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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장
땅의 놀이, 땅의 정치-구정균전법
구정균전법의 연원
정전제 곧 구정균전법은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와 칠성력七星曆으로 대표되는 천문의 역제를 지상에 그대로 적용시킨 것이다.
농경 정착생활을 시작한 상고시대에서 식생활의 근본은 곡물을 생산하는 토지경작에 있었으며, 치세의 핵심은 백성들에게 균등하게 토지를 분배하고 적정한 조세를 징수하는 제도에 있었다.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여 백성들에게 빌려주는 것으로 하되, 경작해서 세금으로 내야할 공전公田과 개인이 임의로 수확물을 처분할 수 있는 사전私田의 비율을 어떻게 정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것은 조세를 현물지대가 아닌 노동지대로 받았음을 뜻한다.
예로부터 정전제는 토지를 우물 "井" 자로 9등분하여 8호의 농가가 각각 한 구역씩 경작하고, 가운데 있는 한 구역은 8호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국가에 조세로 바치는 제도로 알려져 왔다. 중국에서는 900묘畝의 토지를 1정井 이라고 하였으므로 8호의 농가는 각자 100묘의 사전을 가족단위로 경작하고, 정井 의 가운데 구역의 100묘를 공전으로 하여 공동으로 노역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맹자에는 고대의 정전제에 대한 한 고사가 실려 있다. 백규라는 이가 자기는 20분의 1을 세금으로 받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맹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맹자는 20분의 1세는 맥(동이)족의 방법으로 만 호가 사는 대국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반대하면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맥이라는 나라는 곡식이 생산되지 아니하고 다만 수수만이 생산되니, 성곽과 궁실이 없고, 종묘에서 제사지내는 예가 없으며, 제후의 예물이나 손님의 접대가 없으며, 백관과 유사도 없기 때문에 그 20분의 1의 세금을 받아도 충분한 것이오. 지금, 중국에 살면서 인륜을 버리고 군자도 없다면 어떻게 옳다 하겠소. 질그릇 굽는 사람이 적어도 또한 나라가 되지 않는데 하물며 군자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소? 요순이 한 방법보다 세금을 경감시키고자 하는 자는 대맥이거나 소맥일 것이오. 요순의 방법보다 과중한 세금을 받으려는 자는 대걸이거나 소걸일 것이오.[孟子 고자 장구 下 10장]
맹자에 실린 이 이야기는 상고시대의 조세제도만이 아니라 정전제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전하고 있다.
맥은 동이의 일원으로서 우리 겨레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데, 그 나라에서 20분의 1세를 받았다는 사실은
태백일사의 기록과 부합한다.
산 위에는 어디나 사방에서 온 백성들이 있었는데 동그랗게 둘러 부락을 이루었으니
네 집이 같은 정지井地 를 이루었으며, 20분의 1세를 냈다.1
지금까지는 윗글에 나오는 ‘사가동정四家同井’ 이란 구절을 네 가구가 한 우물을 쓴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산정 마을에서 네 집이 한 우물을 쓰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정井 을 우물이 아니라 정전제의 정井 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서에서 우물을 팠다는 기록은 실제 우물이 아니라 우물을 중심으로 하는 소도를 만들었다거나 정전제를 실시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환웅이 천평에 자정과 여정을 뚫고, 청구에 정지井地를 그었다”2는 기록 또한 남자 소도와 여자 소도를 구분하여 만들었다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적절하다 할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상고시대의 토지분배제도를 구정邱井 이라 하였다.
성인이 하늘에서 내려옴과 동시에 무리가 따르고 국가가 성립되는데, 여기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것이 균등한 토지분배였다. 그것을 ‘이토위치以土爲治’ 즉 토지로써 다스린다는 표현을 썼다.
그것이 환웅의 신시와 단군조선의 구정법이었다.
옛적에 우리 환족의 관경은 이미 유목하고 농경하는 곳이었다. 신시개천의 시대에 이르러 토지의 균등분배로써 다스림이 이루어졌다. 1이 쌓여 음이 서고 10을 나누어 양이 만들어지는 이치에 따라 모자람 없이 조화가 생하는 것이다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
구정법의 시행은 백성들 간의 분쟁을 최소한으로 줄여 태평세월을 오래도록 지속케 하였다.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마을을 이루니 네 집이 같은 정지井地 를 이루어 20분의 1을 세금으로 냈다.
세상이 화평하여 농사는 풍년이 드니 노적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일 새 모든 백성들이 즐겁고 편안하여 태백환무의 노래를 지어 전하였다.[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
여기서 말하는 태백환무의 노래란 사람들이 둥글게 돌아가며 춤추면서 부르는 노래로서 막힘과 충돌이 없이 조화되어 순환하는 세상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태백환무의 노래는 진한辰韓인들이 소도제천대회 때 했던 춤노래와 비슷했을 것이다. “5월에 파종을 마치면 귀신[삼신]에게 제사했는데 군중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밤낮을 헤아리지 아니했다. 춤출 때엔 수십 인이 함께 일어서서 서로 따르면서 땅을 디디며 손발을 낮추었다 높였다 하며 서로 장단을 맞추는 것이 탁무鐸舞 와 비슷했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진한조.)”]
