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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검푸른 우국(憂國)의 바다에서
어스름 저녁에 풍랑이 이는 겨울 바다를 본 적이 있습니까.
저에게는 젊은 날 운명처럼 자연의 비장미를 처음 느꼈던 곳이 바다였습니다.
그 후 조셉 콘래드의 작품 “로드 짐”의 영화 첫머리에, 풍랑이 이는 거친 바다를 보면서 해풍에 찌든 늙은 뱃사람의 탁한 목소리가 내러티브로 흘러 나옵니다. “지구의 나이를 알고 싶으면 저 폭풍 속의 바다를 보라.”
그 후 철학자 칸트가 정의한 바다가 주는 비장미에서 위대한 철학자의 감성에 저가 공감대를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물량의 역학적 비장감”이 라고.
그러나 바다의 비장미는 무엇보다도 이순신의 겨울 바다가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1598년 12월 16일 겨울이었습니다.
저는 나라의 국운(國運)이 어려워질 때마다 장렬했던 노량의 겨울을 생각하곤 합니다. 임진왜란은 센고쿠 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의 명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니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워 일으킨 동아시아 국제전쟁이었습니다. 7년간의 전쟁으로 조선과 민초들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의 철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노량해전은 조선에 주둔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대 함대의 철수를 명(明)의 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노량의 겨울 바다에서 섬멸한 마지막 전투입니다. 그래서 노량의 겨울 바다는 이순신의 바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다는 우리 행성에서는 생명의 시원(始原)이기도 합니다.
골디락스 존(Goldilocks Zone)에 속하는 지구라는 행성에는 바다가 생명의 시원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원시 생명체인 남조류(藍藻類)는 지구 행성 초기에 산소를 공급했든 균류로서 지금도 스트로마톨라이트는 화석으로 오스트렐리아 서부 해안과 우리나라 서해안 소청도에도 남아있습니다.
”유기체의 가변성과 자연선택의 방식을 보건대, 생명은 바람 부는 방향으로 움직일 뿐이다. 생명에는 더 이상 합목적성이 없어 보인다.”
이것은 찰스 다윈이 자신의 자서전에서 생명체는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하여 진화하고 있다는 현상을 밝힌 후 적었던 소회입니다. 다윈과 같은 과학자의 말은 이렇게 가치중립적입니다. 생명 세계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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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명제를 위하여 모든 에너지를 투입하고 있으며, 어떤 가치를 전제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등생물로 진화한 호모사피엔스인 인간에게는 가치 중립이라는 정신세계를 가진다는 것은 몇몇 예외적인 과학자를 빼놓고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입니다. 왜냐면 인간은 아시는 바와 같이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동물이며, 그 가치를 위하여 맹렬히 싸우기도 하고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이나 생물학은 지금의 세계와 생명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으며,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밝히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철학이나 종교학 같은 인문학은 ‘지금의 세계와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존재 이유와 가치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하나는 존재(Sein)의 학문이고, 다른 하나는 당위(Sollen)의 학문입니다.
물론 두 개의 학문이, 모든 것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하다 보면 중첩되는 부분이 있어 선명하게 구분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당위에는 도덕규범이나 관습 등도 있지만 대부분 강제와 결부되어있는 당위로서의 법이 인간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존재와 중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법은 ‘존재하는 당위(Seiendes Sollen)’라고 하기도 합니다.
사실 과학자와 인문학자는 패러다임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여 대화가 겉돌거나 대화 자체가 안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곤 합니다. 이런 괴리감을 잘 알았던 헤겔은 그의 법철학에서 차원 높은 지혜를 이야기하면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야 활동하기 시작한다.”라고 하며 참다운 지성을 통하여 학문 간의 불통을 좁히고자 했으며, 양자물리학으로 노벨상을 받은 하이젠베르크는 저서 『부분과 전체』를 통하여 자연과학과 인문학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고자 고심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J 굴드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단층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며 양자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했습니다.
