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BL과 TML, 야구의 버블시대
박동희 기자 / 2007-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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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뉴의 홈구장인 가우슝 리청칭후구장.
사진 한상무 | |
| 중화직업봉구연맹(CPBL,Chinese Professional Baseball League)은 1990년 발족했다. CPBL은 이해를 가리켜 '직봉원년(야구원년)'이라 부른다. CPBL 출범 18시즌 째가 되는 올시즌은 '직봉18년'이다. 출범 당시 슝디샹(형제 엘리펀츠), 웨이첸(미전 드래곤즈), 퉁이스,(통일 라이온즈) 싼상후(삼상 타이거즈) 등 4개팀으로 시작했다. 이 팀들은 각각 타이페이, 타이중, 타이난, 가우슝을 연고지로 삼았다.
초창기 CPBL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야구가 국기나 다름없는 대만에서 프로야구는 단숨에 국민적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여기다 대만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으로 도시간 경쟁이 야구로 나타나며 경기당 1만 명이 넘는 관중을 모았다. CPBL의 흥행은 참여 팀의 증가로 나타났다. 3년이 지난 뒤 쥔궈슝,(준국베어즈) 스바오잉(시보 이글즈)이 리그에 참여해 6개팀으로 불었고 이듬해는 허신징(화신 웨일즈)이 가입해 7개팀으로 늘었다.
그러나 1997년 스바오잉의 주전선수들이 승부조작에 관여한 것이 발각되며 CPBL의 인기는 내리막길을 달린다. 여기다 이해 CPBL에 맞서 대만직업봉구대연맹(TML,Taiwan Major League)이 창설되며 대만프로야구는 양분됐다.
TML이 발족한 배경은 무엇일까. 중계권 때문이었다. 1995년 CPBL 중계를 맡던 뎬스타이인은 다음해 CPBL이 중계권료로 15억 원(약 450억 원)을 요구하자 중계를 포기하고 아예 새로운 리그인 TML을 발족했다. TML의 멤버는 타이페이 기다, 타이충 아간, 가오핑 파라, 치아난 루카 등 4팀이었다. 애초 예상은 CPBL의 위세에 눌려 흐지부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TML은 승승장구했다.
이유가 있었다. 먼저 선수 빼내기다. TML은 CPBL의 유명선수를 차례로 빼내 CPBL의 근간을 흔들었다. 여기다 독특한 선수관리가 한몫했다. TML은 CPBL과는 달리 구단에서 선수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TML에서 일괄 관리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어느 한 팀이 독주하는 현상이 사라졌다. 대만의 야구영웅 궈타이위안이 1997년 일본에서 은퇴한 뒤 대만으로 돌아와 TML 최고고문으로 취임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궈타이위안은 일본야구계 지인들을 대만으로 불러와 TML의 수준을 높이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 일본의 양대리그처럼 두 리그의 우승팀이 최종 결정전을 벌이지 않고 철저히 독립적으로 진행됐다. 한 해에 우승팀이 두 팀이니 팬들의 관심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TML의 독특한 선수관리도 팀 간 전력 차를 줄이는 데는 이바지했지만 팀 간 경쟁의식을 약화하는 단점을 드러냈다.
2002년 TML은 4팀이 2팀으로 합병하는 형태로 CPBL에 흡수됐다. 마침내 CPBL은 기존 퉁이스, 중신, 슝디샹, 싱농 등 4팀과 성타이, 디이를 더한 6개팀으로 단일리그를 이루게 된다. 2004년 성타이 기다가 성타이 코브라스로 팀명을 바꾸고 디이가 라뉴 베어스에 인수되면서 현재의 틀을 갖췄다.
SPORTS2.0 제 73호(발행일 10월 15일) 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