그림91 보만재총서 속의 평양기전에 대한 정전비문井田碑文
단군세기의 “8세 단군 우서한 재위 8년 원년 무신에 2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고 있는 자와 없는 자를 크게 통하게 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하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은 20분의 1세 구정균전법이 ‘책화선린責禍善隣 유무상자有無相資 문명성치文明成治 개화평등開化平等’ 이라는 소도제천의 전범典範을 구현하는 중추제도였음을 알리는 것이다.
[ 책화선린責禍善隣:
잘못을 저질러 화를 부른 것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책임을 짐으로써 이웃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
유무상자有無相資: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와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것.
문명성치文明成治:밝은 문화로 다스림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
개화평등開化平等:막힌 것을 열고 어긋난 것을 조화롭게 하여 평등을 이루는 것.
(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
이러한 구정법의 발상은 <방도>의 모습을 본보기로 삼았을 것이다.
신시에서 단군조선으로 계승되어 나아가는 구정법의 전통과 관련된 사료를 조금 더 보도록 하자.
2세 부루 재위 경술 10년(B.C. 2231년) 4월 구정邱井 을 긋고 논밭의 세금을 정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못하게 하였다.[ “庚戌十年四月劃邱井爲田結使民自無私利.” (단군세기) ]
구정법이 부루 단제 때 시행되었다는 사실은 단기고사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10년 4월에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하니, 백성은 사전私田이 없었다.3
사전이 없었다는 표현은 토지의 사적 소유를 없애고 전 국토를 구정으로 획정하여 편입시켰다는 뜻이다.
구정법을 반포하고 나서 2년 후에는 신지 귀기가 2세 단제 부루에게 시행되는 구정도邱井圖 를 만들어 올렸다.
“2세 부루 재위 임자 12년(B.C. 2229년) 신지인 귀기가 칠회력과 구정도를 만들어 바쳤다.” 4
이때 칠회력과 함께 올렸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그것은 칠회력에 맞추어 정지를 운용케 할 수 있는 20분의 1세를 모델로 하는 구정의 계획 도상이었을 것이다. 귀기의 구정도는 평양에서 발견된 정전을 보고 한백겸이 그린 기전도箕田圖 와 동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것이다.
앞에서 구정법이 <방도>를 본보기로 했으리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는 다음의 글로써 뒷받침된다.
후에 다시 기자가 홍범을 주나라 왕에게 진술한 것 또한 황제중경에 있는 오행치수의 설이었는데,
대개 그 학은 신시의 구정邱井균전법均田法에 근본을 둔 것이다.[ (태백일사/신시본기) ]
이 기록은 천부경으로 대표되는 겨레 상고사의 정신문화를 엿보게 하는 보배가 아닐 수 없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자부선생이 조술한 삼황내문경이나 그것의 세 편 중의 하나라 추측되는 황제중경의 내용은 천부경과 환역을 모체로 하고 있으리라 여겨왔지만 그 전모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태백일사/신시본기의 위 인용문은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윗글에서 전한 바처럼 우리는 이제 천부경의 정신체계를 살펴보기 위해서 신시의 구정邱井균전법均田法을 연구하면 되는 것이다.
단기고사에는 단군조선과 분리하여 기자조선편(기자奇子는 태양의 아들이란 뜻이다)을 따로 두었는데,
기자조선을 연 제1세 서여西余제 또한 정전법을 시행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첫 해에 미서微西에게 명을 내려 정전법을 만들어 공포하고 백성들에게 농사일에 힘쓰도록 독려하였다.
납세의 의무를 알게 하여 소득의 9분의 1을 바치게 하였다.5
이 기록은 신시 때의 20분의 1세가 9분의 1세로 바뀌었음을 알리고 있는데, 이는 앞으로 더 규명해야 될 과제이다.
중국의 정전법의 전통은 요순시대부터 내려와 하은주 시대로 이어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기자가 하나라 우왕에게 전해준 홍범구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도 제기되어 왔다. 구주九疇의 주疇가 밭고랑이나 밭의 경계란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구주가 곧 정전법, 우리 쪽 용어로는 구정균전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선정의 방도를 물었을 때, 기자는 홍범구주를 가르쳐 주었다고 서경은 전하고 있다.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서 마땅히 시행하여야 할 9개 조항의 법은 각기 오행, 오사,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오복五福, 육극六極으로 구성되어 있다.
[홍범의 차서에 대해 이정래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대체로 모든 것을 天道와 人事로써 참고하여 서로 설한 것이며, 이러한 이치에서 그 기본이 되며 시종으로 통하는 오행이 가장 먼저에 해당하여 반드시 일찍이 깨우쳐야 할 것이므로 차례의 1로 한 것이고, 그 다음은 오행을 노득한 이치로써 오사를 참고하여야 하기 때문에 차례의 2로 한 것이며, 그 다음은 이상의 법으로 자신을 수양하였다면 정사를 가히 참구하여 유추할 수 있기 때문에 차례의 3으로 한 것이고, 政이 이미 갖추어졌다면 또다시 천도에 비추어 증험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오기를 차례의 4로 한 것이며…(이하 생략) (이정래, 의역동원 상권, 105쪽)”]
이에 대해 정약용은 홍범구주가 정전제와 다름이 없다고 이미 비판한 바 있다.
