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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분별(思慮分別)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생각과 사물을 제 분수대로 각각 나누어서 가름을 이르는 말이다.
思 : 생각 사(心/5)
慮 : 생각할 려(心/11)
分 : 나눌 분(刀/2)
別 : 나눌 별(刂/5)
사려(思慮)는 여러가지 일에 대하여 깊게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을 말하고, 분별(分別)은 추량하고 사유하는 것 또는 구분하고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려분별(思慮分別)이란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생각과 사물을 제 분수 대로 각각 나누어서 가름하는 것을 말한다.
사려(思慮)가 깊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감정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려깊은 사람은 항상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염두에 두고 다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은 좋아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며 또 즐겨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계(戒)를 엄격히 잘 지키는 것은 또 다른 뜻으로 사려(思慮)가 깊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욕심에 눈이 어둡고 생각이 막히어 다른 이의 재산을 탐내고 명예를 탐하여 그를 해치려 할 때, 스스로 생각하기를 만약 다른 사람이 나에게 내가 지금 남에게 하려는 듯 해온다면 어찌 되겠는가라고 가정해 보라 나는 아마도 매우 슬프고 괴로우며 불행해 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남을 그와 같은 곤경에 처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스스로 반성하고 자숙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남을 해쳐서 나를 이롭게 하겠다는 생각마저도 부끄럽게 여겨 없애버린다면 이 사람은 생각이 깊은 사람, 계행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덕이 높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려(思慮)하는 바가 없다면 남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과 욕망의 달성을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쁜 일이나 옳지 않은 일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게 될 것이니,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면 그 사회는 온갖 범죄로 불안과 공포, 무질서가 지배하는 혼란과 불행의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다른 이의 인격과 사회 전체의 화합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가 없고 보는 즉시, 생각하는 즉시, 개인만을 위해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오직 투쟁과 논쟁이 있을 뿐 평화도 질서도 없는 어두운 사회로 전락할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욕심과 어리석음이 꼭 차있는 사람이 상대방을 전혀 인식하지 아니하고 깊이 생각하는 바가 없는 미래를 모르는 행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 말씀에 '동물의 세계는 남에 대한 생각을 하는 바가 없고, 지혜가 없으며 도덕이라는 것이 없이 본능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큰 짐승은 작은 짐승을 잡아먹고 사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참으로 사실을 그대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야생동물 생태를 기록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한 마리의 독수리가 나무 위에 앉아서 땅위에 움직이고 있는 뱀을 노려보고 있고, 이 뱀은 그것도 모르고 가까이 있는 개구리 한 마리를 먹이로 하려고 노려보고 있으니 이는 부처님의 말씀을 현실적으로 분명하게 뒷받침해주는 예시가 된 것이다. 이러한 동물의 세계에는 부끄러움이나 남을 생각하는 바나 불선업(不善業)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사회에도 계율과 도덕으로 자신들을 단련하지 않고 서로간의 이해와 존경 그리고 생각해주는 바가 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어떤 행동이라도 분별없이, 두려움 없이 실천에 옮긴다면 위의 동물세계와 다를 바 없다.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고 보살피며 도와주기는 커녕 오히려 짓밟고 해치고 넘어뜨려 다시는 일어나지도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잔인하게 앗아 버린다면 어찌 되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계율과 도덕의 가치를 새삼 인식하고 계율이 인류사회에서 절대 필요되는 요소라고 깊이 생각하고 잘 실천 수행하여 질서있는 사회속에서 서로가 신뢰하고 도우며 이해와 용서로서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분별은 불교에서 모든 사물과 존재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에 매달려 판단하고 사유(思惟), 추론하는 의식작용을 말하는 용어이다. 사유(思惟), 계탁(計度)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 비칼파(Vikalpa)를 번역한 것으로, 불교에서는 마음(心)과 그 작용으로써 대상을 취하고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비방가(Vibhanga)을 분별이라 할 경우에는 교법(敎法)을 분류, 분석하여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 고찰하는 것을 말한다.
구사론(俱舍論)에서는 대상을 직접 느끼는 자성분별(自性分別)과, 지혜로써 판단 추리하는 계탁분별(計度分別),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의 것을 기억하여 더하는 수념분별(受念分別) 등 세 가지로 나눈다.
