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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사대주의事大主義를 담은
조공朝貢과 책봉冊封
글,편집: 묵은지
최근들어 중국이 유별나게 우리나라의 문화(文化)나 경제(經濟) 쪽으로 간섭(干涉)과 함께 규제(規制)를 심하게 해대고 있습니다. 특히 경제분야는 그 여파(餘波)나 후유증(後遺症)이 매우 커서 어떤 경우는 기업(企業)의 피해(被害)정도가 예상밖으로 커 심각한 상황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나라 관련 기업들은 새로운 돌파구(突破口)를 찾느라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는데, 그 원인(原因)은 다름아닌 몇해전 부터 대내외(對內外)에 불거진 우리나라 안보(安保)문제로 심각하게 대두(擡頭)된 '사드(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配置)와 무관(無關)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사실 사드배치는 북한의 김정은이 잇달아 자행(恣行)한 핵(核)과 미사일 실험(實驗)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평화(平和)를 위협(威脅)하는 것에 대한 방어적(防禦的) 차원에서 미국이 우리나라와 협의(協議)하여 설치(設置)하려는 전술적(戰術的)인 미사일 방어 계획입니다.
하지만 북한의 미사일 공격(攻擊)을 방어하기 위한 차원의 무기(武器)라지만 중국은 사드가 자국의 영역(領域)까지 도달(到達)하는 첨단(尖端) 무기이다보니 어지간히 신경(神經)이 쓰여지는가 봅니다. 중국이 매우 민감(敏感)하게 반응(反應)하며 이를 추진하려는 미국과 우리나라에 대해 연일 우려를 나타내더니 보복적(報復的) 차원의 경제제재가 노골적(露骨的)으로 일어나고 있고 우리나라는 직접적인 경제적 피해(被害)와 함께 정치권(政治圈)이나 국민들 사이에서도 찬성과 반대의 여론(與論)이 분분(紛紛)해지고 있으며 자칫 국론(國論)이 분열(分列)되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울 정도입니다. 지난번 정치권에서는 야당(野黨)의 몇몇 국회의원(國會議員)들이 중국을 방문(訪問)하여 북핵 문제 해결(解決)에 중국이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것과 우리나라와 북핵에 관한 외교적 공조(共助)를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여당(與黨)이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우리의 안보문제를 굴욕적(屈辱的)인 외교로 풀려한다며 '사대주의적(事大主義的)' 발상(發想)이라는 격한 비난(非難)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중국이 우리나라에 행(行)한 여러가지 각종 제재는 어느 수준을 넘는 심각(深刻)한 단계(段階)에 이르렀으며 한창 열기(熱氣)를 더하던 한류(韓流) 열풍(熱風)을 막고 우리나라 제품(製品)에 대한 규제성 검사(檢査)를 강화(强化)하는 등 노골적인 제재를 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대국의 횡포(橫暴)로 인해 우리나라 경제는 몸살을 심하게 앓고 있으며 그들이 끼치는 영향력(影響力)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는 것인데 이렇게 여러방면에서 의존도(依存度)가 높아지다 보니 자연 어느틈엔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경제나 문화 등 전반에 걸쳐 사대주의쪽으로 편승(便乘)하고 있지나 않는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사대주의라는 용어(用語)를 부정적(否定的)으로 생각하고 사용하는 것은 사대주의가 지닌 의미가 매우 자율적(自律的)이지 못한데서 비롯한다고 보는데 자국(自國)보다 강하고 큰 나라나 혹은 어떤 세력에 의지(依支)하며 그들의 어지간한 요구에도 거부감(拒否感)없이 따르는 주의(主義)를 떠올리는 사대주의의 이 말은 과거 대국(大國)을 향해서 지나친 복종(服從)의 자세와 도(度)를 넘는 관심을 보였던 지배층(支配層)들을 비난하기 위한 이른바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들이 비판적(批判的)으로 사용했던 용어입니다.
하지만 사대(事大)라는 말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가 전통적(傳統的)인 외교정책(外交政策)으로 펼쳐왔던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외교적 방법은 국제질서(國際秩序)의 참여(參與)와 관계유지(關係維持), 그리고 자국의 이익(利益)을 추구(追求)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우리나라는 '글로벌 스탠더드'로서 오래전 부터 이러한 방식(方式)을 외교정책으로 삼아왔던 것입니다. 특히 사대교린 정책(政策)은 조선 초기(初期)에 본격적으로 실시한 외교정책으로 대국인 중국을 축으로한 동아시아 국가간 질서를 확립(確立)한 것으로 큰 나라(중국)를 중심으로 이웃나라와는 화평(和平)하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사대는 당시의 명(明)나라를 일컫고 교린(交隣)은 여진(女眞)과 일본(日本) 등을 가리키는 것이며 사실 이러한 외교정책은 나라만 달랐을 뿐이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으로 중국이라는 대국을 끼고 있던 우리나라의 입지적(立地的) 요건(要件)에서는 피할수 없는 외교의 선택(選擇)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대교린의 가장 중요한 것에는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의 절차(節次)가 핵심(核心)이 됩니다. 조공과 책봉의 관계가 얼마나 잘 이루어 졌느냐에 따라 서로의 친밀도(親密度)를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교육방송(敎育放送)에서 방영(放映)되었던 조공과 책봉에 관한 역사(歷史)의 내용으로 참고 자료입니다.