홍범의 주된 수리는 삼덕, 오행, 오사, 오기, 오복, 육극, 팔정이다. 이 수리들은 삼신오제와 육효ㆍ팔괘와 상통한다.
특히 오행의 수리인 5가 강조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제일 먼저 오행 항목을 두었음은 오행의 통수通水원리가 치세의 근간을 이룸을 말한 것이다. 오행의 원리를 정치제도의 원리로 삼은 것이 오가나 오부체제이다. 그것은 방위에 맞도록 땅과 백성을 나누고, 정전제로써 국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며 동시에 백성의 부를 증진시킬 수 있는 방안이었고, 자치를 행함으로써 각자의 구역에 대한 치수治水 문제까지 해결하도록 하는 묘안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원활히 시행되도록 하려면 황극 곧 다스림의 중심부의 무위이치의 원리가 세워져야 한다.
황극 곧 임금이 되는 자가 지켜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다섯 번째 황극은 황(皇:임금)이 극(極:중심 되는 바른 척도)을 세움이니, 이 다섯 복을 거두어서 여러 백성에게 펼쳐 주면, 이 여러 백성들이 그대가 세운 극을 따르고, 그대와 하나가 되어 그 극을 보존할 것이다.
무릇 여러 백성들이 음란하거나 사사로이 붙어 다니지 않고, 사람들이 패거리를 짓는 일이 없는 것은 오직 황皇이 극을 세우기 때문이다. (…) 치우침이 없고 기울어짐이 없어서 왕의 의리를 따르며, 사사로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지 말아서 왕의 도를 따르며, 사사로이 미워함을 만들지 말아서 왕의 길을 따라라. 치우침이 없고 당파가 없으면 왕의 도가 탄탄할 것이며, 당파가 없고 기울어짐이 없으면 왕의 도가 평평할 것이며, 마음을 거꾸로 가지거나 삐뚤어지는 일이 없으면 왕의 도가 바르고 곧게 되어, 황극에 모이고 황극에 돌아오리라.6
신채호의 ‘조선고대의 사회주의’
신채호는 홍범구주에 대한 정약용의 견해를 한 걸음 건너 뛰어 중국의 정전법은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전해준 것이 그 효시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에 대해 오월춘추의 기록을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요 때에 9년 홍수가 져서 당요가 하우를 명하여 이를 다스리라 하더니, 우가 8년 동안이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매우 걱정하여, 남악 형산에 이르러 백마를 잡아 하늘에 제사하여 성공을 빌더니, 꿈에 어떤 남자가 스스로 현이玄夷의 창수사자[부루태자]라 칭하면서 우에게 가로되, ‘구산 동남의 도산에 신서가 있으니 3월을 재계하고 이를 내어보라’ 하므로, 우가 그 말에 의하여 금간옥첩의 신서를 얻어, 오행 통수의 이치를 알아 홍수를 다스리어 성공하고, 이에 주신(州愼:조선)의 덕을 잊지 못하여 정전井田을 획하여 율도량형의 제도를 세우다.7
신채호의 직관이 환단고기의 내용과 부합하는 면이 많으므로 살펴보기로 하자.
신채호는 천고天鼓1권 2호에 진공이란 필명으로 '조선고대의 사회주의' 라는 고대사 관련 논문을 실었다.
아래는 이에 대한 최광식의 글이다.
그(신채호)는 정전제를 고대의 사회주의 제도로 파악하고, 우리의 정전제를 중국에 전해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채호는 여지승람輿地勝覽에 평양에는 단군시대의 정전井田이 있었고, 경주에는 진한辰韓의 정전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의 정전이 먼저 획정되고 하우夏禹의 정전이 그것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채호는 이 정전제를 고대의 사회주의 제도로 파악하고 있다.
공산제를 현재의 사회주의로 파악하고 몽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그러한 전통이 오래되고 지속된 것을 주목하였다. 특히 고려 태조가 전국의 토지를 백성에게 평등하게 나누어준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고려말 토지겸병으로 빈부의 차이가 현격해 지고 이태조가 균전의 제도를 파괴하였다고 보았다. 신채호는 기본적으로 여기서도 고려말부터 우리의 역사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고 파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고려의 공전公田은 신라의 유제로 고려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고 하여 그 역사의 유구함을 다시 강조하였다.[ 최광식, 天鼓의 '考古'편에 보이는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 참조. 天鼓 1권 2호 ‘朝鮮古代之社會主義’. ]
정전법이 우리 쪽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라는 신채호의 주장은 ‘오행치수의 법과 황제중경이 태자 부루로부터 나와서 하나라 우왕에게 전해졌으며, 기자가 홍범을 주나라 왕에게 진술한 것 또한 황제중경에 있는 오행치수의 설이었는데, 대개 그 학은 신시의 구정邱井균전법均田法에 근본을 둔 것’이라는 태백일사의 기록과 궤를 같이 한다.
