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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 하느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참 지혜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루카 7,31-35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르넬리오 성인은 251년에 로마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그는 박해 시기에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공동체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로마의 사제 노바티아누스 이단에 맞서 투쟁하였고,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의 도움으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였다. 갈루스 황제가 252년 6월 다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면서 그에게 유배형을 내렸고, 253년 6월 이탈리아 치비타베키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성 갈리스토 카타콤에 묻혔다.
치프리아노 성인은 210년 무렵 카르타고(현재 튀니지 일대)의 이민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246년 무렵 체칠리아노 사제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례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제품을 받고, 249년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어 어렵고 힘든 시대에 모범적인 덕행과 저술로써 교회를 훌륭히 다스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유배당하고, 신임 총독 갈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재판받다가,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오늘의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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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이들에게 신뢰를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 속에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에 대한 판단과 식별도 그때그때 달라지고 뒤틀립니다. 고백하건대, 대개의 판단과 식별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이기심으로 그 순수성과 진정성이 퇴색해 가고는 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한결같았습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으로 초대하셨다. 그 구원은 모든 이가 화해와 용서 안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늘 함께 계실 것이다.’라고 요약되는 복음의 가르침은 이제껏 달라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문제는 수많은 인간들의 다양한 해석에서 비롯합니다. 몇몇 해석들은 타락하여 이단이 되었고, 몇몇 해석들은 감히 근접하기 힘든 고도의 수련으로 뻗어 갔습니다. 모든 해석은 어느 정도 제 삶의 가치관과 이해관계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 신앙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좋습니다. 어떤 해석이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고유하게 다듬어 온 것이니 좋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 대한 단단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에 앞서 자신이 가꾸어 온 삶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세상의 흐름에 물결치듯 흔들리며 기회주의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는 단순함이 필요한 것이지요.
힘의 논리와 경제 논리 앞에 자기 삶의 가치관마저 포기하는 비굴함이 세상살이의 당연한 이치로 변질되고 신앙을 지키는 것이 교조주의적 계명 몇 가지를 실천하는 것으로 축소된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부터 회복해야 할 슬픈 시간을 살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박병규신부님 매일미사「오늘의 묵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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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 신부님 글 드립니다~~~~
「이런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 캅(John Cobb), 그리핀(David Griffin)과 같은 신학자들은 신이 다음과 같은 존재라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 신이 도덕군자로서의 엄한 심판자이기만 하다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신이 세상의 고통과 비극에 무감각한 절대자라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3) 신이 인간을 인형처럼 조종하고 자유를 박탈하는 통제자라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4) 신이 부조리한 현실을 옹호하고 묵인하는 존재라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5) 신이 여성을 비하하는 남성성을 가졌다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 이런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받고 싶은 것을 세상에 주어라. 그것이 결국 당신이 받게 될 것이니까(게리 주커브).>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 7,31-35)
「今の時代の人たちは何にたとえたらよいか。
彼らは何に似ているか。
広場に座って、互いに呼びかけ、
こう言っている子供たちに似ている。
『笛を吹いたのに、
踊ってくれなかった。
葬式の歌をうたったのに、
泣いてくれなかった。』」
(ルカ7・31-35)
“To what shall I compare the people of this generation?
What are they like?
They are like children who sit
in the marketplace and call to one another,
‘We played the flute for you, but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but you did not weep.’”
(Luke 7:31-35)
聖チプリアノ司教殉教者聖コルネリオ教皇記念日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ウリガ ピリル ブロ ジュオドノヒヌン チュムチュジ アンコ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ウリガ コグル ハヨド ノヒヌン ウルジ アナッタ。
(루카 7,31-35)
「今の時代の人たちは何にたとえたらよいか。
彼らは何に似ているか。
広場に座って、互いに呼びかけ、
こう言っている子供たちに似ている。
『笛を吹いたのに、
후에오 후이타노니
踊ってくれなかった。
오돗테쿠레나캇타
葬式の歌をうたったのに、
소오시키노 우타오 우탓타노니
泣いてくれなかった。』」
나이테쿠레나캇타
(ルカ7・31-35)
“To what shall I compare the people of this generation?
What are they like?
They are like children who sit
in the marketplace and call to one another,
‘We played the flute for you, but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but you did not weep.’”
(Luke 7:31-35)
Memorial of Saints Cornelius, Pope, and Cyprian, Bishop, Martyrs
Luke 7:31-35
Jesus said to the crowds:
“To what shall I compare the people of this generation?
What are they like?
They are like children who sit in the marketplace and call to one another,
‘We played the flute for you, but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but you did not weep.’
For John the Baptist came neither eating food nor drinking wine,
and you said, ‘He is possessed by a demon.’
The Son of Man came eating and drinking and you said,
‘Look, he is a glutton and a drunkard,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But wisdom is vindicated by all her children.”
