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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 명시감상: 엄재국, 반칠환, 최승호, 안정옥, 우종숙, 현상연
--- 애지 2024년 겨울호에서
백비탕
엄재국
누가 불 지폈을까?
부글부글 살구꽃 한 세상이 담장을 넘쳐 흐른다
건더기 없으면 넘치지 않을 맑은 물의 봄
사람들은 봄빛에 지쳐 쓰러지는데
약 없는 세상
누가 저 담장너머
지독한 봄을 여태 끓이고 있을까?
봄은 대표적인 배고픔의 계절이며, ‘춘궁기春窮期’라는 말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춘궁기란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보리수확이 있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하며, 이 춘궁기의 배고픔 때문에 ‘보릿고개’라는 말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고개는 고산영봉의 그것보다도 ‘보릿고개’라고 할 수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보릿고개에서 굶어죽었고, 이 보릿고개의 배고픔 때문에 골육상쟁의 이전투구를 벌이거나 이웃국가를 침략하여 수많은 살인과 약탈과 온갖 강도짓을 자행해왔던 것이다.
시는 사치의 아이들이고, 배가 고프면 모든 문화와 예술은 질식한다. 배가 고프면 그 모든 일들이 아주 단순해지고, 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는다. 엄재국 시인의 [백비탕白沸湯]은 백약이 무효인 세상의 그 절망감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누가불 지폈을까?”는 분노의 탄식이 되고, 살구꽃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이 세상의 담장을 넘쳐흐른다. 이 세상은 그 어떤 삶의 내용도 없는 “맑은 물의 봄”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은 그 “봄빛에 지쳐” 쓰러진다.
그 옛날의 조선시대에는 맹물을 백번 끓여 임금님께 진상한 것을 백비탕이라고 부르고, {동의보감}에 의하면 백비탕은 양기를 북돋아주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나 백비탕은 맹물인 만큼 수많은 한약재를 넣고 끓인 ‘보약탕’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맑은 물”의 맹물탕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엄재국 시인은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의 구조’를 꿰뚫어보고 “약 없는 세상/ 누가 저 담장너머/ 지독한 봄을 여태 끓이고 있을까?”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배고픔은 절망을 낳고, 절망은 그 어떤 기교도 없이 불을 지핀다. 살구꽃은 불꽃이 되고, 불꽃은 ‘백비탕白沸湯’을 끓이며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시인은 가난하게 살고, 부자는 풍요롭게 산다. 시인은 그의 가난 속에서도 삶의 질을 따져 물으며,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쓰며 산다. 이에 반하여, 부자는 그 풍요로움 속에서도 더욱더 많은 돈과 탐욕을 쫓아가며 아주 가난하게 산다. 마음이 부자인 시인과 마음이 가난한 부자 사이에 더욱더 사악하고 간사한 친구들이 있으니, 그 친구들은 우리 자연과학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의 자연과학자들은 자본가들이 고용한 살인청부업자이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할 수가 있다. 자연과학자들은 자연이나 생태환경도 따져 묻지도 않고, 우리 인간들의 자연스러운 수명과 아름답고 행복한 삶과 이 지구촌의 미래도 따져 묻지를 않는다.
자연과학자들은 자본가들의 이익에 반하는 모든 시인과 철학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다 때려죽이고, 오직 부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동식물들의 서식지를 다 파괴하는 것은 물론, 그 모든 천연자원들을 다 황금으로 변모시켜 놓는다.
누가 지독한 봄을 여태 끓이고 있을까? 엄재국 시인이고, 우리 가난한 예술가와 철학자들이다.
누가 지독한 봄을 여태 끓이고 있을까? 자본가들이고, 우리 자본가들에게 고용된 자연과학자들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우리 인간들의 삶은 그 모든 것이 도로아미타불의 헛수고가 되는 [백비탕]에 지나지 않는다.