6식(六識; 眼, 耳, 鼻, 舌, 身, 意의 인식작용) 중에서 의식(意識)은 세 가지 분별을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유분별(有分別)이라 하고, 나머지 5식(五識)은 자성분별(自性分別)만 있고 나머지 분별은 없으므로 무분별(無分別)이라 한다. 즉 분별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아닌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능가경(楞伽經)에 따르면 모든 대상은 마음의 분별에서 나온 것이며,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듣는 것도 모두가 분별이다. 법이나 비법도 사실은 분별에 지나지 않고,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는 부처님은 참으로 부처님을 뵌 것이 아니다. 분별을 버리지 못하고 허망한 것에 팔리면 열반(涅槃)을 얻지 못하며, 분별을 버리려면 집착하는 소견을 밖으로 내지 않아야 한다.
또 범부가 일으키는 분별로는 진여(眞如)를 깨달을 수 없고 진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분별에 의지해야 한다. 보살은 깨달음의 경지에 들 때 분별에서 비롯한 모든 번뇌를 끊고 인식의 주체와 대상의 대립을 초월하여 평등한 무분별의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
[참고] 안목(眼目)
논어(論語)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글귀를 읽을 수 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고 동시에 그의 눈동자를 살펴보면 누구도 다른 이를 속일 수 없다(聽其言 觀其眸子 人焉瞍哉)."
맹자(孟子)는 언유사병(言有四病)이라 하여 피사 음사 사사 둔사(詖辭 淫辭 邪辭 遁辭)를 말하고 있거니와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속이면 스스로 속이고 있는 만큼 그의 말은 성실성을 잃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말이라는 것은 음성의 정수(精粹)요, 가다듬어진 언구(言句)는 말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言者, 聲之精也; 辭者, 言之精也.
안(眼)이라는 것은 눈(目)이라는 뜻이지만 안목(眼目)이 있다 없다 할 때에는 눈 안(眼) 자(字)와 눈 목(目) 자(字)를 함께 쓴다. 목(目)아라는 것은 모든 생류(生類)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오관(五官)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지만, 안(眼)이라는 것은 목(目)을 통해서 외부세계의 사물을 살필 줄 아는 지적능력의 개념인 것이다.
사람마다 눈은 다 가지고 있지만 안목(眼目)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안목의 수준과 능력은 그 사람됨과 이른바 신언서판(身 言 書 判)의 조건을 얼마만큼 갖추고 있느냐하는 인격과 거의 정비례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사람의 경우일수록 안목이 높고, 넓고, 깊고, 원대하기를 국민들은 기대하는 것이다.
안목(眼目)이 높으면 시계고도가 높아지고, 안목(眼目)이 넓으면 시계반경이 넓어지며, 안목(眼目)이 깊으면 사려(思慮)의 깊이가 있고, 안목(眼目)이 원대하면 과거 현재 미래를 통관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선치자(善治者)는 장목(長目)과 비이(飛耳)를 가지고 수명(樹明: 밝은 세상을 세워간다는 뜻))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역사는 우리에게 귀띔해주고 있다. (管子全書 참고)
신음어(呻吟語)에서는 지도자의 안목(眼目)을 도안(道眼)과 정안(情眼)과 물안(物眼)으로 구별하여 후세 사람들을 깨우쳐 주고 있다.
첫째는 도안(道眼)이다. 도안이라는 것은 옳고 그른 것을 으뜸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의 소유자를 말한다(道眼, 在是非上見).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사물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법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가리켜 유물유칙(有物有則)이라고 한다. 불이 위로 타오르는 것을 염상(炎上)이라 하고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윤하(潤下)라고 한다. 이를 염상윤하(炎上潤下)라고 하거니와 그것이 물과 불이 존재하는 법칙인 것이다.
인간을 비롯하여 미물에 이르기까지 그 나름의 생존의 법칙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도안(道眼)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도안(道眼)이 없는 사람은 사리의 세계를 제대로 인식(認識)하지 못하기 때문에 도덕적인 측면에서 요구하는 가치기준에 상응하는 주격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그런 사람으로부터는 지도자다운 자질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둘째는 정안(情眼)이다. 정안(情眼)은 수시로 느껴지는 정감에 따라 애증의 기준을 척도로 하여 사물을 판단한다는 것으로서 이는 즉 애증을 으뜸으로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情眼, 在愛憎上見).
