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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날씨가 좀 따뜻해지는 것 같습니다. 기상 예보를 보니까 적어도 이번 주는 최고 기온이 계속 영상 10도를 넘는다고 합니다. 다들 봄기운을 느끼면서 즐겁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독일에서는 우리나라 한국을 코레야라고 부릅니다. 코레야라는 이 국호는 고구려와 연관이 있습니다. 고구려를 줄여서 고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이름이 해외에 알려지면서 유럽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우리를 고레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고려라는 이 이름은 무슨 뜻이고 이 이름의 기원은 무엇일까요?
어떤 역사학자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중국의 고서를 보면은 고구려를 구려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구려라는 말은 순수 우리 말 고 혹은 고을 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높을고 고구려는 높고 신성한 마을, 혹은 하늘의 자손들이 다스리는 거룩한 마을 그런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고구려가 작은 고을이었겠죠. 근데 이 고을이 계속 확장하면서 큰 나라가 되었고 그래서 고구려라는 이 이름은 고우를 넘어서서 한 나라를 지칭하는 국호가 되었습니다.
설교 시간에 한국 역사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공동체는 자기 이름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고구려는 거대한 중국과 대치하면서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 우리는 하늘의 자손들이다.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런 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중국에게 짓밟히고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지만 그러나 중국에게 흡수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 우리는 천손들이 살고 있는 나라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계속 그 역사를 고구려부터 이어줬던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이름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이름 속에는 어떤 정체성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요?
오늘은 성경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9장은 바울의 회심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울이라 불렸던 바울은 원래 교회를 없애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도중에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그때부터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교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2절을 보면 다마스쿠스에 있는 유대인 회당을 찾아다니며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바울은 회심 후 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제일 먼저 유대인들에게 선포한 것일까요?
이 문제가 그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 상태였고, 식민지의 앞잡이인 총독과 분봉왕이 자기들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 지도자들이 하는 일은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서 로마에 갖다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세금은 가혹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에 허덕였습니다. 자존심 강한 유대인으로서는 정말 참기 힘든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실력으로 로마를 이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군사력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종교에 의지했습니다.
구약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가 오시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다.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 왕국을 세울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이고, 만국이 우리를 섬기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메시아 신앙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이 활동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며 저분이 메시아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분이었고 수많은 이적을 행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지막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기대했던 모든 사람들의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그리스도인들에 따르면 예수는 사흘 만에 부활했고, 지금도 성령 가운데 임재하셔서 많은 이적을 행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편 바리새파에 속했던 바울은 바리새파의 방식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오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그때 메시아가 오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리새파의 전통을 따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된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이런 바울의 눈에 예수는 절대 메시아일 수 없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신명기 21장의 말씀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그런 사람이 어떻게 메시아일 수 있는가? 바울은 절대 메시아일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바울은 회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바로 메시아 그리스도시다. 그렇게 선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가 메시아시다.
이 선포는 사실 초대교회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을 보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 역시 복음의 핵심은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이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 요한 사도는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 이것을 밝히기 위해서 복음서를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볼 때 초대 교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을까요?
이것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정체성은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라는 말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리스도는 메시아라는 단어에서 온 말입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그리고 이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참고로 그리스도를 한자로 쓰면 기독이 됩니다. 기독 그래서 한국에서는 그리스도교를 기독교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메시아, 그리스도 혹은 기독 이 단어들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특별히 선택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일하는 제사장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들, 이런 사람들이 세워질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은 이렇게 기름 부은 사람들을 모두 메시아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일반 명사로서 메시아와 고유 병사로서 메시아를 구분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메시아는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선포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 개신교는 이 부분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이야기합니다. 삼중직이라고 함은 예언자, 제사장, 왕, 이 세 직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 가지의 직분을 가지고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역들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조금 더 자세히 한번 살펴보지요. 먼저 예언자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생각해 보면요.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개시합니다.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전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인간 예수를 보았는데 왜 하늘 아버지를 보았다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예언자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살펴봅시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파괴시켰습니다. 그러면 이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하나님은 속죄 제사를 통해서 그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속죄의 일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 이것이 제사장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을 보면요.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속죄의 제물로 내주기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지내십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과 우리가 분트가 되었습니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제사장의 사역은 이것입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 사역을 생각해 봅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장면을 복음서는 왕위에 즉위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빌라도의 군병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그러면서 왕이시어 평안하소서 그렇게 인사합니다.
