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03
10월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연중 제27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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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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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bwEv49xeQ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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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 외투를 본래의 주인인 저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작은 사람, 겸손한 인간을 총애하신다는 진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통해서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의 한없는 겸손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칭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본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랫사람’, ‘작고 가난한 사람’, ‘천한 사람’, ‘모든 사람의 종’, ‘다른 형제들의 발아래 있는 사람’, ‘죄인 중의 죄인’, ‘주 하느님의 부당한 종’등으로 자신을 칭했습니다.
그의 겸손은 예수님의 겸손을 판박이처럼 빼닮았습니다. 그는 지속적인 겸손을 유지하려고 집도, 수도원도, 아무런 재산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의 덕을 유지하려고 사제직에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수도회 총장이 되었지만 갓 입회한 지원자에게도 순명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수도원 들어와서 참으로 멋진 선배 사제를 봤습니다. 당신께 들어오는 좋은 선물들은 모두 저처럼 ‘없어 보이는’ 후배들이나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주십니다. 당신은 늘 노숙인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 선배가 인사발령이 나서 다른 소임지로 떠나실 때였습니다. 다들 수도원 마당에 모여서 인사를 드리는데, 깜짝 놀란 것이 이삿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짐이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달랑 손가방 두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걸 손수 양손에 들고 대중교통으로 그렇게 떠나가셨습니다.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홀연히 떠나가는 뒷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모릅니다.
프란치스코가 살아가셨던 중세기 가톨릭교회의 모습은 부끄러운 구석이 많았습니다. 귀감이 되어야 할 고위 성직자들은 제 몫 챙기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지도자들이 갖은 이권에 개입하여 막대한 부를 축척했습니다.
위풍당당한 대성전들과 수준 높은 예술작품 등으로 외관상 교회는 활짝 꽃피어났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회칠한 무덤 같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자취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암울한 시절,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모습, 가장 가난한 모습, 가장 겸손한 모습,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로 대중들 앞에 등장합니다. 지닌 것이라고는 지독한 고행과 극기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몸뚱이 하나뿐인 그가 부패일로를 걷고 있던 제도교회와의 정면대결을 펼쳤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정신이나 이상, 영성으로만 추종한 것이 아니라, 100% 있는 그대로, 실제로, 구체적으로, 온몸으로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심이후 한 평생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기쁘게 했습니다. 완벽한 가난의 실천을 가로막는 무수한 장벽들과의 피나는 투쟁이 그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가도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서슴없이 내어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 외투를 본래의 주인인 저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 외투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 까지만 우리가 잠시 빌린 것입니다. 나는 결코 도둑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필요한 사람에게 우리 것을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둑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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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DbjEvismm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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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왜 신비인가?>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는 율법의 핵심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깨달은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깨달았지만, 아직 실천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은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면 모두가 다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분별하는 이유는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사람을 분별하여 나에게 이익이 될 사람에게만 잘해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따라서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버려야 분별심이 사라지고 모두에게 자신에게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버리는 방식은 타인을 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타인이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를 위해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자아를 위하는 삶에서 벗어납니다. 생판 모르는 채로 태어나 만난 형제이지만 부모에 대한 사랑으로 분별이 사라지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 인류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모든 생명을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생명이 다 그분에게서 왔으므로 그분과 별개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이 모든 존재하는 것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살 때 필연적으로 내가 죽어야 합니다. 이것을 ‘십자가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자아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어서 사랑하려면 필연적으로 넘어야 하는 산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하느님께 예배는 드리는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을 믿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져있던 사람의 아픔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친형제였다면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분별력이 생겨서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을 예배하러 성전에 가지는 않지만,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아픔을 남의 아픔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아를 죽이는 아픔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아픔 안에 세상의 아픔이 포함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이기에 타인의 고통을 통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아픈 것처럼 상대를 바라보니 아픈 사람을 그냥 놓고 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해야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밖에 없어서 하게 됩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높은 탑에 갇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탑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도움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소리를 크게 질렀지만, 탑 아래의 분주한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순금 동전을 떨어뜨렸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금 동전을 줍기 위해서 몰려들었지만, 금 동전에 온 정신이 팔려서 아무도 탑에 갇힌 사람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번엔 무너진 벽에서 굳은 회반죽 한 덩어리를 떼어 내어서 구멍 밖으로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가던 어떤 사람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머리를 다친 사람이 고개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았고, 탑 안에 갇힌 사람의 처지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은 고통받는 사람뿐이란 뜻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길을 잃고 남의 집에 들어가 부모 없이 사신 까닭에 버려지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 잘 아십니다. 그래서 집의 물건들을 잘 버리지 못하십니다. 물건들에 당신의 아픔이 투영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가출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씻겨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신 적도 있습니다. 당신과 같은 처지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이런 사람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고통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 고통이 타인도 살리고 나도 살리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고통과 멸시를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고통은 물론 나를 상처입힙니다. 그러나 상처받아 봐야 내 몸처럼 치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일부러라도 단식도 해보고 사람들 앞에서 창피도 당해보는 등의 고통을 친구처럼 여기고 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사랑하게 만드는 또 다른 원리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주님께 항상 고통과 멸시만을 청했습니다. 능동적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받고 싶을 정도로 고통의 가치를 아는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기도할 때, 위로와 고통에서의 해방만을 청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묵주기도에서 ‘고통의 신비’를 바치며 실제로는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신비는 곧 은총입니다. 고통이 은총이란 뜻입니다. 은총이라면 오히려 달라고 청해야 옳은 것이 아닐까요? 그것을 자꾸 피하려고만 한다면 나에게 이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면 더 약해지고 생명도 잃습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란 말이 있습니다. 미 해군 장교였던 제임스 스톡데일은 베트남전 당시 포로로 잡혀 기약 없는 잦은 고문을 당하며 8년간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후 삼성장군이 되어 대통령 후보로도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떤 이들은 왜 포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석방되리라 믿었던 이들은 크리스마스를 지나게 되면 그래도 부활절이 되기 전까지는 석방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다시 크리스마스를 맞게 되면 상실감이 반복되어 결국은 버티어내지 못했습니다. 불필요한 낙관주의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가혹한 현실을 직시하되, 마침내 이기겠다는 믿음 또한 유지해야 합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물론 고통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이 신비롭다고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하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보다는 지금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드는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을 빨리 떨쳐버려야 할 원수처럼 여기기보다 나를 동반 성장시키는 친구처럼 여겨야 합니다.