흔히 말하기를 상황판단을 하게 될 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고 한다. 팔은 생태적으로 보았을 때 밖으로 굽을 수는 없다. 그러나 팔은 손바닥을 세우고 일도양단(一刀兩斷)하는 식으로 옳고 그름을 판가름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팔은 안으로 굽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 안쪽에는 사심(私心) 사정(私情) 사감(私感) 사욕(私慾) 사리(私利) 사연(私緣)등의 심리적 제 요인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사사로움을 내면에 숨기고 사물을 다루려할 때에는 유물유치(有物有則)이라는 원리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즉 사물이 지니는 원천적인 법칙의 세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일상생활 과정에서 감정의 노예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따라서 시비를 가리고 고직(曲直)을 따지려는 시끄러운 세상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시비비(以是非非)하는 것이 아니라 이비비시(以非非是)하고, 이직곡곡(以直曲曲)하는 것이 아니라 이곡곡직(以曲曲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옳은 생각을 가지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지 아니하고, 그른 생각으로써 옳은 것을 도리어 그르다하며. 곧은 마음을 가지고 굽은 것을 굽었다 하지 아니하고, 굽은 생각을 가지고 곧은 것을 도리어 굽었다고 우겨대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생활사회는 언제나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셋째는 물안(物眼)이다. 물안(物眼)이란 흑백을 분별하지 못하고 청탁을 혼동하는 것을 말한다(物眼, 無別黑白而渾沌). 정안자(情眼者)의 인사는 정실인사(情實人事)에 편향하는 폐단을 낳고, 물안자(物眼者)의 처신은 공사와 청탁을 가림없이 많은 것을 탐식하는 비리를 범한다. 물안(物眼)이란 눈대중으로 사물의 진부를 판단하려는 경향을 지니기 때문에 위험천만 하기 이를 데 없다.
왜 물안(物眼)으로 자만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듣기 좋은 말을 많이 해주고 비위를 잘 맞추어주는 무리들의 자태는 별로 밉지 않다. 밉지 않기 때문에 호감이 가고 호감이 가기 때문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경우일수록 외롭다 느껴질 때마마 그런 부류를 상기하게 되는 충동을 받는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충성 맹서도 쉽게 하는가하면, 견마지로(犬馬之勞)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관상을 통해서 범죄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관상을 보고 범죄인을 단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미남미녀형의 범죄자들이 뜻밖에도 많기 때문이다. 현실이 이러하거늘, 인사권을 가지고 있다 해서 애증 감정이나 눈대중을 가지고 인사를 행한다면 그보다 더 위험한 불작난은 없을 것이다.
정권인수 초기에, 또는 권좌에 취임하는 즈음에 종래의 추종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논공행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경우, 논공행상하는 방식으로 행해지는 인사과정에서는 도안(道眼)이 발휘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정다산(丁茶山) 선생은 그와 같은 초기 인사행정의 맹점을 예방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삼기론(三棄論)을 강조하였다. 첫째는 노기(奴棄)요, 둘째는 옥기(屋棄)요, 셋째는 자기(子棄)다.
노기(奴棄)는 추종자를 버리라는 뜻이며, 옥기(屋棄)는 공금으로 사가를 치장하지 말라는 뜻이며, 자기(子棄)는 자녀들을 공사에 관여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미 경험하였거니와 동파(東派) 서파(西派) 운운하면서 국정을 문란케 했던 사례를 보았고, 대통령 재임 중 사가를 팔고 짓고 하다가 국민적 빈축을 사는 모습도 보았다. 그런가하면 자녀들의 자질을 고려함도 없이 정치적 막후 실력자로 등장시켰다가 줄줄이 감옥행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목민심서(牧民心書)를 한번만이라도 읽어보았다면 그런 오흔(汚痕)은 남기지 안했을 것이다.