“과학의 그물 즉, 교도권(敎導權, magisterium)은 경험세계를 덮고 있다. 그것은 우주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사실), 왜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가(이론)를 다룬다. 종교의 교도권은 궁극적 의미와 도덕적 가치의 문제들을 포함한다. 이 두 교도권은 겹치지 않을뿐더러 모든 의문을 포함하는 것도 아니다. 진부한 표현을 쓰자면 과학은 암석의 시대를 다루고, 종교는 시대의 반석을 다룬다. 과학은 천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연구하고 종교는 천국에 가는 법을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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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학제 간의 학문적 융합을 다루는 일련의 학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진화생물학자인 최재천 교수와 과학철학을 주도하는 장대익 교수 등이 넓은 스펙트럼을 포용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과학과 철학의 관계는 이 세계를 읽는 각론과 총론의 관계이자 지식과 지성의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만, 학자들은 학문의 융합을 ‘통섭(統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시담론(微示談論)과 거대담론(巨大談論)으로 규정하기에는 우리의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여, 역사와 국가가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규정하고 있으므로 어느 한 곳에만 방점을 찍을 수 없다고 봅니다.
제가 이렇게 자연과학과 인문학에 대한 패러다임을 소환하는 이유는, 국가와 역사라는 거대 담론과 시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미시담론인 삶의 가치가 이번 22대 총선에서 큰 단층이 존재하는 것을 보고 저의 멘탈이 붕괴되는 듯한 패닉상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투표가 마감되고 국민의 힘 상황실에는 한동훈 비대위원장과 윤재옥 원내대표와 장동혁, 조정훈 같은 의원들이 개표 실황을 보려고 모여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자신의 체력이 다 소진되어 거의 탈진상태에 이르렀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물에 도취되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번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저에게는 너무 신선하게 다가와 우리 헌정사에서는 보기 드문 정치 아이돌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에 도취 되었고, 접촉하는 시민들과의 자세에서 그동안 기성 정치인들의 진부한 모습과는 대비되는 품격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연예인보다 더 많은 인파를 몰고 다녔으며, 자기를 필요로 하는 지역구에서는 아낌없이 자기의 힘을 소진했습니다.
연약해 보이는 몸을 가지고 그렇게 많은 일정을 소화해낸다는 것은 여의도의 구태의연한, 함량 미달의 정치판을 바꾸어 보려는 열정이 그를 그렇게 인도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공식 선거유세전에는 마이크를 사용할 수 없었는데도 그의 의사 전달은 진부하지 않고 분명했습니다.
‘출구조사에서 나타난 결과는 본투표 집계에서는 충분히 만회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개표과정이 중반을 넘어서자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습니다. 사람은, 특히 남자의 인생에서 승부를 걸어야 할 때는 몇 번 오지 않습니다.
이번의 승부는, 여태까지 겪어보지 못한 한동훈 개인의 승부이기도 하지만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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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승부였습니다. 그것은 일반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무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패하면 국회는 장삼이사보다 못한 잡범 수준의 인물들이 장악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표정이 얼어붙은 걸 보았습니다.
그는 중언부언하지 않고 바로 “이 모든 것은, 선거를 지휘한 비대위원장 본인의 책임입니다.”라고 간략하게 말하고 퇴장했습니다. 그 장면은 우리 현대정치사에서 오래 기억될 장면으로 남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근대사에서 식민국가와 한국동란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겪으며 우리가 찾아낸 것은, 왕에게 예속되어있는 신민국가(臣民國家)에서 우리 백성들이 자유의지를 가진 시민국가(市民國家)라는 공동체의 가치였습니다.
그 공동체의 가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방향성을 설정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서구시민사회가 종교적 교조 속에서도 인간의 자유와 인권이라는 양도할 수 없는 가치를 혁명과 계몽시대를 거치면서 찾아낸 소중한 자산이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하게도 우리의 선각자들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서구의 지성으로 수렴하게 된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받아들이며 우리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물론 해방공간에서 좌우의 극단적인 갈등과 신생 국가들이 겪는 건국전쟁이라는 막대한 희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희생을 감수할 만큼 그것은 가치가 있었을까요?