가난은 살구꽃으로 불을 지르고, ‘약 없는 세상’의 ‘성난 민심’은 [백비탕]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엄재국 시인은 상징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약 없는 세상’의 현실을 꿰뚫어보고, 너무나도 아름답고 환한 ‘상징주의의 꽃’(살구꽃)으로 성난 민심의 [백비탕]을 끓인다.
기적 1
반칠환
여름 장마가 휩쓸고 갔어도
계곡에 버들치 한 마리 떠내려 보내지 못했구나
---반칠환 시집, {새해 첫기적}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삶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한 목표가 있는 생활이다. 일본은 동양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 야구를 정복했고, 이제는 월드컵 축구 우승을 위해 전국민이 하나가 되었다.
일본 야구와 일본 축구 이외에도 해마다 노벨상을 수상함으로서 전인류의 찬사를 받았고, 오늘날의 일본은 세계 최고의 일등국가라고 할 수가 있다.
언제, 어느 때나 근면 성실하고, 하늘이 무너져 내려도 동료 시민과 조국에 대한 사랑이 대일본제국의 기적을 창출해낸 것이다. 일등국가와 일등국민에 대한 목표가 키가 작고 보잘 것 없는 일본인들을 한없이 고귀하고 위대하게 만들어낸 것이다.
“여름 장마가 휩쓸고 갔어도/ 계곡에 버들치 한 마리 떠내려 보내지 못했”듯이,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의 목표는 어떤 천재지변도 떠내려 보내지 못한다.
아아, 대한민국이여!
아아, 대한민국이여!
방부제가 썩는 나라
최승호
모든 게 다 썩어도
뻔뻔한 얼굴은 썩지 않는다
----최승호 시집, 『방부제가 썩는 나라』에서
모든 인간들이 다 죽고, 모든 생명체들이 다 썩어도 요양원과 요양병원을 움직이는 자본가들의 탐욕은 썩지 않는다. 사는 의미와 살 권리를 다 상실한 산 송장들을 연명치료하는 것은 나치와 스탈린 체제에서의 고문보다도 더 나쁘다. 고문이란 피해자의 원한 맺힌 복수감정에서 비롯된 것인데, 왜냐하면 그 가해자들을 너무 빨리 죽이는 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기 고문과 물 고문,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거나 산채로 불에 태워 죽이는 고문, 펄펄 끓는 가마솥에 삶아버리거나 시뻘건 인두로 지지는 고문 등이 있었지만, 그러나 이러한 고문들은 오늘날의 요양원과 요양병원에서 자행하는 고문에 비하면 새발에 피에 지나지 않는다. 물 고문, 약물복용 고문, 영양제와 영양주사 고문, 산소호흡기 착용과 물리치료 고문, 방사선 치료와 CT촬영 고문, 너무나도 가혹한 병원비와 간병비용 고문, 똥오줌을 싸고 헛소리 하게 하는 고문과 주변의 친인척들에게 인간혐오증을 접목시키는 고문 등은 그 어떤 형벌의 고문보다도 더욱더 가혹한 자본주의적 고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요컨대 사는 의미와 살 권리를 다 상실한 산 송장들에게는 연명치료가 아닌 존엄사를 처방하는 것이 최선의 치유책이며, 이 지구촌의 생태계를 살리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하루바삐 생명의 존엄함과 고귀함 따위의 헛소리와 함께, 모든 개인의 재산과 국가의 복지비용을 다 가로채 가고자 하는 탐욕을 버리고 진정으로 참회와 반성의 눈물을 흘려보란 말이다. 최승호 시인의 말대로, 방부제는 썩어도 당신들의 너무나도 뻔뻔스러운 얼굴들은 썩지도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요양원과 요양병원의 입구에는 “단 한 푼의 돈도 자손이나 국가에게 물려주지 말고, 오직 ‘의산복합체의 이익’을 위해 다 쓰고 죽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라고 써 있는 것이다.
스위스는 자연보호와 환경보호, 즉, 이 지구촌을 살리기 위하여 ‘적극적인 안락사’를 실천하는 일등국가라고 할 수가 있다. 본인이 원한다면 그의 요청에 의하여 어떤 기구나 약물 등을 사용해 스스로 이 세상을 떠나갈 수 있는 ‘조력 자살’을 허용한다고 한다.