▶️ 思(생각 사, 수염이 많을 새)는 ❶회의문자로 田(전; 뇌)와 心(심; 마음)의 합자(合字)이다. 思(사)는 '생각하다'의 뜻이다. 옛날 사람은 머리나 가슴으로 사물을 생각한다고 여겼다. ❷회의문자로 思자는 '생각'이나 '심정', '정서'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思자는 田(밭 전)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소전에서는 囟(정수리 신)자가 들어간 恖(생각할 사)자가 '생각'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囟자는 사람의 '정수리'를 그린 것이다. 옛사람들은 사람의 정수리에는 기가 통하는 숨구멍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囟자는 그러한 모습으로 그려졌었다. 그러니 恖자는 머리(囟)와 마음(心)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깊게 생각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해서에서부터는 囟자가 田자로 바뀌면서 본래의 의미를 유추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思(사, 새)는 성(姓)의 하나로 ①생각, 심정(心情), 정서(情緖) ②의사(意思), 의지(意志), 사상(思想) ③뜻 ④마음 ⑤시호(諡號) ⑥성(姓)의 하나 ⑦어조사(語助辭) ⑧생각하다, 사색하다 ⑨그리워하다 ⑩슬퍼하다, 시름 겨워하다 그리고 ⓐ수염이 많다(새) ⓑ수염이 많은 모양(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생각할 륜(侖)이다. 용례로는 돌이키어 생각함을 사고(思顧), 생각하고 궁리함을 사고(思考), 사유를 통하여 생겨나는 생각을 사상(思想), 정을 들이고 애틋하게 생각하며 그리워함을 사모(思慕), 마음으로 생각함을 사유(思惟), 여러 가지 일에 관한 깊은 생각과 근심을 사려(思慮), 생각하여 헤아림을 사료(思料), 생각하여 그리워함을 사련(思戀), 늘 생각하여 잊지 아니하고 마음속에 간직함을 사복(思服), 생각하고 바람을 사망(思望),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어 깊이 생각함을 사색(思索), 서로 엉킨 많은 생각이나 생각의 실마리를 사서(思緖), 정의의 길을 그려 생각함을 사의(思義), 한 시대의 사상의 일반적인 경향을 사조(思潮), 마음 먹은 생각을 의사(意思), 생각하는 바를 소사(所思),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함을 묵사(默思), 고통스러운 생각을 고사(苦思), 깊이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을 심사(深思), 묘한 생각을 묘사(妙思), 객지에서 갖는 생각을 객사(客思), 지나간 뒤에 그 사람을 사모함을 거사(去思), 곰곰이 잘 생각함을 숙사(熟思), 생각이나 느낌이 많음을 다사(多思), 저녁 때의 슬픈 생각을 모사(暮思), 생각이 바르므로 사악함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사무사(思無邪), 어떠한 문제를 생각하여 해석이나 구명하는 방식을 일컫는 말을 사고방식(思考方式), 사모해 잊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사모불망(思慕不忘),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생각과 사물을 제 분수대로 각각 나누어서 가름을 일컫는 말을 사려분별(思慮分別), 처지를 서로 바꾸어 생각함이란 뜻으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봄을 이르는 말을 역지사지(易地思之), 평안할 때에도 위험과 곤란이 닥칠 것을 생각하며 잊지말고 미리 대비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거안사위(居安思危), 편안한 때일수록 위험이 닥칠 때를 생각하여 미리 대비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안거위사(安居危思),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생각하라는 말을 견리사의(見利思義),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도 없다는 뜻으로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오묘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사의(不可思議),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생각을 너무 깊게 함 또는 애쓰면서 속을 태움을 일컫는 말을 노심초사(勞心焦思), 깊이 생각하고 깊이 고찰함 또는 신중을 기하여 곰곰이 생각함을 이르는 말을 심사숙고(深思熟考), 능히 보고도 생각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보통의 이치로는 추측할 수 없는 일을 이르는 말을 능견난사(能見難思), 타향의 생활이 즐거워 고향 생각을 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 또는 눈앞의 즐거움에 겨워 근본을 잊게 될 때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낙이사촉(樂而思蜀), 몹시 뒤섞이고 착잡하여 어수선하게 생각함 또는 그 생각을 일컫는 말을 호사난상(胡思亂想), 즐거움에 젖어 촉 땅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쾌락 또는 향락에 빠져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낙불사촉(樂不思蜀),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리지 못할 생각이나 평범하지 않는 생각을 일컫는 말을 비이소사(匪夷所思), 낮에 생각하고 밤에 헤아린다는 뜻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깊이 생각함을 이르는 말을 주사야탁(晝思夜度), 물을 마실 때 수원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근본을 잊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음수사원(飮水思源), 일을 하면 좋은 생각을 지니고 안일한 생활을 하면 방탕해 진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노사일음(勞思逸淫) 등에 쓰인다.
