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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대출기간이 오늘로 다했습니다. 아마 도배, 초장문 둘 중에 하나가 될 것 같네요.
태사자 자의
-무용담의 대가.
호랑이 때려잡은 일로 유명해진 손례등과는 스케일의 크기가 다릅니다. 그가 손책을 따라 강동을 평정할 때 어떤 사람이 손책에게 욕을 퍼부었는데,-아마 엄백호일지도.-그 사람이 누각 기둥에 손을 얹은 것을 보고 활을 쏘아 손을 꿰뚫어 놓습니다. 지켜보던 장졸들이 모두 탄성을 내질르는 것으로 보답합니다.
또한 주군인 손책과 신정(神停)에서 벌인 백병전은 삼국지 백미중에 하나이며, 일찍히 공융이 위급에 처해있을 때 구함을 받고자 단신으로 수만의 무리를 뚫고 유비에게 지원을 요청했었습니다. 이런 굵직한 사건들로 전국적인 명사가 된 태사자에게 조조가 편지를 써보냅니다. 말로 적은 것은 아니고 상자를 봉해 그 안에 당귀를 넣어두었는데, 당귀는 승검초라는 풀의 뿌리로 한약재로 쓰입니다. 이른바 손가의 대들보라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강동이 평정된 후 유표의 조카 유반이 용맹을 믿고 서쪽을 소란스럽게 하자 태사자를 보냈는데, 태사자가 죽는 206년까지 죽은 듯 얌전했다고 합니다. (유반은 이후 황충의 추천으로 유비에게 쓰여집니다.)
*3년만 더 살았더라면, 조조는 주유와 태사자를 상대로 전쟁을 하게 되었을겁니다. 격으로 놓고보면 관우와 장비를 동시에 상대하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감녕 흥패
-사람의 혼을 빼놓는 대가.
감녕은 익주 출신이었는데, 유언과 유장이 다스리던 때에 워낙 그 지방에 환란이 많아 통치가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건달들을 이끌고 삼강을 유람하며 관리를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지내며 살았습니다. 그 악명이 너무 높아 깃발에 달아둔 방울소리만으로 사람들이 오금을 저립니다.
손권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오랜 신하들과 동등한 대우를 하자 감녕이 바로 들이대는데, 그것이 바로 유장부터 황조까지 유세하던 땅을 겪어보면서 느낀 점에 대한 진술입니다. 이 서방 정벌론에 장소가 즉석에서 반대하자 그 따위로 해서 소하를 따라갈 수 있겠느냐! 고 비아냥거립니다. 말로 끝내지 않고 서방정벌의 첫시작인 황조토벌에서 황조를 포로로 잡아옵니다.
합비전에서 조조와 손권이 대치하고 있을 때에 장료의 선전으로 기세가 꺽여있자 자신의 유격부대를 인솔하여 오밤중에 적진을 그대로 훓고 지나가는데 기습에 너무 놀라 감녕은 잡히지 않고 유유히 돌아옵니다.
장흠 공혁
-자잘한 조무래기가 아니다.
손책이 강동을 건너기 전에 합류하여 강동평정의 모든 전투와 반란진압에 나섰으며 합비전투에서 장료를 상대로 선전하여 탕구장군 겸 유수독에 이른 입지전적의 무인입니다. 뒤에는 중앙으로 돌아가 소송의 처리도 맡아보았습니다.
그의 집을 방문한 손권은 그가 너무 검소하게 살아 가산을 모조리 바꾸고 보태어 주었는데, 이런 신임때문에 서성조차도 자기 본분대로 일을 처리해놓고 뒤탈이 날까 걱정합니다. 조조가 유수로 진군해왔을 때 여몽과 함께 군의 도독이 되었는데 그 아래 있던 서성이 매우 두려워했으나 장흠은 그의 잘한 일을 매번 칭찬하여 의구심을 없애줍니다. 관우를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병사합니다.
*병력를 분화시켜서 장수마다 부대을 할애한 오나라의 방식으로 볼 때 일찍부터 1만의 군대를 이끌고 곳곳마다 참여하여 도독을 맡았던 것은 그가 오나라 최정예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주태 유평
-오주(吳主)의 자룡.
