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국 스님의 신.심.명. 강설]
2.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라 다만 간택함을 꺼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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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안휘성 천주산에 있는 삼조사. 이곳에 있는 삼조동굴은 삼조 승찬 스님이 신심명을 집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嬚揀擇)이니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하리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라 다만 간택함을 꺼릴 뿐이라. 신심명 첫 구절이며 신심명 대의가 다 들어있는 구절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런 만큼 지극한 도에 대해서 가능한 할 수 있는 데까지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요. 그런데 지극한 도는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말로 표현하려니 부득이 지극한 도라고 했을 뿐, 도에는 지극한 도니 평범한 도니 그런 명칭이 붙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극한 도에 대한 정견(正見)이 없이는 신심명을 배워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부질없는 설명을 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글이란 말을 다 표현할 수가 없지만 말은 글이 아니면 뒷사람에게 전할 수가 없고 말로서는 뜻을 다 전할 수가 없지만 뜻은 말이 아니면 드러내지 못한다는 고인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모자란 데로 한번 풀어 나가겠습니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이 지극한 물입니다. 물고기와 물은 분리될 수 없으니까요. 물고기와 물은 한 몸입니다. 그러나 물고기 눈에는 물이 보이지 않는답니다. 허공으로 보인답니다. 우리가 배우려는 지극한 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우리도 도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도에는 안과 밖이 없습니다. 원융무애하기 때문에 안팎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본래의 ‘나’입니다. 그래서 3조 승찬 스님께서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고 하신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도에서는 물과 허공이 다르지 않을뿐더러 일체가 ‘원융무애’합니다. 3조 승찬 스님은 지극한 도가 삶이 되었기에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지극한 도는 사람 사람마다 온전히 갖추어 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 밝은 스승들은 사족을 부치고 설명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설명하는 일이 중생을 위하는 길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아예 수행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이렇게 허물을 안고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도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고 직접 체험해서 자기 삶이 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지극한 도는 도에 대해서 체험한 만큼 즉 믿는 만큼 보입니다. 요즈음 말로 아는 만큼 보이는 겁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正見(정견) 즉, 바른 믿음입니다.
본래 부처임을 바로 믿는 겁니다. 모자라서 보태거나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본래 원만 구족함을 바로 보는 ‘正見’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 육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몸을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얼마 전 저는 아주 귀여운 애기 때 ‘돌’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고추를 다 내어놓은 채로 찍은 애기 사진인데 엄청 귀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이 바로 내 어릴 때 사진이라는 겁니다.
말로 표현하려고 하니
지극한 도라고 했을 뿐
도에는 지극한 도니
평범한 도니 구분없어
분별하는 상대성 양변을
모두 초월해 원융무애한
이치를 지극한 도라 이름
저는 13세에 출가했기 때문에 어릴 적 사진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회갑 다 지나서 보는 돌 사진이 누군지 알 수가 없겠지요. 본인이 본인인줄 모르는 겁니다. 여기에 돌 사진과 10대, 20대, 30대, 환갑 지난 사진을 펴놓고 보면 어느 사진이 ‘나’입니까? 다 내 사진이라지만 모두 다 내가 아닙니다.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으니까요. 마치 얼음으로 정성 드려 잘 조각해 놓은 조각상을 햇볕에 내놓으면 살살 녹아가는 모습과 우리가 늙어가는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육신으로서의 나는 변해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변해가는 모습에 무슨 고정된 실체가 있겠습니까? 계속 쉼 없이 변해가는 것은 내 모습만이 아닙니다. 일체 삼라만상 모두가 변해가는 과정으로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이 사실을 분명히 바로 보는 것, 이것을 바른 믿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변해 나가는 원인과 결과 즉, 연기법을 분명히 바로 보고 바로 행하는 것을 ‘正見’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원리를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며 ‘유혐간택’이라고 할 때 간택할 실체가 없다는 겁니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를 두고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니 지극한 도는 간택함을 꺼린다는 깊은 뜻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공간적으로 살펴봐도 또한 그렇습니다. 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내 입장에서는 남쪽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저 뒤에 계신분이 볼 때는 북쪽에 앉아 있는 게 분명하거든요, 남쪽이니 북쪽이니 하는 것은 나를 기준으로 하는 것 일뿐 내가 없으면 동서남북 또한 없습니다. 서울 조계사에서 볼 때는 제가 살고 있는 충주 석종사가 남쪽에 있지만 부산에서 보면 북쪽에 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는 남쪽이 맞고 부산에서는 북쪽이 맞습니다. 양쪽 다 맞다는 것은 양쪽 다 틀렸다는 의미입니다.
신심명에서는 이와 같은 모순을 뛰어 넘어 맞다, 안 맞다, 너다, 나다 하는 상대성 양변을 모두 초월하여 ‘원융무애’한 이치를 지극한 도라고 이름 하신 겁니다. 중도(中道)를 말하는 겁니다. 결국 지극한 도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증애심인 양변을 초월해야 합니다. 양변을 뛰어넘는다고 해서 뛰어넘은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양변이 없어지면 가운데라는 개념도 저절로 사라집니다. 한국에 있는 집이나 북한에 있는 집이나 집을 허물어 버리면 꼭 같은 허공이 됩니다. 남이니 북이니 자체가 없고 한국이니 북한이니 하는 이름도 없어집니다.
문제는 동서남북이니, 너니, 나니 하는 모든 이름을 인간들이 마음대로 부쳐놓은 이름일 뿐이지 저들이 정해달라고 해서 만들어진 이름이 아닙니다. 그냥 한 허공일 뿐입니다. 그렇게 된 삶을 중도의 삶이라고 하고 지극한 도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간택할 실체가 없는 것을 본인이 스스로 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본인이 착각에서 깨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비교하고 경쟁하는 인간의 심리는 매우 심각합니다.
