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폐왕 연산군(廢王燕山君)유배지를 가다
(Yeonsangum exiled to Gyodong)
폭군의 대명사 인 연산군 은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 수많은 文臣, 武臣 들을
수 없이 처형하고 언론을 억압 했으며 당시 士大夫 들의 倫理觀에 어긋나는
학정(虐政)을 거듭 하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 된 비운의 왕 이다
반정(1506)으로 폐위되어 강화 교동도 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후에 병사
(病死)했다고 되어있다.
중종반정 을 성공시킨 무열공 박원종(武烈公朴元宗)은 본관이 순천(順天)
자는 백윤(伯胤). 曾祖父 평양군 박석명(朴錫命)은 좌정승 박가흥 의 장자
고려 공양왕의 조카사위로 대사헌을 지냈고 사육신 박팽년(死六臣朴彭年)
과 는 8촌간 이다.
할아버지(祖父)는 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박거소(朴去疎)이고 아버지
는 敵愾佐理功臣 박중선(朴仲善)이며 어머니는 행호군(行護軍) 허균(許稛)
의 따님 이시다.
박원종 은 무과에 급제한후 선전관(宣傳官)으로 있다가 성종의 배려(配慮)
로 승지(都承旨) 에 올랐던 人物인데 그는 지기(志氣)와 도량이 뛰어났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때에는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하고 있었던 실력자 이다
박원종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여러 동지(同志)들을 규합(糾合)하기 시작
했는데 먼저 그 당시 명망이 있는 재상 유순정(柳順汀)· 성희안(成希顔) 두
사람과 손잡고 자순대비의 소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하기로 하고
반정(反正)을 결심(決心) 하게된다.
반정(反正)을 결정(決定)한후 그것을 시임대신(時任大臣에게 알리기로하고
그들의 모의내용(謀議內容)을 은밀히 삼정승(三政丞)대신 에게 통보 하였다
영의정 유순(柳洵)과 우의정 김수동(金壽童)은 두말없이 좋다고 승낙(承諾)
했지만 상황판단을 못한 좌의정 신수근(愼守勤)만은 동조(同調)하지 않았다
그 는 연산군(燕山君) 의 처남(妻男) 이요 진성대군(晉城大君)의 장인(丈人)
이었는데 반정(反正) 의 밀통(密通) 을 듣고 생각 하기를 매부(妹夫)가 임금
으로 있으나 사위(壻)가 임금으로 등극하나 마찬가지 인데 섣불리 일을 잘못
하였다간 연산군에게 죽기가 쉽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했던 것이아닐까 한다
그는 한순간 판단착오 줄을잘못선 관계로 반정전(反正前)기밀이 샐까염려한
반정군 에게 동생들 과 함께 제거 되었으며 딸인 신씨는 중종과 함께 왕후 에
올랐으나 아버지 의 잘못 으로 1주일 만에 "반정세력" 에 의해 폐비가 되어서
대궐을 쫏겨 나가게 되는 신세(身世) 가 되어 다시는 궁궐에 들어오지 못한다
연산군(燕山君) 은 자기의 비위 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다 죽이거나 혹은
멀리유배(流配)를 보내어 언로(言路)를 막은후 밤낮 주색(酒色)과 오락(娛樂)
을 주생활 로 삼아 자기하고 싶은바 모두 하면서 민생은 도탄(塗炭)에 빠진다
특히 갑자사화 이후에는 창기(唱妓)로서 얼굴이 어여쁜 여자들을 대궐 안으로
뽑아 들이니 처음에는 백명정도 였던것이 나중에는 만명(萬名) 이나 되었단다
기생의 칭호(稱號)를 고쳐 운평(運平)이라 했는데 대궐안 에 들어온 여자들은
흥청(興淸)· 계평(繼平)·속홍(續紅)이라 하고 왕 가까이 모신 여자 는 지과흥청
(地科興淸)이라하고 임금과 동침한 여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하였으며
장악원(掌樂院)을 고쳐 연방원(聯芳院)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창기출신(娼妓出身) 장녹수 는 연산군 보다 나이가 10살 이나 많으면 서도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도 "폭군인 연산" 을 잘 다룰줄 아는 여인 이였으며
심지어 자신 의 치맛자락 을 밟았다고 "지과흥청" 의 목을 베기도 했다는데
천하의 요부(妖婦)중 에도 그런 요부가 없을 지경 연산군 의 아명(兒名 )이
‘백돌’인데 녹수는 연산군을 ‘전하’라고 부르는 대신 “백돌아!” 라고 부르고
다녔으며 연산군 은 후궁(後宮)인 장녹수 가 함부로 자신 의 아명(兒名) 을
부르는 것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하니 뭐가 뭔지 도통...