홍범구주는 땅을 균등하게 나누는 정전법으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제반 법도에 대한 규정이었으며,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황제중경에 실린 구정 균전법의 원리와 정신에 대한 것이었다.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146쪽. 소부도지에서는 기자가 사용한 오행 삼정과 홍범 무함巫咸이 환웅의 도와 다름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고찰해서 밝힐 필요가 있다.
“은의 망명자 기자가, 패군과 난민을 이끌고, 부도의 서쪽에 도망하여 왔다. 명예를 위하여 당우唐虞의 법을 행하고, 오행 삼정을 써서, 홍범 무함을 시행하였다. 천웅의 도와는 절대로 서로 용납할 수 없었다. (부도지, 79쪽)”]
홍범구주의 내용에 대해 신채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삼정三正은 곧 정덕正德과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이니, 이는 ‘대우모大禹謨’에 보인 바라.
정덕은 삼신三神의 도요, 이용은 수화금목토 오행의 용법이요, 후생은 정전井田으로써 인민의 생산을 풍부케 함이요, 오행은 곧 수화금목토니 삼정의 하나이지만, 이로써 오제五帝의 덕에 분배하여 수덕ㆍ화덕ㆍ금덕ㆍ목덕ㆍ토덕이라 하며, 오부의 직에 분장한다.”
이 글에 따르자면 서경 ‘대우모’에서 말하는 삼정三正 곧 세 가지 바른 것이란 그 첫째가 삼신의 도이며,
그 둘째가 오행의 용법이고, 그 셋째가 정전제라는 주장이다. 삼신의 도라 함은 천신ㆍ지신ㆍ인신이 하나라는 천부경의 도를 지칭하는 것이며, 오행의 용법이란 용도ㆍ구서에서 말하는 천지의 상생상극의 법도를 이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정전은 땅으로 다스림의 원리가 되도록 하는 구정균전법으로서 백성들의 생산력을 높여 생활의 질을 개선토록 하는 것이다.
삼정에 대한 신채호의 분석은 천부경의 삼신오제사상에서 선각仙覺의 원리가 빠지긴 했지만, 사상의 맥락을 가장 정확히 갈파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백겸의 기전도
조선중기의 선구적인 실학자로 평가받는 한백겸韓百謙은 역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동시에 실사구시의 학구적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집안의 동생이 평양감사가 되자, 평양으로 가서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평양 근교의 기자의 정전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두 발과 두 눈으로 확인한 정전의 터를 그림으로 그리고 해설을 붙여 출간하였다.
이것이 소중화 의식으로 정신적 침체상태에 빠져 있던 조선 중기의 유생들을 충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간 기전도箕田圖 사건이었다.
말로만 전해지던 기자조선시대 정전의 유적이 평양에 실제 존재한다는 것도 상상키 어려운 일이었지만, 유생들이 더욱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것은 정전의 모습이 맹자가 말한 바대로 정井자의 모양이 아니라 전田자 형으로 되어 있다는 한백겸의 보고 때문이었다. 유학의 성인인 맹자가 말한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마도 청천벽력과 같은 실망감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그림92 한백겸의 구암유고에 실린 기전도.
우측 상단에 글자로 가려진 부분을 포함하여 64정지가 보인다.
그러나 만일 한백겸이 본 것이 사실과 일치한다면, 이는 우리 상고사의 빈틈을 채울 수 있는 확신과 희망의 뇌관과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정지井地가 전田자 형태를 기본으로 해서 이루어졌다면 이는 곧 사가동정四家同井을 뜻하며,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마을을 이루니 네 집이 같은 정지井地를 이루어 20분의 1을 세금으로 냈다’는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의 기록이 사실이었음을 확신케 하는 구체적인 물증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구정균전법이 <방도>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층 더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조선의 균전은 팔가동전八家同田이 아니요 사가동전四家同田이니, 금 평양이나 경주에 끼친 기器자형의 고전故田이 충분히 이를 증명하며, 그 세제는 10분의 1을 취하는 십일세什一稅가 아니요 20분의 1을 취하는 입일세卄一稅이었나니, 맹자에 기記한 바 ‘맥이십이취일貉二十而取一’이 이를 명백히 지적한 것이다.8
이제 한백겸의 기전도 보고서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고 정전법에서 9분의 1세가 아닌 20분의 1세라는 관념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추론하기로 하자.
한백겸은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 제하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평양 근교의 정전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그 구획한 바가 모두 전자형田字形이다. 1개 전田에 4구역이 있고, 1구역이 각각 70묘畝9이다. 큰길 안에서 옆으로 보면 4개의 전지田地와 8개의 구역이 있고, 세로로 보아도 또한 4개의 전지와 8개의 구역이 있다. 4개의 전지는 사상四象의 상이고 8개의 구역은 팔괘八卦의 상이다. 전지가 모두 64(8× 8=64)구역으로 바르게 방方을 이룬다. 그 법은 선천방도先天方圖10의 바른 모습을 본뜬 것이다.