2026-09-16「笛を吹いたのに、踊ってくれなかった。葬式の歌をうたったのに、泣いてくれなかった。」
+神をたたえよう。神はわたしたちのうちに不思議なわざを行われた。
おはようございます。
今日は聖チプリアノ司教殉教者聖コルネリオ教皇記念日で
す。
十字架の主・イエス・キリストと悲しみの聖マリア、聖母の配偶者聖ヨゼフ、聖チプリアノ・聖コルネリオ、諸聖人の大いなる祝福がありますように!
また、大天使とすべての天使、私たちの守護の天使が今日も皆さまを見守り平和でありますようお祈りします。
**********聖コルネリオは、251年にローマの司教に叙階されました。彼は、迫害の際に棄教したキリスト者を再び教会共同体に受け入れることを拒んだローマの司祭ノヴァティアヌスの異端に立ち向かい、カルタゴの司教聖チプリアノの助けを得て、自らの権威を確立しました。ガルス皇帝が252年6月に再びキリスト教徒への迫害を始めると、コルネリオは流刑に処せられ、253年6月、イタリアのチヴィタヴェッキアで亡くなりました。その遺体はローマに移され、聖カリストのカタコンベに埋葬されました。
聖チプリアノは、210年ごろ、カルタゴ(現在のチュニジア一帯)の異教徒の家庭に生まれました。246年ごろ、司祭カエキリアヌスの影響を受けて洗礼を受け、自らの財産を売って貧しい人々に分け与えました。洗礼を受けて間もなく司祭に叙階され、249年にはカルタゴの司教となり、困難な時代に、模範的な徳と著作をもって教会を立派に導きました。ウァレリアヌス皇帝の迫害の際に流刑に処せられ、新たに着任した総督ガレリウス・マクシムスの裁判を受けた後、258年9月14日、カルタゴ郊外で斬首され、殉教しました。(『今日の典礼』よ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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ルカによる福音
<笛を吹いたのに、踊ってくれなかった。葬式の歌をうたったのに、泣いてくれなかった。>
そのとき、イエスは言われた。7・31「今の時代の人たちは何にたとえたらよいか。彼らは何に似ているか。32広場に座って、互いに呼びかけ、こう言っている子供たちに似ている。
『笛を吹いたのに、
踊ってくれなかった。
葬式の歌をうたったのに、
泣いてくれなかった。』
33洗礼者ヨハネが来て、パンも食べずぶどう酒も飲まずにいると、あなたがたは、『あれは悪霊に取りつかれている』と言い、34人の子が来て、飲み食いすると、『見ろ、大食漢で大酒飲みだ。徴税人や罪人の仲間だ』と言う。35しかし、知恵の正しさは、それに従うすべての人によって証明される。」(ルカ7・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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気まぐれで、言うことや態度がころころ変わる人を信頼することは難しいものです。それは、世の中を見るときも同じです。私たちの生活の中で絶えず起こっては消えていく数多くの出来事や事件に対する判断や識別も、その時々によって変わり、ゆがんでしまいます。正直に告白するなら、たいていの判断や識別は、自分の利益を優先して計算する利己心によって、その純粋さと誠実さを失っていくものです。
イエス様と洗礼者ヨハネの呼びかけは、いつも一貫していました。「初めから神様は、人間を救いへと招かれた。その救いとは、すべての人が和解と赦しのうちに共に生きられるようにすることであった。したがって、この世は愛の共同体とならなければならず、互いに愛し合うところに神様はいつも共にいてくださる。」このように要約できる福音の教えは、これまで一度も変わったことがありません。
問題は、人間による多種多様な解釈から生じます。ある解釈は堕落して異端となり、またある解釈は、容易には近づくことのできない高度な修練へと発展しました。すべての解釈は、ある程度、自分自身の人生観や利害関係から生み出されるものでもあります。これまでどのように生きてきたのか、今どのように生きているのか。その答えが、信仰を解釈する方法に表れることがよくあります。それでよいのです。どのような解釈であっても、それぞれが自分の置かれた場所で独自に磨き上げてきたものだからです。
しかし、一つ覚え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あります。それは、自分自身の固有の視点に対する揺るぎない信頼と愛です。隣人を愛する前に、まず自分がこれまで育んできた人生を愛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自分自身を信じられない人は、世の中の流れに波のように揺さぶられ、やがて日和見主義者へと転落してしまいます。「はい」と言うべきことには「はい」と言い、「いいえ」と言うべきことには「いいえ」と言う、そのような単純さが必要なのです。
力の論理と経済の論理を前にして、自分の人生の価値観までも放棄する卑屈さが、世渡りの当然の道理であるかのように変質しています。また、信仰を守ることが、教条主義的な幾つかの掟を実践することだけに縮小されてしまった今日、私たちはまず、自分自身に対する信頼と愛を取り戻さなければならない、悲しい時代を生きているのかもしれ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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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日の福音を読み、変わることのない福音の教えに信頼し、「はい」は「はい」、「いいえ」は「いいえ」と誠実に答えながら、自分自身と隣人を愛して生きることができますように。聖霊、来てくださ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