두 친구가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때는 매우 추운 겨울이었고 눈보라가 치고 있었습니다. 쓰러진 사람은 죽지는 않았으나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길을 가던 두 친구도 탈진 상태였습니다. 한 친구는 쓰러진 사람을 데리고 가자고 했고 다른 친구는 그러면 우리 모두 죽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한 친구는 먼저 떠났고 다른 한 친구는 그 사람을 들쳐 업고 걸었습니다. 마을 입구에 이르자 먼저 갔던 친구가 얼어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쓰러진 사람을 들쳐 업은 친구는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 덕분에 살게 된 것입니다.
칼 융은 “모든 신경증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라고 했고,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날 더 강하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고통이 쓸수록 열매가 달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만 말고 친구로 대해봅시다. 내가 참아내는 고통이 이웃을 더 공감하고 사랑하게 만들어서 결국엔 그것이 나를 살리게 할 것입니다. 내가 이기지 못할 고통은 주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통을 이겨낼 때 사랑할 수 있게 되어 그것이 나의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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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0,25-37 :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으나, 결국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25절) 여기서는 율법 학자지만 법조문만 잘 알 뿐 그 정신은 모르는 자들임을 알려준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율법의 첫 줄부터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26절) 율법 교사는 계명을 말씀드렸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꾸짖으시며 벌을 주시듯이 말씀하신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 그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라고 묻는다. 그리스도를 모르면 율법도 모른다. 율법은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율법을 알겠는가?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율법을 지키고자 하여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줄 준비가 된 사람만이 예리코로 내려가던 사람의 이웃이었다고 가르치신다.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사제도 레위인도 아니었다. 율법 교사가 대답한 것처럼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37절)이 그의 이웃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34절)이라고 한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의사는 필요한 치료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분의 말씀이 치료제이다. 어떤 말씀은 상처를 싸매고, 어떤 말씀은 기름을 바르고 어떤 말씀은 포도주를 붓는다. 그분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노새에 태우고 그의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말씀하신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35절) ‘이튿날’은 바로 강도를 맞은 사람이 구원받은 날로 부활의 날이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은 하느님의 두 계약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상처 입은 값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 그 고귀한 피가 우리를 구원하여 죽음의 아픔을 면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매 맞고 반죽음 상태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준 이가 당신이심을 알려주셨다. 우리의 상처를 보살펴 주는 이보다 더 가까운 이는 없다. 그러니 그분은 우리 주님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으로 사랑하자.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사랑하여야 한다. 하나 된 몸 안에서 다른 어려운 지체들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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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너무도 익숙한 말씀이기에, 오늘은 ‘사마리아인’이 아닌 ‘율법 교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의 행동을 주목해 보면,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또 자기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그의 의도가 몹시 불순합니다. 아울러 그의 질문은 매우 형식적이며 기계적입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고, 또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지만, 이 질문을 다시 살펴보면, “나는 그 ‘무엇을’ 잘하고 있으며,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라는 교만함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른 화법으로 접근하십니다. “누가 이웃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되물으십니다. 율법 교사에게는 ‘아무개’라는 이웃의 이름이 중요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웃이 되어 줌’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율법 교사에게 하느님의 가르침, 곧 율법은 일종의 수학 공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가르치는 교사였으니, 율법의 계명에 관한 지적인 앎은 충분하였습니다. 그는 계명을 바탕으로 ‘무엇’과 ‘누구’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계명을 통해서 정작 중요한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지는 못하였고, 따라서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풀며 이웃이 되어 줄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고 그분의 계명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읽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율법 교사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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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누가 너의 이웃인지를 묻지 말고, 네가 먼저 ‘모든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루카 10,36-37)
1)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구세주이신 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강도당한 사람’을 우리로, ‘착한 사마리아인’을 예수님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비유는, 하느님(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도 그렇게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1요한 4,11)
2) 마태오복음에 있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라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강도당한 사람’을 예수님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을 우리가 해야 할 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일이고, 같은 일이라고 해석됩니다. (이웃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이웃이라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따로 구분되는 두 가지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에도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에도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30-32)
예수님께서 이야기 속에 사제와 레위인을 등장시킨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자들을 비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당시의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 사제들은 율법 실천은 철저하게 했지만, 마음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이웃 사랑 실천 없이 하느님만 섬기는 것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위선’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또 하느님을 섬기는 일도 사랑 없이 의무감으로 한다면, 그것도 역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마리아인의 경우에는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서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표현되어 있는데(33절), 사제와 레위인의 경우에는 이 말이 없다는 점입니다. ‘가엾은 마음’은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심하게 다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최소한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이 무슨 이익을 얻게 되는지만 따지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영적인 이익에는 관심이 없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이익만 따지는 사람들.) 그렇다면 그들의 신앙생활도 참된 신앙생활과는 거리가 먼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생활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3-35)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킨 것은 의도적인 일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원수가 되어서 지냈기 때문입니다. (비유 속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게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고, “원수에게 이웃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사제와 레위인은 동족에게도 사랑 실천을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보이는 부분은,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이 아니라 ‘최대한’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나’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상대방’을 기준으로 하는 일이라는 것도 나타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로마 13,8) 이 말은, 사랑이란,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사랑이란, 자기 마음대로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6-37)