그 가치는 우리가 어떠한 미래를 만들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지만 현재의 좌표를 배제할 수 없으며 앞으로 살아가야할 미래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상의 가장 빈곤한 사회가 불과 2세대도 지나지 않아 압축성장을 통하여 경제 규모 10위의 나라로 성장했으며 방위산업 6위 국가라는 세계적인 위상을 가진 나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경제 규모가 커짐에 따라 개인적인 삶의 가치도 상승하면서 결국 민주화까지 이루어 냈습니다. 20세기 신생국가 중에 정치 경제와 문화에서 이런 발군의 성취를 이룩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산업근대화와 민주화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초석이 되었으며 동전의 앞뒷면같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서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산업화의 다이내믹한 드라마는 실종되고, 민주화라는 다분히 고루하고 진부한 말만 재탕 삼탕 우려먹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소득 수준이 5천 달러에 도달하지 못하면, 민주화는 하나의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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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정치학자들이 말하곤 합니다. 우리는 많은 신생 국가들이 민주화에 성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빈부와 이념의 갈등으로 내전에 휩싸여 고통을 받고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의 친구들은 산업화라는 시대적 요청을 가장 리얼하게 경험한 세대입니다. 저 자신도 전문가는 아니지만, 장치산업의 정밀부품을 영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밀화학, 반도체, 원자력 발전소의 설비 현장을 직접 다니며 우리 산업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개괄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현장 엔지니어들의 고충과 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기술의 성취도 함께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그 기술이 우리 산업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습니다만 안타까운 것은 민주화 세력이 그런 삶의 애환을 알지도 못하면서 일방적으로 기업과 산업화 세력을 경제 불평등의 주범으로 보고 폄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념에 편향된 일부 정치인들은 공명심에 사로잡혀 노동조합을 부추겨 산업현장을 멈추게 하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자학적인 역사관까지 젊은 세대와 학생들에게 심어 국가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나라가 어떤 고난과 희생을 치르고 만들어진 나라이며, 또한 그런 성취를 이룬 나라임을 망각한 체 자칫 잘못하면 삼류국가로 전락할 광경을 볼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연배는 궤도를 이탈한 우리의 정치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며 또 그러한 사회적 위치에 있지도 못합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으며, 우리의 연륜은 한갓 노망으로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망연자실하여 우리 사회가 침몰하는 모습을 마치 세월호가 침몰하는 것을 넋을 놓고 보듯이 말입니다.
당시의 젊은 작가들은 그 현실을 『눈먼 자들의 국가』라고 통렬하게 비난하듯이, 우리 또한 눈먼 자들이 권력을 잡는 나라의 시민들이 될지도 모릅니다.
어느덧 우리의 나이도 80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의 손주 세대들이 구김살 없이 자라서 스스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좇아 우리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이 되어 우리가 도달하지 못했든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길 바랄 뿐입니다.
우리는 현재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자유와 개인의 존엄을 누리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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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사회라도 단일한 이념이 지배하는 그런 사회는 없다고 보지만, 통념상 상식과 공정이 지배하는 주류사회는 있기 마련입니다.
사회의 이념이나 이익공동체에는 항상 대칭관계에 있는 집단이 공존해왔습니다. 오히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사회가 대척점에 있었기 때문에 반면교사가 되어 자본주의 시장경제도 건전한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성장해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공존을 학자들은 ‘적대적인 공생관계’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자연의 생태계에는 그런 질서가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자유 시민사회와 공산사회의 이념경쟁은 쉬운 말로 하면 “개인이 우선인가, 집단이 우선인가?”라는 말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집단이 하나의 개체처럼 움직이는 대표적인 곤충이 개미입니다. 그 개미의 연구로 유명한 세계적인 석학인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한 말이 “이론은 훌륭한데 종(種)이 틀렸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사회주의 이론이 아무리 이상적이고 훌륭하더라도 인간에게는 적용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20세기 이념경쟁은 좌우 이념의 생존 경쟁이 되어 학문과 예술을 위시하여 우주개발까지, 정신과 물질의 모든 분야에서 영역을 선점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을 해왔습니다.