▶️ 慮(생각할 려/여, 사실할 록/녹)는 ❶형성문자로 虑(려, 록)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마음심(心=忄;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빙빙 돈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 盧(로)의 생략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慮자는 '생각하다'나 '걱정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慮자는 虎(범 호)자와 思(생각할 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思자는 사람의 정수리와 심장을 함께 그린 것으로 '생각'이나 '심정'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전에는 산길로 다닐 때 무엇이 가장 걱정됐었을까? 아마도 산짐승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 가장 걱정이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호랑이를 만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慮자는 그러한 의미가 반영된 글자로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진 思자에 虎자를 더해 '우려되다'라는 뜻을 표현했다. 그래서 慮(려, 록)는 마음으로 두루 생각한다는 뜻으로 ①생각하다 ②이리저리 헤아려 보다 ③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④걱정하다 ⑤어지럽게 하다 ⑥맺다, 연결하다 ⑦꾀하다 ⑧흩뜨리다(흩어지게 하다) ⑨생각 ⑩계획(計劃) ⑪걱정, 근심, 염려(念慮) ⑫의심(疑心), 의혹(疑惑) ⑬대강(大綱), 대개(大槪: 대부분), 대략(大略) ⑭꾀 ⑮기(척후가 들고 다니는 기) 그리고 ⓐ사실하다(寫實: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다)(록) ⓑ조사하다(調査)(록)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생각할 륜/윤(侖), 생각할 유(惟), 생각할 억(憶), 생각 념/염(念), 생각 사(思), 생각할 임(恁), 생각 상(想), 생각할 고(考)이다. 용례로는 뜻밖이나 의외로를 여외(慮外), 우러러 염려함을 여앙(慮仰), 폐단을 염려함을 여폐(慮弊), 어떤 일을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을 우려(憂慮), 깊이 생각하여 헤아림을 고려(考慮), 보살펴 주려고 이리저리 마음을 써 줌을 배려(配慮), 여러 가지로 헤아려 걱정하는 것을 염려(念慮), 여러 가지 일에 관한 깊은 생각과 근심을 사려(思慮), 앞으로 올 일을 헤아리는 깊은 생각을 원려(遠慮), 신중하게 사려함을 신려(愼慮), 깊이 생각함 또는 그러한 생각을 현려(玄慮), 마음속으로 걱정함 또는 그러한 걱정을 심려(心慮), 많은 사람의 생각을 중려(衆慮), 현명한 분별을 지려(知慮),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못함을 가려(可慮), 천 번을 생각하면 한 번 얻는 것이 있다는 뜻으로 많이 생각할수록 좋은 것을 얻음을 일컫는 말을 천려일득(千慮一得), 천 가지 생각 가운데 한 가지 실책이란 뜻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하나쯤은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을 천려일실(千慮一失), 형세가 절박하여 아침에 저녁 일을 헤아리지 못함 곧 당장을 걱정할 뿐이고 앞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조불려석(朝不慮夕), 깊은 꾀와 먼 장래를 내다보는 생각을 일컫는 말을 심모원려(深謀遠慮), 마음을 태우며 괴롭게 염려함을 일컫는 말을 초심고려(焦心苦慮), 가까운 곳에서는 근심하고 먼 곳에서는 염려함을 일컫는 말을 근우원려(近憂遠慮),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이 아주 확실함을 일컫는 말을 보무타려(保無他慮),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천사만려(千思萬慮), 여러 가지 방책을 깊이 생각함을 일컫는 말을 백술천려(百術千慮), 깊이 잘 생각함을 일컫는 말을 심사숙려(深思熟慮), 충분히 생각한 끝에 과감하게 실행함을 일컫는 말을 숙려단행(熟慮斷行),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자연 속에서 한가하게 즐김을 일컫는 말을 산려소요(散慮逍遙), 아무런 생각이나 걱정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무사무려(無思無慮), 경솔하고 얕은 생각을 일컫는 말을 경려천모(輕慮淺謀), 조금이라도 다른 근심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단무타려(斷無他慮), 걱정이 적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성비세려(誠非細慮), 어리석은 자의 많은 생각을 일컫는 말을 우자천려(愚者千慮), 모든 일에 생각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이 아주 자세하게 함을 여무소부도(慮無所不到) 등에 쓰인다.