‘더 라스트 리조트’는 안락사 관련 비영리 단체이며, 안락사 신청자가 ‘사르코 캡슐’에 들어가 이 세상을 떠나가게 했다고 한다. 안락사 캡슐 ‘사르코’에 들어가 단추를 누르면 질소가 뿜어져 나와 산소 부족으로 죽는다고 한다. 그 시간은 5분 이내이고, 사용료는 20달러이며, 면역계 질환을 앓는 미국 여성(64세)이 그 첫 번째 사용자였다고 한다. ‘사르코’는 호주 출신 의사 필립 니슈케 박사의 발명품이며, 그 첫 사용자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아주 “빠르고, 평화롭고, 품위가 있었다”고 한다.
비록, ‘사르코’의 경우 스위스 정부의 정식 허가를 받지 못한 제품이지만, 비영리법인 단체인 ‘더 라스트 리조트’에 무한한 존경과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탄생이 축복이듯이, 죽음 역시도 무한한 축복이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게 다 썩어도/ 뻔뻔한 얼굴은 썩지”도 않는 것이 우리 자본주의의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나의 주권은 나에게 있고, 누구든지 나의 ‘존엄사 선택’을 도와줄 의무가 있다.
죽은 척하기
안정옥
곰을 만나면 죽은 척, 그러나 곰과 맞닥트린 적이
없다 동물원의 곰 발걸음은 멈춰있는 마침표로
그에게 나도 여전히 멈춰있는 마침표 일 것이다
죽은 척하는 사람, 주머니 속에는 숨겨둔 손이 있다
무엇을 할지는 그 다음일이다
---안정옥 시집 {나의 온 삶은 훨씬 짧게}(근간)에서
“곰을 만나면 죽은 척”하라는 것은 곰은 죽은 생명체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그 습성 때문에 생긴 말일 것이다. 곰을 만났을 때의 ‘죽은 척하기’는 일종의 자기 보호색이자 방어본능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 방어본능 속에는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공격성이 숨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척하기’는 가짜 죽음이고 속임수이며, 따라서 이 속임수 뒤에는 주머니 속의 “숨겨둔 손”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원의 곰은 그 사나운 공격성이 거세되어 있고, 동물원의 관람객인 나 역시도 그 어떤 공격성도 갖고 있지 않다. 곰과 나의 호전적인 공격성은 마침표로 그쳐 있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공격성은 그 마침표 뒤에 숨어 있을 때가 더욱더 사납고 잔인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모든 전쟁은 ‘기습작전’이 승패를 좌우하고, 그래서 ‘유비무환의 경계 태세’가 필요한 것이다.
청나라 앞에서의 죽은 척하기, 일본 앞에서의 죽은 척하기, 미국 앞에서의 죽은 척하기----. 하지만,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의 ‘죽은 척하기’는 더욱더 사납고 무서운 공격성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그 공격성이 거세된 노예적인 복종태도로 나타났던 것이다. 많이 아는 자는 백전백승의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지만, 주입식 암기교육을 받고 백치가 된 우리 한국인들은 단 한 번의 공격은커녕 무조건 항복부터 해버렸던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조선의 멸망은 조선인을 위해 축하할 일”, “천황폐하, 조선을 정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글을 쓴 대표적인 ‘정한론자征韓論者’이자 ‘탈아론脫亞論’의 주창자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일본의 막부 정치를 종식시키고 일본의 근대화를 창출해낸 영웅이며, 후쿠자와 유키치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일본은 세계 일등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이자 만엔권 화폐의 주인공인 후쿠자와 유키치, 세계적인 문화영웅인 후쿠자와 유키치를 배출해낸 일본이 너무나도 부럽고 존경스럽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윤석열, 이재명 등과도 같은 인물들 수십억 명이 덤벼들어도 후쿠자와 유키치 한 사람을 이길 수가 없다.