특히 군비경쟁(軍備競爭)은 자연의 생태계에서 보듯이 자원이 최대치로 소모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미국과 소련을 천조국(千兆國)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들의 국방예산이 천조원이 들기 때문입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나서는 중국이 그 뒤를 잇고 있다고 합니다. 병력수로는 미국이 150만 명이라면 중국은 230만 명이라고 합니다. 자연 생태께에서 자원을 이렇게 투입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습니다.
자원이 기형적으로 투입되다 보니 효력도 없는 소모전이 되었지만, 결국에는 자원이 부족한 쪽에서 내부균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독일 통일과 동유럽 공산주의 사회의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은 해체되어 종교와 민족이 다른 소수국가가 독립하면서 본래의 러시아로 축소되었습니다. 승리한 진영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었지만 그들 또한 노동자계급의 생존과 복지를 확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세기는 그렇게 오랜 냉전시대였습니다.
“시장은 폭력과 자유라는 두 얼굴(Janus-faced)를 갖는다.”라는 말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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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없는 자에게는 억압이며 있는 자에게는 자유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성찰한 결론입니다. 물론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오래전에부터 그 약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공한 국가는 이런 시장의 폭력을 알았기 때문에,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을 만들려고 노력해 왔으며 시민단체를 통하여 어렵고 가난한 소외된 사람들을 포용해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통치행위의 힘이 되는 정치권력에도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치도 자유와 폭격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방공간에서 참혹한 건국전쟁을 치른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삼류정치이며, 삼류국가라는 오명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모듬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이 말은 프랑스계 보수주의자 조제프 드 메스트로가 남긴 말이라 하기도 하고 미국의 민주주의를 연구한 알렉시스 토크빌이 한 말이라 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이 촌철살인의 말은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한 것처럼 주제 파악을 제대로 좀 하고 살아라는 뜻으로 우리한테 다가옵니다. 그것은 또한 ‘정치는 이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리얼한 현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정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된다.”라는 말도 깊이 새겨두어야 할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깜냥도 안되는 사람이 정치를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겪었습니다.
그래서 정치 지도자는 카리스마가 중요합니다.
어떤 집단이든 그 조직의 장은 카리스마가 없으면 그 조직을 이끌지 못합니다.
카리스마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을 따르게 하는 능력으로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정치 지도자가 가져야 할 자질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 정치에서 카리스마는 이미지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과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현대에 올수록 정치인은 언론 미디어는 물론이고 영상 미디어와 인터넷을 통해서 이미지 정치가 점점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정치인은 전문성과 도덕성을 기본 베이스로 깔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공적 자질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정치인은 그것이 카리스마이던 겸손한 경청의 자세이던지 이미지관리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스타들도 이미지가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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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가 나쁘면 정치인은 대중스타와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결함이 됩니다.
다른 것은 대중스타의 이미지는 극히 사적인 영역이지만, 정치인의 이미지는 공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 영향력의 반경은 넓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져 대권을 바라보는 2인 자의 위치에서 나락으로 떨어져 점점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숱한 정치인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회창 총리, 손학규 경기지사, 김무성 대표, 황교안 총리,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유승민 의원, 안철수 의원, 이낙연 총리 등. 안철수와 이낙연은 지금도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점점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윤석열 정권도 이미지 정치에서 실패하지 않을까’하고 조바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윤석열 정권은 지난 문재인 정권의 실패에서 탄생한 정권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문재인 정권에서 핍박받은 검찰총장 출신이었습니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아마추어였고, 본인도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으리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국민이 가졌던 그의 이미지는 공정과 상식이었습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詩)에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는 구절이 있듯이 ‘그를 대통령으로 키운 건’ 역설적으로 문재인 정권과 정권의 하수인인 조국과 추미애, 그리고 박범계 법무부 장관 등 좌파 정치권의 바람이었습니다.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과 위선적인 말과 행동에 피로감을 느낀 시민들이 새로운 인물에 대한 갈증과 윤석열 자신의 열정이 만들어 낸 권력이었습니다.
모든 권력은 각자의 시대에 맞는 역할이 있습니다.