장흠과 함께 임관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로, 손권이 그를 좋아하여 형에게 자기사람으로 달라고 청하였는데 산월을 토벌하러 들어갔을 적에 손권이 너무 만용을 부린 나머지 몸이 위급하게 되자 주태가 제 몸으로 보호하여 손권을 살려냅니다. 온 몸이 모두 간덩이로 구나... 라 했던 현덕의 자룡에게 비할 강맹한 무인입니다. 죽을만큼 베이고 살아납니다.
훗날 그가 평로장군이 되어 유수독이 되었을 때 주연과 서성이 주태의 수하였으나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손권이 이 때문에 유수에 나와 주태를 위해 크게 연회를 베풀고 몸에 새긴 상처들을 하나하나 묻습니다. 또한 그가 사용하던 덮개(옷인지 우산인지)를 하사하는데 이때부터 서성등이 비로소 복종합니다. 손권이 관우를 쳐부수자 주태를 한중태수 겸 분위장군으로 삼고 능양후로 봉하는데 그 이전에 무장으로 제후가 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촉을 취하지는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서성 문향
-조비조비조비조비조비....
예주 낭야군 거현 출신이나 전란으로 오군으로 옮겨왔고, 용맹으로 알려져 손권이 그를 별부사마로 삼아 병사 500을 주고 시상현의 장을 맡겨 황조에게 맞서도록 합니다. 황조의 아들이 듣도보도 못한 무장이 제 앞에 나타나자 군대를 이끌고 왔는데, 서성은 병사 1천을 사상입히고 성문을 열고 일제히 지쳐들어가 괴멸시킵니다. 이 뒤로 감히 덤비지 못합니다.
서성이 크게 활약한 것은 위문제가 십수만 대군을 이끌고 온 226년의 일인데, 기병의 기동성에 주목하여 건업을 따라 벽을 쌓고 울타리를 세워 마치 장성을 쌓아둔 것처럼 하여, 이걸 본 조비는 "기병대가 천개에 이른들 소용이 없구나." 한탄하며 그대로 물러가버립니다. 직접 창칼을 맞대지 않았으나 적은 오나라 군대로 강성한 위군을 무혈로 격퇴시킨 전략이라 할 것입니다.
이보다 앞서 조비에 의해 손권이 번왕으로 봉해지자 군신들에게 개탄하며
"우리가 몸을 떨치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허와 낙양을 겸병하고 파와 촉을 삼키지 못하여 오히려 우리 군주에게 맹약을 맺도록 하였으니 치욕스럽지 않소!"
그대로 눈물을 쏟아냈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정봉 승연
-손침 이 호로시키야!
정봉은 어린 시절부터 군관이 되어 감녕, 육손, 반장의 수하로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그가 주목받은 것은 강동의 1,2세대 장수들이 소멸한 손량의 재위시절로 이때 관군장군이 되고 도정후로 봉해집니다.
제갈각이 위나라를 정벌하러 갔을 때 수하 3천을 이끌고 요혜지를 먼저 선점하여 전선의 위군을 붕괴시키는 공을 세웠으며, 문흠이 투항하려 하자 손준을 수행하여 적의 추격병을 격퇴합니다. 그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선봉장으로서 활약했습니다.
손휴가 제위에 오르자 장포와 논의하여 손침을 주살하려 했는데 장포는,
"정봉은 비록 관리처럼 글을 쓸 수는 없지만 계략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므로 큰일에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라 하며 추천합니다. 정봉은 연회에 손침을 초청하여 홀로 남겨진 때에 그를 죽이자는 계책을 세웠고, 마침내 손침을 죽입니다. 이후 대장군으로 승진하고 가절을 받고 서주목을 겸합니다. 손호가 제위에 오르자 우대사마 좌군사가 되었으나 신분이 고귀해지고 공로가 더해지자 교만해져 그가 죽자 대신들의 탄핵으로 가족들이 수도에서 추방됩니다.