여기에 나오는 율법 교사는 처음에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는데(루카 10,29),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 말씀은, “사랑이란,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려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나를 자신의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또 그가 나에게 이웃이 되어 주지 않더라도, 나는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생각만 하지 말고, 또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사랑 실천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당신의 온 삶으로’ 하신 사랑이고, 그리고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우리에게 내주신 사랑입니다.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야고 2,16) 말로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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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깨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력은 하지만 성과가 없을 때를 이야기합니다. 제방에 냉풍기가 있습니다. 에어컨은 아니지만 틀어놓으면 뜨거운 여름밤을 견딜 만 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냉풍기를 틀어놓아도 시원해지지 않았습니다. 원인은 외부로 연결되는 관이 낡아서 연결부위가 떨어졌습니다. 테이프를 가지고 연결부위를 고정하니 다시 시원해졌습니다. 방에 있는 냉장고도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2년 동안 사용하였습니다. 문득 냉풍기가 생각났습니다. 냉장고를 벽에서 조금 떨어트렸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냉장고 안에 있는 물이 훨씬 차가워졌습니다. 맞았습니다. 냉장고가 벽에 너무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냉장고에서 나오는 열기가 다시 냉장고를 따뜻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다리의 목적지를 정확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한때 ‘황제 다이어트’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체중을 조절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중 조절은 우리 몸에 커다란 부작용을 주게 됩니다. 탄수화물의 섭취가 적을수록 우리 몸의 인슐린 생산도 적어집니다. 그런데 혈중 인슐린이 적어지면 당뇨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황제 다이어트는 자신의 몸을 당뇨병과 비슷한 상태로 만들어 비만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소탐대실’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순리를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몸은 순리에 따라 조화롭게 움직이기를 원합니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는 것이 체중조절에 정도입니다. 교회가 순교자들을 특별히 공경하는 것은 그분들이 흘린 땀과 피 위에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사막의 신기루와 같습니다.
신학자 본회퍼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값싼 은총은 싸구려 상품 같은 은총이며, 싸구려 죄의 용서, 싸구려 위로, 싸구려 성만찬입니다. 교회의 무진장한 창고에서 생각도 없이, 끝도 없이 경박한 손으로 털어내는 은총입니다. 가격도, 경비도 없는 은총입니다. 인격적인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입니다. 순종 없는 은총, 십자가 없는 은총, 살아계시고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총 이것이 값싼 은총입니다. 값비싼 은총은 끊임없이 찾아야 할 복음이며, 기도해야 할 은사이며, 두드려야 할 문입니다. 은총이 값비싼 까닭은 은총은 우리를 제자의 길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총인 까닭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값비싼 까닭은 인간에게 생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총인 까닭은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은총이 값비싼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하느님에게도 값비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느님께서 아들의 생명을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입니다. 생각과 삶이 하나였고, 기도와 실천이 하나였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름다운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 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10월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사랑으로 여물고, 다듬고, 익어 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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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하느님 앞에 우리가 준 사랑만이 남을 뿐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 예수님께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일상의 마주오는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나는 지금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 지, 그리고 강도를 맞아 초주검이 되어 쓰러진 사람처럼 그렇게 아픈 말이나 상처로, 혹은 져야할 무거운 삶의 짐이나 사랑하는 이의 배신으로 마음이 초주검이 된 이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주길 다짐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 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거지 일화”가 떠 오릅니다.
하루는 젊은 프란치스코가 부유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시장에서 옷감과 직물을 팔고 있을 때였습니다. 걸인 한 사람이 구걸하러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딱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팔던 물건들을 내팽개치고 그는 걸인을 뒤쫓아가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모든 돈을 그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의 자선 행위를 본 친구들은 그를 멍청하다고 크게 비웃었고, 이를 알게 된 아버지는 화가 나서 아들을 호되게 야단을 칩니다.
하지만 그는 그 걸인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모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성 프란치스코의 소품집, 분도출판사, pp.107-11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복음에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며 축복받은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을 실천하고 겸손을 지니도록 합시다. 죄인들의 더러운 때에서 직접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는 애긍 시사를 하도록 합시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남겨 둔 모든 것을 결국 잃고 맙니다. 그 대신 자기가 실천한 사랑의 열매를 가지고 가서, 그 행실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상급을 받을 것이며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뿐 아니라 해와 달과 동물들과 식물들 우주 만물을 사랑하고 돌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에게는 모든 곳에 주님의 영이 임하고 계신 장소였으며, 모든 이들이 자신의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가득했고 그의 삶은 예수님과 일치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지신 오상의 고통도 그에게는 주님과 하나되는 길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하나되어 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에 대해 뭔가 모르게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때는 2016년에 토론토 신자들과 함께 아시시 성지 순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의 첫 인상은 뭔가 모를 불편함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성지를 방문하며 성인이나 기적의 장소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 아시시에는 마치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님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가 마치 예수님인 듯 성지의 모든 것이 그를 중심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진실로 가난하고 낮은 이의 모습이고 싶으셨는데 왜 이곳에서는 너무도 부유하고 마치 하느님이라도 된 듯 숭배 받고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며 성지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을 때 필립비서 2장의 말씀을 통해 제가 너무도 인간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립 2,6-9)
살아 생전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난하게 되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살아간 프란치스코를 예수님께서 이제는 그를 들어 높여 준 것이 아닐까요? 성모님처럼 그렇게 우리가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가 따랐던 예수님의 가난과 예수님의 모든 이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그 마음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그가 예수님께 이렇게 높임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 역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위해 가난해지고, 예수님을 위해 겸손해질 때, 예수님처럼 그렇게 순종과 사랑으로 고통을 짊어지고 갈 때, 우리를 예수님께서 들어 높여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전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비록 성인처럼 그렇게 위대한 가난을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일상의 작은 삶의 영역 안에서 가난과 겸손과 사랑으로 살아갈 때 우리 역시 천상에서는 더 큰 사랑으로 보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성인처럼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도 많은 이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죽고 얼마 후면 잊혀지고 말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나눈 사랑과 우리가 베푼 용서와 자비를 기억하시고 천상에서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이 땅을 떠날 때, 당신은 당신이 받은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고 당신이 준 것만 가지고 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위해 우리의 것을,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 하느님의 것을 나눌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나눈 것은 비단 물질뿐만 아니라 나와 맞지 않는 이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 나를 힘들게 한 이들에 대한 용서의 마음, 그리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을 향한 포용의 마음도 포함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조건 없는 사랑과 나눔, 용서와 자비의 삶을 살아갈 때 그 모든 것들이 하늘로 올라올라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천국을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도 슬픔과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은 고단한 인생의 끝에
찾아오는 빛으로 가는 문이다.
