끌어들였다. 그런 인사치레는 일부러 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등자불은 고요히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흔드는데,
“우리 집 보셨지요? 동혁 씨 집버덤 잘 지었지요?”
한참 만에야 영신은 딴전을 부리듯이 묻는다.
“아까 잠깐 바깥으루만 둘러봤는데, 너무 훌륭허드군요. 한곡리 회관쯤은 게다 대면 행랑채 같어요.”
하고는,
“집들은 엄부렁허게[‘엄범부렁하다’의 준말. 실속은 없이 겉만 크다] 지어놨지만, 인젠 내용이 그만큼 충실허게 돼야 해요.”
하고 동혁은 제가 주인인 듯이, 영신의 손목을 끌어다가 앉혔다. 회관의 설계도를 보고, 또는 편지로 자세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여자 혼자 시작한 일로는 엄청나게 규모가 큰 데, 두 번 세 번 놀랐다.
“좀 누서요. 여간 고단치가 않으실 텐데…..”
하고 영신은 목침을 내어놓고 일어서며,
“시장두 허실걸. 원재 어머닌 어딜 가서 여태 안 들어와.”
하며 일어나는데,
“아이고, 선생님이 벌써 오신 걸 몰랐네.”
하고 마주 들어오는 것은 이 집의 주인이었다. 그는 손님이 혼자 와서 기다리는 것이 보기 딱해서, 영신의 뒤를 쫓아 보낼 사람을 얻느라고, 회관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온 것이었다.
영신은 원재 어머니에게만은 동혁이와의 관계를 이야기하여서, 그 역시 동혁이를 여간 기다리지 않았었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며,
“어쩌문 그렇게 대장감으루 생겼어요? 참 봐서 그런지, 마주 쳐다보기가 무서웁디다.”
하고, 혀긑을 내둘러 보이면서 밥상을 차린다. 그는 청석골 밖에는 나가 보지도 못하였지만, 동혁이처럼 건장하고 우람스럽게 생긴 남자를 처음보았던 것이다. 천사와 같이 숭앙하는 채 선생의 남편 재목이, 방 안이 뿌듯하게 들어설 때, 그 마음속까지 뿌듯하였다. 영신이도 동혁이를 칭찬하는 말이, 듣지 싫지 않아서,
“그렇게 무서워 뵈요? 아무튼 보호병정 하나는 튼튼허게 뒀죠?”
하고 느긋한 웃음을 웃어 보였다. 원재 어머니가,
“찬이 없어서 어떡헌대유?”
하고 성화를 하니까,
“뭘, 돌멩이를 깨물어 먹어두 새길걸.”
하면서, 밥상을 들고 들어가서는,
“한곡리처럼 대접을 해들릴 수는 없어요. 우린 쩍의 반찬(배골플 적이란 뜻)밖에 없으니까요. 당최 벜에 들어설 틈두 없구요.”
하고는,
“호호호호.”
하고 명랑히 웃는다. 동혁은,
“내가 요릿집을 찾어온 줄 아슈?”
하고 밥상을 들여다보더니,
“외상을 먹구는 언제 갚게요. 밥 한 그릇만 더 갖다가 우리 같이 먹읍시다.”
하고 우겨서, 둘이 겸상을 해서 먹으며, 피차에 지낸 이야기를 대강 주고 받았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저 사람을 그다지두 그리워했었던가.’
하는 듯이, 피차에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기계적으로 숟가락질을 했다. 동혁은 숭늉을 마신 뒤에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더니,
“이 근처에두 주막이 있겠지요?”
하고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제아무리 장사라도 이틀 동안 거진 삼백리 길이나 줄기차게 걸어왔으니, 노그라지지[지쳐서 맥이 빠지고 축 늘어지다] 않을 수가 없었다.
“주막은 왜 찾으셔요? 어느 새 망령이 나셨담.”
하고 영신은 동혁을 붙잡아 앉히고는, 홑이불을 새로 시친 저의 이부자리를 펴주고 나서,
“허구 싶은 얘긴 태산 같지만, 오늘은 일찌감치 주무서요. 조옴 고단허실까.”
하고 일어선다. 동혁은,
“아닌 게 아니라, 내 쫓어두 못 가겠쇠다.”
하고 못 이기는 체하고 자리 위에 쓰러졌다. 영신은 안방으로 건나갔다가, 자리끼를 들고 들어와서,
“문고리를 꼭 걸구 주무서요, 네.”
하고 의미 깊은 웃음을 웃어 보이고는 나간다. 동혁이도 한곡리 바닷가의 오막살이에서, 영신이가 오던 날 밤에, 제가 한 말이 생각이 나서 빙긋이 웃으며,
“굿 나잇!”
하고 손을 들었다. 조금 있자, 문풍지가 진동하도록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소리가, 안방에서 잠을 얼핏 이루지 못한 영신의 귀에까지 들렸다.
동혁은 ‘한곡리’서 나팔을 부는 시간에, 자리를 걷어차며 벌떡 일어났다. 정신없이 쓰러져 잤건만, 온몸의 피곤이 회복되지를 못해서, 사지가 나른한데, 잠이 깨어 누웠자니 비록 깨끗하게 빨아서 시치기는 했으나, 영신이가 베던 베개와 덮던 이불에서, 아렴풋이 풍기는 여자의 살 냄새는 코를 자극시킬 뿐이 아니었다.