누구든지 집이 없던 사람이 처음으로 집을 장만하여 30평 아파트로 갈 때는 얼마나 좋아 보이고 행복했는지 모른답니다. 그런데 경쟁자인 동창생이 50평 아파트를 사서 이사 갔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자기 30평 아파트는 형편없이 작아보이게 되고 불평이 시작되는 겁니다. 행복해하던 분명 그 아파트이건만 한 생각 일으킴으로 인해 형편없는 아파트가 되어버린 겁니다. 결국 한 생각 일으키는 그 마음 따라 이세상은 창조 되고 멸하고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이 생각이 나오는 자리, 사랑과 미움이 둘이 아닌 그 자리를 바로 보면 바로 ‘통연명백’인 것입니다.
우리 본질 즉 본마음 연기 공성으로서의 참 나에는 미워하고 사랑하고가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라고 하셨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증애심만 놓아버리면 통연명백하니라 하셨거든요. 그러나 증애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꿈꾸고 있는 사람은 일단 꿈속의 일을 사실로 받아들이니까요.
아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해하는 것 가지고는, 생각으로는 되지만 삶으로는 되지는 못합니다. 증애심이 끊긴 원융한 공간, ‘나’라는 벽이 없다는 사실을 실참실구하여 직접 체험해야만 합니다. 통연명백이라고 생각으로 아는 것을 지식이라 하고 통연명백이 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지식은 기억하는 것이고 수행은 직접 체험하여 자기 삶이 되는 겁니다. 익히고 습득하는 기술을 체험하는 게 아니고 비우고 비워서, 쉬고 또 쉬는 고요의 체험을 말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요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을 말합니다. 성성적적은 나의 본래 고향이며 본래 모습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성성적적은 연습해서 새로 만드는 게 아니고 완벽한 본래 자기 모습이니까요.
제가 외국스님들하고 송광사에서 같이 참선을 할 때였습니다. 그 당시 7개국 스님들이 같이 모여 살 때인데 어느 나라 스님인가 내가 있는 수선사 선방에 와서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스님은 부처님을 만난 일이 있느냐고요. 그럼요, 매일 만납니다. 그러면 내일도 만날 겁니까? 예, 물론이지요. 그러면 내일 부처님을 만나거든 왜 우리 앞에는 나타나지 않느냐고 물어봐주십시오. 예, 그러지요. 꼭 물어봐 달라고 강조하면서 나가는 그 스님 뒤를 쳐다 보면서 사실 우리는 부처님을 만나는 게 아니라 늘 같이 살고 있는 건데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뒷날 찾아와서 물어 봤냐기에 물어 봤다고 그랬지요. 그런 뒤 스님들 사이에서 하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자네들 찾아가려고 통화했더니 자네들은 24시간 하루 종일 통화중이라서 통화가 안 되더랍디다. 그랬더니 외국 스님들이 상당부분 정말 그렇다고 긍정하는 거예요.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중 꽤 많은 시간을 번뇌와 망상, 온갖 잡생각 하느라고 자신을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고요라는 본모습 자기 자신을 지키는 시간이 많지 못합니다. 이런 하루가 쌓여 일 년이 되고 일생이 되는 겁니다. 내 한평생이라는 삶을 냉철하게 돌아보면 내 감정에 휘둘려 다니느라 보낸 인생이지 내가 누구인지 참나는 오늘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 자신을 잘 지켜 주인으로서 보낸 시간은 얼마 안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잘 지켜서 주인이 주인 노릇한 시간을 고요의 체험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지켜야할 내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단막증애하면 바로 그 자리입니다. 바람이 없으면 파도는 그대로 바닷물이니까요.
저는 젊은 시절 한창 공부할 때 파도 자체를 없애려고 많은 갈등과 시간 낭비를 했습니다.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인생을 낭비한다는 얘기요, 인생을 낭비한 죄는 죄 중에서도 큰 죄로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슬픈 일 가운데 하나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 안다는 사실입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내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늙어 버렸다는 현실이 이 얼마나 한스러운 일입니까. 이 말은 옛부터 내려오는 고인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막증애하면 통연명백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는 증애심이라고 표현한 이 말속에는 이 세상 모든 상대성과 모든 갈등이 다 들어 있습니다.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너다, 나다 모든 시비를 다 포함하고 있는 아주 함축된 언어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면 이미 증애심입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應無所住)이생기심(而生其心),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낼 때만이 단막증애가 되는 시간입니다. 그 길은 단막 즉 ‘몰록’이라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심명이 비록 짧은 글이지만 그 내용은 중도 총론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단막증애하면 통연명백하는 도리는 알아도 되고 말아도 되는 일이 아니라 언젠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일입니다. ‘지도무난이요 유혐간택이니 단막증애하면 통연명백하리라’하신 이 열여섯 글자에 우주 대진리를 다 보여주신 겁니다. 눈앞에 역력하게요.
■ 혜국 스님은
1948년 제주 출생으로, 1962년 해인사로 출가해 일타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70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고 1970년 22세에 ‘성불’(成佛)을 발원하며 오른손 손가락 3개를 연비했다. 이후 태백산 도솔암에서 2년 7개월 동안 생식 및 장좌불와를 하며 매서운 정진에 몰입했다. 경봉, 성철, 구산 스님 회상에서 수행정진하면서 해인사, 송광사, 봉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수십 안거를 성만했다. 1994년 제주 남국선원 무문관을 개원하고 2004년 빈터만 남은 충주 폐사지에 석종사를 창건했다. 현재 석종사 금봉선원장으로 주석하면서 수행납자와 재가수행자들을 정진의 길로 이끌고 있다.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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