1묘畝의 넓이가 되는 길로 대략 구역을 나누고, 3묘의 길로 전지田地를 나누었다. 64구역의 3면에 9묘가 되는 대로가 있는데 성문을 지나서 영귀정 강변으로 통한다. 지나다니는 길이나 사거리 같아 보여서 전지를 제대로 만들 수 없는 밭고랑들은 자연스럽게 나두었는데, 반드시 16전지, 64구역으로 구획해서 1전甸11이 되도록 하였다. (구암유고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
한백겸은 평양의 기전이 1구역이 7묘로 된 것은 맹자가 말한 바처럼, 은나라의 70묘설과 동일하다고 보고, 그것이 주나라의 것이 아니라 은나라의 정전제이며 따라서 기자의 정전이 확실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기전도설후어箕田圖說後語’에서 다시 자신이 본 기전箕田의 원리가 <역>의 사상 팔괘 64괘의 원리와 부합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추론하였다.
대저 9묘 넓이의 대로 안에서 각각 70묘를 이루는 것은 64구區가 방方형으로 벌려 있는 것으로 <역>의 원방과 같다. 8구가 일렬로 선 것은 8번 나아감으로써 1이 된다는 것이다. 8구의 가운데 1구역이 공전이 되고, 그 나머지 7구역을 7가구가 각각 1구역씩 받는다. 7가구는 그 공전 중에서 여사(廬舍:농막)용으로 3묘씩을 받게 되므로 21묘를 제하게 된다. 그래서 나머지 공전은 49묘로서 7가구가 나누어 받게 되므로 공동으로 경작하는 것은 각각 7묘이고 나머지 70묘는 사전이 된다.
실제 공전으로 내는 것이 7묘이므로 70묘의 10분의 1로서 나머지가 없는 것과 같으므로 비록 그 제도에 대해 밝힌 글이 없을지라도 어찌 자연스럽지 않다 하리오. (중략) 대개 70묘에다 7가를 이루고 7묘를 공전으로 삼는 여사의 제도 또한 7수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곧 자연스럽게 스스로 이루어지는 수이다.
(구암유고 기전도설후어箕田圖說後語)]
그림93 맹자의 정전과 기전의 사가동정 비교도.
좌측 정井자형 그림은 맹자의 정전제, 우측이 기전의 전田자형 사가동정이다.
맹자의 정전제에서는 9구역으로 나눠진 정지에서 8가구가 1구의 공전을 경작하는데, 그 세율은 1/8, 1/9, 1/10이다.
우측 기전의 사가동정제에서는 전체 64구역으로 나눠진 정지에서 60가구가 3구의 공전과 1구의 여사용 공전을 경작한다. 그 세율은 1/20이다.
이것은 기전제가 10분의 1세를 유지했을 때 나타나는 수리이다.
우리는 윗글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정전제가 역법易法에 따라 획정된다는 사실과 그것을 구획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역>의 수리가 내재되어 있도록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신시의 구정균전법
만일 신시의 정전법이 평양의 기전과 같은 형태를 유지하면서 20분의 1세를 기본으로 했다면 어떤 식으로 공전과 사전을 분할하였을까?
평양의 기전은 <역>의 원리에서 정전의 법제를 도출해낸 것이므로 마찬가지로 <역>의 원리를 적용해보자.
64괘를 천지의 운행법인 60갑자의 도수 [“하늘은 6을 마디로 삼고, 땅은 5를 법도로 삼는다. 천기天氣는 6회 돌아 하나를 갖추게 되고, 지기地紀를 마치는 것은 5년이 되어 일주一周한다. 오와 육이 상합한 720기가 1기一紀가 되는데 모두 30년이다. 1440기는 모두 60년으로서 1주一周가 된다. (황제내경소문 천원기대론)” ] 에 맞추려면 64괘중에서 운행의 축을 이루는 건乾ㆍ곤坤ㆍ감坎ㆍ리離 4괘를 몸체로 보아 제한다.
[“주역참동계에서는 건乾과 곤坤을 화로와 솥으로 하고, 감坎과 리離를 금도金刀와 대약大藥으로 하며, 나머지 60괘를 모두 화후火候로 쓰고 있다.” 주희, 역학계몽 48쪽. “건과 곤은 역의 문호가 되며, 모든 괘의 부모가 되고, 감과 리는 바르고 크게 비어 있어 수레의 구르는 바퀴통이요 바른 굴대가 된다. 역에 64괘가 있는데, 건곤감리 4괘를 빼내서 노정, 약물에 대응시키니, 나머지 60괘, 360효는 주천周天의 도수와 꼭 맞는다. (참동계 제1장)”]
그러면 나머지 60괘가 60갑자에 맞추어진다.
동일한 원리를 정전제에 적용하면 정전제는 64구역에서 4구역을 제해야 하므로 60구역으로 편성된다. 60구역의 20분의 1은 3구역이다. 그러니까 60가구를 한 단위로 보았을 때 60가구가 공전으로 경작해야 하는 면적은 3구역이다. 공전은 모두 4구역이므로 4구역에서 3구역을 제하면 1구역이 남는다.
