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이라크에서 귀국 삼 일만에 포항공대신축현장 발령을 받았다. 잔여공기가 6개월 남짓인데 골조가 끝나지 못한 상황이다. 결국 선후공정에 무관하게 자원을 퍼붓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일명 돌관공사에 서게 됐다.
준공 3개월 앞두고 일간 공정표와 마감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준공계획서 제출지시가 내려졌다. 초반은 현재의 흐름을 참조했지만 나머지는 거의 상상력에 의존해 작성했다. 이 계획서를 두고 참여사 합동회의가 열리는데 소장은 발언권이 없고 보고와 답변은 공사과장인 내 몫이다. 헌데 D-60일부터 계획이 어긋나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회의란 것이 질책이나 고함으로 끝났다. 준공이 한 달 남짓 임박했다, 역시 맞지 않는 공정표를 놓고 추궁하는 감독에게 계획서 수정과 현안문제를 같이 풀자는 제안을 냈으나 답은커녕 회의장에서 내쫓겼다.
나는 탈진 상태였고 내일 할일에 대한 불안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어지러움, 자괴감으로 더 이상 고통을 받는다면 극단의 방법을 생각해야할 지경이었다. 바로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다음날 인사차 어머니께 들러 올라온 사정을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고통이 끝없는 것 같아도 어이없게 풀리는 것이 삶이라셨다. 일이 틀어졌다고 사람까지 꼬여서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며 바로 현장에 가라셨다. 사흘 만에 복귀했다. 이후 신기하게도 현장은 문제들이 풀리며 준공일자를 지킬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아이가 잘 크고 재물이 조금씩 모이는 것, 때 맞춰 진급하는 기쁨에 취해 왔었다. 무탈하길 빌었으니 도전보다 유순한 삶이 나의 목표였다. 그런 날이 모여서 무엇이 되든지 하루하루를 때웠다. 그러다보니 닥친 복잡공정에 당황했고 아닌 책임에 자책하는 어리석음에 빠졌다. 서른이 넘어도 어른이지 못 했다.
이후 일이 풀리지 않거나 인내심이 필요할 때마다 포항을 떠 올리곤 했다. 격절에 속수무책이었던 나에게 밀물만큼 채워지는 바다를 비유하신 어머니. 귀임을 기다려준 소장님과 돌아온 나를 받아준 포철 건설부장, 그 분들과 연(緣)의 곳이라 그런지 포항을 생각하면 마음도 놓이고 반성이 쉽다.
첫댓글 그런 날들을 쌓고 쌓아 오늘까지 오신
그래서 지금 우리의 가족들과 이웃들을 만들어 오신
선배님들의 노고와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네에~그런과정들이 있었군요~
건설현장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수고를 하신 님께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도 86년 건축과를 졸업하였지만
대기업 몇 군데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신 후
서비스직으로 진로를 변경하였지요
. 아마 당시에 ㅎ건설이나 ㅅ건설에
합격하여 재직하였더라면 이미 정리해고
당했거나 해외건설현장에 남아 가족과
거의 이산가족으로 살아왔거나 다소
역동적이고 과격한 현장이 맞지않아
부동산업으로 방향을 전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글 감사 드리며...
늘 건강하시고 평안한 삶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도 몇번 낙방 끝에 겨우 취직 했지요
원래 소심했는데 살아가면서 허풍 얍삽해지고
리피터 말씀 공감함니다. 주말 잘 보네세요
이번 휴가를 포항으로 갈 것 같은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고통이 끝이 없을 거 같아도 어이없게 풀리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씀 , 끄덕입니다. 아드님한테는 살아있는 교육의
현장이겠네요. 삶의 지혜도 대물림되네요. 잘 읽었어요. 감사드립니다.
끝 문장을 수정 하였습니다.
무더위지만 즐거운 주말 되십시요
저도 대전 엑스포 전기에너지관 설계 사업책임자를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계약이 대충이라, 공사과정에서 모든 불리한 것은 을이 떠안게 되지요,
갑의 입장에서 일했지만, 참 불합리한 점이 많다는 것을 늘 실감했습니다.
하루 빨리 정상적인 질서가 잡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의미 있는 일을 하셨군요. 포항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포스텍은 세계를 향해 내 놔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거리니까요.
국제수준의 공과대학을 2년 도 않되는 기간에 기획,설계,시공까지 완료하는 추진력의 박태준회장
대한민국의 자랑임니다. 그분이 그립습니다.
포항에서 근무했었는데 ...가보고 싶어집니다
처가입니다. 구룡포 ㅎㅎ
그인연만 아니면 무의미한데 ㅋㅋ
혹 구룡포들리시면 까꾸네모리국수 한번 가보세요. 유명맛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