문재인 정권은 자유민주주의 가치 위에서 시장경제를 만들어가는 국가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어 국민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윤석열 정권의 시대적 사명은 이 궤도를 이탈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정체성을 정상궤도로 돌려놓는 역할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후 우리의 국가가 정상궤도에 오르면 새로운 카리스마가 나타나 우리 시민들을 교도할 것이라고 상상해보곤 했습니다.
왜냐면 윤석열 정권은 처음과 달리 점점 불통의 이미지로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있었으며, 해외 순방에서 얻은 찬사에 도취 되어 언론과 방송미디어로부터 국정운영에 관한 평가에 비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변 참모들도 덩달아 해외 순방에 도취 되어 쓴소리하지 않는 침묵의 카르텔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 중흥을 이끌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위상에 맞게 많은 일화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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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그중에서 시인 구상(具常)과의 일화는 사람들의 입에 많이 회자되곤 합니다. 영관 시절부터 오랫동안 막걸리 친구로 서로 격의 없이 임자와 박첨지로 부르면서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이였습니다.
그런 구상 시인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큰 북과 같은 사람이다, 크게 치면 큰 소리가 나고 작게 치면 작은 소리가 나는 그런 사람이다.” 위인은 국가의 이상이라는 큰 주제와 서민들과 소외된 사람들의 작은 소리도 들을 줄 아는 탄력성 있는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육영수 여사의 역할이 커서 민초들의 삶과 같이하는 모습은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김건희 여사는 용모는 빼어나지만 민초들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런 이미지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그의 위선적인 모습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단 한 가지 좋아하는 말이 “정치는 서생(書生)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실용주의를 넘나들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것이었습니다.
국민이 무조건 옳다고 국민만 따라가면 포퓰리즘 정치가 되며 국가의 가치가 실종되는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 포퓰리즘 정치는 중독성이 강하며, 한번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 좀처럼 빠져나오기 어려운 관성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포퓰리즘의 단맛을 보다가 나라가 망하거나 삼류국가로 전락하는 모습을 많은 자원이 있으면서도 실패한 남미의 히스패닉 국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정치인은 실용주의도 중요 하지만 국민보다 한 발짝 앞서서 견인할 수 있는 국가의 미래를 준비하는 비전(Vision)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죽창가를 부르며, 조자룡 헌 칼 쓰듯이 걸핏하면 탄핵을 외치는 좌파 정치인들은 과거의 역사와 싸우느라 국가의 이상과 미래를 논할 여유가 없습니다. 국가의 이상이라는 비전도 자학적인 역사관을 극복하는 국민일 때 가능하다고 봅니다.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결국 과거를 해석하는 방식이 현재의 자화상이자 그 사회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경고음이 계속 울리는데도 윤석열 대통령과 용산의 비서실은 국민과의 소통을 게을리했습니다. 현대 정치에 있어서 이미지는 국민과의 소통을 매개하는 언론을 통하여 만들어집니다. 비서실도 그렇거니와 여당인 국민의 힘에서도 대통령과 토론하며 쓴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옛날 완고한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도 사간원(司諫院)이 있어 임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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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해 썬 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지금이 그때보다 더 완고한 시대입니까?
이태원 할로윈 참사와 새만금 잼버리 대회의 국제적 망신,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와 부산 엑스포 유치의 압도적 참패 등은 윤석열 정권을 역대 어느 정권 보다도 낮은 지지율로 경고음을 계속 울리고 있었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라’고 야당은 이때를 놓칠세라 국정의 주도권을 잡아 4월 10일 총선을 치를 심산이었습니다.
인사에서도 난맥상을 보였습니다.
용산 대통령실과 내각은 일사불란한지는 몰라도, 다른 의견이 수용되어 정책 진로가 바뀌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것이 수용되었다면 연이은 패배의 쓴잔을 마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는 대통령이 자초한 것이기도 합니다.
대통령이 권력의 속성을 알았다면 절대로 다변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경청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버락 오바마는 젊은 대통령이었지만 경청하는 겸손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마치 동네 신부님같이 마을 사람들의 불평을 듣는 듯이 말입니다. 물론 신부님같이 용서하는 성직자는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권력이 강할수록 뇌를 마비시키는 도파민의 분비가 많아져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는 성격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권력의 속성을 생물학적으로 연구한 결과입니다.
