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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률이상 제31권
양 사문 승민ㆍ보창 등 편집
9. 태자들[太子部] ①
1)보살의 도를 행한 여러 나라의 태자들[行菩薩道諸國太子部]①
(1) 건타시리(乾陀尸利) 국왕의 태자가 주린 범에게 몸을 던졌는데 유골(遺骨)로 탑(塔)을 일으키다
“건타시리 국왕의 태자는 영화(榮華)를 좋아하지 않아 산천에서 숨어살고 있었느니라. 그 때에 깊은 골짜기 밑에 한 마리 굶주린 범이 있었다. 얼마 전 새끼 일곱 마리를 낳았는데, 눈까지 내려서 어미 범은 새끼를 품고 사흘이 지나도록 먹이를 구할 수 없었느니라. 새끼가 얼어 죽을까 걱정스러워 배고픔을 참고 새끼를 보호하고 있는데 눈이 그치지 않자, 어미와 새끼는 배가 고파서 오래지 않아 죽을 지경이었다. 어미는 너무도 굶주린 나머지 새끼를 잡아먹으려 하였느니라.
이 때 여러 신선들은 말하였다.
‘누가 몸을 버려서 이들을 구제하겠는가?’
태자가 말하였다.
‘좋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낭떠러지 끝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미 범이 새끼를 품은 채 눈에 덮여 있으므로,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어 산꼭대기에 서서 고요히 선정에 들었다가 이내 청정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서 과거의 아득한 겁 동안의 일을 자세히 살펴보고, 미래 또한 그렇게 살펴보고서 곧 돌아와 스승과 5백의 동학(同學)들에게 아뢰었다
‘저는 이제 몸을 버리겠으니 모두 기뻐하십시오.’
스승이 말하였다.
‘도를 배운 지 오래되지 않았고 지견(知見)도 아직 넓지 못한데, 왜 갑자기 아까운 몸을 버리려고 하느냐?’
태자는 대답하였다.
‘저는 옛날에 서원을 세워 천 개의 몸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전생에 벌써 999개의 몸을 버렸으니, 오늘 버리게 되면 꼭 천 개의 몸이 다 찹니다. 이 때문에 버리는 것이니, 스승께서도 따라 기뻐해 주십시오.’
스승이 말하였다.
‘그대의 뜻과 원이 높고도 미묘하여 반드시 먼저 도를 얻을 것이니, 다시는 버리려고 하지 말라.’
그랬는데도 태자가 스승을 사직하고 떠나가므로 스승과 5백의 신선들은 눈이 붓도록 슬피 울면서 태자를 전송하며 산 벼랑 끝까지 이르렀느니라. 때마침 그날 부란(富蘭) 장자가 남녀 5백 인을 데리고 공양을 가지고 산으로 올라왔다가 태자가 몸을 버리려 하는 것을 보고 슬피 울면서 역시 태자를 따라 산 벼랑 끝까지 이르렀느니라. 태자는 대중들 앞에서 크게 서원을 세웠느니라.
‘나는 지금 몸을 버려 중생의 생명을 구제하겠습니다. 모든 공덕으로 빨리 보리(菩提)를 이루어 금강의 몸[金剛身]과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무위법신(無爲法身)을 얻어서 제도되지 못한 이를 제도하고 해탈되지 못한 이를 해탈하게 하고 편안하지 못한 이를 편안하게 하리다. 나의 지금의 이 몸은 무상과 괴로움과 온갖 독에 쌓여 있고, 이 몸은 깨끗하지 않아서 아홉 개의 구멍에 가득 차 흐르고, 4대(大)라는 독사에게 깨물리고 있으며, 칼을 뽑은 다섯의 도둑이 쫓아오면서 베고 있습니다. 이러한 몸을 되풀이하며 감미로운 음식과 5욕락(欲樂)으로 공양할 것 없습니다. 이 몸이 죽은 뒤에는 은혜를 받을 훌륭함이라곤 없으니 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몸이란 괴롭게 해야만 하고 즐거움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서원을 세우며 말하였다.
‘지금 나의 살과 피로써 저 주린 범을 구제하고 나머지 사리골(舍利骨)은 나의 부모가 뒷날 탑을 일으키게 되며, 일체 중생의 몸에 있는 모든 병고와 외로움이 전생에 지은 죄로 인해 탕약과 침과 뜸으로 나을 수 없게 될 때, 나의 탑에 와서 지극한 마음으로 공양하면 병의 경중에 따라 백 일이 되기 전에 반드시 나을 수 있게 하소서. 만약 진실이요 거짓이 아니라면, 여러 하늘들은 향과 꽃을 비처럼 내리소서.’
말을 마치자 만다라꽃[蔓陀羅華]이 비처럼 내렸으며 땅이 모두 진동하였느니라. 태자는 이내 사슴 갖옷을 벗어서 머리를 싸매고 스스로 몸을 범의 앞에다 던졌으므로, 어미 범은 보살의 살을 먹게 되었고, 어미와 새끼가 모두 다 살아났느니라. 이 때 낭떠러지 끝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태자가 범에게 먹혀 뼈와 살이 흩어져 어지러이 널린 것을 바라보고 슬피 울며 크게 부르짖어 소리가 산중을 진동시켰느니라. 어떤 이는 스스로 가슴을 치면서 땅에 누워 뒹구는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선정에 드는 이도 있었고, 머리를 조아리며 참회하는 이도 있었느니라.
수타회(首陀會)의 여러 하늘과 천제석ㆍ사천왕 등과 일월의 하늘들, 수천만 대중들은 모두 위없는 보리의 마음을 내어 음악을 울리고 향을 지피며 꽃을 흩뿌리면서 태자를 공양하고 부르짖었다.
‘장하십니다, 마하살타(摩訶薩埵)시여.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서 도량(道場)에 앉으시게 되오리다.’
5백의 신선들은 모두가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無上正眞道]의 뜻을 내었고, 신선의 큰 스승은 무생법인을 얻었다. 부인(夫人)이 음식을 보냈는데, 옷과 일산과 발우와 석장(錫杖)과 병과 두레박만이 석실(石室)에 있을 뿐이었으므로 두루 신선들에게 물었으나 열이면 열, 다섯이면 다섯이 서로 마주 슬피 울고 있었고, 큰 스승에게로 갔으나 스승도 손을 턱에 고이고 눈이 붓도록 울며 앉아 있었다. 주위에 물어보았지마는 대답하려 하지 않았느니라. 사자가 두려워하면서 곧 음식을 여러 신선들에게 주고 달려 돌아와서 부인을 향하여 자세히 위의 일을 말하였더니, 부인이 말하였다.
‘재화로구나, 나의 아들이 죽은 것이로다.’
가슴을 치고 크게 부르짖으며 왕에게로 달려가자, 왕이 듣고 기절하여 버리므로 신하들은 왕에게 간(諫)하였다.
‘태자는 산에 계시오니, 왕께서는 잠시 진정하소서.’
왕과 부인과 비후(妣后)ㆍ채녀ㆍ신하ㆍ백성들이 달려서 산으로 올라가는데, 장자 부란(富蘭)이 마중 나와서 왕에게 아뢰었다.
‘태자는 어제 몸을 바위 아래로 던져 살을 범에게 먹였습니다. 지금은 남은 뼈가 흩어져 어지러이 땅에 있을 뿐이니, 함께 시체 있는 데로 가십니다.’
왕과 부인ㆍ후비ㆍ채녀ㆍ신하와 백성들이 소리 높여 슬피 울부짖어 산골짜기가 진동하였느니라. 왕과 부인은 아들의 시체 위에 엎드려 간장이 끊어지도록 슬퍼하다가 기절하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느니라.
태자비는 나아가 태자의 머리를 붙들고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말하였다.
‘차라리 내 몸이 부서져서 가루가 되게 하더라도 나의 남편이 죽어서 지금 같이는 되지 않게 했어야 합니다.’
그 때에 여러 신하들은 왕에게 아뢰었다.
‘태자는 보시하며 중생 제도하기를 서원하였고, 무상(無常)의 살귀(殺鬼)에게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아직 냄새나거나 문드러지지 않았으니, 공양을 베푸셔야 합니다.’
이내 해골을 거두어 산골짜기 어귀로 나와서 평평한 땅에다 전단향의 나무를 쌓고 향과 소유(酥油)를 뿌리고 화장하였으며, 사리(舍利)를 거두어 가져다 칠보탑(七寶塔)을 일으켰느니라. 그 때의 태자는 바로 지금의 내 몸이요, 부왕은 바로 지금의 나의 부친 수두단(輸頭檀)이시며, 부인은 바로 지금의 모친 마야(摩耶)이시고, 후비는 바로 지금의 구이(瞿夷)이며, 화장을 한 이는 바로 지금의 아난이요, 산 위의 신선의 큰 스승은 바로 지금의 미륵이니라.”『보살투신반아호경(菩薩投身飯餓虎經)』에 나온다.
(2) 담마감(曇摩紺)이 법을 위하여 몸을 태우자 불구덩이가 변하여 꽃이 핀 못으로 되다
“옛날 염부제(閻浮提)에 범천(梵天)이라는 왕이 있었다. 왕의 태자 담마감은 바른 법을 매우 좋아했으므로, 제석(帝釋)은 변화로 바라문이 되어 와서 말하였다.
‘나는 설법을 잘합니다.’
태자가 발 아래 엎드려 공손히 예배드리고 듣기를 청하자, 바라문이 말하였다.
‘나는 배우고 쌓기를 오랫동안 하였는데 어떻게 그냥 들으려 하십니까? 만약 목숨과 처자를 아끼지 않고 큰 불구덩이에 들어가서 공양을 할 수 있다면, 그제야 나는 설법을 하겠습니다.’
태자가 그의 말대로 큰 불구덩이를 만들자, 왕과 부인 및 채녀들이 궁중에서 나와 바라문을 달랬다.
‘나라 안의 처자(妻子)들을 시켜 한결같이 곁에서 모시도록 할 터이니, 태자가 이 불 속으로 몸을 던지지 않게 하소서.’
바라문이 말하였다.
‘나는 그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단지 그렇게 하는 것으로는 그를 위해 설법하지 않겠습니다.’
왕은 국내에 널리 영을 내렸다.
‘이로부터 7일 후에 태자는 몸을 태운다. 만약 보고 싶은 이는 그날 일찍 올 것이니라.’
온 나라의 귀천이 일시에 모두 모여서 애걸하며 억지로 청하는데……(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태자는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나고 죽는 가운데서 몸을 수없이 없앴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는 탐욕을 위하여 서로 베고 해치고 하였으며, 천상에서는 수명이 다하여 5욕을 잃으면 근심 걱정하였으며, 지옥에서는 타고 삶아지고 칼과 톱으로 베이고 잘리었고, 재의 강물과 칼 나무의 고통은 심장과 골수에 사무쳤습니다. 아귀로 나서는 백 가지의 독으로 몸뚱이를 뚫렸으며, 축생의 과보 에서는 몸을 중생들의 입에 이바지하고 풀을 먹고 무거운 것을 졌습니다. 이런 많은 고통을 지니면서 헛되게 살면서 일찍이 착한 마음으로 법을 위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야 더럽고 냄새나는 몸을 버려 맑고 훌륭한 것을 구합니다. 그대들은 어째서 나를 막으려 하십니까? 나는 부처님 도를 얻어서 그대들에게 오분법신(五分法身)을 베풀겠습니다.’
태자가 불구덩이 위에 서자, 바라문이 말하였다.
언제나 인자한 마음을 행하여
성내거나 해치려는 생각을 없애며
대비(大悲)로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어
그들 위해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린다.
크게 기뻐하는 마음을 수행하여
자기가 얻은 법을 같이하며
부축하여 보호함은 도의 뜻[道意]으로써 하여야
비로소 보살행(菩薩行)에 알맞으니라.
태자가 게송을 듣고 이내 몸을 불에 던지려 하자, 제석과 범왕(梵王)이 그를 위해 한 손을 붙잡고 힐난하며 말하였다.
‘염부제 안의 일체 중생들이 태자의 은혜를 힘입어 제자리를 얻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이제 만약 불에다 던지면 천하가 아버지를 잃은 듯할 터인데 어째서 스스로 주어서 일체를 버리려 합니까?’
태자는 거절하며 말하였다.