바로 이 1구역은 공동경작해서 나온 생산물을 가지고 여사廬舍의 유지비용이나 기타 공동비용으로 충당한다.
60가구가 공전 3구역을 공동으로 경작한다면 20가구가 1구역씩을 맡는 셈이다. 4가구가 하나의 정지를 이루고 있으므로 20가구는 모두 5정지를 이룬다. 이것은 바쁠 때나 비상시에 공전을 5정지가 교대로 나가 경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각자의 70묘 또한 한 정지를 이루는 4가구가 협동으로 일할 수 있음을 뜻한다. 농사는 예나 지금이나 개인이나 가족단위로 짓는 것이 어렵다. 그런 면에서 사가동정四家同井 제도는 현실적이고 능률적인 조직방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여사용 1구역은 60가구 전체가 모여 축제처럼 할 수도 있으며, 각 정지 단위로 교대로 경작할 수 있다.
사가동정과 20분의 1세를 전제로 하는 정전제는 조세의 부담을 경감시킬 뿐만 아니라 생활의 숨통을 튀어줄 수 있는 넉넉하고도 조화로운 제도이다.
이제 여기서 도출되는 수리와 그 의미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구역이 70묘를 이루고 4구역이 1정지를 이루므로 수리는 4와 7이 나온다. 4와 7은 칠성력을 이루는 수리이자, 천부경 환7의 수리이다. 그것을 현도에서 살펴본 바 있다.
따라서 사가동정에 1구역이 70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칠성력의 역법에 부합한다.
공전 1구역에 20가구가 할당되는데, 정지단위로는 5가 되니 4가구씩으로 된 1정지가 5일에 한 번씩 나가 교대로 공전을 경작하면 된다. 만일 4가구가 각자의 사전을 하루씩 번갈아 공동경작하여 4일을 보내고, 그 다음날 공전에 나가 일한다면 주기가 맞다. 칠성력을 썼으므로 천신을 모시는 일요일이나 월신을 모시는 월요일에는 쉰다면, 한 달 28일 4주를 마디로 돌아가면서 사전과 공전을 경작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종이도 없던 시절에 날짜 셈이 복잡하다면 머리가 아플 것이다.
그런데 이 정전제에서는 그런 불필요한 낭비는 없다. 마치 해와 달처럼 세상일이 운행한다. 게다가 1구역의 공전을 맡는 정지 팀이 모두 5개이므로 각 팀마다 거주하는 방위나 특성에 따라 저가, 구가, 양가, 우가, 마가 또는 도ㆍ 개ㆍ걸ㆍ윷ㆍ모의 명칭을 부여한다면 더욱 간단하고 수월해질 것이다.
그림94 평양 기전도의 64정지. 굵은 점선 안에 사가동정의 田이 모두 16을 이루고 있다.
공전 3구역을 전체적으로 보면 3구역에 각각 4가구씩이 모여 경작하는데 매번 팀원이 교체되면서 5일에 한 번씩 되돌아오는 것이다. 5일은 절기의 1후를 이루며, 오행의 수리이기도 하다. 여기에 칠성력의 칠요 체계가 번갈아 들면서 세월을 흐르게 하면서 모두 모여 축제처럼 즐기면서 일하는 여사용 1구역이 또 남아 있으므로 이것은 천부경의 ‘운삼사성환오칠일묘연’의 이치를 쏙 빼닮았다.
공전을 3구역으로 하고 여사용으로 1구역을 제하는 것에서 1과 3의 원리를 도출할 수 있다.
천부경 철학의 핵심은 하나가 천지인 셋이 되고 천지인 셋이 본래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1은 무無이기도 하고 태극이기도 하고 일기一氣라고도 한다. 그것은 천지인으로 분화되기 전에는 공空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이 4구역을 공전으로 다 쓰지 않고 1구역을 남기는 까닭이다.
국가에 생산물을 제공하지 않아도 되는 백성들만의 공전이 되는 것이기에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예의와 겸양의 도덕을 함양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정전제를 혁파하자 사람들한테서 예의와 겸양의 미덕이 사라졌다고 힐난한 이가 신채호였다. 20분의 1세가 아니라 10분의 1, 9분의 1, 8분의 1세밖에 되지 않는 정전제마저 없애버렸으니 오죽이나 했을까.
한백겸이 발견한 평양의 기전이 기자조선 때의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이나 이후의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신빙할 만한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이 정전이었는지, 아니면 촌락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런 의문점들을 일단 미뤄 두더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한 게 있다.
그것은 땅을 <역>의 64괘 원리에 따라 구획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한백겸의 보고서에는 평양의 기전에서 보이는 경계선의 수리가 ‘1묘畝의 넓이가 되는 길로 대략 구역을 나누고, 3묘의 길로 전지田地를 나누었다. 64구역의 3면에 9묘가 되는 대로가 있다’고 하였다. 전田자형이 근간이 되어 사상과 팔괘와 64괘로 분화되는 수리의 상을 보이는 것도 그냥 넘길 수 없는 대목이지만, 경계를 이루는 길의 면적이 1→3→9의 수리를 보이는 것은 평양의 기전이 천부경의 수리체계에서 나온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천부경은 1이 3이 되고, 3이 다시 9로 변화하는 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9×9로서 경문이 81자를 이루고 있다.