성공한 위인들은 대체로 자기 성공의 방정식에 도취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생기는 권력의 오만을 헬라어로 휴브리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늘 휴브리스를 경계하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떤 정권이든 사건 사고는 항상 일어난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은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사건이든 사고이든 언제나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건에는 선제적인 조치가 필요한데도 대통령 앞에서는 왜 그렇게 작아지는지, 침묵의 카르텔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언론은 자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눈에 띄는 인사는, 단언컨대 한동훈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문재인 정권에서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각을 세우다 보니 변방에서 한직으로만 돌던 한동훈 검사를 전격적으로 법무부 장관에 발탁한 것입니다. 그것은 윤석열 정권의 신의 한 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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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국회의 법사위에 출석하거나 국정감사로 국회의 단상에 섰을 때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논리적 반박하는 모습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을 초라한 존재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를 검사 시절에 왜 조선의 제일 검으로 불렀는지 이해가 가는 장면이 여러 번 연출되었습니다.
야당 의원들이 집요하지만 허구인 픽션을 팩트로 둔갑시켜 퍼붓는 질문 공세에, 과거 그들의 실언과 내로남불식 발언을 조목조목 상기시키면서 그들의 발언을 뻘쭘하게 만들었습니다.
치졸한 발언으로 사람들의 입에 회자 되는 것으로 당연히 선두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김남국 의원의 ‘이모 발언’이 있으며, 그에 버금가는 김의겸 의원의 ‘청담동 빠 발언’이 있습니다. 최강욱 의원의 여성을 비하하는 ‘암컷 발언’과 ‘깐족거린다’라는 말은 듣기가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정청래 의원과 박범계 의원의 발언도 도긴개긴이었습니다.
그들의 발언을 무색하게 차단할 때마다 어김없이 그들의 고성방가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들의 본색이 궁색하게 드러나며, 그들의 목청소리가 커질 때마다 저는 어느 영장류학자가 밝힌 베네수엘라 밀림에 사는 붉은고함원숭이들의 생태계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남아메리카에 사는 붉은고함원숭이는 영장목의 고함원숭이 속(屬)으로 분류되며 다른 원숭이들에 비해 설골(舌骨)이 10배 정도 커서 큰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대개 동물의 소리는 짝짓기를 위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소리인데, 영장류 연구가이며 형질 인류학자인 레슬리 냅 박사는 가장 큰 소리를 내는 고함 원숭이들은 가장 작은 고환을 가졌고, 가장 작은 목소리를 내는 원숭이는 오히려 큰 고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고환이 작으면 생산하는 정자 수가 적을 수밖에 없는데, 이 부족함을 큰 소리로 보완한다는 것입니다. 이 현상을 국회의원들의 큰소리에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호모사피엔스도 영장목의 인과(人科)에서 분기해 나왔다는 사실은 알았으면 합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큰 목소리들이 거리를 누빌 것이라고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옵니다.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들이 크고 멋진 차와 액세서리로 자기를 과시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예수가 외식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 걸 보니, 이런 허세는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의 생태계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야당 의원들의 허위의 팩트와 큰 고함소리가 나면 날수록 한동훈 장관은 뉴스의 초점을 받으며 그의 개인 성장사가 공개되면서 하나의 팬덤이 만들어졌습니다.
시민들은 모처럼 정계의 아이돌을 보면서 환호했습니다. 한동훈 장관의 명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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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그의 탄탄한 독서량이 배경이 되기도 하지만, 그의 특출한 재능을 알아보는 가까운 친구들의 얘기들을 들어보면, 한동훈의 머릿속에는 일종의 아카이브(Archive 기록보관소)가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고 잘 보관해두는 정돈된 개조식 문서같이 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해보면, 그와 토론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닐 듯합니다.
어느 선거이든 간에 대통령 재임 중에 치르는 선거는 그 정권의 중간 평가와 같은 것입니다. 4월 10일 총선을 앞두고도 좀처럼 오르지 않는 국민의 힘과 대통령 지지율 때문에, 윤석열 정권은 비상한 카드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비상한 카드가 결국 한동훈 장관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발탁한 것입니다.