‘나의 위없는 도를 향한 마음을 막지 마십시오.’
몸을 불구덩이에다 던지자, 천하가 크게 진동하였고 허공의 여러 하늘들은 동시에 슬피 통곡하여 눈물이 소나기 오듯 하였다. 이 때 이글거리던 불구덩이는 변하여 꽃이 핀 못으로 되었고, 태자는 연화대(蓮華臺)에 앉았는데, 여러 하늘들은 꽃을 비처럼 내려 무릎까지 차게 하였다.
범천왕은 바로 지금의 정반(淨飯)이요, 모후는 바로 지금의 마야부인이며, 태자는 바로 지금의 세존이시다.“『현우경(賢愚經)』 제1권에 나온다.
(3) 인욕(忍辱)이 아버지를 위하여 몸을 죽이다
비바시불(毘婆尸佛) 때였다. 바라내국(波羅㮈國)의 왕은 총명하고 인자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한 산신(山神)을 섬기어 12년 동안을 빌고 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뒤에 첫째 부인이 한 남아를 낳아 길렀는데 성품이 착하고 성을 내지 않았으며 상호를 두루 갖추었다.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그의 길흉을 점쳐서 그의 이름을 인욕(忍辱)이라 지었다. 나이가 들고 장성하면서 보시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써 대하였다. 나라에 어느 대신(大臣)은 간사하고 아첨하며 횡포하고 무도하여 사람들이 싫어하였는데, 태자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 때에 왕이 중병이 들어 목숨이 아침 아니면 저녁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인욕 태자는 부왕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부왕께서 위독하신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하들이 말하였다.
“묘약을 얻기 어렵습니다. 머지 않아 떠나시겠습니다.”
그러자 태자는 슬퍼하다가 기절하여 버렸다. 나쁜 대신은 계략을 세워서 태자를 제거시키고자 하여 태자에게 여쭈었다.
“왕의 병에는 어떠한 약이 필요한데 그 약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태자는 물었다.
“그것이 어떠한 물건입니까?”
대신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성을 내지 않은 사람의 눈동자와 골수입니다. 만약 이 약을 얻는다면 반드시 왕의 생명을 보존하시리다.”
태자는 말하였다.
“나의 몸이 그와 비슷하겠습니다.”
이내 그 어머니와 하직하고 아울러 여러 작은 나라 왕을 모아 놓고 널리 알렸다.
“나의 지금의 이 몸은 여러분들과 이별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전타라(旃陀羅)를 불러서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두 눈을 오려내게 하자, 대신은 이내 합쳐 찧어서 대왕께 받들어 올렸다. 왕은 즉시 먹고 병이 나았으므로 여러 대신에게 물었다.
“이 약은 자못 묘합니다. 나의 고통스런 병이 나았으니 말이오.”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지금 이 약은 태자께서 마련한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지금 어디에 있소?”
신하가 대답하였다.
“바깥에 계신데 신체가 상하고 파괴되어서 수명이 멀지 않았습니다.”
왕은 몹시 슬피 울면서 아들에게로 갔으나 그는 이미 목숨을 마친 뒤였다.
그 어머니는 괴로워하면서 몸을 시체 위에 던지고서 말하였다.
“나는 전생의 죄가 있어서 몸을 가루로 하여 티끌처럼 했어야 하였는데, 이에 나의 아들이 목숨을 잃게 하였구나.”
우두전단(牛頭栴檀)으로써 그를 화장하고, 그 유골로 칠보탑을 일으켰다.『대방편불보은경(大方便佛報恩經)』 제3권에 나온다.
(4) 지지(智止)가 피와 살을 병든 비구에게 보시하다
“옛날 염부리(閻浮利)에 지력(智力)이라는 왕은 언제나 불법을 수호하며 정성이 지극하였다. 왕과 친하게 지내는 한 비구가 있었는데, 왕이 존경하였으며, 나라 백성들도 사랑하고 존중하였다. 왕은 그를 한없이 보고 싶어하였는데, 그 비구의 넓적다리 위에 큰 악창(惡瘡)이 생겨서 나라 안의 의약으로 낫게 할 수 없었으므로 왕과 2만 부인들은 모두가 다 슬퍼하며 염려하였었다. 어느 날 왕이 자다가 꿈을 꾸는데, 어떤 천인(天人)이 와서 왕에게 말하였다.
‘만약 그 비구를 낫게 하고 싶으면 산 사람의 살과 피를 마시고 먹게 하여야 나으리다.’
왕은 깨어나서 언짢아하다가 생각하였다.
‘이 비구의 병이 중하니 그 약을 구해야겠구나.’
칙명을 내려 신하에게 물었다.
‘어디서 산 사람의 피와 살을 얻겠는가?’
그 때에 왕의 태자 지지(智止)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근심 마옵소서. 사람의 피와 살은 가장 천한 물건입니다. 세간 사람들은 소중히 여기나 도(道)에서는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장하도다.’
태자는 잠자코 가서 칼을 가져다 넓적다리를 베어 살과 피를 비구에게 보냈다. 비구는 그것을 먹고 악창이 곧 나아서 몸이 안온하게 되었으며, 왕은 비구가 벌써 나았음을 듣고 기뻐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태자도 저절로 본래대로 회복되었으며, 왕은 온 나라의 재보를 태자에게 하사하였다. 그 때의 정성이 지극한 이는 바로 제화갈라불(提和竭羅佛)이시며, 지력왕은 바로 지금의 미륵이요, 지지 태자는 바로 지금의 내 몸이니라.”『월명보살삼매경(月明菩薩三昧經)』에 나온다.
(5) 월광(月光)이 몸을 깨뜨려 피와 골수를 내어서 병든 사람을 구제하다
월광 태자가 나가 다니면서 유람을 하는데, 나병인(癩病人)이 그를 보고 수레를 막으면서 말하였다.
“내 몸은 중병이 들어 몹시 괴로운데, 태자는 재미있게 놀면서 혼자 기뻐하십니까? 큰 자비로 가엾게 여기시어 낫게 하여 주소서.”
태자가 그것을 듣고 여러 의사들에게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태어나서부터 자랄 때까지 성을 내지 않았던 사람의 피와 골수를 바르고 마시고 하여야 나을 수 있습니다.”
태자는 생각하였다.
‘설령 이런 사람이 있다 하여도 살기를 탐내고 목숨을 아깝게 여길 터인데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내 몸을 제외하고는 얻을 곳이 없으리라.’
이내 전타라에게 명하여 그로 하여금 몸의 살을 발라내어 뼈를 부수고 골수를 내어서 나병인에게 바르고 피를 마시게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보시 끝에 처자까지 보시하기에 이르렀고, 보시하면서도 마치 풀과 나무를 버리듯이 아끼지 않았으며, 보시할 물건을 자세히 살펴서 인연 따라 존재함을 알고 그의 실제를 추구하여도 도무지 얻을 것이 없음을 알면, 온갖 것이 깨끗하여져서 마치 열반의 모습과 같고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기에 이를 것이니, 이것을 업을 맺어서 받은 육신[結業生身]으로서 단바라밀(檀波羅蜜)을 행하는 것이라 한다.『대지론(大智論)』 제12권에 나온다.
(6) 수천제(須闡提) 태자가 살을 베어서 부모의 생명을 구제하다
“비바시불(毘婆尸佛)의 상법(像法) 때였다. 바라내국(波羅奈國)의 왕 라사(羅闍)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저마다 작은 나라를 맡고 있었다.
이 때 왕은 총명하여 바른 법으로 정치를 하였고 백성들을 잘못되게 하지 않았으며, 왕에게는 덕의 힘이 있었으므로 바람과 비가 제때에 와서 오곡이 잘 익었다. 왕이 중용하고 있던 라후라(羅睺羅)라는 신하가 역모를 품고 갑자기 4병(兵)을 일으켜 바라내국을 쳐서 대왕의 목숨을 끊고, 이어서 첫째와 둘째 왕자를 쳤으며, 다음에는 셋째 왕자를 치려 하였다.
셋째 왕자는 형체가 크고 단정하여 잘생겼으며 고운 성품은 고르고 착했으며, 말할 때는 언제나 웃음을 머금었고 이익되는 말만을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며, 바른 법으로 백성을 다스렸고 토지는 풍요로웠으며, 나라의 재산은 충분하여 사방에서 찬미하였고, 허공의 여러 하늘과 일체 귀신들까지도 모두 공경하고 사랑하였다.
그에게 한 태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수천제(須闡提)였다. 총명하고 인자하며 보시하기 좋아하고 몸은 황금빛에 일곱 군데[七處]가 꽉 차서 사람 상호가 두루 갖추어졌으며, 나이 일곱 살이 되면서부터 그 아버지는 사랑스러운 생각으로 마음에서 잠시도 잊는 일이 없었다. 이 때 궁전 지키는 신[守宮神]이 왕에게 말하였다.
‘라후라가 반역을 도모하여 왕위를 빼앗고 부왕을 죽이고자 하여 군사들을 일으켰고, 두 형을 찾아 체포하여서 역시 생명을 끊었습니다. 군사와 말이 오래지 않아서 여기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근심하고 괴로워하며 어쩔 줄 모르다가 간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기절하며 쓰러졌다. 한참 있다가 소생해서 작은 소리로 공중에다 대고 말하였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그 소리만 들릴 뿐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까? 아까 말씀하신 일이 사실입니까?’
신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바로 궁전을 지키는 신인데, 왕이 총명하고 정직하며 백성들을 그릇되게 하지 않았으므로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왕은 빨리 나가셔야 합니다. 그는 오래지 않아 도착할 것입니다.’
왕은 이웃 나라로 가려고 생각하였는데 그러자면 두 개의 길이 있었다. 한 길은 7일 동안을 가야 되었고, 한 길은 14일 동안 가야 되었으므로, 곧 한 사람이 7일 동안 먹을 양식을 담고서 궁중으로 들어가 수천제를 불러서는 안아서 무릎 위에다 놓자, 부인이 나와서 물었다.
‘대왕께서는 지금 두려워하시는 모습이십니다.’
왕이 말하였다.
‘당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부인이 아뢰었다.
‘저의 몸과 왕은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어째서 서로 관여하지 말라 하십니까?’
그제야 왕은 위와 같은 일을 말하고서 이내 태자를 안고 길을 떠나갔는데, 부인이 뒤를 따랐다. 당황하고 마음이 어지러워 잘못하여 14일이 걸리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은 험난하고 물과 풀도 없었다. 앞으로 수일 동안 세 사람이 가야 할 터인데 다 같이 양식이 떨어졌으며 갈 길은 아직도 멀었다. 왕과 부인은 소리 높여 크게 통곡하면서 말하였다.
‘괴이하도다, 쓰라리도다. 태어나서부터 이제까지 일찍이 이런 고통은 들은 일조차 없다. 어떻게 오늘날에 이런 고통을 겪는가?’
깊이 뉘우치고 책망하는데 배고픔과 목마름이 들이닥쳐서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방편을 생각해 내면서 ‘세 사람이 함께 죽지 않으려면 아내를 죽이고서 나와 아이가 살아야겠구나’ 하는데, 수천제가 왕이 이상함을 보고 나아가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여쭈었다.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아버지는 슬퍼하며 눈물이 눈에 가득히 어려서 작은 소리로 아들에게 말하였다.
‘너의 어머니를 죽여서 그 살과 피로써 너의 생명을 잇게 하려 한다.’
수천제는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에게 여쭈었다.
‘어디서 어떤 아들이 어머니의 고기를 먹는다 하십니까?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면 아들과 어머니가 함께 죽을 것이니, 아들만을 죽여서 부모의 생명을 구제하옵소서.’
왕은 아들의 말을 듣고 이내 기절하였다가 작은 소리로 아들에게 말하였다.
‘아들은 나의 눈과 같거늘, 어디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을 후벼파서 제가 도로 먹는다더냐? 나는 차라리 죽을지라도 절대 아들을 죽여서 먹지는 않으리라.’
수천제는 또 말하였다.
‘만약 당장에 목숨을 끊으면 피와 살이 냄새나고 문드러져서 며칠을 지나지 못하게 됩니다.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만약 거역하신다면 인자한 부모가 아니십니다.’
부왕은 태자에게 말하였다.
‘너의 뜻을 거역하지 않으리라.’