▶️ 分(나눌 분, 푼 푼)은 ❶회의문자로 푼의 뜻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된다. 刀(도; 칼)와 八(팔; 나눔)의 합자(合字)로 물건을 나눔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分자는 ‘나누다’나 ‘베풀어 주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分자는 八(여덟 팔)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八자는 사물이 반으로 갈린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사물이 나누어진 모습을 그린 八자에 刀자가 결합한 分자가 물건을 반으로 나누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分자는 사물을 반으로 나눈 모습에서 ‘나누어 주다’나 ‘베풀어 주다’라는 뜻을 갖게 됐지만, 물건이 나뉜 후에는 사물의 내부가 보인다는 의미에서 ‘구별하다’나 ‘명백하다’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分(분, 푼)은 (1)분세(分稅) (2)분수(分數) (3)십진(十進) 급수(級數)의 단위의 하나. 곧 하나를 열에 나눈 것의 하나. 1의 1/10. 시간(時間)의 단위. 한 시간을 60으로 나눈 그 하나 (4)각도(角度). 경위도 등의 1도를 60으로 나눈 단위의 하나 (5)길이의 단위 1치를 10으로 나눈 그 하나 (6)1돈을 10으로 나눈 그 하나 (7)1할(割)을 10으로 나눈 그 하나 (푼)으로 읽힐 때, ㊀옛날 엽전의 단위. 한돈의 1/10 ㊁무게의 단위. 한돈의 1/10 ㊂길이의 단위. 한 치의 1/10, 등의 뜻으로 ①나누다 ②나누어 주다, 베풀어 주다 ③나누어지다, 몇 개의 부분(部分)으로 갈라지다 ④구별(區別)하다, 명백(明白)하게 하다 ⑤헤어지다, 떨어져 나가다 ⑥구별(區別), 다름 ⑦나누어 맡은 것, 몫 ⑧분수(分數) ⑨운명(運命), 인연(因緣) ⑩신분(身分), 직분(職分) ⑪길이, 무게, 시간(時間), 각도(角度), 화폐(貨幣) 따위의 단위 ⑫24절기(節氣)의 하나,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을 때, 그리고 ⓐ푼(엽전의 단위)(푼)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구분할 구(區), 나눌 반(班), 나눌 배(配), 나눌 반(頒),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합할 합(合)이다. 용례로는 어떤 사물을 이루고 있는 각 성분이나 요소를 갈라냄을 분석(分析), 어떤 갈래에 달린 범위나 부문을 분야(分野), 틀림없이 또는 확실하게를 분명(分明), 나누어서 넘겨 줌을 분양(分讓), 서로 나뉘어서 떨어지거나 떨어지게 함을 분리(分離), 찢어져 갈라짐을 분열(分裂), 생산에 참가한 개개인이 생산물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나누는 일을 분배(分配), 일을 나누어서 맡음을 분담(分擔), 종류를 따라서 나눔을 분류(分類), 따로따로 흩어짐을 분산(分散), 서로 구별을 지어 가르는 것을 분별(分別), 분량이 적적하여 모자람이 없음을 충분(充分), 전체를 몇으로 나눈 것의 하나하나를 부분(部分), 처리하여 다룸을 처분(處分), 명목이 구별된 대로 그 사이에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나 분수를 명분(名分), 따로따로 갈라 나눔을 구분(區分), 개인의 사회적인 지위 또는 계급을 신분(身分), 몫몫이 나누어 줌을 배분(配分), 남에게 어질고 고마운 짓을 베푸는 일을 덕분(德分), 마음에 생기는 유쾌 불쾌 우울 따위의 주관적이고 단순한 감정 상태를 기분(氣分), 화합물을 조성하는 각 원소를 성분(成分), 자기에게 알맞은 신분 또는 의무로 마땅히 하여야 할 직분을 본분(本分), 영양이 되는 성분을 양분(養分), 서로 소매를 나누고 헤어짐이란 말로 이별을 뜻하는 말을 분수작별(分手作別), 분가함 또는 별거함을 분문이호(分門異戶), 얼마 안 되는 돈과 곡식을 분전승량(分錢升量), 사리를 분별하는 마음가짐을 분별사식(分別事識), 자기 분수에 만족하여 다른 데 마음을 두지 아니함을 안분지족(安分知足), 두 과부가 슬픔을 서로 나눈다는 뜻으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동정한다는 말을 양과분비(兩寡分悲), 한번 서로 인사를 한 정도로 아는 친분을 일면지분(一面之分),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중대한 의리와 명분을 대의명분(大義名分) 등에 쓰인다.