죽음은 고생스러운 삶의
마지막에 빛으로 가는 길이다.”
주님, 저에게 제 뜻과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께 봉헌할 수 있는 가난의 마음을 주소서.
주님, 저에게 자유로운 마음을 주시어
마주 오는 모든 것을 당신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사랑하고,
당신 사랑을 나누며
일생을 기쁨과 감사로 살게 하소서.
주님, 어둠 속에서도
당신의 새로운 빛을 인내로이 기다리게 하시고,
사랑과 용서로 날마다 새로운 빛으로 가는 문을 발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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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레위인과 사마리아인, 나는 지금 누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특히 우리처럼 똑똑하고 여러 가지를 계산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따라하기 어려운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누가 이웃이냐는 측면을 놓고 볼 때 간절히 도움을 바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이웃이라는 것은 우리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사제와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하느님에 대하여 박식할 뿐 아니라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거룩한 사람으로 비추어졌던 인물들입니다.
그에 반해서 사마리아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치부되어 구원에서 제외된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그러한 사람들의 평가나 겉모습과는 달리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복음에서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정은 해발 850m의 예루살렘 고원지대를 출발해서 요르단의 계곡을 향하여 내리막을 치닫는 길로서 해발 150m 지대인 예리코까지 가는 아주 험하고 가파른 곳을 지나는 여행이었습니다.
이 길을 유다인들은 '아둠밈 오르막'이라고 부르는데(여호15,7) '피의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성 예로니모에 따르면 로마 군인들은 이 곳을 여행하는 여행객을 보호하기 위해 군막을 설치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험한 길을 가던 사람 하나가 강도 떼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호되게 맞아 초주검이 되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먼저 사제가 길을 지나다 이 사람을 보고는 급히 지나쳐 버렸습니다. 급히 지나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제 계급은 제사를 지내고 율법을 지키는 거룩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예리코에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피해자는 예리코로 가는 길이었으니 어쩌면 안면이 있는 사이일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제는 못 본체하고 피해 지나쳐 버립니다. 자기 직무와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피해자가 죽은 줄 알고 시체에 손을 대서 부정을 타지 않으려는 율법준수가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또 레위인도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쳐버렸는데 그렇게 한 이유가 역시 나름대로 있습니다. 그곳은 지형 자체가 굉장히 험하고 또 강도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지역을 지나치는 것은 위험한 일로 사람들은 되도록 그 길을 지나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오늘 레위인은 부득이한 일로 이 길을 지나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범죄가 자주 발생하는 곳으로, 즉 강도가 아픈 척하고 누워 있다가 지나가던 사람이 가까이 오면 마구 두들겨 패서 돈을 뺏는 강탈 사건이 자주 일어났던 곳입니다.
그래서 레위인은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혹시 강도가 거짓으로 누워 있는 것은 아닌지 재빨리 계산을 하고 피해서 지나쳐 가버린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그것을 모를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도 분명히 그 곳에는 강도가 많이 출몰한다는 것과, 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떠맡았다가 괜히 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계산이 없지 않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계산보다는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이 앞섰다는 것이지요. 내버려두면 죽을 것 같은 그 사람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제나 레위인처럼 계산을 잘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렇게 저렇게 피해 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돕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도와줍니다. 결국 죽어가던 사람을 구한 이웃은 사마리아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쉽지 않지만 우리의 이성과 판단을 넘어서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예수님께서는 제안하십니다. 나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제나 레위인의 삶의 모습이 내 삶의 모습에서 조금이라도 발견된다면 반성하고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내가 강도를 만나 반죽음에 처해 있었다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나치는 사람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내가 피해자가 아니기에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면 반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용기를 내어 나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도 가서 그렇게 하십시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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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사베리오 신부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10,37)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한다. 도심 한가운데 살다가 도심에서 이십여 킬로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50여 가구 남짓한 똑 같은 모양을 한 새로 지어진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었다. 주변에는 맑은 개울도 흐르고 과수원과 논과 밭도 쉽게 보이는 곳이었다.