정치 경험도 없는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젊은 장수가 그 직책을 맡기까지는 고심이 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한동훈은 한 해하고도 반이 넘는 법무장관 재임시, 국회 법사위와 국정감사에서 우리 국회가 깜냥도 안 되는 함량미달의 의원들을 보고 실망했으리라고 보며, 운동권 정권의 클라이언틸리즘과 그들의 토착비리가 저지르는 부패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파악했을 것으로 봅니다.
거기 더하여 그런 부패가 만드는 재화가 국가권력을 만드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데에 그의 정의감이 그를 소명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부패를 척결하는 것이 그가 이 세상에서 배운 정의이기도 합니다.
야당 의원들과 일부 여당의 중진의원들은 정치 경험도 일천한 풋내기 정치인이 국정의 난제를 풀기 위한 정치 기술과 정계에 자신의 인맥도 없이 가능하겠느냐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함께 가면 길이 됩니다.”라는 말과 “자신은 어느 지역구나 비례대표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당을 재건하는 데에만 힘을 쏟겠다”고 공언하였습니다.
“4월 10일 이후의 제 인생은 생각한 바 없으며, 오로지 4월 10일까지 제 인생을 다 소진할 것”이라고 결기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목련이 피는 4월 10일 바로 이 자리에서 동료 시민을 뵙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시적인 감성의 언어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비대위원 파트너로 김형동 의원과 장동혁 의원을 지명했으며 비대위원에 시각장애인 김예지 의원, 운동권 출신인 김경율 회계사, 구자룡 변호사, 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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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돌봄교육 대표, 당연직으로 윤재옥 원내대표, 유의동 정책위의장등을 포진시켰습니다.
비정치인을 비대위원으로 내세웠다는 것은 기성 정치의 진부함과 완고함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되며, 제가 보기에도 환상의 조합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참신한 모습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던 시민들까지 열광하게 만들어, 그가 방문하는 곳마다 인파를 몰고 다니는 하나의 팬덤 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름하여 ‘한동훈 효과’라는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진부한 용어 대신에 ‘동료 시민 여러분’이라는 말로 시민들의 가슴 속으로 뜨겁게 다가갔으며, 그의 행보로 보건데 연설문도 특정한 조력자 없이 직접 쓰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까운 친구들도 한동훈은 그 정도의 역량은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기자들의 질문에도 막힘없이 순발력 있게 대답하는 것을 보면, 그의 머릿속에는 중요한 의제에 대하여 각론과 총론이 잘 정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용산 대통령실의 실책으로 변질되긴 했지만, 처음에 내건 정치공약도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은 말할 것도 없고, 범죄혐의로 기소만 되어도 그때부터 세비 반납하는 것으로 하였으며, 국회의원 수(數)를 줄이는 것과 국회의사당을 세종시로 이전하는 것 등 여의도 정치 문법을 파격적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국회가 세종시로 옮기면 무엇보다도 xxx다리(犬子橋)라고 불리던 원효대교의 위상도 복원될 것입니다.
