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한 장마, 회원들과 만남도 미뤄지고 하안거하는 수도승처럼 집안에만 있자하니 옛날 다니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그중에서,
2024. 06.04(화)일에 찾아 가본 신원사(계룡산) 중악단 현판 글씨를 자세히 들여다 본다. 무슨 정보가 있을까 해서.
계룡산 신원사에 중악단을 세울 무렵의 우리나라 안팎 형세는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나라이름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라는 이름으로, 년호도 사용하고 하지만,
국가 수뇌부가 정신 못 차릴 때, 주변 열강들은 먹이를 만난 이리떼처럼 청나라, 러시아, 일본까지. 남의 집 안마당에서 청일전쟁도 일으키고, 러일전쟁도 일으키고.. 척화비를 세우고 막으려 하지만...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흑같은 시절, 민심 또한 흉흉했을 터, 정감록의 가치가 몰래몰래 퍼져 나가고, 동학농민운동에.... 서학까지 들어오고.. 이런 민심도 다스릴 겸해서 민속신앙에 의존했을 터인데. 그래서 계룡산 신원사에 충청관찰사가 절 이름도 신원사(神院寺)를 현재의 신원사(新元寺)로 바꾸고, 중악단도 세우지만 결국은 나라는 망하고 만다.(1910. 7. 29 경술국치일)
답사 당시의 사진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본다.
전에 갔을 때는 중악단 앞 양 쪽에 커다란 구골나무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 베여지고 없다.
대신 화분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산신령이 타고 다니시던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호랑가시나무 대신 그를 닮은 구골나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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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악단 현판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신묘 직지어사
이중하 (李重夏) 書
그는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후손이라고 한다. : 신묘 직지어사 이중하 서 (辛卯 直旨御史 李重夏 書) 신묘년은 고종 28년 (서기 1891년)이오 그의 벼슬은 직지어사이었다.
신묘년은 1891년이니 토문감계사 임무도 끝난 지 4년 후로 그는 그 때 직지어사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흔히 말하는 암행어사 시절에 이 중악단 현판 글씨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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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 : 암행어사 : 지방 수령 방백들에게는 시어머니 모습이었을 어사 출도요.. 춘향전 판소리 한 대목이 떠오른다...
봉고파직하라는 어사의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본래 지방의 수령들이 ( 현감 , 군수, 부사 목사들이)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잘 이끌고 보살피는 지를 관찰하고 감시, 평가하는 일은 관찰사, 또는 감사(觀察使 , 監司)라는 한자말이 뜻하는 것처럼 제도적으로 되어 있지만, 왕은 직접 마냥 미복 차림으로 다 직접 돌아 볼 수는 없는 것, 그래서 그 임금을 대신해서 민정을 살피고 직보하기를 바라는 체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가 곧 암행어사 제도다. 암행어사 하면 많은 일화를 남긴 천안의 박문수가 유명하지만.
그런데 그 암행어사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단다.
보통 우리가 아는 암행어사는 임금의 명을 비밀리에 수행하는 이른바 암행어사를 떠 올리게 된다..
이는 곧 직지어사, 또는 수의어사(直旨御史, 繡衣御史)를 가리키는 것이다.
또 다른 어사는 이조(吏曹)에서 임명하는 암행어사가 있었다. 권위에 있어서 단연 왕명을 직접 받은 암행어사의 권위가 더욱 위엄이 있음은 당연한 것. 비록 품계는 낮아도 그 권한이 막강했으니, 나중에 황제를 대신하는 흠차(欽差대사) 또한 마찬가지였듯 말이다..
이중하는 안변부사 시절인 1885년에 토문감계사로 토문지방(현재의 간도 지역)이 우리 영토임을 확정하기 위해, 청나라와 국경을 획정하는 회담에 대표로 참석한다.,
그 2년 후인 덕원부사 시절인 1887년에도 다시 토문감계사로 임명되어 백두산 정계비에 나와 있는 " 토문"이라는 글자 해석이 두만강이 아닌 토문강이라고 주장하지만 청국은 현재의 두만강을 고집하고, 이렇게 '"토문"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양측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국경을 정하는 일은 어정쩡하게 미봉인 상태로 세월이 흐르고, 나라는 망해 가고 있었고......
1891년(신묘)에 이 현판 글씨를 쓸 때의 이중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역사는 비극적인 쪽으로 흐르고,
1895년 을미년(을미사변)에 중악단을 짓고 기원을 올렸던 명성황후는 비명에 세상을 뜨고...
1909년 외교권을 침탈한 일본은 조선을 대신해 청나라와 만주철도부설권 획득과 간도국경문제를 청의 뜻대로 하는 안과 맞바꿔 협약을 체결하는, 이른바 간도협약으로 이어진다. 을사늑약이 정당한 합법적 절차에 의하지 않았듯이 간도협약 또한 국제법적으로 공인받지 못하는 협약이 되었지만, 어쨌든 현실은 이렇게 해서 토문 즉 간도지방은 우리가 아는 북간도가 되어 그후 독립군들의 본거지가 되다시피하고 윤동주의 고향이 된다. 약소국의 설움이 배어있는 간도 (만주 일대가 다 그렇지만..) 마저도 잃어버리고, 조상이 물려준 넓고 넓은 고토는 다 빼았기고 백두산 남쪽 자락 한 귀퉁이만 차지하고 있게 된다.
그마저도 허리가 반 토막이 나버린 채로.. 통일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
다시 (산신각) 중악단 현판을 보면서 만단정회가 감돈다.
(* 신원사 경내 영원전 현판도 이중하가 쓴 것이라고 한다. 다음에 갈 때는 보고 올 수 있으려나.)
( 2024 .07.16(화) 카페지기 자부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