그 동네에는 작고 예쁜 예배당이 하나 있었다. 천주교 신자는 우리 집안뿐이었고, 거의 모든 동네 친구들은 예배당에 다니고 있었다. 주일이면 가족들과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성당이나 수도원 미사를 참례했지만, 평일에는 친구들과 함께 예배당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목사님께서는 좋은 아저씨 같은 느낌의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아이들이 모이면 늘 먹을 것을 한 광주리에 담아서 내놓고는 하셨다. 여름방학이 되고 아이들과 예배당에 모이는 시간이 늘어났다. 목사님께서 제안을 하신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연극을 한 번 해보자고 말이다. 우리는 모두가 ‘좋아라’ 하며 박수를 쳐댄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내놓으신 대본이 바로 오늘 복음으로 읽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였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나를 가리키시며, “착한 사마리아인을 대열이가 해주었으면 좋겠구나.”라는 제안을 하신다. 모두들 열심히 해서 멋진 연극을 만들어보자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얼떨결에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고 말았다. 주인공이 된 것이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각자의 역할에 맞는 대본을 열심히 외워나가며 매일 적당한 자리를 찾아가며 연습을 했다. 발표 날짜가 다가오자 소품을 구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당시엔 변변한 소품을 구할 수 있는 상항이 아니었으니, 각자 집에서 포대기나 수건 같은 것을 가져와, 둘둘 감거나 뒤집어쓰면서 나름대로 그럴 듯 한 분장을 만들어 나아갔다. 드디어 발표 날이 되었고, 예배당으로 온 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공연을 하였고, 동네 어른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이렇게 어린 시절의 경험을 이야기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성서에 나오는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은 원래 이스라엘 사람과 같은 민족들이었다. 하지만 빈번한 외세의 침략으로 이방인의 피가 섞이게 되었고, 선민의식을 중요시하던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결한 족속들로 몰아세웠다. 사람들로서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죄인들 취급을 하는 분위기였고 상황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사마리아인을 드셨다는 것은 그냥 착한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특히 정통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산다고 자처했던 율법학자에게는 상당한 반발을 살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논리를 반박할 수 없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아직도 어린 시절의 목사님의 인자하셨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 이렇게 가톨릭의 사제로서, 당시 목사님보다도 나이가 많은 삶을 살고 있지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대할 때마다 그 목사님이 떠오른다.
모두가 개신교인 아이들 속에서 천주교 신자인 나를 선택하신 그분의 마음, 그리고 아이들에게 미래를 살아감에 있어 절대로 경계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려 ‘착한 사마리안의 비유’를 선택하셨던 그분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으로 그어놓은 선들, 그 선들 안에서 서로를 적대하며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 이익을 위해서라면 도리도 논리도 없어지고, 언제든지 동료와 적을 바꿀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선(善)과 옳음(正) 그리고 사랑(愛)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복음적 아름다움과 행복을 만들어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거라.”는 말씀에, 옳기 때문에 “예” 하고 따를 수 있는 삶이 행복한 삶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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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명기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한 율법교사의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참된 이웃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한 일간신문에서 읽었던 기사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간선도로변의 상점에 2인조 괴한이 침입, 주인 부부를 15분간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으나 이 일대를 지나던 30여 명의 시민들이 이를 구경하는 바람에 범인들이 그대로 달아나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주인은 범인 중 한 명의 바지자락을 붙잡고 주위 사람들에게 '도와달라'며 통사정했지만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뒤늦게 출동한 경찰이 목격자 진술을 받기 위해 시민들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집에 가야 한다',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떠 경찰은 목격자 진술마저 받지 못했다"
극단적 이기주의와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란 중병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사람이 한 사람만 있었다면 적어도 그 주인 부부는 그렇게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 뿐더러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마음의 더 큰 상처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주위 사람들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야 하며 그것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길은 고도 차가 1천미터나 되는 경사진 길이고 계곡과 절벽이 많은 광야를 통과해야 했기에 도둑이나 강도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인물들의 묘사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사람은 예루살렘에서 거행되는 의식에의 종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의식을 마치고 사제들의 도시인 예리고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이웃사랑에 대해 가르침을 잘 받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를 보고는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외국인이며 이교도, 즉 유다인들의 괄시를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모호한 강도사건에 전혀 말려들 생각이 없었을 것이고 잘못하면 의심을 받고 죄를 뒤집어 쓸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가 그 사람의 상처를 보고 응급치료를 해 주며 또한 온통 자신의 일처럼 처리합니다. 그의 시간과 가진 돈은 이제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맙니다. 게다가 앞으로 필요한 그 모든 것에 대해서까지도 책임을 지겠다고 합니다. "저 사람을 잘 돌보아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예수께서 이러한 인물들의 대립적인 태도를 부여하심으로써 오늘 복음이 의도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즉, 형제들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보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형식주의적 전례, 결실이 없는 예배행위를 반대하고 계십니다. 즉,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오직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을 돌보지 않는 잘못된 신앙을 반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웃을 존중하며 이웃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좀 더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삶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라 불리었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저는 처음에 사람들을 회개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고 사랑이 부족한 우리의 차가운 가슴을 변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고백소 안에서 고백하는 죄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주일미사 빠진 것과 교회법적 규정을 따르지 않은 것이 혹시 전부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러한 것들의 고백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려고 애썼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성찰하고 고백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범위를 한정시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이웃이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인 동족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다가 좀 더 축소되어 자기 그룹이나 종교적, 정치적 집단만을 일컫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혹시 이것은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아는 사람, 나하고 친한 사람, 내 그룹,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내 이웃이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내가 모르는 사람, 내 그룹이 아닌 사람에겐 무관심하거나 냉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협소하고도 이기적인 테두리를 부수어 버리시며 사랑의 개념을 확대시키십니다. 친구이든 적이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과 정의는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가 매일 체험하는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함을 기억합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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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두 번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이 질문 뒤에는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그분께 메여있는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은 ‘무엇을 하느냐?’는 행위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라는 존재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소임을 맡느냐가 중요하기보다, 사랑으로 그 소임을 수행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곧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루카 10,27)이 되는 일입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마르 10,29)
이 질문 뒤에도 역시 그의 옹졸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마르 10,36)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단지 이웃이 아니라 형제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문제보다, ‘나는 이웃이 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나의 형제인가? 묻기에 앞서, ‘나는 그의 형제인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곧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바로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루카 10,37).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와 함께, “주님 저희가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37)
이 말씀은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하라는 요청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하라는 말씀이요,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 때가 아니라, 그렇게 실행할 때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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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주님!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보다, 나는 그의 이웃인가를 묻게 하소서!