수천제는 말하였다.
‘날마다 저의 몸에서 세 근의 살을 베어 두 근은 부모께 이바지하고 한 근은 제가 먹어서 신명을 이어가게 하시옵소서.’
부모는 울면서 그대로 따랐다.
앞으로 갈 길을 이틀쯤 남겨 놓고 몸의 살은 다 되어서 손발 마디의 힘줄과 뼈만이 앙상하게 이어져 있고 목숨만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부모는 부여안고 소리 높여 크게 통곡하였다.
‘우리들이 면목이 없구나. 멋대로 너의 살을 먹어서 너를 고통스럽게 하다니, 갈 길은 아직도 멀어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너의 살도 다 되었으니 이제는 운명을 함께하여 시체나 한 군데로 모으자.’
그 때에 수천제는 작은 소리로 간(諫)하였다.
‘이미 아들의 고기를 잡수시고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부모께서는 지금 평범한 사람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운명을 한 곳에 나란히 하시겠다 함은 가엾이 여겨서이나 거역하지 마십시오. 몸의 여러 마디 사이에서 깨끗하게 남은 살을 베시면 부모님을 구제하실 수도 있고 계실 곳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부모가 그 말에 따라 다 먹은 뒤에 울부짖으면서 떠나가자 수천제는 일어서서 부모를 보고 있었고, 부모는 크게 통곡하면서 길을 따라 떠나갔다. 부모가 멀리 떨어지자 수천제를 보지 않았지마는, 태자는 부모를 그리워하면서 눈을 잠시도 떼지 않고 한참 만에 땅에 쓰러졌다. 몸에서 신선한 피와 살 냄새가 주위에 퍼지자 모기와 등에가 피와 살의 냄새를 맡고 와서 몸 위에 달라붙어서는 온몸을 쪼아먹었으므로 그 심한 고통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남은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소리를 내며 서원을 세웠다.
‘전생의 재앙과 악이 이로부터 다 없어져 버리면 지금 이후로부터는 다시는 감히 죄를 짓지 않으리다. 지금 저의 이 몸을 부모에게 공양함으로써 저의 부모는 언제나 열한 가지의 여복[十一餘福]을 얻게 하시며, 남아 있는 피와 살은 모든 모기와 등에에게 보시하나니 모두가 배부르게 하소서.’
이렇게 원을 세울 때 천지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해는 광명이 없어졌으며, 날짐승과 길짐승은 흩어져 달아났고, 큰 바다에서는 파도가 일어 수미산이 오르락내리락하였으며, 여섯의 욕계(欲界) 하늘들은 모두가 다 겁을 내어 염부제로 내려와서 사자나 호랑이 등으로 변화하여 눈을 부릅뜨고 윗수염을 후려치면서 땅에 대고 크게 으르렁거리다 훌쩍 뛰어와서 치며 깨물려고 하였다. 그 때에 수천제는 여러 짐승들이 크게 위세부리는 것을 보고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너희들이 잡아먹고 싶으면 마음대로 먹어라.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느냐?’
제석천이 이내 하늘의 몸으로 돌아가자, 태자가 그것을 보고 한량없이 기뻐하므로 이 때 제석은 태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버리기 어려운 것을 능히 버렸도다. 이러한 공덕으로 천상에 가서 악마왕이 되시겠소, 범왕(梵王)이 되시겠소?’
태자는 대답하였다.
‘저의 소원은 위없는 보리[無上菩提]를 이루는 것입니다.’
천제석은 말하였다.
‘괜한 말씀을 하시는구려. 누가 그대를 믿겠습니까?’
태자는 서원하며 말하였다.
‘만약 거짓이라면 제 몸의 상처가 끝내 아물지 않게 하시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로 하여금 본래대로 회복되게 하소서.’
그러자 피는 도리어 젖이 되고 몸은 본래대로 회복되면서 단정하기가 평소보다 갑절이나 더하였다. 제석천은 머리를 조아려 발에 예배하고 찬탄하며 말하였다.
‘장하십니다. 저로서는 그대에게 미칠 수 없습니다. 그대는 정진을 용맹하게 하시어 보리를 얻으셔서 먼저 저를 제도하여 주소서.’
천왕 제석은 공중에서 이내 사라져 버렸다. 이 때 왕과 부인은 이웃 나라에 이르렀다. 이웃 나라에서는 소식을 듣고 멀리까지 나와 영접하여 서로가 만났으며, 위의 일을 자세히 설명하자 필요한 바를 다 공급하여 그의 뜻에 아주 알맞게 하여 주었다. 이웃 나라 왕은 감격하면서 ‘태자야말로 인자하고도 효성스럽구나’ 하고는 4병(兵)을 바치므로 도리어 그 왕과 함께 라후라를 토벌하고서 길을 따라 돌아왔다. 먼저 태자와 이별하던 곳으로 가 그의 뼈를 거두려고 앞을 바라보면서 슬피 통곡하였는데, 차츰차츰 나아가다가 멀리서 태자의 몸이 본래대로 회복되었음을 보고는 나아가 껴안으니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였다. 이 때 수천제가 자세히 위의 일을 그의 부모에게 아뢰자, 부모는 기뻐하면서 함께 큰 코끼리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태자의 복은 아주 수승하였으므로 본국으로 돌아오자 이내 태자를 세워 대왕으로 삼았다.
그 때의 부왕은 바로 지금의 수두단왕(輸頭檀王)이시고, 그 때의 어머니는 바로 지금의 마야부인(摩耶夫人)이시며, 수천제는 바로 지금의 부처님 몸이요, 천제석은 바로 지금의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이다.“『대방편불보은경(大方便佛報恩經)』 제1권에 나온다.
(7) 수대나(須大拏)가 보시하기를 좋아하며 남에게 흰 코끼리를 주게 되자 꾸지람을 받고 산중으로 내쫓기다
“옛날 섭파국(葉波國)의 왕 이름은 습수(濕隨)였다. 그 태자의 이름은 수대나(須大拏)인데 4등(等:四無量心)으로 널리 보호하여 말로써 남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이렇게 원하였다.
‘보시로 중생들을 구제하여 나로 하여금 후세에 무궁한 복을 받게 하소서.’
어리석은 이는 변화의 무상함을 보지 못하고 보전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5가(家:王ㆍ賊ㆍ물 ㆍ불 ㆍ惡子)가 있음을 비추어 알고, 옷과 밥과 금은과 많은 값진 보배와 수레ㆍ말ㆍ밭ㆍ집을 얻으려 하면 구할 적마다 얻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빛나는 명성이 멀리 퍼져서 4해(海)가 찬탄한다. 부왕에게 흰 코끼리 한 마리가 있었는데 용맹하고 힘이 세어서 외적 60개 국이 와서 싸워도 그 코끼리가 능히 이겨내므로, 여러 왕들은 함께 의논하여 범지(梵志) 여덟 사람을 보내어 그로부터 흰 코끼리를 구걸하게 하였는데, 태자는 기뻐하면서 물었다.
‘무엇을 구하려 하십니까?’
범지가 대답하였다.
‘연꽃 위를 다니는 흰 코끼리를 구걸하려 하는데 코끼리의 이름은 라사화단(羅闍和檀)입니다.’
태자는 말했다.
‘좋습니다. 금은의 여러 가지 보배도 구하시면 마음대로 드리겠습니다.’
곧 시자에게 명하여 빨리 흰 코끼리에게 금은으로 된 안장과 굴레를 씌우고, 왼손에는 코끼리 굴레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금병을 잡고서 범지의 손을 씻어 주었다. 그리고 사랑과 기쁨으로 코끼리를 주자, 범지는 몹시 기뻐하면서 이내 주원(呪願)을 마치고서 코끼리를 타고 떠나갔다. 상국(相國)과 백관들은 모두가 서운해 하고 섭섭해 하면서 말하였다.
‘이 코끼리야말로 힘이 세고 용맹하여 교전할 때마다 이겼다. 이제는 적국에다 주었으니 장차 무엇을 믿을까?’
자세히 왕에게 아뢰자, 왕은 듣고 참담한 모양으로 오래 있다가 말하였다.
‘태자는 부처님 도를 좋아하여 두루 가난한 이를 구제하고 자비로 돌봐주는 것이니 못하게 할 수 없다. 가령 구금하여 처벌한다 하여도 이것으로는 도리가 없다.’
백관들은 모두 말하였다.
‘절차(切磋)의 교법으로는 과실이 없습니다. 구금하여 처벌함은 가혹한 것이므로 신(臣)들은 감히 아룁니다. 나라에서 추방하여 전야(田野)에 두고 10년 동안 스스로 참회하게 하심이 신들의 소원입니다.’
왕은 이내 사자를 보내어 그에게 말하였다.
‘코끼리는 바로 국보인데 적국에다 주었느냐? 차마 처벌할 수는 없으니 빨리 나라에서 떠나라.’
사자가 명을 받들고 이렇게 말을 하자, 태자는 대답하였다.
‘감히 천명(天命)을 어기지는 않겠습니다. 사재(私財)로써 다시 7일 동안만 보시하게 하소서. 감히 나라의 것은 소비하지 않겠습니다.’
사자가 이렇게 아뢰었더니, 왕은 이내 허락하였다. 태자는 기뻐하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크게 보시하고자 하여 널리 말하였다.
‘빨리 와서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가져가라.’
그렇게 하기를 7일 동안을 보시하여 마치니, 가난한 이들이 모두 부자가 되었다.
태자의 아내의 이름은 만지(曼坻)였다. 본래 왕녀로서 얼굴이 꽃같이 어여쁘고 얌전하여서 그 나라에서는 짝할 이가 없었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7보의 영락을 걸고 있었는데, 태자는 아내에게 말하였다.
‘일어나서 나의 말을 들으시오. 대왕께서는 나를 단특산(檀特山)에다 12년 동안을 유배시켜 둔다 하셨는데 당신은 그것을 아십니까?’
아내는 놀라면서 태자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쫓겨나 나라의 높은 영화를 버리고 이제 깊은 산에서 산다는 것입니까?’
태자가 대답하였다.
‘내가 나라의 유명한 코끼리를 적국에다 보시하였더니, 왕과 신하들이 성을 내어서 나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아내는 이내 서원하였다.
‘부디 나라에는 풍년이 들고 왕과 신하와 백성들은 재물이 넉넉하고 수명이 끝없게 하시고 오직 뜻을 산택(山澤)에다 세웠으니 맹세코 도를 이루어지게 하소서.’
태자는 말하였다.
‘저 산택이야말로 두려운 곳이어서 범과 이리 등 해치는 짐승 때문에 머무르기 어려우며, 또 독이 있는 벌레와 도깨비ㆍ쓰러져 죽은 귀신ㆍ우레ㆍ번개ㆍ벼락ㆍ바람ㆍ비ㆍ구름과 안개 등으로 매우 두려우며, 추위와 더위가 도에 지나치고 나무는 의지하기 어려우며, 납가새와 조약돌로 되어 있어 밟는 것도 어려운 곳입니다. 당신은 왕의 딸이라 영화롭고 즐거움 속에서 태어나 궁중에서 자라면서 옷은 부드러웠고 음식은 감미로웠으며, 누우면 장막이요 뭇 음악으로 귀를 떠들썩하게 하셨으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제 산택에 가서 산다 하면 누우면 풀 깔개요, 음식에는 과일과 채소라 사람으로서 참아낼 바가 아니리라. 어떻게 그것을 견디겠습니까?’
그러자 아내는 말하였다.
‘화려한 옷과 여러 가지 보배와 장막과 감미로운 것이 어찌 이 몸이 태자와 생이별하는 것보다 낫겠습니까? 대저 왕은 번기로써 표지가 되고 불은 연기로써 표지가 되고 부인은 남편으로써 표지가 됩니다. 저는 태자를 믿기를 마치 두 어버이 믿듯 하며 태자가 나라에 계시면서 사방에다 보시하는 것은 저 또한 원이 같습니다. 이제 험한 일을 겪으시게 되는데 남아서 영화를 지키는 것이 어찌 어진 도[仁道]이겠습니까? 만일 누군가 와서 구걸할 때 저의 남편이 나타나지 않으면 마음에 한이 맺혀서 틀림없이 죽게 될 것입니다.’
태자는 말하였다.
