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언니가 아팠습니다.
참으로 예쁘고 공부도 잘했던 언니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마에게 엄마,,언니 어디 갔어? 라고 철부지 어린 내가 물었을 때 엄마는 언니 미국으로 유학갔어..라고 말했습니다..정말 어린 마음에 예쁜 우리 언니는 공부 잘해서 유학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미국으로 유학간 언니는 돌아 올 줄 몰랐습니다.
언니는 복수가 차서 남산만한 배를 가지고 15살 꽃다운 나이에 엄마,아빠가슴에 대못하나 박아놓고 하늘나라로 간 거 였지요..
그런 언니하나 잃은것도 서러운데..언니와 똑같은 15살 어린나이에 제가 엄마 손잡고 병원을 찾았을때...저 역시 하늘나라 보낸 언니와 같은 윌슨씨병이었습니다.
오열하던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저는 기억합니다. 어린 마음에 나 때문에 울부 짓는 엄마 아빠를 보며 엄마 울지마 아빠 울지마 내가 잘못했어 라고 같이 울었습니다..가슴 아팠었지요..그러나 언니와는 달리 윌슨씨병의 유일무이한 치료약인 페니실라민이 제겐 부작용이 없었습니다..3달넘게 원주기독병원에 입원치료후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은 했으나..제겐 평생 페니실라민을 먹어야 하며 치료는 되지 않는 질병이란 사실을 들었습니다.. 간에 구리가 침착되다니.. 유일한 치료법은 간이식이란 것을 어린 나이부터 알았지요..
하지만 일상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기에 ..페니실라민 먹는것도 게을리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린 시절 3달간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보았던 간호사언니들이 너무나 이뻐서 간호과로 진학했고..병원 중환자실에서 3년 넘게 근무하며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누구도 제게 그 병이 여전히 잠재되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었지요.
하지만 결혼 후 계속되는 습관성유산에 전 그 윌슨을 생각했어야 하는데 참으로 바보스럽게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직장을 그만 두면 행여 임신이 될까 싶어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어도 아기라는 성스러운 축복은 제게 없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삼성화재를 알게 되어 설계사로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삼성화재에 발 디딘 후 두 달째 되는 날 웅덩이에 빠져 아킬레스건이 짤렸습니다. 이 아킬레스건이란것이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응급을 요하는 수술입니다. 분당에 있는 차 병원으로 갔는데 제 혈액수치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수술은 안하고 내과로 옮기더군요 그 때 간 경화 3기로 진단을 받았습니다.
간경화 3기란것은 정말로 큰 병이었는데 ...
남편에게 차병원의사선생님이 그러더랍니다. 3년이면 길게 본거라고요.
33살 마누라를 3년만 보고 보낸다니..참 그때 남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렇게 시작된 7년의 투병생활동안 한번은 식도정맥류로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 실려갔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제가 처녀시절 근무하던 중환자실이더군요.그때의 착잡함이란 이루 말할수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힘을 내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위에 출혈이 생겨서 밥도 못먹는 저를 같은 삼성화재 식구들은 전복죽을 사다주며 조금이라도 먹으라고 안타까워 하곤 했었습니다.
그외에도 병원에 입원하는것은 7년간 옆집 놀러가듯이 다니는 내 연중행사가 되어버렸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실려가던날 아침 출근해서 제가 소장님께
소장님 나 너무 아파요..라고 하자 그 소장님이 아프긴 멀쩡해보인다..라고 했는데 제가 그날 차병원 중환자실로 실려가자. 제게 그런 소리를 했다는것에 죄책감을 느낀 그 소장님 면회도 안되는 중환자실 병실밖에서 하루종일 멍청하니 서 있다 가고 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으면서 제가 참 여러사람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전 참으로 씩씩했습니다. 기죽지 않았습니다. 병이 걸려 곧 죽을거라고 의사선생님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전 항상 웃었습니다. 지금사 생각하면 저의 그런 성격이 저를 버리지않고 3년 후 끝날 거라는 제 생명을 7년이나 연장해 준 것 같습니다.
모임의 후배가 제가 윌슨으로 인해서 간경화란 사실을 알고는 어느날 전화가 왔더군요.