그가 나를 위해 주고 있는가보다, 나는 그의 위해고 있는가를 묻게 하소서!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보다,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게 하소서!
누가 사랑받기에 합당한가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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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오늘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생태계의 주보성인'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왜, 사람들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좋아하고 사랑할까?
저는 프란치스코가 단순성과 겸손과 기쁨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걸어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요 형제인 첼라노는 그런 사부의 모습에 대해 그의 전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장 높은 지향과 주된 바람과 최고의 결심은 복음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이었고,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열의를 다하여 애타게 갈망하는 온전한 정신과 뜨겁게 타오르는 온전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었다."(1첼라84)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사셨고, 그렇게 사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합일의 표지인 오상을 받으셨고, 후대의 사람들로부터 '또 하나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고도 불리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어떤 율법 교사에게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지금 너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나병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결정적인 회개의 길을 걷기 시작한 프란치스코는 이후 "어디에서나 늘 예수께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마음에도 예수를 품고 있었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지체들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습니다."(1첼라115)
지금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가 끝까지 간직했고 형제들도 간직하기를 바랬던 '단순성과 겸손과 열정'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순성과 겸손과 열정으로 돌아가야 할 '회개의 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한 것이 없으니, 다시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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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걸음>
루카 10,25-37 (가장 큰 계명, 착한 사마리아의 비유)
그때에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한 걸음>
한 걸음이
또 한 걸음을
낳기 마련이지
저 멀리
아픈 이를
향한 한걸음이
어느새
아픈 이 곁에
나를 있게 하지
한 걸음이
또 한 걸음을
낳기 마련이지
바로 옆
아픈 이를
거스른 한걸음이
어느새
아픈 이마저
내게서 지워버리지
한 걸음이
또 한 걸음을
낳기 마련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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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등학교 친구 중에 수학을 무척 잘하는 친구가 기억납니다. 그런데 이 친구를 기억하는 이유는 보통 수학을 잘하면 다른 과목도 잘하는데, 이 친구는 딱 수학만 잘하는 경우였지요. 다른 과목의 성적은 아주 형편없는 특이한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너는 왜 수학만 잘해?”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이 질문에 친구는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중학생 때 수학 선생님을 너무 좋아했어.”
수학 선생님을 좋아하다 보니 수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그래서 수학 공부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수학 성적도 올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다른 과목의 선생님은 무조건 혼내고 몽둥이를 들어서 너무 싫었답니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혼내는 선생님의 과목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실제로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은 이 세상에 더 큰 가치를 만듭니다. 주님에 대해서는 더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관심을 두게 되고, 주님을 알기 위해서 더 노력할 것입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주님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더 큰 가치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랑을 가장 강조하시고 중요한 계명이라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덧붙여 ‘사랑’에 관한 가르침을 보충합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모든 이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문제는 명확했습니다. ‘이웃’은 자기들 사이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을 뺀 모든 동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이란 이방인이건 이단자이건 다른 이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는 모든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이제 율법 교사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음은 옳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질문은 이렇게 되었어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모든 사람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사랑해야 더 높은 가치를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사랑이야 이견이 없지만,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습니다. 특별한 이웃만을 나의 이웃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모든 사람의 이웃이 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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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를 구하는 기도>(성 토마스 모어)
주님, 저에게 충분한 소화력을 주시고 소화할 음식도 주소서.
건강한 몸을 주시고 또 이를 되도록 잘 간직하는 데 필요한 감각을 주소서.
죄에 빠졌다 해서 절망하지 않고, 사물에 다시금 제정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주님, 착한 것과 깨끗한 것을 분별할 거룩한 마음을 내려주시옵소서.
따분함도, 불평도, 신음도, 탄식도 모르는 마음을 주소서.
갈수록 볼품이 없어져 가는 ‘나’라는 것에 관하여 너무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생활 속에서 자그마한 기쁨을 알고, 남에게도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도록 유머 감각을 주시고, 농담을 이해할 은총을 내려주옵소서.
토마스 모어 성인의 기도를 보면서, 나의 기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삶 전체가 기쁨과 행복의 시간이 되려면, 성인의 청처럼 유머가 필요합니다. 유머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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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웃이 되어 준 사람>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웃사촌만도 못하다(잠언27,10)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표현되어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에는 “네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고 불행할 때 형제의 집으로 가지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잠언27,10).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가 이웃입니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는 마음이 불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되었는데 마침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피해 지나가 버렸고 또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그도 역시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입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율법교사가 자신 있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10,37) 하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 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누가 이웃이며, 이웃이 아닌지에 대해서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남으로 보았고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게 표현된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사실“우리가 병들고 궁핍한 사람을 만지는 것은, 곧 고통을 받는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입니다.”(성 마더데레사) 그리고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고 마음을 먹을 때 이웃이 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이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저 '어떤 사실을 보는 사람'으로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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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인이 되세요!">
-궁극의 희망이자 목표-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시편84,2-3)
아침성무일도중 마음에 와닿은 시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리워하는 자가 성인입니다. 10월1일은 성녀 소화 데레사 기념일이었고 오늘 10월4일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흡사 10월 묵주기도 성월이 성인성월聖人聖月, 성인의 달처럼 느껴집니다. 성인들은 누구입니까? 주님을 닮아 마음의 얼굴도 둥글둥글 잘 익어 원숙한 가을 배열매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마침 23년전 이때쯤 썼던 둥글 ‘원圓’자, 익을 ‘숙熟’의 ‘원숙(圓熟)이란 시도 생각났습니다.