‘먼 나라 사람이 와서 아내나 아들을 구걸하여도 나는 거스를 마음이 없을 터인데, 당신이 애정과 연모 때문에 만일 보시의 길을 어긴다면 큰 덕을 끊게 되어 나의 무거운 임무를 무너뜨리리다.’
아내는 말하였다.
‘태자의 보시야말로 세간에서 보기 드물며 마땅히 큰 서원을 마치셔야 하므로 부디 게으르지 마십시오. 백천만 세상에서도 당신과 같이 부처님의 무거운 임무를 세운 사람이 없으니, 저는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태자는 말하였다.
‘좋습니다.’
곧 처자를 데리고 어머니에게 나아가 하직하였다.
머리를 땅에 조아리면서 가엾은 모양으로 하직하여 말하였다.
‘염려 마시고 옥체 보전하소서. 나라 일에는 힘을 쓰시어 자주 인자로써 간(諫)하여 마음대로 하시다가 저 천민(天民)들을 그르치게 함이 없게 하시고, 참을 수 없는 일이 있더라도 참으셔야 합니다.’
모후는 말하였다.
‘아직 아들이 없을 때는 원을 세워서 후사를 구하였고, 잉태하게 된 날에는 마치 나무가 꽃망울을 머금기를 기다리듯 하였더니, 하늘은 소망을 빼앗지 아니하여 나에게 아들이 있게 하였도다. 다 양육하고 나자 생이별을 당하다니, 그의 부인과 빈첩(嬪妾)들에게 다시는 공경 받지 못하게 되었구나.’
태자와 그 아내며 아이들은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니 궁중 안의 모든 사람은 목이 메이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백관이 나와 슬퍼하며 결별하고 다 함께 성을 나와서 떠나가자 모두가 가만히 말하였다.
‘태자는 나라의 거룩한 이요 뭇 보배보다 존귀하신데, 양친께서는 무슨 마음으로 내쫓으실까?’
태자가 성 밖에 나와 앉아서 전송하는 이들을 사양하며 돌아가게 하자, 온 백성들은 공경히 엎드려서 모두가 슬퍼하였고, 혹은 주저앉아 날뛰고 하면서 하늘을 불렀으므로 그 소리에 나라가 진동하였다. 나라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자 한 나무 아래에 앉았는데, 어떤 범지가 멀리서 와서 몸에 있는 보배와 옷과 그리고 처자들의 구슬을 구걸하였으므로 모두 다 그에게 주고서 아내와 아들을 수레에 태우고는 고삐를 붙잡고 떠나려 하였다. 막 길을 나아가려 하는데, 또 어느 범지가 말을 구걸하므로 말을 그에게 주고서 자신이 끌채 안에서 수레를 끌고 길을 나아갔다. 그런데 또 다른 범지가 와서 그 수레를 구걸하므로 이내 수레까지 주어 버렸으므로 태자에게는 수레와 말과 옷과 몸의 보배 등의 여러 물건들이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아내에게는 딸을 업게 하고 자기는 아들을 안고서 21일 동안을 가서야 비로소 산중에 닿게 되었다. 태자는 산에 나무가 무성하고 흐르는 샘과 맛있는 물과 감미로운 과일이 갖추어져 있고, 물오리와 기러기와 원앙새들이 그 사이에 유희함을 보고서 아내에게 말하였다.
‘나무가 하늘에 높이 늘어서서 부러진 것이 없고, 뭇 새들도 지절거리며 샘물과 과일도 매우 많아서 음식은 충분하겠으니, 도(道)에만 힘쓰십시다.’
산중의 도사(道士)는 모두가 절개를 지키고 배우기만을 좋아하였는데, 아주타(阿珠陀)라는 한 도사가 오랫동안 산간에 있으면서 매우 미묘한 덕이 있었으므로 이내 처자와 함께 나아가서 머리 조아리고 말하였다.
‘저는 처자를 거느리고 여기에 와서 도를 배우려 하니 크고 인자한 가르침을 드리우셔서 저의 뜻을 이루어 주소서.’
그 도사는 그를 가르쳐 주게 되었다. 태자는 거기에 나무와 풀로 집을 짓고 머리를 따고 왕골로 옷을 해 입고 열매를 먹으며 샘물을 마셨다. 사내아이 야리(耶利)는 가는 풀 옷을 입고 아버지를 따라 출입하였고, 계집아이 계노연(蘮拏延)은 사슴의 갖옷을 입고 어머니를 따라 나들이를 하였다. 산에서 하룻밤을 묵었더니, 하늘은 그들을 위하여 샘물을 늘리고 다시 약나무가 나게 하였다.
뒷날 구류손(鳩留孫)이라는 가난하고 늙은 범지가 있었다. 한창 나이의 그의 아내는 얼굴도 꽃같이 아름답고 잘생겼다. 병을 가지고 물을 길러 가다가 길에서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녀를 막으면서 조롱하여 말하였다.
‘그대는 살기가 가난한가? 저 늙은이의 재물을 탐내면서 살기를 바라는구나. 저 늙은이는 도를 배워 일가(一家)를 이루려고 희망하나 어리석어 어긋나기만 하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탐내는가? 얼굴 모습은 추하고 검으며, 코는 바로 들창코요, 몸뚱이는 비뚤어지고, 얼굴은 쭈글쭈글하며, 입술은 쳐져 있다. 말은 더듬고 두 눈은 푸르며, 모습이 마치 귀신과 같아서 온몸이 좋은 곳이라곤 없으니, 그 누가 싫어하지 않겠는가? 그대는 그의 아내로서 부끄럽거나 싫증이 나지도 않는가?’
부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늙은이는 수염과 살갗이 희어서 서리가 나무에 붙은 것 같으면서도 아침저녁으로 죽지도 않으니, 어떻게 할꼬?’
돌아와서 그의 남편을 향하여 이 일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말하였다.
‘만약 잔심부름꾼이 없으면 나는 당신을 떠나겠소.’
남편은 말하였다.
‘나는 가난한데 어떻게 갑자기 잔심부름꾼을 구하겠소?’
아내는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수대나가 큰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다가 산중에 유배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에게 두 아이가 있으므로 구걸하면 당신에게 주시리다.’
아내는 자꾸 졸랐다. 그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버리기가 어려워서 곧 그녀의 말을 받아들여서 그를 찾으며 길을 가다가 사냥꾼을 만났다. 사냥꾼은 평소에 태자가 쫓겨온 까닭을 알고 있었으므로 발끈 성을 내어 꾸짖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너의 목을 베겠다. 태자가 있는 곳을 물었기 때문이다.’
범지는 두려워 피하면서 말하였다.
‘왕과 신하들이 태자를 부르게 하셨는데 나라로 돌아오면 왕으로 삼는답니다.’
사냥꾼이 대답하였다.
‘아주 잘된 일이로다.’
기뻐하면서 그 처소를 가르쳐 주었다. 다가가자 조그마한 집이 보이는데 태자 역시 그가 오는 것을 보았다. 두 아이들은 그를 보자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면서 남매가 함께 말하였다.
‘우리 아버님이 보시하기를 숭상하므로 이 사람이 멀리서 오는구나. 재물도 다했고 그 다음 것도 없으니. 반드시 우리 남매를 그에게 주실 것이다.’
남매는 손을 끌고 함께 도망갔다. 어머니가 본래 그늘에다 구덩이를 파서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해 놓았었는데 두 아이는 그 속으로 들어가 나무로써 그 위를 덮고 서로가 경계하며 말하였다.
‘아버님이 불러도 대답하지 말자.’
태자는 그를 위로하여 말하였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달프시겠습니다.’
범지가 대답하였다.
‘나는 멀리서 오느라고 온몸이 괴롭고 아픕니다. 또 배도 몹시 고프고 목도 마릅니다.’
태자가 과일과 물을 베풀자 말하였다.
‘이제는 죽을 날이 다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희미한 목숨이나마 늘려 주십시오.’
태자는 측은히 여기며 말하였다.
‘재물이 다 떨어졌으니 아낄 것도 없습니다.’
범지는 말하였다.
‘두 아이를 주셔서 이 늙은이를 먹여 살리게 하소서.’
태자가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십시오.’
태자는 아이들을 불렀다.
남매는 두려워하면서 말하였다.
‘우리 아버님이 부르며 찾으신다. 틀림없이 이 귀신에게 주시겠구나. 명을 어기고 대답하지 말자.’
태자는 그들이 구덩이 안에 숨어 있는 것을 알고 나무를 헤쳐 그들을 찾아냈다. 아이들은 나와서 아버지를 안고 덜덜 떨면서 울며 말하였다.
‘이는 바로 귀신이며 범지가 아닙니다. 저희들은 자주 범지를 보았지마는 얼굴 모습이 이렇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을 귀신에게 먹이지 마십시오. 우리 어머니는 과일 따러 가셨는데 어찌 이리 늦으실까? 오늘은 틀림없이 죽어서 귀신에게 먹히게 되었구나. 어머님이 돌아와 우리를 찾으실 때 마치 소가 송아지를 찾듯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슬피 우실 터인데, 아버님께서는 반드시 후회하시리다.’
태자가 말하였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보시하였으나 조금이라도 뉘우친 일이 없었다. 내가 허락한 것이니 너희들은 어기지 말라.’
범지는 말하였다.
‘내가 늙어서 기운이 없으니 아이들은 나를 버리고 도망가서 그의 어머니에게로 갈 것입니다. 태자께서는 크신 은혜로 그들을 묶어서 맡겨 주십시오.’
태자가 아이들을 붙잡아다 범지로 하여금 묶어서 스스로 새끼 끝을 끌고 가게 하자, 두 아이는 주저앉아 몸을 뒹굴며 아버지 앞에서 슬피 울다가 어머니를 부르며 말하였다.
‘천신(天神)과 지신[地祇]이시여, 산과 나무의 모든 신(神)이시여, 한번만 가엾이 여기셔서 어머니에게 알려 주십시오. ≺두 아이를 남에게 보시하였으니, 한번만이라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입니다.’
슬픔이 천지를 감동하여 산신(山神)이 우레 같은 소리로 진동시켰다. 어머니는 이 때에 과일을 따고 있었는데, 몹시 두려워지므로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니, 구름과 비도 보이지 않는데 오른쪽 눈이 깜빡거려지고 왼쪽 발바닥이 간지러우며 두 젖이 흘러나왔으므로 어머니는 생각하였다.
‘몹시 괴이한 일이로다. 돌아가서 우리 아이들을 보아야겠다.’
어머니는 과일조차 버리고 두려워하면서 미친 듯이 돌아왔다. 제석은 생각하였다.
‘보살의 뜻이 높아서 중요한 소임을 이루려 하는데, 만약 아내가 도착하게 되면 그 높은 뜻을 무너뜨리겠구나.’
그리고 변화로 사자가 되어서 길에 나아가 쭈그리고 앉아 있자, 부인이 말하였다.
‘너는 바로 짐승 중의 왕이요, 나는 인간 세상의 왕의 딸로서 함께 이 산에 살고 있다. 나에게 두 아이가 있는데 모두가 아직 어리다. 아침에 오면서 먹이지를 못해서 나를 기다리며 바라고 있으리라.’
그러자 사자는 그를 피했다. 이에 부인이 다시 길을 걸어가는데, 제석은 흰 이리로 변화하여 부인의 앞에 다시 돌아왔다. 부인이 앞에서와 같이 말하자 이리도 그를 피하였다. 또 변화로 범이 되어서는 범지가 멀리 피해 가게 한 뒤에 비로소 물러났다. 부인은 태자가 혼자 나오는 것을 보고 슬픈 모양으로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우리 아이들은 어디로 갔기에 지금 혼자 앉아 계시오? 아이들은 언제나 내가 돌아오는 것을 보면 나에게 달려 나와서 뛰놀며 기뻐하고 웃으면서 ≺어머님이 돌아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아이들 장난감인 진흙으로 만든 코끼리와 진흙으로 만든 소ㆍ진흙으로 만든 말ㆍ진흙으로 만든 돼지 등, 잘 만든 여러 물건들이 땅에 흩어져 있구려. 이를 보는 마음이 슬퍼서 저는 미칠 것만 같습니다. 범ㆍ이리ㆍ도깨비ㆍ도둑에게 먹힌 거나 아닐까요? 빨리 이 묶인 것을 풀어 주십시오. 나는 틀림없이 죽을 것입니다.’