그는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 체조를 한바탕 하고, 샘을 찾아가서 냉수로 세수를 하고는, 학원으로 올라가서 두어 바퀴나 돌면서, 야릇한 흥분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늦은 가을 서리 찬 아침은, 정신이 번쩍 나도록 상쾌하다.
‘아하, 여기가 청석골이었구나!’
하고 동혁은 산중 벽촌의, 하나도 신기할 것이 없는 자연을 둘러보았다. 띄엄띄엄 선 초가집 앞의 고욤나무는 단풍이 지고, 미루나무는 벌써 낙엽이 져서, 가지만 앙상한 것이 매우 소조해 보인다. 다만 흰 벽이 찌들은 예배당만이 한곡리에 없는 귀물이었다.
……..조반을 같이 먹으면서도 두 사람은 보통 연애를 하는 남녀와 같이, 깨가 쏟아지는 듯한 이야기는 없었다. 영신이도 수다스러이 재잘대기를 좋아하는 성미가 아니나, 하고 싶은 말은 가슴속에 첩첩이 쌓였건만, 입은 나분나분하게 놀려지지를 않았다.
“이따가 내빈총대(內賓總代)로 한마디 해주서요. 기부금 적은 사람들이 감동이 돼서, 척척 내놓게요.”
하고 특청을 하였고,
“어디 연설 말씀을 헐 줄 알어야지요.”
한 것이, 중요한 대화였다.
시간이 되려면 멀었건만, 아이들은 거진 다 모여들었다. 그중에도 계집애들은 명절 때처럼 울긋불긋하게 입고, 어깨동무를 하고는 학원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어떤 계집애는 추석 놀이를 하던 날 밤에 꽃았던, 풀이 죽은 리본을 꽂고 자랑스러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닌다.
동혁은 운동장으로 내려가서, 나비를 움켜잡듯이 제일 조그만 계집애 하나를 붙들어 번쩍 들고, 겁이 나서 빨개진 뺨에 입을 맞추고는,
“이 색시, 몇 살인구?”
“집은 어디지?”
“그래 채 선생님이 좋아?”
하고 말을 시킨다. 다른 아이들은 고만 꼬리나 빠질 듯이 풍비박산을 하는데, 동혁에게 붙들린 계집애는, 처음에는 겁이 나서 발발 떨며 울지도 못하다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닌 줄 알고,
“일굽 살유.”
“우리 집은 청석굴이래유.”
하고 사투리를 써가며 곧잘 말대답을 한다.
동혁은 체격과는 정반대로, 아이들을 보면 귀여워서 사지를 못 쓴다.
“이걸 누가 해주든?”
하고 리본도 만져보고, 어깨 위에다 둘씩이나 올려놓고 얼싸둥둥을 하고, 춤을 추듯 하며 다니는 것을 보고는,
‘어디서 저렇게 생긴 사람이 왔을까?’
하고 도망을 갔던 아이들이, 살금살금 모여들어서 동혁을 에워쌌다.
“저어, 이 아저씨가 사는 ‘한곡리’란 동네엔, 너희 같은 애들이 창가두 잘허구, 유희두 썩 잘허는데, 너희들은 아주 바보로구나.”
하고는, 저 먼저 굵다란 목소리로 동요도 하고, 그 큰 몸집을 굼뜨게 움직이며 유희하는 흉내도 내어 보인다. 아이들은 그것이 우스워서 깔깔거리며 자지러지게 웃다가,
“애개개, 우리더러 창갈 헐 줄 모른대여.”
하고 도리어 놀려먹으로려고 든다. 동혁이가,
“그럼 어디 한 번들 해봐라.”
하고 꾀송꾀송[‘꾀음꾀음’의 방언. 달콤한 말이나 교묘한 말로 남을 자꾸 꾀는 모양]하면, 아이들은 성벽이 나서, 추석날 하던 유희와 창가를 되풀이하느라고, 시간이 된 줄도 몰랐다.
땡그렁 땡땡, 땡그렁 땡땡.
언덕 위 학원 정문에 달린 종이 울린다. 그 명랑한 종소리는, 맑고 푸르게 갠 아침, 한없이 높은 하늘로 퍼지는데, 아이들은 와아 소리를 지르며 앞을 다투며 달려간다.
땡그렁 땡땡, 땡그렁 땡땡.
그 종은 새로 사다가 한 번도 울려보지 않았던 것이다. 동혁은 머리를 들어 종을 치고 선 영신을 쳐다보았다.
‘이 돈은 꼭 저금을 해두었다가, 새로 지으려는 학원 마당 앞에 종을 사서 달겠습니다. 아침저녁 내 손으로 울리는 그 종소리는, 나의 가슴뿐 아니라, 이곳 주민들의 혼곤히 든 잠을 깨워주고, ‘청석골’의 산천초목까지도 울리겠지요.’
라고 씌었던 편지 사연이 생각났다. 오늘 아침의 그 종소리는, 누구보다도 동혁의 가슴 한복판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