-“가을 열매는
태양의 자식들
배, 사과, 복숭아, 호박...
태양을 닮아
둥글둥글 환하다
사람도
사랑으로 익어 열매되면
얼굴도
마음도
글도
말도
행동도
하느님 닮아
둥글둥글 환하다”-1998.9
*각주: 둥근 태양아래 ‘둥글둥글(圓)’ 황금빛 찬란하게 ‘익어가는(熟) 배 열매들 보고 원숙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더불어 성철 큰 스님이 “나는 모나게 살았지만 너희들은 둥글게 살라” 제자들 마다 둥글 원(圓)자가 들은 법명을 지어주었다는 일화도 생각났습니다. 오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을 앞둔 어제 10월3일에는 오전부터 오후까지 고백성사와 제 축일을 미리 축하하러 온 형제자매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떠날 때마다 드린 당부 인사말은 “성인이 되세요!”, “성녀가 되세요!”라는 기분 좋은 덕담의 말마디였습니다. 불가에서는 “성불成佛하세요!”, 부처님이 되라는 인사말도 있다 합니다. 참 기분좋은 인사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믿는 이들 누구나의 깊이에 잠재해 있는 궁극의 희망이자 목표는 성인이 되고 싶다는 갈망일 것입니다. 사실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 안에는 순교성인의 영적 디엔에이가 면면히 계승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별난 성인들이 아니라 인생 가을을 접어들면서 주님 사랑 안에서 원숙한 열매들로 익어가는 영혼들입니다. 아주 오래전, 만30년 전인 1991년 10월4일, 오늘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에 했던 강론중 많은 부분이 시사하는 바가 자못 커 나눕니다.
-우리는 수도원에 성인이 되기 위해 왔습니다. 출세하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학자가 되기위해,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또 세례 받은 사람은 누구나 성덕에로 부름을 받고 있는 잠재적 성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인은 완전한 자가 아닙니다. 본래의 참나가 되는 것입니다. 100% 참나를 사는 자유인입니다. 뚜렷이 자기 색깔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번 주 축일을 지낸 성인이 다 그렇습니다. 괴팍하고 별났던 9월30일의 예로니모 성인은 ‘사막의 선인장’ 같았고, 스물네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10월1일의 소화 데레사 성녀는 ‘한송이 장미꽃’같았고, 오늘 기념하는 가난을 사랑하여 자연과 하나되어 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을 길에 피어난 ‘해말간 코스모스’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성덕의 잣대는 열렬한 사랑입니다. 성인이 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뜨겁게 항구히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익어 둥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항구한 사랑만이 온갖 고통을 빛과 기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으면 오상까지 받은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였겠습니까!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하느님께 대한 사랑만은 양보해선 안됩니다.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은 그리스도께 대한 한결같은 사랑이었고 바로 이것이 성덕의 기준입니다. 우리의 규칙서 역시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니 주님 사랑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시들해 지는 사랑에 다시 불을 붙여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본래의 자기가 되어 갑니다. 향기와 색깔도 뚜렷해 집니다. 성인이 되어 갑니다. 다른 모든 복잡한 생각들을 집어 치우고, 주님 사랑에 총력을 기울입시다.-
성인 축일 때마다 반드시 확인해 보는 생몰生沒연대, 성 프란치스코는 고작 44세 생애였지만 남긴 족적은 불멸입니다. 성인을 결정적 회심으로 이끈 성구는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는 말씀이었고 자발적 가난의 기쁨으로 일관된 들꽃같은 삶이었습니다. 성인의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되는 ‘태양의 찬가’는 얼마나 황홀한 아름다움인지요! 제 장례미사때 입장, 퇴장 성가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작은 형제회 수도회의 창립자인 성인은 1226년10월3일 시편 142장을 크 소리로 노래하며 선종합니다. 이런 기조의 시편입니다.