태자는 오래 있다가 말하였다.
‘어느 한 범지가 와서 두 아이를 찾으며 말하기를 ≺나이 다하여 목숨이 희미하니 구제하여 주소서≻ 하기에 나는 그에게 두 아이를 주었습니다.’
부인은 이 말을 듣고 뛰다가 땅에 주저앉아 뒹굴면서 슬피 통곡하며 말하였다.
‘진실로 어젯밤에 꾼 꿈과 같구나. 꿈에 늙고 가난한 범지를 보았는데 나의 두 젖을 베더니 그것을 가지고 급히 도망쳤소. 바로 지금 이렇게 됐습니다.’
슬피 통곡하며 하늘을 부르자 온 산간이 진동하였다. 태자는 아내의 슬픔이 너무 심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본래 그대를 꺼린 것은 두터운 효성과 어른 받드는 마음 때문이었소. 구하는 것마다 보시하지 아니함이 없으리라는 나의 맹세가 아주 분명하였는데 이제 애통해 하면서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는구려.’
아내는 말하였다.
‘태자께서 도를 구하심이 어찌 그리 수고로우십니까?’
제석과 여러 하늘들은 모두가 의논하였다.
‘태자의 도가 크고 널리 베풂이 그지없으므로 시험삼아 그의 아내를 빌어보자.’
제석은 범지로 변화하여 말하였다.
‘당신은 건곤(乾坤)의 어짊을 품고 널리 중생을 구제하며 보시에 거스름이 없다 하기에 짐짓 와서 마음을 떠보려 합니다. 당신 아내는 어질고 정숙하며 덕의 향기가 멀리 퍼졌으므로 와서 구걸합니다.’
태자가 대답하였다.
‘예, 그렇게 하십시오.’
천지가 갑자기 크게 진동하고 하늘과 사람과 귀신들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범지는 말하였다.
‘나는 바로 제석천이요 세간의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일부러 와서 당신을 시험해 본 것입니다. 당신이야말로 부처님의 지혜를 숭상하며 그 모범은 짝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바라는 것이 어떠한 소원입니까? 구하는 대로 반드시 이루게 하리다.’
태자는 말하였다.
‘소원은, 큰 부자가 되어 언제나 기꺼이 보시하며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며, 지금은 저의 부왕과 국민들을 만나 보고 싶은 것입니다.’
제석천은 말하였다.
‘좋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그 때 사라져 버렸다. 그 때 아까의 범지는 그의 뜻을 이루어 기쁜 나머지 길을 가면서도 고달픈 줄을 모르고, 두 아이를 끌고 가는 것이 마치 잃었던 일꾼을 찾아가듯 하였다. 아이들은 왕자(王者)의 손자요 영화와 즐거움이 자유로웠으나 두 어버이를 떨어지게 되면서 새끼에 묶였고, 묶인 자리에 모두 상처가 났으므로 슬피 울면서 어머니를 불러대자, 범지가 채찍으로 치면서 몰고 가니 피가 흘러서 땅을 붉게 물들였다. 천신들은 가엾이 여겨 포박을 풀고 상처를 낫게 하였으며, 그들을 위하여 감미로운 과일을 내고 땅을 부드럽게 하였으므로 남매는 과일을 따서 서로에게 주어 먹으면서 말하였다.
‘달기가 동산 안의 과일과 같고, 땅은 왕 곁의 모전과 같이 부드럽구나.’
남매는 서로가 붙들어 안고 하늘을 우러르며 어머니를 불렀으며, 눈물이 온몸에 흘렀다. 범지는 집에 가 닿자 기뻐서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당신을 위하여 종 두 사람을 얻었습니다. 마음대로 부리시오.’
아내는 아이들을 보고 말하였다.
‘종들은 이렇지 않습니다. 이 아이들은 단정하고 손발이 사랑스러워서 고생 시키기에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가서 팔아서 다시 부릴 만한 것을 사오십시오.’
그리하여 또 다른 나라로 가려고 하는데 하늘이 그의 길을 헷갈리게 하여 본디 그들이 살던 곳으로 가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들을 알아보고 모두가 말하였다.
‘이는 대왕의 손자들이다.’
곧 왕에게 알리자 왕은 그들을 불러서 궁중으로 들어오게 하였으므로 궁중 사람들은 모두가 탄식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왕은 두 아이를 안으려 하였으나 나오지 않으므로 말하였다.
‘왜 그러느냐?’
아이들이 말하였다.
‘옛날에는 왕의 손자였으나 지금은 천한 종의 몸이온데 어떻게 왕의 무릎에 앉겠습니까?’
왕이 범지에게 물었다.
‘어떠한 인연으로 이 아이들을 얻었습니까?’
범지가 왕에게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러자 말하였다.
‘아이들은 얼마에 팔겠습니까?’
범지가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 손자가 말을 막으며 말하였다.
‘사내의 값어치는 은전(銀錢) 1천에 수소와 암소 각 백 마리씩이며, 계집의 값어치는 금전(金錢) 1천에 수소와 암소 각 2백 마리씩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남아는 큰데도 천하고 여아는 어린데도 귀하니, 왜 그러느냐?’
대답하였다.
‘태자는 이미 거룩하고도 인자하여 뭇 사람이 의지하고 따르는데도 멀리 쫓겨났으니 그 때문에 남자는 천한 것임을 알 수 있고, 백성의 딸이 진실로 꽃다운 자색이면 깊은 궁중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여자가 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여덟 살 어린아이인데도 높은 선비로서의 이론이 있는데, 하물며 그의 아버지이겠느냐?’
궁중 사람 모두가 그의 풍간(諷諫)을 듣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모두를 돌아보면서 숫자대로 치르자 범지는 물러갔으므로, 왕이 두 손자를 안아다 무릎에 앉히면서 말하였다.
‘아까는 안기려 하지 않더니, 지금은 어찌 그리 빨리 오느냐?’
손자들이 대답하였다.
‘아까는 바로 종이었으나 지금은 왕의 손자가 되었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산에 살면서 무엇을 먹더냐?’
두 아이는 함께 대답하였다.
‘나물과 나무 열매를 먹고 살아가며, 날마다 길짐승과 날짐승들과 즐겨 놀면서도 수심이 없었습니다.’
왕은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를 맞아오게 하였다. 사자가 길을 떠나자 산중의 나무가 굽혔다 폈다 하면서 꿇어앉았다가 일어나며 절하는 시늉을 하였고, 온갖 새들은 지절거리면서 인정을 슬프게 하였으므로, 태자는 말하였다.
‘이것이 무슨 조짐일까?’
아내가 땅에 누워서 말하였다.
‘왕의 마음이 풀려 사자가 맞으러 오니 천신과 지기(地祇)가 축하를 하는 까닭에 이런 상서가 일어납니다.’
아내는 아이들이 없어지고서부터 땅에 누워 있었는데 사자가 도달하여서야 비로소 일어나 왕명에 예배하자, 사자가 말하였다.
‘왕과 황후께서는 식사도 거르면서 소리 내지 않고 우시느라 신명이 날로 쇠하여지셨으며, 태자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태자는 좌우를 돌아보며 산중 수목과 흐르는 샘을 연연해 하다가 눈물을 거두고 수레에 올랐다. 사자가 출발하면서부터 온 나라는 기뻐하면서 길을 다스리고 소제하며 미리 장막을 깔고, 향을 사르며 꽃을 흩뿌리고 음악과 일산과 당기를 세우며 온 나라가 허리를 굽히고서 빨리 나아가 수명의 한량없음을 칭송하였다. 태자가 성으로 들어가서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고 물러나 안부를 여쭙자, 왕은 다시 나라의 창고와 값진 보배를 모두 태자에게 맡기면서 권하여 보시하게 하여 이웃 나라의 가난한 백성들이 마치 냇물이 바다로 돌아가듯 하였고, 옛 적국들도 그를 보고 예배하며 와서 신하되기를 일컬으면서 공물을 서로가 바쳤다. 도둑들도 오히려 인자하여져서 훔친 물건을 다투어 보시하였고, 무기 창고와 감옥도 헐렸으므로, 중생들은 오래도록 즐거워하고 시방도 기뻐하였으며, 덕을 쌓음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는 비록 고생을 겪었으나 지금은 그지없이 높은 이가 되었는데, 태자는 그 뒤에 죽어서 도솔천(兜率天)에 가 났고, 그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백정왕(白淨王)의 궁중에 태어났으니, 바로 지금의 내 몸이다. 부왕은 바로 지금의 아난(阿難)이며, 아내는 바로 지금의 구이(瞿夷)이며, 아들은 바로 지금의 라운(羅云)이며, 딸은 바로 지금의 아라한 주지모(珠遲母)이며, 제석천은 바로 지금의 미륵이며, 사냥꾼은 바로 지금의 우타야(優陀耶)이며, 주타(珠陀)는 바로 지금의 대가섭(大迦葉)이며, 아이를 판 범지는 바로 지금의 조달(調達)이니, 보살이 인자스런 은혜로 보시하였던 것이 이와 같았느니라.”『수대나경(須大拏經)』에 나온다.
(8) 기역(祇域)은 내녀(捺女)의 소생인데 나라를 버리고 의사가 되다
옛날 유야리국(維耶離國)의 왕의 동산에서 하나의 능금나무가 났다. 가지와 잎이 무성하였고, 게다가 광택이 있었으며, 향기와 맛이 뛰어났으므로 왕은 극히 사랑하였고, 궁중의 높고 귀한 이가 아니면 그것을 먹을 수 없었다.
이 때 한 범지가 있었는데 부유하여서 나라에서는 짝할 이가 없었고, 총명하고 널리 통달하여 재지(才智)가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왕은 그를 대신으로 삼았다. 그가 먹어 보기를 청하므로 능금을 가져다가 하나를 그에게 주었더니, 범지는 능금의 향기와 맛이 보통이 아님을 보고 물었다.
“이 능금나무 아래에 조그마한 묘목이라도 있으면 얻었으면 합니다.”
왕은 말하였다.
“경(卿)이 만약 한 묘목을 얻고 싶다 하면 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범지가 그것을 얻어 심고서 아침저녁으로 물을 붓자, 가지와 줄기가 번성하게 되어서 3년 만에 열매가 열렸는데, 광채와 크기가 왕가의 것과 같았다. 범지는 크게 기뻐하면서 생각하였다.
‘나의 재물은 수없이 많아서 왕보다 적지 않았으나, 다만 이 능금나무만이 없었는데 이제 이것을 얻었으니 모자라는 바가 없구나.’
곧 그것을 따서 먹어 봤더니 아주 쓰고 떫으므로 물러 나와서 생각하였다.
‘이 땅이 비옥하지 못해서이다.’
그대로 젖을 가져다가 한 소에게 마시게 하고서 차례로 백 번까지 달여서 제호(醍醐)를 만들어서는 날마다 그것을 부었더니, 그로부터 다음 해에 이르러서는 열매가 달고 맛이 있었다. 그런데 나무 곁에 마치 주먹만한 큰 혹 마디가 하나 생기더니 날마다 더욱 커지니, 그 열매들을 방해할 것 같아서 마침내 찍어 버리려고 하였으나 또 나무가 상할까 두려워서 망설이며 결단내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그 마디에서 하나의 가지가 나면서 똑바로 곧게 뻗어 오르며, 높이는 나무 꼭대기까지 솟았고, 땅에서 일곱 길[丈]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 나무 끝에서 여러 가지들이 나왔는데 형상이 마치 누운 일산과 같았다. 꽃과 잎이 무성하고 아름다워서 본래 나무보다 훌륭하였으므로, 이내 잔각(棧閣)을 짓고 올라가서 그것을 보았더니, 누운 일산 속에 못물이 있었다. 못물은 맑고도 향기로웠으며 꽃들은 곱고 화사하였는데, 헤치고 꽃 밑을 보았더니, 한 계집아이가 못물 속에 있었다. 범지는 안고 집으로 돌아와 기르면서 이름을 내녀(㮈女)라고 지었다. 나이 열다섯이 되자 얼굴이 단정하여서 천하에 짝할 이가 없었다. 소문이 먼 나라까지 퍼지자, 일곱 나라의 왕이 동시에 함께 범지에게로 와서 내녀를 부인으로 삼겠다고 청혼을 하였다. 범지는 누구에게 줄지를 결정하지 못하여서 그 동산 안에 높은 다락을 하나 짓고, 내녀를 그 위에 놓아두면서 여러 왕들에게 말하였다.