다시 기전으로 돌아가 보자. 사가동정과 20분의 1세를 기본 제도로 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기전 내에서 발생하는 조직구조를 살펴보자. 64구는 사실상 공전도 사전도 아닌 여사용 공공용지가 1구역, 국가 살림용 공전이 3구역, 나머지 사전 60구역으로 구성된다. 공전 3구역을 60가구에 배당하면 1구역을 20가구가 맡게 된다. 공전 1구역을 책임지는 단위에 따라 가구를 나눠본다면 60가구는 20가구씩 A, B, C 세 반으로 분할된다. 그리고 한 반 20가구에는 사가동정(田자형) 4가구로 이뤄지는 영농작목반의 원리에 따라 5개 반이 있게 된다.
그림95 기전도의 1ㆍ3ㆍ9묘로.
사가동정을 이루는 4정지를 1구씩 나누는 길은 1묘의 폭이며, 4정지를 다른 4정지와 구분하는 길은 3묘의 폭이며,
64정지와 다른 64정지를 구분하는 길은 9묘의 폭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동방세계의 전설적 수리이자 삼한철학의 핵심수리인 1, 3, 5가 출현함을 알 수 있다.
일신, 천신, 하느님, 삼황오제, 삼신오제, 삼한오가 등등.
1이 무극[큰 하나:大一]이라면 3과 5는 삼신오제이다.
3은 천일天一ㆍ지일地一ㆍ인일(人一, 太一) 삼신이며, 5는 흑제ㆍ적제ㆍ청제ㆍ백제ㆍ황제 오제가 된다.
1이 배달국이라면 3은 진한(辰韓:신한), 마한(馬韓:말한), 번한(番韓:불한) 삼한이고, 5는 오가五加, 오부이다.
전을 구성하는 4가구는 각각 1구역씩 70무를 갖고 있으므로 모두 280(70× 4=280)무를 이룬다. 공전 3구역은 모두 210무(70× 3=210)이다. 공전 1구역을 맡는 가구 수는 20이다. 여기서 도출되는 수리 4, 7(70), 20, 28(280), 49(490=280+210)는 앞서 현도에서 보았던 수리와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도>의 외곽을 이루는 괘는 모두 28개인데, 이는 현도의 ‘환7’의 수리이자 윷판에서 중앙 1점을 제외한 28점과 일치한다. 외곽 바로 다음 내부에 있는 둘레를 이루는 괘는 모두 20개인데, 이는 ‘환5’의 수리이자 윷판 외곽 20점과 일치한다.
만일 상고시대의 사가동정, 64정지 체계에서 20가구가 1구역의 공전을 맡았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64구역에서 여사용 1구역을 제하고, 나머지 63구역을 셋으로 분할하여 21구역씩 분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럴 때 3ㆍ7의 수가 도출된다. 또한 64구역에서 4구역을 공전여사용 포함으로 할 경우, 공전과 사전의 비율은 1:15가 된다.
이는 용도에서 태극수 1이 15로 변화되는 원리와 동일하다.[용도의 중앙을 이루는 무5와 기10은 태극수 1이 변화된 것으로 나머지 수의 본체를 이룬다.“대소변화의 주체인 중中은 그 자체가 바로 개개의 수이며 또한 물物과 상象 자체의 영사기인 바 이것이 또한 5와 10을 기본으로 하고 이루어진 것인즉 우주 창조의 본체는 5와 10이라는 중中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창조하는 면에서 보면 10이 본체이고 작용하는 면에서 보면 5가 본체다.
(한동석, 우주변화의 원리, 159~161쪽)”]
평양의 기전에서 보이는 9묘의 대로로 구획된 정전 안에 있는 64구를 전甸이라 하는데, 옥편에 ‘16정(井:여기서는 구역)이 1구丘가 되고 4구丘 64정井이 1전이 된다’고 정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전을 사상에서 팔괘, 팔괘에서 64괘로 나아가는 역법易法의 상으로 만드는 유제는 그 기원과 전통이 오래된 것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평양의 기전에서 1구역이 70묘가 되도록 한 것은 농사에 들어가는 적절한 노역과 그에 따른 작물 수확량을 고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천문운행의 역수와도 맞추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림96 기전도에서의 공전과 사전 추상도.
그림 중 백색 정지가 공전이다. 네 개의 공전 중 ○표시된 정지가 여사용이다.
총 64개의 정지 중 60가구가 3개의 정지를 경작해 생산물을 국가에 바치므로 20분의 1세가 된다.
60가구는 20가구씩 세 반으로 나뉘며, 각 반은 4가동정 5개팀으로 구성된다.