▶️ 別(나눌 별/다를 별)은 ❶회의문자로 冎(과; 另령)와 선칼도방(刂=刀; 칼, 베다, 자르다)部의 합자(合字)이다. 살과 뼈를 나누는 일, 나중에 살에 한하지 않고 사물을 구분하는 뜻으로 쓰였다. ❷회의문자로 別자는 ‘나누다’나 ‘헤어지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別자는 另(헤어질 령)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另자는 冎(뼈 발라낼 과)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뼈와 살을 발라낸다는 뜻이 있다. 別자의 갑골문을 보면 뼛조각과 칼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의 뼈와 살이 나누어졌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뼈와 살이 나누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죽었다는 뜻이기 때문에 別자는 ‘헤어지다’나 ‘나누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別(별)은 (1)어떤 말 앞에 붙어서 보통과 달리 독특함을 나타내는 말 (2)별의 별의 뜻을 나타내는 말 (3)명사(名詞) 다음에 붙어서 그 명사를 같은 종류로 구별(區別)할 때에 쓰는 말 등의 뜻으로 ①나누다 ②몇 부분(部分)으로 가르다 ③헤어지다 ④따로 떨어지다 ⑤떠나다 ⑥다르다 ⑦틀리다 ⑧갈래, 계통(系統) ⑨구별(區別) ⑩차별(差別) ⑪이별, 헤어짐 ⑫따로 달리 ⑬특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를 타(他), 구분할 구(區), 다를 차(差), 다를 수(殊), 다를 리(異), 떠날 리(離)이다. 용례로는 딴 방면이나 방도를 별도(別途), 세상을 떠난다는 뜻으로 윗사람이 죽음을 별세(別世), 관련성이 없어서 구별되는 딴 것을 별개(別個), 살림집 밖에 경치 좋은 곳에 따로 지어 놓고 때때로 묵으면서 쉬는 집을 별장(別莊), 본관 밖에 따로 지어 놓은 건물을 별관(別館), 유달리 좋은 맛으로 늘 먹는 것과는 다르게 만든 좋은 음식을 별미(別味), 달리 일컫는 이름을 별칭(別稱), 두드러진 다른 차이를 별차(別差), 따로 떨어져서 살음을 별거(別居), 보통의 것과는 달리함을 별반(別般), 보통과 다름을 특별(特別), 차등이 있게 구별함을 차별(差別), 하나 하나 낱낱이 따로 나눔을 개별(個別), 특별함을 각별(各別), 종류에 따라 갈라 놓음 구별(區別), 서로 구별을 지어 가르는 것을 분별(分別), 서로 갈려 떼어짐을 이별(離別), 기약 없는 이별을 결별(訣別), 서로 헤어짐을 작별(作別), 서로 떨어지기를 서운하게 여김을 석별(惜別), 이별을 알림을 고별(告別), 헤어지거나 멀리 떠나는 사람을 보냄을 송별(送別), 가려서 따로 나눔을 선별(選別), 속계를 떠난 특별한 경지에 있다는 뜻으로 별세계를 말함을 별유천지(別有天地),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아주 좋은 세상 또는 딴 세상을 별유건곤(別有乾坤), 보통 볼 수 없는 특별히 좋은 풍경을 별유풍경(別有風景), 남자와 여자와는 분별이 있다의 남녀유별(男女有別), 남편과 아내는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부부유별(夫婦有別), 여러 가지 사물이 모두 차이가 있고 구별이 있다의 천차만별(千差萬別), 어른과 아이와의 구별을 관동지별(冠童之別), 우레처럼 만났다가 번개처럼 헤어진다는 뇌봉전별(雷逢電別)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