“이 여인은 저의 소생이 아닙니다. 저절로 능금나무 위에서 나왔는데, 이제 일곱 왕께서 함께 구혼하니, 제가 만일 한 분에게 드리면 여섯 분께서는 성을 내실 것입니다. 감히 애석히 여겨서가 아닙니다. 여인은 지금 동산 안의 누각 위에 있으니, 여러 왕께서는 의논하셔서 얻으셔야 할 이가 데려가십시오. 제가 제지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자 일곱의 왕들은 함께 다투며 시끄럽게 하였으나 결정이 나지 않았다. 그 밤에 병사왕(甁沙王)은 기어서 구멍으로 들어와 누각에 올라가 동침하게 되었다. 다음 날 새벽에 떠나려 하자, 내녀가 말하였다.
“대왕께서 거둥해 오시었기에 높은 어른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만약 자식을 갖게 되면 이는 왕의 종성인데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그것이 남자면 나에게 보내고 그것이 여자면 당신이 맡으십시오.”
왕은 이내 금가락지의 도장을 벗어서 내녀에게 주며 말하였다.
“이것을 신표로 삼으십시오.”
나가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미 내녀와 함께 하룻밤을 잤느니라.”
그러자 병사왕의 군인들은 모두가 만세를 부르며 말하였다.
“우리 왕께서 이미 내녀를 얻으셨다네.”
여섯 왕들은 그것을 듣고 저마다 돌아가 버렸다. 내녀는 남아를 낳았다. 처음 태어날 적에 손 안에 침과 약주머니를 쥐고 있었으므로 범지는 말하였다.
“이는 국왕의 아들이면서 의료기(醫療器)를 가지고 있으니 반드시 의왕(醫王)이리라.”
그리고는 이름을 기역(祇域)이라 지었다.『열반경(涅槃經)』 등의 모든 경전에서는 모두 기바(祇婆)라 하였고, 『청반특비구경(請槃特比丘經)』에서는 기역이라고 하였다. 나이 여덟 살이 되자 총명하고 학문과 서소(書疏)에 뛰어났으며, 이웃 어린아이들과 놀고 장난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늘 아이들을 업신여겼으므로 여러 아이들은 욕설을 퍼부었다.
“아비 없는 자식이요, 음녀의 소생이면서 어찌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느냐?”
기역은 깜짝 놀라면서 잠자코 대답하지도 못하다가 이내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여러 아이들이 모두 저보다 못하다고 보았는데 도리어 저에게 욕을 하기를 아비 없는 자식이라 하였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어머니는 말하였다.
“너의 아버님은 바로 병사왕이시다.”
기역은 말하였다.
“병사왕은 라열기국(羅悅祇國)에 계시며 여기서는 5백 리 떨어졌는데, 어떠한 인연으로 저를 낳으셨습니까?”
모든 사연을 다 듣고 나자 이내 이 가락지를 가지고 라열기국에 가서 곧장 궁문으로 들어가 왕 앞에 이르러서는 왕에게 예배하고 길게 무릎 꿇고 아뢰었다.
“저는 바로 왕자이며, 내녀의 소생이옵니다. 지금 나이 여덟 살이온데, 비로소 대왕의 소생임을 알았으므로 신표인 가락지 도장을 받들고 멀리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왕은 도장의 글을 보고서 옛날에 있었던 서약을 기억하며 슬퍼하는 빛을 띠고 가엾이 여기어 태자로 삼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 마침 아사세왕(阿闍世王)이 태어났으므로 기역은 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처음 태어날 적에 침과 약주머니를 들었다고 하니 의왕(醫王)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제가 태자이기는 하나 제가 즐기는 일이 아니고 또 왕께서는 적자(嫡子)를 낳으셨으니 마땅히 그에게 왕위를 이어주셔야 합니다. 저의 소원은 다니면서 의술(醫術)을 배우는 것입니다.”
왕은 곧 허락하고 나라의 으뜸가는 의사에게 명하여 의술을 모두 가르쳐주게 하였다. 그러나 기역은 장난이나 치면서 받아 배우는 일이 없었으므로 여러 스승들은 책망하며 말하였다.
“의술은 천한 것이라 진실로 태자 같은 지존(至尊)이 배울 것은 못 됩니다. 그러나 대왕의 명이라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칙명을 받은 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태자께서는 처음부터 반 마디의 말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왕께서 저희들에게 물으시면 저희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기역이 말하였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의사로서의 증거가 손에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대왕께 아뢰어 영화와 호귀함을 버리고 의술 배우기를 청하였는데, 어찌 게으름을 피우겠습니까? 단지 스승님들의 도가 배울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내 본초약방(本草藥方)과 침맥(針脈)의 여러 경전을 가져다가 자세히 스승들에게 질문을 하자, 스승들은 대답할 수가 없었으므로 도리어 그에게 예배하며 말하였다.
“태자께서는 신령한 성인이시라 저희들은 미치지 못하겠습니다.”
대대로 의문스럽던 이치들을 태자에게 설명해 줄 것을 청하자, 곧 그 뜻을 해설하였으므로 여러 의사들은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받들어 행하였다. 기역은 구료(救療)에 나아갔다. 다스리기만 하면 바로 나았으므로 먼 나라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궁문(宮門)으로 돌아오다가 땔나무를 짊어진 어린아이를 만났는데, 5장(臟)이 자세하고도 분명하게 바라보이므로 기역은 생각하기를 ‘본초경(本草經)에 말하기를 ≺약왕나무[藥王樹]가 있는데 바깥에서 속을 비춘다≻고 하였다. 이 아이의 나무 안에 약왕나무가 있구나’ 하고 바로 물었다.
“얼마에 팔겠느냐?”
아이가 말하였다.
“10전(錢)입니다.”
품삯 10전을 치르자, 아이는 나무를 땅에다 내려놓았다.
그러자 캄캄해지며 다시는 그 뱃속이 보이지 않으므로 기역은 생각하기를 ‘다발 안의 어느 것이 이 약왕나무인지를 모르겠구나’ 하고 이내 두 다발을 풀고서 낱낱이 붙잡고 아이의 배 위에다 대 보았으나 비춰 보이는 바가 없었다. 이렇게 두 다발의 나무를 다해 가는데 맨 나중의 작은 가지가 뱃속을 비추어 보이므로 기역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 작은 가지가 틀림없는 약왕이로구나’ 하고 아이의 나무를 다 돌려주자 아이는 기뻐하면서 떠나갔다. 이 때 그 나라 안의 가라월(迦羅越)의 집 딸의 나이가 열다섯이어서 시집갈 날이 임박했는데 갑자기 두통으로 죽어 버렸다. 기역은 그것을 듣고 그 집으로 가서 물었다.
“딸에게 늘 어떠한 병이 있었기에 일찍 죽어 버렸습니까?”
그의 아버지는 말하였다.
“딸에게는 조금의 두통 병이 있었는데 날마다 더욱 심해가더니 아침에 죽어 버렸습니다.”
기역이 약왕으로써 딸의 머리를 비춰 봤더니 깎아 먹는 벌레가 보였다.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살면서 수백 마리가 두뇌를 깎아먹어서 뇌가 다 없어졌기에 죽게 된 것으로 이내 금칼로써 그 머리를 쪼개 헤쳐서 모든 벌레를 다 들어내어 독 속에다 봉하여 두고, 세 가지 신고(神膏)를 상처에다 발랐다. 한 가지는 벌레가 파먹었던 뼈 사이의 상처를 보(補)하는 것이었고, 한 가지는 뇌가 생기게 하는 것이었고, 한 가지는 바깥의 칼의 상처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딸의 아버지에게 알렸다.
“잘 안정하게 하면서 부디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이레 동안이면 나을 것입니다. 그 날에 내가 다시 오겠습니다.”
기역은 떠나갔다.
딸의 어머니는 다시 슬피 울면서 말하였다.
“나의 자식이 두 번 죽게 되었구나. 어찌 머리를 쪼개고 뇌를 파내었는데 다시 살아난단 말이냐?”
그의 아버지는 그것을 말리며 말하였다.
“기역은 태어나면서 침과 약 주머니를 가졌기에 높은 왕위도 버리고 다니면서 의사 일을 한다오. 다만 일체를 위하고 인명을 다스리기 위해 대의왕(大醫王)이 되었는데 어찌 거짓이겠소? 당신에게도 ‘부디 놀라게 하지 말라’고 부탁하였는데, 지금 도리어 슬피 울어서 그를 놀라 요동하게 하는구려. 이 아이를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하렵니까?”
어머니는 듣고 이내 울음을 그치고 공양하며 그를 보호하면서 7일 동안을 고요하게 하였더니, 딸은 숨을 내쉬면서 깨어났는데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말하였다.
“저는 이제 조금도 머리가 아프지 않습니다. 몸도 전부 편안한데 누가 나를 구호하여서 이럴 수 있게 하셨습니까?”
아버지는 말하였다.
“너는 전에 이미 죽었었는데 의왕(醫王)이신 기역께서 일부러 오셔서 너를 구호하였다. 머리를 쪼개고 벌레를 들어내어서 다시 소생하게 되었다.”
곧 독을 열어서 벌레를 내어 보이자 딸은 보고 크게 놀라 두려워하면서 매우 요행으로 여기며 말하였다.
“기역의 신령함이 이와 같습니다. 어떻게 그 은혜를 갚아야 합니까?”
그 때에 기역이 왔으므로 딸은 크게 기뻐하면서 문을 나가 영접하며 예배하고 무릎 꿇고 말하였다.
“당신의 여종이 되어서 종신토록 다시 소생한 은혜를 갚게 하소서.”
기역은 말하였다.
“나는 의사라 돌아다니면서 병을 고칩니다.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으니 여종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반드시 은혜를 갚고 싶다면 나에게 5백 냥의 돈을 주십시오. 나 자신이 쓰려는 것이 아니고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려 합니다. 스승께서 비록 나에게 가르친 것은 없었다고 하나 나는 일찍이 제자였으므로 이제 그대에게서 돈을 얻으면 그 분에게 드리렵니다.”
여인이 5백 냥의 돈을 바치자 기역은 그것을 받아서 스승에게 드리고, 이어 왕에게 아뢰어 잠시 돌아가 어머니를 뵈려고 유야리국(維耶離國)으로 갔다. 어느 가라월의 집 아이가 배우기를 좋아하였는데 높이 일곱 자 남짓한 하나의 목마(木馬)를 만들어 뛰어올라 타는 법을 익힌 뒤에 비로소 말에 오르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런데 뒷날 결국 발을 헛디뎌 땅에 넘어지면서 죽었다. 기역이 그것을 듣고 곧 가서 약왕(藥王)으로써 배를 비춰 보자, 간(肝)이 뒤틀려서 뒤로 향하여 있어 기(氣)가 맺혀서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금칼로 배를 째서 손으로 더듬어 처리하여 간을 돌려 앞으로 향하게 한 뒤에 세 가지 고약을 거기에 발랐다. 그 한 가지 것은 손으로 바루며 만졌던 곳을 보(補)하는 것이었고, 한 가지는 숨을 잘 통하게 하는 것이었고, 한 가지는 주로 칼이 닿은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부탁하였다.
“부디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3일이면 나을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명을 받고 고요히 공양하며 보았더니, 3일 만에 아이는 숨을 내쉬면서 깨어난 것이 마치 자다가 깨어난 것과 같았는데 바로 일어나 앉았다. 잠시 후에 기역이 오자 아이는 나가 마중하며 예배하고 말하였다.
“종이 되어서 종신토록 공양하여 살려 주신 은혜를 갚게 하소서.”
기역은 말하였다.