한고조(漢高祖)에 승리한 흉노족(匈奴族)은 중앙아시아 최초의 통일 제국을 이룩하지만 유목(遊牧) 기마민족(騎馬民族)인 흉노는 농경지역(農耕地域)이 많은 한나라의 영토(領土)에 그리 욕심내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일정(一定) 수준의 공물(貢物)을 바치는 것으로 한나라의 영토를 허락하였으며 서로간의 화친(和親)을 의미하고자 한나라의 공주(公主)를 흉노의 우두머리인 '묵돌선우(冒頓單于)'에게 출가(出嫁)시키고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흉노에게 바치도록 하는 이른바 사대의 형식을 갖추었습니다. 이것으로 한과 흉노는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고 서로 동등(同等)한 지위(地位)와 상대의 영토를 침범(侵犯)하지 않기로까지 약속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합의(合意)는 약 70년 이상을 지속(持續)하였고 매년 조공의 양(量)은 상대국 상황(狀況)에 따라 인상(引上)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외교방식은 서로의 독립성(獨立性)을 인정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으로 단순한 '예속관계(隸屬關係)'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국은 종주국(宗主國)으로서 천자(天子)인 황제 아래 외교관계를 맺고있는 주변의 나라들은 모두 번국(藩國)이나 속국(屬國)으로 인정하고 그대신 나라마다 그 지위를 보장(保障)해주는 것으로 자국의 위엄(威嚴)과 권위(權威)를 위한 명분(名分)을 살리고 국제질서(國際秩序)를 유지시키는 방법으로 활용하여 왔습니다. 소국(小國)은 대국(大國)을 받들어 섬겨 자국의 안정(安定)을 꾀하고 대국은 자국을 따르는 소국에게 안정된 보장으로 질서를 유지시켜 국가간의 안녕(安寧)과 평화(平和)를 도모(圖謀)한다는 이것이 소위 자신들이 주장하는 '화이관(華夷觀)'의 정신인 것입니다. 물론 명나라로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전란(戰亂)으로부터 자국의 안정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정책(政策)을 잘 활용하여 주변국을 진정시키고 다스리는데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던 것인데 가장 활성화(活性化) 되었던 14~17세기 중국의 명나라는 이때 원만한 조공과 책봉으로 그나마 종주국의 체면을 지키며 유지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외교정책이 모두 좋은 방향으로만 흐른 것은 아닙니다. 원칙적(原則的)으로 이 정책은 단순한 상하관계(上下關係)를 떠나 서로의 이익(利益)을 위한 사대관계였기에 서로가 좋은 정책으로 유지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나라마다 이해관계가 얽히는 경우도 다반사(茶飯事)로 발생하는데 조선은 어떤 시기에는 도리어 명나라를 통해 사대관계를 극대화(極大化)하여 교역(交易) 등을 통해 많은 이익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정책이 조선에 이익을 주기 이전까지는 많은 수모(受侮)와 착취(搾取)도 있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이후 정식으로 외교관계가 정립(定立)되지 않은 틈을 타 명나라의 사신(使臣)이 조선에 오면 엄청난 선물(膳物)을 요구하기 일쑤였으며 이러한 수탈(收奪)은 세종 때 와서야 중국의 황제가 엄명(嚴命)하여 근절(根絶)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가 조선을 돕기위한 명분으로 원병(援兵)까지 보냈다는 것은 그나마 모두 이런 사대교린정책의 일환(一環)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청나라 때는 수시로 사대의 약속(約束)은 간데없이 지켜지지 않았으며 조선에 대한 일방적(一方的)이고 무리한 조공의 요구는 물론, 갖은 침략(侵略)과 수탈을 일삼기도 하였습니다.