장녹수(張綠水)와 장희빈(張玉貞)두 장씨
요화 장녹수 를 이야기 하다보면 왠지자꾸 희빈장씨, 장희빈 이 생각난다
그래서 이참에 두 장씨 의 "권력지향적면모" 를 비교(比較)해 보기로 하자
사랑을 이용하여 조선 을 자신의 치마폭 속에 놀렸던 장녹수 와 장희빈 중
누가 더 권력의 중심에서 조정을 좌지우지 하였을까?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 볼때 질문 에 대한 정답은 아마 ‘장녹수’ 일 것이다
장녹수 는 혼군(渾君) 인 연산군을 이용 임사홍 과 결탁하여 사화(史禍)를
일으키고 인수대비를 결국 죽음으로 이끌었던 그당시 최고의 실권자 이다
다만 장녹수 가 그렇게 정권을 뒤 흔들수 있었던 것도 대궐의 큰 어른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걸(女傑) 인수대비 를 죽음으로 몰아간 일련의 일도
모두 연산군 이 폭군이자 광인(狂人)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부귀영화 가
가능(可能)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승정원일기 의 기록에 장록수 미모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여기에 장녹수는
얼굴이 희고 미모는 보통을 넘지 못하였다고 적혀 있는것으로 보면 美人은
아니였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장희빈 은 숙종(肅宗)을 통해 신분을 초월하고 왕비 의 자리에
까지 올라 갔지만 장녹수 와는 달리 도리어 막판에는 숙종 에게 이용(利用)
당하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장희빈은 남인(南人)의 거두(巨頭)를 자처하며 정권에 큰영향력을 미치기는
했지만 훗날 날이 갈수록 숙종 에게 역이용(逆利用) 당해 환국(換局)구실 로
가차 없이 버려졌다는 것이다.
다만 장희빈 역시 요화(妖花)인지라 숙종의 총애(寵愛)가 하늘을 찌를때의
그녀 의 부귀(富貴)와 영화(榮華) 는 장녹수 에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장녹수 가 그저 연산군의 애첩(愛妾)이었다면 장희빈 은 한 나라의
국모(國母)요 국왕의 지어미요 훗날 임금의 어머니로써 위세(威勢)를 맘껏
누려 보았으니 궁궐 에서의 위세가 권력 에 비례한다고는 할수없을 것이다
노산 이선승지
교동도에 폭군(暴君) 으로 유명한 연산군 유배지(燕山君流配地)가 있다.
연산군 유배지/ 燕山君流配地 (연산군 墓 는 서울 방학동 에 있다)
도성(都城)에서 먼 섬지방이 가장 가혹한 유배형 이였다.
고려의 왕 들도 교동도에 유배를 왔다고 한다.
교동도는 도성에서 아주멀지도 않고 관리하기도 쉬워서 왕이나 왕족의 유배지로 이용된것 같다.
王 으로 모든것을 누리다 섬 쪽방으로 유배를 오면 참으로 황당했을 것이다.
王 과 왕족들도 수난을 많이 당한것 같다.
연산군의 화려한 집권12년이 덧없는 세월이 되고 말았군.
말도 안되는 이유로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인 王 연산 은 그벌을 제대로 받은것 같다.
연산군의 이름은 이융(李㦕) 이다.
흥청망청(興靑亡靑) 願도 恨도 없이 살았던 " 王 " 연산군
認證 한장 날린다......ㅋㅋㅋ
교동도 ㅇㅔ는 연산군이 유배가는 모습을 재현 해 놓았더라...
연산군이 머물던 유배지 초막(草幕)을 위리안치 후 병사 들이 지키고 있다
그래도 식사준비 하는 하녀는 데리고 간 모양이다.
정말 유배온 연산군은 이런모습 이였을까? 미친왕 이 더 미치지는 않았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상암동 MBC방송국 옆 식당 일미락(一味樂) / 유명한 집 이란다.
맛있다고 아들이 추천해준 집이라 네비찍고 찾아갔다
여느 삼겹살집과 조금 다르다 가격도 대전보다 다른것 같다/ 180g 에 17,000원
시원한 물김치가 내 입맛에 맞아 더 시켜 먹었다는...
맥주 종류도 많은데 필자는 "매실주"를 시켰다.
삼겹살(?) 집에서 와인도 팔고 일본 사케도, 비싼 수입맥주, 생맥주, 청주,양주, 등 고급주류가 많더라,,,
이곳에 입장하는데 번호뽑고 20분을 기다렸다.
메뉴가 비교적 간단하다
필자는 "통삼겹살"과 "통목살" 合 2인분 을 시켰다.
국내산 韓豚 생고기라고 하는데 육질은 부드럽고 육즙이 많아 그 맛은 좋았다.
이번에는 내가 운전 하기로 하여서 나는 음주를 하지 않았다는 ... 아내가 좋아 했다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