누나 윌슨병 그건 간이식하면 낳는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간이식이란건 제게 너무나 먼나라의 이야기였습니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날 차병원의 의사선생님께 제가 물었습니다. 저 죽어요? 참 얼마나 어리석은 물음이었는지.
그런데 이 보험회사란것은 시책이 있습니다. 제가 그 시책에 대상이 되어서 제주도로 놀러갔습니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소주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돌아온 제게 온것은 복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차기 시작한 복수는 몇년을 제게 따라다니면서 만삭이예요? 소리를 항상 듣게 했지요.
복수를 빼면서 배에 꼽은 호스로 빠지는 그 노오란 물은 항상 저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마지막 수술대위에 올라가게 될때 제 몸무게가 93킬로였습니다. 저를 아는 모든 이들은
배가 터질것 같았다고 하더군요..
저는 2003년 1월2일에 남편과 함께 다니던 차병원을 뒤로 하고 강남성모를 찾았습니다. 그때 차오른 복수로 인해 저는 갈비뼈가 두대나 나가있는 상태였고..이미 저는 생을 포기했었습니다.
하지만 나없이 혼자 살아갈 남편이 가여워서 항상 눈물지었고..농담처럼 자기야 나죽으면 자기 꼭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해 그리고 이쁜 아기도 낳아서 행복하게 살아 정말 미안해.. 라고 했었습니다.
그 말을 하며 일부러 농담처럼 말할려고 웃으면서 말했지만 속으로는 정말 가슴이 아려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1월2일 강남성모병원을 찾았을때 사실 간이식에 대해 남편이 여러군데 알아봤었나 봅니다.
아산병원에서 이식을 받은 분이 1억이 들었다고 할때 남편은 암담했다고 하더군요.
우리한테 있는 모든것을 다 팔아도 그 돈이 안되었거든요.
하지만 우연히 강남성모를 알게 되었고 전화로 상담끝에 4500만원이면 된다는 소리에.
남편은 내 손을 잡아 끌고 강남성모로 갔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최종영교수님은 입원을 시켰고 검사를 받기위해 동생도 시골에서 올라왔습니다..
장기이식센타에서 저보다 먼저 수술한 분들을 보면서 남편이 너두 저렇게 될 수있어..희망을 가져..라고
말하며 상기된 얼굴로 수술비를 마련하기위해 여기 저기 전화해 대던 얼굴을 쳐다보며
전 부모에게 물려받은 윌슨이란 병 때문에 세상을 원망했지만 다시 지금의 내남편이란 사람을 만나게 해준것에 대해 정말 감사했습니다.
검사를 받던 동생이 C형간염이 의심댄다며 재검사에 들어갔을때 절망하는 제게 최종영교수님의 눈빛에서 안스러워 어쩔줄 몰라 하는 표정을 보며..그래 행여 동생이 안된다고 하더라도 내 생명의 끈을 놓아주지는 않겠구나하는 믿음을 가졌으니..내게 강남성모병원과 최종영교수님은 정말 생명의 은인이신겁니다.
수술날자를 잡고 수술을 하고 제가 7년을 하루같이 근무하던 삼성화재 직원들이 성금을 모아 가지고 왔습니다.
각 영업소마다 모금함을 놓고 저의 쾌유를 기원하고..있다는 말을 듣고 전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이란것을 느꼈습니다.
정말 감사한 직원들이었습니다. 돌이켜생각하면 제가 만약 삼성화재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전 우울증에 빠져 내 삶을 비관하며 죽었을 지도 몰랐겠지요.
지금 수술후 4개월 뒤부터 복직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영업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제 경험이 보험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되더군요.
재검사에 들어갔던 동생이 이식할 수있다는 판정을 받고난후 수술 스케쥴을 빠르게 잡고 각종 검사에 들어갔습니다.