기성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 시민들은 환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당의 지지율이 오르며 민주당과의 격차가 거의 10% 가까이 났으며, 더불어 대통령의 지지율도 오르는 듯했습니다. 국민의 힘 내부에서도 누군가가 당이 150석이 가능하며 제1당이 될 수 있다고 호들갑을 떠니까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입조심을 하라며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본래 삼단지계(三端之戒)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자는 세상에 나가면 칼끝, 혀끝, 붓끝이라는 세 가지 끝을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비단 정계뿐만 아니라 각 분야에서 지위가 높을수록 말 한마디에 운명이 갈리는 것은, 무림소설에서 강호(江湖)의 고수들도 칼 끝에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많은 정치인이 혀끝에서 설화(舌禍)를 입어 정치생명이 끝나기도 했습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까요, 한동훈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경고음(警告音)은 계속 울리고 있었습니다. 윤석열 정권이 시작된 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태원 할로윈 참사, 새만금 잼버리대회의 국제적 망신,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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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와 부산엑스포 유치의 압도적 참패-에 더하여 총선 선거운동 중에 불거진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사건, 해병대 채상병 사망에 대한 지휘부의 의혹과 이종섭 국방장관에 대한 공수처의 출국금지를 무시하고 호주대사로 임명하여 출국하도록 한 것, 황상무 수석의 ‘기자 회칼 테러’ 발언, 의대생 2,000 명 증원 문제, 한동훈 비대위원장 사퇴 거론 등은 경고음으로 계속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윤 대통령과 용산 비서실에서는 미세한 음파는 고사하더라도 수위 높은 정치적 공세의 빌미가 될 수도 있는 높은 음파조차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큰 사건에는 그 징조를 알려주는 신호가 1:29:300이라는 하인리히 법칙이 작동한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큰 사건에는 29번의 가청권 내의 울리는 소리와 300번의 미세한 음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경고음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의 고위 관료나 정치권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면 귀머거리 이거나 아니면 수신안테나가 고장 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스템이 고장 난 것이지요.
우리 정치 생태계를 알려면, 한국의 종교생태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할 것’이라고 예언까지 했습니다만 우리의 종교생태계를 보면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보다도 기독교의 종교적 열정이 최고조에 달한 한국에서, 그리고 세계 최대의 교회와 교파를 성취한 나라에서 그 와 병행해 유독 사이비 교주들은 어찌하여 그렇게 자주 나타나는가? 숱한 비행이 언론을 통해서도 나타났지만, 결국 교주 한 사람은 세월호 사태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런 광신 집단에 빠져드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북한의 수령동지가 현지지도를 나오면 인민들은 환영의 도를 넘어 무슨 집단오르가슴에 빠지듯 울부짓는 모습과 오버랩 됩니다. 저는 아직도 그 두 개의 집단이 만드는 광기의 심리적 진원지가 어떻게 다른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젊은 작가들은 세월호 사태를 보면서 ‘눈먼 자들의 국가’라고 개탄스러워했지만 눈먼 자들은 우리 정치 생태계에서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위선형 범죄 정치꾼’들이 우리 시대의 지배종이고 , 그 토대는 그 어떤 ‘내로남불’도 내 편이면 괜찮다는 전도된 가치관을 지닌 우리 민초들입니다. 그 심리적 진원지도 사이비교주를 섬기는 광신도들과 다르지 않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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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노예는 쇠사슬에 묶인 자가 아니라 사기꾼을 못 알아보는 자입니다. 그래서 22대 국회는 내로남불 소시오패스들이 민초들을 지배하고 형벌하는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이 될 것입니다.
결국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라는 말은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되는 도돌이표 정치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선거권에서 잘못 인식하고 있는 부분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민주 국가에서 참정권을 가진 사람은 1인당 1표를 행사합니다. 문제는 그 이유로 ‘모든 의견이 동등한 값어치를 지닌다.’라고 착각을 한다는 점입니다.
다양한 분야에 많은 책을 썼던 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말대로 “민주주의가 나의 무지나 너의 지식이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동훈은 보수 우파의 중요한 자산이자 우리 정치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그의 복귀는 오로지 우리 시민들의 절실함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저 또한 한동훈의 복귀를 염원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만 그가 그리는 우리 정치 셍태계는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나는 노량의 겨울 바다에서 비장했던 이순신 장군의 우국(憂國)의 바다를
생각하며, 국운이 살아있다면 장군이 그러했듯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권력에 대해, 김훈 작가가 이순신 장군의 비장한 독백 “나는 나의 충(忠)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은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라고 읊었듯이, 그가 다시 돌아와 시민들의 가슴 속으로 뜨겁게 다가가길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2024년 5월 22일 사이버 총무 김 정 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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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문의 칼럼인데도 적절한 사례와 인용을 통하여 본인 의견을 잘 드러낸 글.
한동운의 활약으로 비전 있는 국가 여정이 펼쳐 지기를 기대합니다.
글쓴이 김정율은 부고 19의 대표적 지성임이 증명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