조국과 안철수와 진중권 같은 학자 수십억 명이 달려들어도 마르크스와 아인시타인과 칸트 같은 학자들 한 사람을 이길 수가 없는 것처럼----.
포정의 칼
우종숙
말을 시퍼렇게 갈고 있다
단칼에 베어 아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떨어진 제 목을 보고 환하게 웃을 수 있도록 내 말이 바람처럼 날렵해 표정이 베이지 않도록 포정의 칼처럼 평생을 쓸 말을 갈고 있다
모래에 스미는 물처럼 파랗게 벼리고 있다
푸른 하늘에 나는 새털처럼 부드러운 율동, 빛과 같은 속도로 꽂히는 한 마디 화살처럼 천리마가 날고 있다
그러나 뒷모습만 보이는 말은 자욱이 먼지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고삐를 단단히 잡지 않으면 굴러 떨어지거나 제멋대로 날뛰기 일쑤인 말인 것을,
말이 나를 베어버린다
---우종숙 시집 {포정의 칼}(근간)에서
포정庖丁이란 그 옛날의 소, 돼지, 개 따위를 잡던 사람을 말하고, 소위 최하천민인 백정을 말한다. 우종숙 시인의 [포정의 칼]은 ‘포정의 신화’를 차용하여 ‘말의 사제’로서 이 말을 갈고 닦는 제일급 시인의 솜씨를 보여준다. 우종숙 시인은 날이면 날마다 “말을 시퍼렇게 갈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말에 목이 떨어져도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말과 생명은 하나이고, 말을 잃으면 ‘인간은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다. 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도 있고, 이에 반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가 한 형제이며 한 민족이다’라는 말은 전자의 예에 해당되고, ‘그들과 우리는 종교적, 문화적 차이로 인해 한 솥밥을 먹을 수가 없다’라는 말을 후자의 예에 해당한다. 말은 포정의 칼처럼 천하제일의 명검이지 않으면 안 되고, 시인은 포정처럼 천하제일의 말의 사제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말에 목이 단번에 떨어져도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것, 제 목이 떨어져 나간 것을 보고도 환하게 웃을 수 있게 만드는 것----, 이 불가능한 꿈을 위하여 그는 그의 말을 “모래에 스미는 물처럼 파랗게 벼리고”있는 것이다. 말은 칼이 되고, 칼은 날렵하고 빠른 모습으로 천리마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닌다. 푸른 하늘을 나는 새털처럼 부드러운 율동으로 춤을 추고, 빛과 같은 속도로 꽂히는 한 마디의 화살처럼 천리마가 되어 날아다닌다. 말은 언제, 어느 때나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뒷모습만을 보여주고, 먼지만을 자욱이 남기고 사라진다. 말은 천리마이고, 빛보다 더 빠른 속도를 지닌 말의 고삐를 단단히 잡지 않으면 굴러 떨어지거나 제멋대로 날뛰기 일쑤인 말에 내가 베어진다.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하듯이, 말로 일어난 자는 말로 망할 수가 있다.
장자의 말에 따르면, 포정은 고대 양혜왕의 주방장이며, 그 칼질하는 솜씨가 마치 상림桑林의 춤과도 같고, 경수經首의 음악과도 같았다고 한다. 능숙한 칼잡이도 1년에 한번씩은 칼을 갈고, 어중간한 칼잡이도 한 달에 한번씩은 칼을 갈지만, 그러나 포정의 칼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해체했지만, 아직도 금방 숫돌에 갈아온 듯 날카로웠다는 것이다. 포정은 그의 칼로 살과 힘줄과 뼈를 베는 것이 아니라, 살과 살, 혹은 살과 뼈 사이의 틈을 비집고 가른다고 한다. 포정의 칼솜씨는 단순한 칼솜씨의 수준을 떠나 ‘내 마음의 경로’만을 따르는 ‘도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할 수가 있다.