성경이 이 장면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통해 왕위에 즉위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죗값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했습니다. 왕으로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이 삼중직을 하나로 한번 연결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시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이 재물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를 분트가 되게 하신 제사장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의 권세,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신 분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게 되었고,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 땅에 나타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우신 분이고, 그 그리스도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이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 현실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사야서 53장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될 그 죽음을 자기의 죽음으로 감당했습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죄의 싹을 그분께서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이 사실을 믿는 겁니다. 따라서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고난에 짓눌려서 흙흡되며 고난의 종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고백을 한번 들어봅시다.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자이신 그리스도, 왕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그는 저주를 받아 죽어 마땅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울을 대신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 바울을 복음의 한 증거로 삼으셨습니다. 죄인의 우두머리인 바울을 참아주신 그 주님, 그 주님은 나중에 예수 믿고 영생 얻으려는 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저런 죄인도 구원하셨으니 나 같은 사람도 구원하지 않을까 그를 복음의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바울은 죄책감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는 더 이상 죄책감에서 허덕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왜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셨습니까?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인이십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그 사람들, 그 사람들을 모아서 교회를 세우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되었을 때 그 교회를 통해 죽음의 문들, 지옥의 문들을 쳐부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은 분명했습니다. 자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죽음의 문들, 지옥의 문들을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친히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생명의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그리스도인을 세우고 그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작은 죄를 지어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나도 민감한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어서 때로는 죄의 권세 앞에 굴복하고 때로는 무기력하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자기가 괴롭힙니다. 너무 착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 살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멸하신 주님, 죄의 싹쓸 죄의 값을 지불하신 주님 그 주님께서 원하신 것은 지금도 우리 안에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데 우리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이 빌미가 되어서 현실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갑니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마치 죄의 노예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갈까요?
가장 큰 원인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머물 때 하나님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인도해 주셨고, 캄캄한 저녁이 되었을 때 정막이 내려왔을 때 불기둥을 통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가데스바네아에서 불신앙의 결단을 내리고 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만 그것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아낙 자손들이 더 두려웠습니다.
장대와 같이 큰 사람들, 하늘에까지 닿을 것 같은 높은 성들을 보면서 우리는 안 돼.
우리는 메뚜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자
그런 결정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임하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불기둥과 같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를 살려주시고 병을 고쳐주시고,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져 올리듯이 우리를 어려움에서 건져 올리십니다. 구체적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려움에 지배당하며 심리적으로 두려움에 눌릴 때가 많습니다. 그 두려움이 너무 커서 불안 속에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하루를 염려로 시작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을 돌아봅시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굴복해서 불신앙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두려움과 염려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들을 한번 돌아봅시다. 이런 불신앙의 핵심에는 자기 정체성을 망각한 것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스스로를 우리는 천손의 자손들이다. 하늘의 자손들이다. 우리는 신령한 고을, 신령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자기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고구려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중국의 침략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나라가 망한 것처럼 왕이 죽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망할 때를 보면은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스스로 무너집니다. 권력자의 연계 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이 권력 다툼을 벌입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었던 연남생이라는 분이 동생들에게 권력 싸움에서 치고 맙니다. 권력에서 밀려나자 이 분은 당나라에 망명 가버립니다. 그리고 훗날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선봉장이 되어서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들어옵니다.
그는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이 아니라 당나라 황제를 섬기는 신하로 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하늘의 자손이 아니라 인간의 신하로 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정체성이 망각되었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부정했을 때 고구려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래서 그리스도가 세워주신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그와 함께하고 그 사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역사를 나타낼 거다.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그리스도인을 통해 음부의 권세가 넘어질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체성을 잊어버립니다. 현실 속에서 질병을 만났을 때 잃어버립니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 이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는 가운데 음부의 권세 아래 두려워하면서 방황하며 살 때가 있습니다.
설교를 맺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사순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하신 주님께서 영으로 자기 사람들에게 임하십니다. 그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의 권세를 만나도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그리스도가 승리한 것처럼 너도 승리해야 한다. 음부의 권세가 너의 앞에서 떨게 될 것이다. 주님은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런 삶의 자리로 만들어 갑시다. 사순절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돌아봅시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이 복음을 가지고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돌아봅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믿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면 현실과 부딪히면 우리 안에 계시는 그 주님께서 우리의 길을 열어가실 것입니다. 절망하지 말고 우리가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