수술전날 전신을 면도하고 베타딘을 온몸에 뒤집어 쓰고 대장을 비우기위해 관장을 두번이나 하면서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힘들었던건 시집도 안간 동생의 배에 흉터가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생이 그러더군요. 이배의 흉터 때문에 뭐라고 할 신랑감이라면 이쪽에서 거부하겠다고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수술전날 많은 상념에 잠겨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아침이 밝아와 드디어 면역억제제 7알을 먹고는 수술방으로 저를 데리고 가는데 따라오는 형부와 남편앞에서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올까..난 정말 바르게 살았는데..병원복도가 떠나가라 엉엉 우는 나를 따라오며
남편이 꼭 살거야 ..이따가 보자..라며 따라오는데 자기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소리만 해댔습니다.
수술방에서 먼저 들어와 있던 동생을 만났습니다. 수녀님이 오셔서 동생 침대 옆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동생에게 미안하다며 내가 막 울자 내 동생이 제 손을 꼬옥 잡으며 말하더군요.
난 괜찮아 언니는 꼭 일어 날 꺼야.. 힘내..
수술실의 둥그런 불빛을 보며 신이 계시다면 저를 꼬옥 살려주세요 하고 빌었습니다.
신은 계셨나봅니다. 저는 12시간의 수술이 끝난후 중환자실의 무균실에서 눈을 떳습니다.
면회시간에 유리창밖으로 내다 본 남편의 얼굴은 상기되어있는 얼굴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인터폰으로 나 어때? 라고 물었고 남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일인실로 옮겼을때 창밖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저는 다시 태어난 거였습니다. 그간의 세월이 너무나 힘들어 눈물만이 쏟아지더군요.
이주간을 일인실에 있으면서 유리창 밖 세상의 그 아름다움에 다시 태어난 내 삶을 정말 보람있게
보내겠노라 다짐 또 다짐했었습니다.
순조로운 병원생활을 마감하고 마스크를 쓰고 퇴원하던날 상기된 남편의 모습이라니.
길고 긴 여행길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심정이 이랬을까요.
한달만에 돌아온 집은 정말 아름다음 그 자체였습니다.
키우던 강아지를 다른 집으로 보내고 와서 그런가 한식구였던 강아지와의 이별이 못내 가슴이 아팟습니다..
이 아침 눈물을 훔치며 투병기를 읽습니다. 큰 시련 속에서도 남편분의 변함없는 사랑에 박수드리며, 수술 후 4개월에 복직이시라니, 정말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늘 조심하시고 이 행복 끝까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수술회복 중인 보호자라 그 심정 절절히 느끼고 갑니다.
첫댓글 아~~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이십니다.가슴이 벅찹니다.그 힘든 세월을 너무나 용기있게 살아오셨음에 온몸으로 박수를 쳐드립니다.그리고 건강을 회복하셔서 또 너무나 기쁩니다~사랑하는 남편분과 동생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행복하세요~!!
감동적인 글 잘 보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시련이 있었지만, 세찬 폭풍우와 파도 다 헤치고 여기까지 오셨으니 앞으로 좋은 일만 맞으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축하 드립니다. 앞으로 내내 건강 하세요!
정말 감동적인 글.. 저까지 행복해 지네요.. 이렇게 아름다운 햇살을 다시 볼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한거 겠죠.. 앞으로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한편의 아름다운 서사시 입니다. 공부하는엄마님의 씩씩한 모습에도 박수를 드려요
갑자기 눈물이 핑~ 도네요. ㅠ.ㅠ 앞으로 좋은 일들만 생기시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셔요.
정말 감동입니다. 이런경험안해본환자분이나나 보호자분은 이런심정 모를것입니다. 이제 새 삶이 있으니 더욱더 건강하십시요. 홧팅!!!
이 아침 눈물을 훔치며 투병기를 읽습니다. 큰 시련 속에서도 남편분의 변함없는 사랑에 박수드리며, 수술 후 4개월에 복직이시라니, 정말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늘 조심하시고 이 행복 끝까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수술회복 중인 보호자라 그 심정 절절히 느끼고 갑니다.
저도 눈가에 눈물이 고이네요. 새롭게 얻으신 생명 잘 관리하셔서 남편과 백년해로하시길 바랄께요
눈물이 앞을가려 겨우 끝까지 보았습니다. 주신 생명의 감사함으로 늘 아름다운 부부애로 행복하게 사세요.^*^
감사합니다...저 무척 씩씩하게 잘 살꺼에요 화팅..
슬퍼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