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가요 상 시상식을 보면서 웃음만 났어요. 30대 이상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태진아가 뽑히더라고요. 난 30대지만, 태진아는 물론 당시 후보였던 대개의 트로트 가수를 전혀 좋아하지 않아요.”
방송을 위한 설정이라 해도 갤럽 같은 기관을 들먹이며 공인된 내용임을 자부하는 사회자의 얘기에는 화가 나기까지 하더라도 최경희씨의 얘기다. 김민기, 조용필의 향수를 그리워하지도,그렇다고 HOT나 GOD 세대도 아닌 그에게 함께 호흡해온 대중가수는 그만큼 흔치 않아 보인다.
실제로 최근 세종대 허행량 교수가 발표한 조사 보고서는 오늘날의 가요계 현실을 실감케 한다. 1992년부터 10년간 가요 차트 100위에 한번이라도 오른 가수나 그룹은 1154팀이었지만, 그 대부분의 가수 생명은 2년 안팎에 머물렀다.
가장 오랫동안 차트에 올랐던 가수는 이승철이었으며 김성호, 최용준, 소리새, 권인하 등 의외의 이름이 그 뒤를 잇고 있어 이채롭기도 하다.
가장 많은 1위를 기록했다는 신승훈과 김건모, 김종서 등 몇몇을 제외하면 안타깝게도 대게 21세기 한국 가요계의 주역인 가수들은 대부분 하루살이 삶을 산다.
상황이 이렇고 보니 반짝 하다 사라지는 가수가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노래 실력보다는 개인기에 주력하는 가수들이 넘쳐나고, 립싱크가 아닌 무대에는 선뜻 나서지 못하는 댄스그룹도 한둘이 아니다.
졸속으로 기획되는 컨필레이션 앨범 (뛰어난 곡만을 엄선 수록하는 편집 판 앨범)만 물량 공세를 해대는 음반 매장에서 30대가 귀 기울일 만한 가요찾기가 어디 쉽겠는가. 그래서일까. 최근 연이어 발표된 김종서, 이승환, 신승훈의 새 앨범은 모처럼 들을 만한 소리를 찾았다는 반가움부터 느끼게 한다.
자신만의 음악적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도 대중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온 이들은 한결같이 2년이 넘거나 그에 가까운 준비 기간을 거쳐 탄탄한 음악을 내놓은 것이다.
“후배 가수들에게 끊임없이 자극이 되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김종서의 이야기는 음악적으로 정체되거나 안주하지 않겠다는 그의 노력은 물론 자신의 연륜까지도 짐작케 한다. 지난해 11월 2년반 만에 발표한 <오딧세이>가 벌써 여덟 번째 정규 앨범이다.김종서 풍의 발라드를 기대하는 팬들을 위한 ‘절대사랑’부터 흥겨운 록 사운드는 물론 그만의 감수성이 묻어나는 편안한 리듬의 곡까지,수록 곡 모두를 직접 작사, 작곡, 프로듀싱한 그의 정성은 곡마다 흘러넘친다.
김종서는 물론 이승환, 신승훈 등 30대 후반의 나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이들의 새 앨범은 10년이 넘는 그들의 음악연륜을 응축시켜 장인정신으로 우려낸 작품들이다.
척박한 가요계 현실속에서도 이들은 상품으로서의 대중성은 물론 작품으로서의 대중성은 물론 작품으로서의 음악성까지 함께 포획하는 데 아쉬움이 없어 보인다.
이승환은 아예 두 장의 음반을 묶어 냈다.지난 12월 발표한 <에그>는 2년 만에 내놓은 7집 앨범이다. 그만의 장기인 애절한 발라드에서 트로트 느낌이 나는 가요까지 한데 아울렀는가 하면, 다른 한 장의 음반에선 그의 이미지를 전복시키듯 하고 싶다던 록 음악을 즐겁게 부른다.“어른들이 늘 말씀하시길/ 참고 살아라/ 사회란 그런 것” 이라는 반어적 가사처럼 사랑과 이별에만 천착하는 노래 사이에서 빛을 내는 비판적 시선도 들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전한다.
“똑같은 발라드만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죠. 저 역시 변화에 필요 이상 신경 쓰일 때도 있었고요. 하지만 진정한 내 음악의 색을 내는 건 나 자신이잖아요. 제 안에서 깊어지고 발전하는 음악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 1월 8집 <더 신승훈>을 내놓은 신승훈은‘30대 후반의 변화’를 묻는 질문에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김종서, 이승환과 마찬가지로‘신승훈 풍 발라드’가 따로 느껴질 정도로 고유한 음악을 선보여온, 그의 새 앨범은 기존의 이미지를 크게 흔들어 놓지는 않았다. 그의 생명을 유지 시켜온 팬들의 기대인 동시에 그만이 가지는 음악의 뿌리와 닿아 있기 때문이다.‘비상’의 노랫말처럼 유행을 쫓으며 살기보다 “나의 작은 노래로 세상을 말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