위에서 추론해본 것은 상고시대의 마을 단위가 위와 같이 사가동정과 20분의 1세를 근간으로 하는 정전제 체제로 편제되어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나온 하나의 이상적인 모델이다. 그것은 여러 지정학적 요인에 따라 변화할 여지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림97 기전도와 <방도> 여하튼 그러한 정전제 아래에서 농경마을 사람들은 사전과 공전의 경작을 번갈아 해야만 하는 협동농장식체제나 품앗이 협업체제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이다. 또한 칠성력의 역법으로 한 달과 한 해를 나누어 살았다면 그 역법에 맞게 농사력을 짜고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려고 했을 것이다. 상고사회의 오가 전통이나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5일장 등의 풍습은 정전제 농경사회에서 자연적으로 기인한 유습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 진다. 64괘의 역제와 1달 28일의 칠성력을 근간으로 정전제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단위 마을에서부터 관경 전 영역으로 확장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수리적 원리는 정전만이 아니라 정치체제와 사회문화 전 영역으로 확산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러한 전통은 끊어지지 않고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었다. 전국을 8도로 구획하고, 한양을 5부 49방으로 나눈 것은 상고시대 역법의 잔존물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땅으로써 다스림의 원리가 되도록 하는 치세의 도에서 나온 구정균전법은 전田자형 사가동정을 기본단위로 하여 8구역, 64구역으로 땅을 분할하지만, 실제 1묘로, 3묘로, 9묘로로 이루어지는 경계길이나, 그 운영제도에서 보듯이 1이 3으로 나뉘고, 3은 5로 나뉘고, 그밖에 7과 9가 나오도록 하여 천원지방의 모든 수리가 고루 조화되도록 설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64정지 내에서 1정지를 제외한 63정지를 삼등분하면 21정지가 되도록 하여, 3ㆍ7의 성수를 기억케 하고, 20가구가 1개의 공전을 책임지게 함으로써 양의兩儀의 하나를 이루는 20수리를 드러내게 하였다. 그것이 인체에 손가락 발가락으로 나타난 수이며, 윷판의 외곽 점의 수이자 마야 아스텍 책력의 신성한 수의 하나였음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이제 겨레의 상고사나 인류 고대문명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황금열쇠인 윷에 관한 긴 탐구의 여정을 끝마칠 때가 되었다. 한 가지 빠트린 것이 있다면 윷놀이를 모놀이로 하지 않고 왜 윷놀이로 명명했는가 하는 문제다. 그것은 컬린이나 다른 이들도 지적한 바 있듯이 사상을 뜻하는 네 자루의 윷가락이나 윷점체계의 최고 수리인 윷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윷을 뜻하는 한자가 네 개의 나무막대기를 뜻하는 ‘사柶’로 쓰는 전통으로 볼 때, 오채의 점수체계보다는 그것이 나오게 하는 윷가락 네 개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네 개의 나무막대기를 우리말로 ‘윷’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아직 보이지 않으므로 의문점은 여전히 남는다. 그런 면에서는 윷점체계의 최고 수리인 윷에서 왔을 것이라고 본 컬린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림98 모두 63개의 돌로 이루어진 포석정.(장근식ㆍ심은보, 유동훈 논문의 그림) 64괘에서 하나를 뺀 수리는 공空이나 허虛를 강조한 정전법 사상에서 온 것일까? 아니면 64번째 만월이 30일 단위 1개월의 63번째와 자연수로 일치되는 현상을 담을 것일까? 그렇게 볼 때 윷의 명칭은 오행의 개념보다 사상의 개념이 더 강조되고 중시되던 시대의 작품일 수 있다. 그렇다고 윷놀이의 초기에 오채 중에서 모가 빠지고 사채만이 있었다고 섣불리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문표의 <사도설>을 보더라도 조선 중엽 때까지도 모는 오채의 하나로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태극에서 64괘로 분화되는 <역>의 이치에서 볼 때 오행이란 사상이 성립되면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개념이므로 따로 언급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해서였을 수도 있다. 이는 사출도나 사신도라는 개념은 있어도 오출도나 오신도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는 겨레 철학의 특징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윷이 소이며, 소의 머리 형상이 삼각이기 때문에 삼한철학의 경전인 천부경을 상징하고, 천부경의 놀이로 만든 것이 윷이기 때문에 모놀이가 아니라 소놀이라고 했으리라는 추측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런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그것을 명확히 밝히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윷놀이의 제정원리나 그것을 만든 동기가 무엇인지 충분히 검토했다고 생각한다. 64구역 20분의 1세 정전법에서 여사용 공전으로 1구역을 둔 것은 땅속에서 샘이 터져 나오는 혈穴의 기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중앙이 비어 있는 현도의 원리와도 통한다. 허虛와 같은 그 한 구역이 사실은 나머지 전체를 살리는 역할을 한다. 아마도 우리 몸에 있는 단전의 소용돌이 곧 현빈지문玄牝之門도 그와 똑같을 것이며, 사방 한 치 길이의 원방으로 된 그것을 먼저 체감하고 천부경의 ‘환1’이자 중황실이라 명명한 이가 그 의미를 깨닫고 바깥 세상에 다스림의 원리로서 그것을 적용하지 않았을까? 원문: <천부윷의 재발견> 출처 :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nLSm&articleno=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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