사대관계에서의 조공은 반드시 공물을 받는 쪽에 이익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국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조공을 바친 나라에게 조공의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사여품(賜與品)'을 내려야 했는데 이 사여품이 부담(負擔)이 되어 대국의 체면(體面)을 구기는 경우도 발생하긴 했습니다. 오죽하면 명나라 때 자기나라의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는 조선 조정(朝廷)에게 매년 들여오는 조공 횟수를 줄여달라는 요청까지 하였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관(華夷觀) 사상(思想)으로 사대외교를 이어가려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조공과 책봉으로 자국을 대국으로 자임(自任)하며 주변나라들을 소위 '신하국(臣下國)'에 심어놓고 울타리 역할로 이용, 국방 전략상(戰略上) 안전을 도모하면서 국내의 정치적인 안정을 꾀하려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 이런 사대관계는 약속을 지키는 관계로 본다면 쌍방(雙方)간의 이익을 주는 외교 전략적인 실리(實利)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사대외교는 그때그때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라때에 당나라를, 고려때에는 송, 원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나라의 형편을 살폈는데 사대정책이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시대에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시설(施設)과 전용(專用) 건물까지 건립(建立)하였습니다. 서대문(西大門) 근처에 '은혜(恩惠)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는다'라는 뜻의 '영은문(迎恩門)'을 세우고 근처에 명나라 사신을 위한 전용 건물로 '중국을 흠모(欽慕)한다'라는 뜻이 담긴 '모화관(慕華館)'을 지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사대외교 극치(極致)를 보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후 명나라가 무너지고 청(淸)나라가 지배하던 19세기에 이르렀을 때는 국제정세(政勢)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유럽 열강(列强)들의 등장(登場)과 함께 청나라가 그들과의 전쟁에 연이어 패하면서 청은 차츰 국력(國力)이 약해지기 시작하였으며 대국으로서의 모습과 위엄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조선에서도 빠르게 사대외교에서 벗어나 자주(自主) 독립국(獨立國)으로서의 자리를 잡으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청나라의 패배(敗北)와 함께 '시모노세키 조약'이나 국제법상(國際法上)으로 조선의 독립이 규정화(規定化) 되었고 1890년에 서재필(徐載弼) 등 개화파(開化派)들에 의해서 사대주의의 상징(象徵)인 치욕(恥辱)의 영은문을 헐고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獨立門)을 세울 것을 고종(高宗)에게 건의(建議)를 하여 승낙(承諾)을 얻게 되었습니다. 1895년 부터 서재필과 독립협회는 국민들에게 성금(誠金)을 모금(募金)하기 시작하였으며 프랑스의 개선문(凱旋門)을 모델로한 독립문을 설계(設計)하여 1896년, 서재필과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주도(主導)로 공사를 시작하여 드디어 1년 뒤인 1897년에는 사대외교의 산물(産物)인 영은문을 헐어낸 그 자리에 사대관계를 청산(淸算)하고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을 완공(完工)하게 되었습니다.
서대문에 세워진 독립문은 높이가 14.28m, 폭은 11.48m로 약 1,850개의 화강암을 쌓아 만들었습니다. 현판(懸板)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며 구한말(舊韓末) 문신(文臣)이었던 '김가진(金嘉鎭)'이 썼고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皇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紋樣)이 장식(裝飾)되어 있습니다. 앞쪽에 영은문의 돌기둥 2개를 남겨 두었으며 특히 독립문 기공식(起工式) 때는 고종은 물론 대한제국의 황족(皇族)들과 고관(高官)들이 대거 참석하였으며 모두들 청나라의 굴욕(屈辱)에서 이제야 벗어날 수가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였다는데 이는 오랜 사대외교를 거치면서 청나라에 줄곧 시달렸었던 좋지못한 과거의 역사와 격랑(激浪)의 시기를 보내며 나라 안팎의 어려움으로 지쳤던 마음을 서로들 달랬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지나치게 무기력(無氣力)해진 대국의 무능(無能)으로 상호관계(相互關係)를 상실(喪失)해 버린 사대주의로부터 독립문을 세움으로서 결별(訣別)을 선언(宣言)하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져 표출(表出)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대화(現代化)된 세계는 자국의 자존심(自尊心)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외교를 합니다. 물론 과거의 역사처럼 조공과 책봉을 요구하는 외교는 가당치도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를 지닌 새로운 신(新) 사대주의가 조장(助長)되고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조짐(兆朕)에 일단 경계심(警戒心)을 가지고 신중하게 대처(對處)해야 합니다. 우리가 걱정해 온 사대주의에는 정도에 따라서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있는 '문화 사대주의'도 있습니다. 자신이 배우고 자란 자국의 문화를 이유없이 비하(卑下)하면서 선진국(先進國)이나 맹목적(盲目的)인 다른 나라의 문화를 추종(追從)하는 그런 형태의 사람들을 우린 문화 사대주의에 빠진 자라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문화는 아무런 비판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자세야 말로 오히려 자신의 문화 정체성(正體性)을 잃어가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비근(卑近)한 예(例)로 내용도 모르는 괴문자(怪文字)의 티셔츠를 입고 대로(大路)를 활보(闊步)하는 젊은이들이나 외제(外製) 명품(名品)이면 필요와 상관없이 사족을 못쓰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문화 사대주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어(言語)에서도 굳이 외래어(外來語)를 곁들여 사용해야만 자신의 수준(水準)을 높이는 것이라고 여기는 짧은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 사대주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있는게 아닐까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