모든 일의 목표도 도이고, 모든 시인의 목표도 도이다. 말로 타인의 목을 베어버려도 그 목베임을 전혀 모르고 그 떨어진 목을 보고 웃게 만든다는 것----, 이것의 도의 길이고 참다운 삶의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포정의 칼도 살림의 칼이고, 우종숙 시인의 말도 살림의 말이다. 이때의 말과 칼은 흉기가 아닌 철학적 의사의 칼이 되는 것이다.
포정도, 시인도 가축이나 사람을 죽이지 않고, 그 모든 생명체들을 되살려 놓는다.
울음, 태우다
현상연
맨드라미 붉게 타오르던 날
그녀가 불 속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세상이 서늘하였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길들여진 인내는 잿빛 바람이 되고
해묵은 생의 파편들은 숯이 되었다
문밖을 서성이던 어떤 울음은 불이 되고
까맣게 뚫린 심장 사이로 들락거리던 울음은
토하지 못하는 울음이 되었다
초여름 날 예측하지 못한 검은 행렬이
깃을 세우고 다가와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던 불길 앞
마른 눈물이 바닥을 기었다
화구에 들어간 그녀
까만 재 들추니 씹지 못한 쇠붙이 한 개
마지막 유언처럼
거룩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현상연 시집, {울음, 태우다}(근간)에서
울음이란 모든 생명체들이 내지르는 소리이겠지만, 우리 인간들의 울음이란 대부분이 슬픔 때문에 우는 소리라고 할 수가 있다. 슬픔이란 어떤 장애물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말하고, 우리는 그 대책 없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단말마적인 울음을 울게 된다.
울음은 슬픔이고 비명이지만, 그러나 현상연 시인에게 있어서의 울음은 그 주체자의 몸통이 된다. 울음은 그녀가 되고, 그녀는 “문밖을 서성이던 어떤 울음은 불이 되고”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불덩이 몸의 추위 때문에 오히려, 거꾸로 “맨드라미 붉게 타오르던 날” 그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녀의 몸(울음)이 불이라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너무나도 추웠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녀는 그녀의 몸을 치유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길들여진 인내는 잿빛 바람이 되”었고, “해묵은 생의 파편들은 숯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문밖을 서성이던 어떤 울음은 불이” 되었고, “까맣게 뚫린 심장 사이로 들락거리던 울음은/ 토하지 못하는 울음이 되었다.” 울음은 그녀의 몸통이 되고, 그녀의 몸은 불이 된다. 불은 “초여름 날 예측하지 못한 검은 행렬이/
깃을 세우고 다가와/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던 불길 앞”이라는 시구에서처럼, “마른 눈물”이 된다. 더 이상 젖거나 마를 일이 없는 눈물----. 요컨대 이 마른 눈물은 그녀의 일생 자체가 ‘울음’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울음은 몸통(북)이 되고, 슬픔은 채찍(북채)이 되고, 고통은 울음이 된다. 하지만, 그러나 “화구에 들어간 그녀/ 까만 재 들추니 씹지 못한 쇠붙이 한 개/ 마지막 유언처럼/ 거룩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라는 시구에서처럼 그녀는 영원한 소화불량증 환자로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상연 시인의 [울음, 태우다]는 인간이 아닌 울음의 장례식이며, 그녀는 이 세상의 삶, 즉, 슬픔을 삭히지 못한 소화불량증 환자였던 것이다. “까만 재 들추니 씹지 못한 쇠붙이 한 개”는 소화불량증 환자의 징표가 되고, 그것이 “마지막 유언처럼/ 거룩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는 것은 이 세상의 최고의 삶의 비법이 슬픔을 소화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현상연 시인의 [울음, 태우다]에서는 둥둥둥, 북소리가 들려오고, 이 세상에서 별 볼 일 없고 하찮은 존재였던 그녀의 넋을 위로해주는 노래가 울려퍼진다.
모든 시는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고, 모든 비가는 이 세상의 삶의 찬가로 승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아, 현상연 시인이여,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슬픔을 받아들이고, 그 슬픔을 소화시킬 것이란 말인가?
----반경환 약력 지난 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