“소리쳐 부리는 곳 주여 당신이오니
이 몸이 피할 것은 당신이외다
생명의 나라에서 내 몫이외다.”(시편142,6)
서방 수도생활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던 성 베네딕도와 성 프란치스코의 보완 관계가 의미심장합니다. 더불어 연상되는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과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산山같은 성 베네딕도에 강江같은 성 프란치스코를 묵상하며 두 영성을 동시에 살 수 있기를 소망하며 쓴 시가 생각납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맑게 흐르는 강”-1998.10
밖으로는 정주의 산같고 안으로는 강같은, 산과 강의 영성을 살아가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성인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다음 율법교사의 주님을 향한 불순한 의도의 질문은 그는 물론 우리의 내적 갈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바로 ‘제가 무엇을 해야 성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과 대동소이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구체적 착한 사마리안의 비유로 들면서 누가 진짜 성인인지 밝힙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성인처럼 보였던 사제도 레위인도 아닌,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이를 살려 낸, 자비행의 이방의 익명의 사마리아 사람이 진짜 성인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세상 곳곳에는 하느님만이 아시는 착한 사마리아인 같은 익명의 진짜 성인들도 많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요나서, 우리는 참 재미있는 각별한 성인 요나를 만납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유머’같은 재미있는 성인으로, 시종일관 미소짓게 하는 성인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피해 도주하는 모습도 재미있고, 요나의 솔직한 고백에서 성인의 매력적인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왜 하느님이 그를 좋아하셨는지 그 까닭을 알게 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나는 바다와 뭍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 나를 들어 바다에 내 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당신들에게 들이닥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저는 여기서 안타까움에 하느님께 부르짖으며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이방의 순박한 뱃사람들도 익명의 성인들처럼 생각됩니다.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했고,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다 살아나니 그대로 요나는 파스카 예수님의 예표가 됩니다. 하느님 역시 참 재미있는 유머의 대가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 섭리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께 성인이 되라 불림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소망이자 목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성인이 되어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사람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성인이 되는 자비행의 길을 알려 주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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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저의 사부이신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축일에 듣는 오늘미사의 말씀은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예수님은 당신을 시험하려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묻는 율법 학자에게 비유 하나를 들어주십니다. 비유 속에는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어떤 사람과,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제가/ 레위인도 ...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31.32)
"어떤 사마리아인은 ...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0,33)
도움이 필요한 사람 앞에서, 이스라엘의 종교인인 사제, 레위인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천대받는 사마리아인의 반응이 사뭇 다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머리가 먼저 반응한 것 같지요. 율법의 관점에서, 주검에 몸이 닿으면 부정하게 되어 자기들 앞에 놓인 창창한 계획에 차질이 생길 지도 모르는 일이니, 별 고민 없이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마음이 먼저 반응을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우상숭배자라고 손가락질 받지만, 그의 내면에서 솟아난 '가엾은 마음'이 바로 야훼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검처럼 쓰러져 있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 살피고 돌봅니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루카 10,35)
여관에서 사마리아인은 피로도 잊고 그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습니다. 이로써 충분할 법한데도 떠날 때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지요. 두 데나리온은 일꾼의 이틀치 품삯이니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를 염두에 둔 듯합니다. 그는 다친 이의 현재에만이 아니라 미래에까지도 손을 내밀었습니다. 미래를 계산해 현재를 모면하려 한 앞의 두 사람과 상당히 큰 차이가 보입니다.
제1독서는 요나 에언자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피하여"(요나 1,3.10)
요나는 주님이 부르셨을 때 그분을 피해 달아납니다. 그가 향한 곳은 주님 쪽도 아니고, 주님께서 염려하시는 니네베 쪽도 물론 아닙니다. 정 반대쪽으로 작정한 듯 멀리멀리 떠나는 요나의 모습에서 비유 속 사제와 레위인의 냉정한 발걸음이 겹칩니다.
요나도 주님을 떠나면서 니네베의 미래에 손을 놓은 것이고, 동시에 자신의 미래에서도 손을 뗀 것입니다. '나 아니어도 어떻게든 되겠지. 안 되어도 그만이고...'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요나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사실 요나는 니네베를, 그리고 니네베를 통해 하느님을 버린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요나를 쫓아가십니다. 요나가 겪은 폭풍과 물고기 뱃속 이야기는 어린이들도 귀가 솔깃할 만큼 다이나믹하고 흥미지진하지요. 사실 그분께는 순종적이고 성실하며 잘 준비된 예언자들이 많이 있으시니, 도망간 사람은 말고 다른 누구라도 부르시면 그만일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요나야, 너 말고도 니네베를 도울 사람은 많다. 그런데 나는 꼭 너를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고 싶단다. 너의 구원도 이 일에 포함되기 때문이란다." 하시는 마음이었을까요...
복음의 비유 속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피하면서 자신들의 하느님도 피한 것이고, 피함으로써 버린 것이기도 합니다. 초주검이 되었던 사람 입장에서 보면 강도를 만난 것도 통탄할 일인데 거기에 더해 외면 당하고 버림받기까지 한 거지요.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강도 당한 뒤 고통 속에 버려지기까지 한 그 사람의 존엄성을 되돌려 준 것입니다. 다가가서 치료하고 돌보며 미래까지 염려해 손을 내민 사마리아인을 통해 영육으로 죽음 문턱까지 갔던 이가 되살아납니다. 목숨을 건진 것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존엄함도 회복하게 된 거지요. 듣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별로 달갑지 않겠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사마리아인은 이미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였던 것입니다.
구원은 자비를 베푼 사람은 물론 자비를 입은 사람에게도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자비를 베풀고 이웃이 되어주는 일은 바로 하느님께서 늘 하시는 일이니까요.
"누가 너의 이웃이냐?"
사랑하는 벗님! 이번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자비가 필요한 사람, 이웃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가 그에게 손을 내미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덕분에 그가 구원을 체험하고 그 덕분에 우리가 구원되니 이웃이 된다는 것,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요!
오늘 복음의 사마리아인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예표같이 느껴집니다. 만민의 형제, 성 프란치스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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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cwk9MDSJ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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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37)
아름다운
계절의
생생한
향기이며
넘치는
빛깔이다.
가진 것이
너무 많은
우리들 삶이다.
가난의 실천이
곧 복음의
실천이다.
가장 간절한
가난이
가장 행복한
은총이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맑은 가난이
세상을 치유한다.
맑은 가난으로
하느님을
찬미한다.
하늘 나라의
문을 여는
가난이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만나는
가난이다.
가난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최고의
기쁨이다.
자아에서
빠져나오는
가난은
서로를 살린다.
맑은 가난은
사랑이며
용서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가난한 마음이
잘 가르쳐주고 있다.
하느님을 위한
가난이다.
복음의 요약은
가난한 마음이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간절한 가난
간절한 사랑이
있다.
사람의
맑은 가난이
풍요롭게 하시는
하느님을
향한다.
가난이
만들어가는
감사의
눈물이다.
가난하기에
숨길 것 없는
우리들
기도이다.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서로를 구원하는
가난한 십자가가
있다.
가장
가난한
십자가가
가장 풍요로운
사랑이 되었다.
모든 것을
여는 가난의
신비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온전한
가난으로
가장 충만한
사랑의 신비를
만났다.
생생한
만남의
정수(精髓)이다.
가난의 신비는
참된 만남의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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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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