“나는 의사로 돌아다니며 병을 고치고 있습니다. 병자의 집에서 어찌 나를 위하여 심부름하며 종으로 쓰겠습니까? 우리 어머님이 나를 기르느라 애쓰셨는데 나는 아직도 봉양을 못하였습니다. 그대 만약 나에게 사례하려 한다면 나에게 5백 냥의 돈을 주시어 어머니의 은혜를 갚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돈을 가져다 내녀에게 바치고 도로 라열기국으로 돌아왔다. 기역이 이 두 사람을 살려내자, 명성은 천하게 드날려서 알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또 남쪽에 큰 나라가 있었는데, 라열기국에서는 8천 리 떨어졌다. 병사왕과 여러 작은 나라들이 모두 신(臣)으로서 그에게 속하여 있었다. 그 왕이 병이 들어서 여러 해 동안 낫지 않자 항상 괴로워하며 성을 내면서 곁눈질을 하여도 사람을 죽이고, 남이 눈을 들고 보기만 하여도 역시 죽이고, 머리를 숙이며 쳐다보지 않아도 역시 죽였다. 사람을 부렸는데, 가는 것이 느려도 역시 죽이고, 빨리 달려가도 역시 죽였으므로 좌우의 시종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으며, 의사가 약을 지어 주기만 하면 독이 있다고 미워하면서 역시 그를 죽였으므로 앞뒤로 살해당한 신하와 궁녀와 의사들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병은 날로 더하여 그 독기가 심장을 침투하였으므로 신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숨이 가빠서 마치 불로 몸을 태우는 것과 같았다. 기역의 명성을 듣자 이내 칙서를 내려 병사왕에게 기역을 부르도록 명하였다. 기역은, 이 왕이 의사를 많이 죽여서 모두가 두려워한다 하는 것을 들었고, 병사왕도 그 나이 어린것을 가엾이 여기면서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 보내지 않으려 하였지마는, 토벌 당할 것을 두려워하면서 부자(父子)가 서로 지키며 밤낮 마음 졸이고 걱정만 하다가 비로소 기역을 데리고 함께 가서 부처님께 묻자, 부처님께서 기역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전생에 나와 서약하기를 ‘함께 천하 사람의 병을 구호하되, 나는 속병을 다스리고, 너는 바깥 병을 다스리자’고 하였었다. 나는 이제 부처가 되었기 때문에 본래 서원대로 되었고, 마침 너도 나의 앞에 나타나게 되었도다. 이 왕의 병이 위독하여 만리에서 와서 너를 영접하는데, 어떻게 가지 않겠느냐? 급히 가서 그를 구호하되 방편을 쓴다면 병은 반드시 낫게 될 것이고 너를 죽이지도 않으리라.”
기역은 부처님의 거룩한 신력을 받들고 왕에게로 가서 진맥(診脈)하고 약왕으로써 비추어 보았더니, 왕의 오장과 온 맥 속의 혈기의 어지러운 모양이 자세히 보였다. 이것은 전갈의 독이었는데 온몸에 두루 퍼져 있었으므로 기역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의 병은 다스릴 수 있고 치료하면 낫겠습니다. 그러나 태후(太后)를 뵙고 묻고 의논하여 약을 지어야겠습니다. 만약 태후를 뵙지 못하면 약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그 까닭을 모르겠으므로 몹시 성을 내려 하다가 그러나 몸의 병을 근심하였고, 전부터 기역의 명성을 듣고 일부러 멀리서 그를 영접하였으므로 반드시 유익할 것임을 기대하였으며, 또한 어린아이인지라 간통이 없을 것을 알았으므로 화를 참고 그를 허락하고 곧 내시에게 데리고 들어가서 태후를 뵙게 하였다. 기역은 태후에게 아뢰었다.
“왕의 병은 다스릴 수 있으므로 이제 약을 지어야겠습니다. 은밀하게 그 처방을 아뢸 것이니, 널리 드러내서는 안 되겠습니다. 좌우를 물리쳐 주소서.”
태후가 이내 내시를 내보내므로 기역은 태후에게 물었다.
“아까 왕의 병환을 살폈더니 왕의 몸 안의 혈맥에 있는 것 모두가 전갈의 독이어서 사람 종류의 것이 아닌 듯합니다. 왕은 바로 누구의 아드님이십니까? 태후께서 사실대로 저에게 말씀하시면 제가 치료할 수 있겠으나 만일 저에게 말씀하지 않으시면 저는 치료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태후는 말하였다.
“내가 옛날 일찍이 금주전(金柱殿) 안에서 낮잠을 잤는데, 갑자기 어떤 물건이 와서 나의 위를 문지르는 것이 있었다. 내가 그 때 황홀하게 꿈에서 통정을 하고서 갑자기 깨어나 보자 길이 세 길[丈] 남짓한 큰 전갈이 나의 위에서 떠나갔다. 그리고 바로 임신을 하였으므로 왕은 실은 이 전갈의 아들이다. 나는 부끄러워서 아직은 이 일을 입 밖으로 낸 일이 없었는데, 동자가 이제야 그것을 깨닫게 하니, 어찌 그리 신묘하냐? 만약 병을 다스릴 수 있다면 왕명으로써 동자에게 위촉하겠다. 이제 그것을 다스리려면 어떠한 약을 써야 되느냐?”
기역은 말하였다.
“제호(醍醐)만이 있을 뿐입니다.”
태후는 말하였다.
“예끼, 얘야. 부디 그런 말은 말아라. 왕은 제호의 향기를 몹시 싫어할 뿐더러 또 그 이름조차 듣기 싫어하신다. 이전에 제호를 말하였다가 죽은 이가 수천백 인이다. 네가 이제 그것을 말하기만 하면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며, 이것을 왕이 마신다 하여도 끝내 내려가지도 못할 터이니, 바꾸어 다른 약을 쓰도록 하여라.”
기역은 말하였다.
“제호가 독의 병을 다스리는 것이므로 제호를 듣기조차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왕의 병환이 미미하고 이것이 다른 독이라 하면 딴 약으로 낫게 할 수 있겠으나 전갈의 독이라 무척 위중하십니다. 또 이미 온몸에 번졌으니 제호가 아니면 끝내 녹일 수가 없습니다. 이제 잘 달여서 물이 되게 하여야겠습니다.”
그리고 나와서 왕을 보고 말하였다.
“아까 태후께 들어가 뵙고 이미 약방문을 말씀드렸으며, 이제 그것을 지어야겠는데 15일이 걸리겠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다섯 가지의 소원이 있습니다. 왕께서 만약 저에게 허락하시면 병이 이내 나을 수 있을 것이나, 만약 저에게 허락하지 않으시면 병환은 나으실 수 없습니다.”
왕이 물었다.
“다섯 가지 소원이란 모두 어떠한 일들이냐?”
기역이 말하였다.
“첫 번째의 소원은 왕의 상자 안의 새 옷 중에 아직 몸에 걸치지 않으셨던 것을 저에게 주셔서 입게 하는 것이며, 두 번째의 소원은 제가 혼자 궁중 문을 출입하여도 막거나 꾸짖지 않게 하는 것이며, 세 번째의 소원은 날마다 혼자서 태후와 왕후를 들어가 뵙되 역시 막거나 꾸짖지 않게 하는 것이며, 네 번째의 소원은 왕께서 약을 마시되 단번에 쳐들고 다 마셔야 되고 중간에 쉬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며, 다섯 번째의 소원은 8천 리를 가는 왕의 흰 코끼리를 저에게 주시어 타게 하는 것입니다.”
왕은 듣고 크게 성을 내며 말하였다.
“조그마한 애가 어찌 감히 다섯 가지 소원을 구하느냐? 빨리 그것을 설명하라. 만약 설명하지 못하면, 이제 너를 때려죽이겠다.”
기역은 말하였다.
“약을 짓자면 의당 정결하고 재계하여야 되는데, 제가 온 지 오래되어서 의복이 모두 때가 끼었기 때문에 왕의 옷을 얻어 입고 약을 지으려 하는 것입니다. 또 왕께서 이전에 모든 의사들로 하여금 모두 의심쩍게 하였음은 맡기고 믿는 바가 없어서였습니다. 또 그들을 죽이고 그 약을 잡수지 않으셨으므로 여러 신하들은 모두 말하길 ‘왕께서는 장차 또 저를 죽일 것’이라 하는데, 그러나 왕의 병환은 이미 심하여져 있으므로 외부 사람들이 난을 일으킬 마음을 낼까 두려워서이며, 만약 저에게 스스로 나가고 스스로 들어오게 하면서 막거나 꾸지람을 하지 않으면 바깥의 모든 사람들은 ‘왕께서 저를 믿고 의심하지 않아 반드시 저의 약을 잡수시고 병환이 반드시 낫게 되겠구나’를 알게 하기 위해서이며, 감히 역적의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또 왕께서는 이전에 사람을 아주 많이 죽이셨으므로 모든 신하가 저마다 두려워하면서 모두가 왕의 안온을 원하지 않으므로 믿을 만한 이가 없어 이제 함께 약을 짓는다면 그 일로 제가 한눈 파는 동안에 독약을 던져 넣을까 두려워서이며, 제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면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건대 ‘천하에 믿을 만한 이로서 은혜와 정이 둘도 없는 이는 어머니와 아내뿐이다’고 한 까닭에 태후와 왕후를 들어가 뵈면서 함께 약을 짓고 달이려는 것이며, 15일이 되어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날마다 들어가서 불이 고른가를 엿보려 해서입니다. 또 약에는 가지런한 수의 기미(氣味)가 있어서 서로가 미쳐야 하는데, 만약 그 중간에 쉬게 되면 기미가 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또 남산(南山)에는 신묘한 약초가 있는데 여기서는 4천 리 떨어져 있습니다. 왕께서 약을 잡수시면 바로 이 약초를 얻어서 거듭 잡수셔야 하므로, 이 코끼리를 타고 아침에 떠나가서 그것을 따 가지고 저녁에 돌아와 약의 기미가 서로 미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왕은 마음이 모두 풀리면서 다 허락하였다. 이에 기역은 제호를 15일 동안 정성껏 달였다. 그러자 맑은 물처럼 되었으므로 다섯 되 가량을 태후와 왕후에게 주고 함께 나아가 약을 바치며 잡수라고 아뢰면서 청하였다.
“흰 코끼리를 차려 정전(正殿) 앞에다 놓아주소서.”
왕은 이내 들어주었다. 왕이 약을 보니 맑은 물과 같았으므로 한 번에 다 마셨다. 기역은 이내 코끼리를 타고 지름길로 하여 그의 본국으로 떠나갔다. 나이 어리고 미약한데 3천 리 가량을 너무 빨리 갔으므로 현기증이 생기고 몹시 고달파 견뎌내지 못하여 산간에 누워 쉬고 있었다. 한낮이 지나서 왕이 트림을 했는데 제호의 기(氣)가 나오므로 성을 내며 말하였다.
“어린아이 놈이 감히 제호를 나에게 먹였구나. 어린아이가 나에게 흰 코끼리를 구하는 까닭을 괴상히 여기기는 하였는데 돌아가기 위해서였구나.”
왕에게 오(烏)라는 용사가 있었는데 신족(神足)으로 다닐 수 있었다. 이내 칙명을 내렸다.
“쫓아가서 어린아이를 잡아오너라. 내 눈앞에서 때려죽이겠다.”
오(烏)는 가서 그를 따라잡고서 말하였다.
“너는 무엇 때문에 제호를 왕에게 드렸느냐? 그 약을 말씀하시면서 나에게 따라가서 너를 불러오게 하셨다. 너는 급히 나를 따라가서 스스로 용서를 빌고 살아나기를 희망하여라. 만약 본래처럼 달아나려 하면 당장 너를 죽일 것이니 끝내 벗어날 수 없으리라.”
기역은 생각하였다.
‘나는 비록 방편으로 이 흰 코끼리를 구하기는 했으나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구나. 이제 다시 방편을 써야겠다. 어찌 따라가겠느냐?’
그리고 오에게 말하였다.
“나는 아침에 나와서 아직 먹지도 못하였고 돌아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 차라리 나를 잠시 동안이나마 산간에서 얻은 과일을 먹게 하고 물을 마시게 하여 배부른 상태에서 죽음에 나가게 하심이 좋겠습니다.”
오가 기역을 보니 어린아이로서 죽음이 두려워서 하는 말씨가 몹시 애처로워서 가엾이 여기면서 그를 허락하고 말았다.
“빨리 먹고 가야 한다. 오래 지체할 수는 없다.”
기역은 이에 한 개의 배를 가져다 반을 씹어먹고 나머지 반에다 손톱 속의 독약을 묻히고서 땅에다 놓아두고, 또 한 잔의 물을 가져다 먼저 그 반을 마시고 그 나머지 물 속에다 손톱 아래의 독을 넣고 다시 땅에다 놓아두면서 감탄하며 말하였다.
“이 물과 배야말로 모두가 천약(天藥)이로구나. 맑은 향기에 감미롭기까지 하다. 이것을 마시고 먹는 이는 몸이 편안하여지고 백 가지 병이 모두 나으며 기력이 갑절 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라의 도읍 아래에 있어서 백성들이 이를 얻지 못하도록 깊은 산 속에 있어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한스럽구나.”
그리고 산으로 돌아가면서 다른 과일을 찾았다. 오의 천성은 본래 먹는 데에 욕심꾸러기라, 음식에는 참을 수 없을 뿐더러 기역이 신약이라고 감탄한 것을 들었고, 또한 기역이 이미 그것을 마시고 먹고 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반드시 독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이내 나머지의 배를 먹고 남은 물을 마셨더니, 바로 설사를 하였다. 설사가 마치 물을 부어대는 것 같았으므로 땅에 쓰러져 누웠는데, 일어나기만 하면 아찔하여 넘어지곤 하여 다시는 움직일 수조차도 없었다.
기역은 가서 그에게 말하였다.
“왕께서는 나의 약을 먹고 병환이 반드시 나으리라. 그러나 지금 약 기운이 아직 돌지 못하였고, 남은 독이 아직은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내가 이제 가면 반드시 나를 죽일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모르고 나를 잡아가려 하므로 풀려나기 위해서 일부러 당신을 아프게 했습니다. 병은 저절로 나을 것이니, 부디 3일간만 동요하지 않으면 나을 것입니다. 만약 일어나서 나를 쫓게 되면 틀림없이 죽게 될 것입니다.”
코끼리를 타고 떠나가다가 마을의 오장(伍長)에게 말하였다.
“이 분은 바로 대국의 왕의 사자이시오. 지금 갑자기 병을 얻었으니, 당신들이 급히 가서 수레로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를 잘 봉양하고 구호하시되, 그의 평상과 자리를 후히 하고 미음과 죽을 드리면서 부디 죽지 않게 하십시오. 만약 죽게 된다면 왕은 당신들의 나라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는 이내 떠나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왔다. 오장이 명을 받고 맞아다가 3일 동안을 구호하여 독이 없어졌으므로 오는 보수를 주고 이내 돌아와 왕을 뵙고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며 말하였다.
“제가 실로 어리석어서 왕의 명을 저버렸습니다. 기역의 말을 믿고 그가 남긴 과일과 물을 먹고 마셨더니, 약에 중독이 되어서 3일 동안을 설사를 하다가 이제야 막 나았습니다. 스스로 죽어 마땅함을 알고 있습니다.”
오가 돌아온 3일 사이에 왕의 병은 이미 나았으므로 오를 보낸 것을 뉘우치고 있다가, 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한편은 기뻐하고 한편은 슬퍼하면서 말하였다.
“네가 아이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 잘 되었도다. 내가 성낼 적이었으면 반드시 때려죽였으리라. 나는 그의 은혜를 얻어서 이제는 살게 되었는데 도리어 그를 죽였다면 잘못이었으리라.”
왕은 생각하기를 ‘이전에 잘못 죽인 이들을 모두 다시 후히 장사지내고 그의 가문을 회복시키며 돈과 재물을 주리라’고 하면서, 기역이 보고 싶고 그의 은혜를 갚고자 하여 이내 사자를 보내어 기역을 맞아오게 하였다.
기역이 비록 왕의 병이 이미 나았을 줄 알면서도 두려워하며 다시 가려 하지 않자, 부처님께서 기역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전생에 큰 서원이 있었기에 공덕을 성취하였는데, 왜 그만두려 하느냐? 다시 가야 하느니라. 네가 이미 그의 바깥 병을 다스렸으므로 나도 다시 그의 속병을 다스리리라.”
기역은 이내 사자를 따라 떠나갔다. 왕은 기역을 보자 몹시 크게 기뻐하면서 끌어다 그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고 그의 팔을 붙잡으며 말하였다.
“어진 이의 은혜를 입어서 이제 다시 소생하게 되었다.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겠느냐? 국토의 반을 나누어서 주겠으며, 궁 안의 채녀와 창고의 보물도 모두 반씩 나누겠다.”
기역은 말하였다.
“저는 본래 태자로서 비록 진실로 작은 나라이기는 하나 역시 백성은 있었으며 값진 보배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나라 다스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사가 되려 하였으니, 다니면서 병을 다스려야 합니다. 토지나 채녀, 보물은 모두 소용없습니다. 왕께서 전에 저의 다섯 가지 소원을 들어주셨기에 바깥 병이 나을 수 있었으나, 이제 만약 또 저의 다른 소원을 들어주시면 속병도 낫게 되실 것입니다.”
왕은 말하였다.
“그대의 명을 들을 뿐이로다.”
청하며 다시 그에게 묻자, 기역은 말하였다.
“왕께서는 부처님을 청하시어 그로부터 밝은 법을 받으소서. 부처님께서는 왕을 위하여 공덕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왕은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제 오(烏) 신하를 보내어 흰 코끼리로써 부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데, 오시겠느냐?”
기역은 말하였다.
“흰 코끼리는 소용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멀리서도 마음과 생각을 아시니, 다만 재계하고 청결히 하고서 모든 공양 거리를 마련하고 향을 지피며 멀리서 예배하고 길게 꿇어앉아 부처님을 청하기만 하면,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스스로 오시게 되십니다.”
왕은 그의 말대로 하였다. 부처께서는 1,250비구들과 함께 오셔서 밥을 다 잡숫고 나서 왕을 위하여 경을 말씀하셨다. 그러자 왕은 이내 위없는 도의 마음을 내었고, 온 나라의 모든 이는 다 5계(戒)를 받들었다.
내녀(奈女)가 났을 적에 이미 기이한 일이 있었는데 자라면서 또 총명하였으므로 그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워 널리 경도(經道)를 알았으며, 성력(星曆)과 모든 기술은 그 아버지보다 나았고, 게다가 음악에 통달하여 소리는 마치 범천(梵天)과 같았으므로, 여러 가라월(迦羅越)과 범지의 집 딸 모두 5백 인이 가서 따라 배우며 큰 스승으로 삼았다.
내녀는 언제나 5백의 제자들을 데리고 경도와 기술을 강하였고, 혹은 서로 함께 동산과 못에서 재미있게 놀면서 음악을 하기도 하였으므로 나라의 사람들은 그 까닭을 모르고는 비방을 하면서 음녀(婬女)라고 불렀으며, 5백의 제자들까지도 모두 음탕한 무리라고 일컬었다.
내녀가 날 적에 나라 안에서는 또 두 여인이 함께 출산을 하였는데, 첫째는 수만녀(須蔓女)요, 둘째는 파담녀(波曇女)였다. 수만녀는 가라월의 집에 나게 되었는데, 그 집에서는 언제나 수만(須蔓)을 눌러 짜서 향기로운 고약을 만들었다. 그 고약을 짜는 돌 곁에 갑자기 혹이 생겼는데, 크기는 탄환만큼 하고 길이는 주먹만큼 하였다. 돌이 문득 폭발하면서 돌의 마디 안에서 빛이 났는데, 마치 반딧불과 같더니 쏘아 내보내어 땅에 떨어진 지 3일 만에 수만이 생겨났다. 3일이 되자 꽃이 피었는데, 그 안에 소녀가 있었으므로 가라월이 데려다 그를 기르면서 수만녀라고 이름지었다. 장성하면서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내녀에 버금갔다.
파담녀는 어느 범지의 집 목욕하는 못 안에 푸른 연꽃이 나서 날마다 자라고 커서 마치 닷 되들이 병만큼 되더니 꽃이 피었고, 그 안에 한 소녀가 있었으므로 범지가 그를 기른 것인데, 이름을 파담녀라고 지었다. 장성하면서 재주와 지혜가 총명하고 통달하여 마치 수만녀와 같았다. 여러 나라의 왕들은 이 두 여인의 얼굴이 세상에서 다시없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가 와서 청혼하였으므로 두 여인은 말하였다.
“내가 태어난 것도 태(胎)로 말미암아서가 아니고 풀 꽃 속에서 나왔으니 뭇 사람들과는 다른데, 왜 세속을 따라서 시집을 가야 합니까? 듣건대 내녀는 총명하고 온 세상에서 짝할 이가 없으며, 태어난 것도 우리와 바탕이 같다고 하였습니다.”
모두가 부모를 하직하고 가서 내녀를 섬기며 제자 되기를 청하였는데, 지혜가 밝고 널리 통달하여 모두가 5백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부처님께서는 그 때에 유야리국에 이르셨다. 내녀와 여러 제자들은 성을 나가서 받들어 맞이하고 부처님께 예배하고 꿇어앉아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내일 저의 동산에서 공양을 하옵소서.”
부처님께서는 잠자코 수락하셨다. 왕은 궁중을 나가 마중하고, 또 다음 날 궁중에서 공양하실 것을 청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녀가 먼저 청하였고, 왕은 그보다 뒤이니라.”
왕은 말하였다.
“저는 나라의 주인으로서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청하오니,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가엾이 여기셔서 허락하시옵소서. 내녀는 단지 음녀일 뿐이며, 날마다 5백의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못된 짓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저를 버리면서 그의 청에 응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여인은 음녀가 아니니라. 그는 전생에 큰 공덕이 있어서 이미 3억의 부처님을 공양하였느니라. 어느 과거 세상에서나 내녀와 수만과 파담은 항상 자매간이었다. 내녀가 맏이요, 수만이 다음이요, 파담이 막내였다. 큰 성바지의 집에 태어나서 재보가 넉넉하였으므로 자매들은 5백의 비구니를 서로 스승 삼아 함께 공양하였으며, 음식을 차리고 의복을 지어서 가진 대로 모두가 다 그들을 공양하였다. 수명이 다될 적에 세 사람은 서원하였다.
‘우리는 후세에 부처님을 만나게 되고, 태로 말미암지 않고 저절로 화생(化生)하여 더럽고 흐린 것을 멀리 여의게 하소서.’
이제 본래 소원대로 되어서 나를 만나게 되었느니라. 옛날에 5백의 비구니를 공양하였다고는 하나 부호 가문에서 났으므로 언어가 방종하였다. 그 때에 비구니를 희롱하여 말하였다.
‘여러 도인들은 서로 껴안아 본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틀림없이 시집가고 싶을 것이나, 나의 공양을 받고서는 멋대로 할 수 없으리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 그 남은 재앙을 받는 것이다. 비록 경도(經道)를 강(講)한다 하더라도 허망하고 음탕하다는 비방을 당하는, 이 5백의 제자들은 그 때 힘을 아우르고 마음을 같이하다가 금생에도 서로가 따르게 되었느니라.
기역은 그 때에 가난한 집의 어린아이로서 내녀가 공양하는 것을 보고 아주 연모하고 좋아하면서도 재물이 없었으므로, 언제나 비구니들을 위하여 소제를 깨끗이 한 뒤에는 생각하였다.
‘저는 천하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도록 하옵소서.’
내녀는 그의 가난을 가엾이 여겼고, 게다가 그를 언제나 아들이라 부르면서 그 비구니들에게 질병이 있으면 늘 기역을 시켜 의사를 모셔 오게 하고 탕약을 짓게 하였으므로 모두는 말하였다.
‘너는 후세에 우리와 함께 이 복을 얻게 되리라.’
기역이 모셔 온 의사가 치료하면 모두가 나았으므로 이에 서원하였다.
‘저의 후신은 대의왕이 되어서 언제나 모든 사람 몸의 4대(大)의 병을 다스리고 치료하는 이들은 모두 낫게 하여지이다.’”
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잘못을 뉘우치면서 기일을 뒷날로 미루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 날 모든 비구들과 함께 내녀의 동산에 가셨으며, 자세히 그들을 위하여 본래 서원한 공덕을 말씀하시자, 세 여인은 경을 듣고 모두 다 깨우쳤고, 5백 제자들 모두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내녀경(奈女經)』에 나온다.
『경율이상』 31권(ABC, K1050 v30, p.1048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