*오나라 말기의 대장을 손꼽으면 서쪽(형주)에 육항, 동쪽(양주)에 정봉입니다. 그러나 명백히 말해 그 이전의 장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추가
주연 의봉
-수성의 명장.
그의 본래 이름은 시연입니다. 그런데 주치가 손책에게 부탁하여 양자로 들여줄 것 요청합니다. 주치는 강동의 개국공신중에서도 최고 원로에 속했으므로 그의 후계자인 주연은 일찍부터 손권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손권은 친분과 더불어 그의 재주도 남다르다 여겨 젊은 나이부터 부대를 맡겨주었는데, 가장 크게 활약한 것이 위문제 조비가 형주로 쳐들어온 때입니다. 조진, 장합, 하후상이 각기 대군을 이끌고 강릉성을 포위하여 1년여를 공격했지만 결국은 낙성에 실패하고 군사를 물렸습니다. 이때 주연이 이끈 군대는 고작 5천이었고, 손권의 지원군이 포위망을 깨뜨리지 못해 식량이 바닥나고 있던 실정이었습니다.
말년에 그는 병석에 누워 손권을 애태웠는데 차도없이 죽습니다. 정사의 이야기로는 질병이 있을 때 손권이 마음을 기울인 점에서는 여몽과 능통이 가장 두터웠고 주연이 그 다음이었다고 합니다.
능통 공적
-사람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말라.
그는 15세에 이미 명성을 얻어 죽은 아버지의 부대를 물려받습니다. 산월을 토벌하는 전투에 참여했을 때 그의 상장이 교만하고 예를 범하는 일이 잦아 능통과 척을 졌었는데, 번번이 능조를 욕하였습니다. 능통이 참다못해 그를 칼로 찔러 죽였으나 공으로 과를 씻기 위해 직접 병졸처럼 싸워 승리를 얻어냅니다.
가장 대담한 전투는 합비전투입니다. 주장(主將)인 손권이 서투르게 앞서 나갔다 장료의 기습에 매우 위태로워 졌는데 이때 능통이 부대를 인솔하여 손권이 강을 건너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었으므로 겨우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로 그의 부대는 모두 전멸하였으나 다행히 그는 목숨을 건집니다.
그에 대한 기술에는 멋있는 구절이 여럿 있는데,
"비록 그는 군대 안에 있었지만 현명한 자를 가까이하고 선비와 사귀었으며,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도의를 중시하여 국사다운 풍모가 있었다."
"능통은 평소 유능한 인물들을 아꼈고, 그러한 인물들도 그를 흠모했다."
"고향 현을 지나게 되었을 때, 절의 문으로 걸어 들어가 관리들이 판 세 개를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고 공손하게 예절을 다하였다."
"어떤 사람이 능통과 같은 군의 성섬을 손권에게 천거하면서, 그의 기개가 장대함은 능통을 넘는 점이 있다고 했다.
손권은 이렇게 말했다. 능통과 같을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
"능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손권의 그들에 대한 총애는 자기 아들들과 똑같았다. 빈객들이 알현할 때, 그는 두 아이를 불러 빈객들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내 호랑이 새끼요..."
능통은 49세에 병사합니다.
*능통의 안타까운 점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효를 다하지 못했고, 한창의 나이에 죽어 충의도 다 내비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태사자에 비해서는 장수했으나 그의 재량이 만개하지 못한 것은 마찮가지입니다.
첫댓글 조조가 태사자에게 보낸 당귀(當歸)에는 아마도 "나의 진영에 귀의하는 게 어떻겠소?"라는 중의적인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게 아닐까합니다. 천하의 명사기도 했고 강동 출신이 아닌 북방 사람이기에 조조 역시 그를 자기 편으로 회유해 볼 욕심이 생겼겠죠. 태사자의 인품을 고려해서 구구절절한 편지 대신 당귀라는 상징물로 대신한 조조의 처사 역시 참 쿨하구요. 태사자는 다른 오나라 장수들과 달리 유요, 사섭같은 당대의 군웅들과 함께 입전되어 있는데요, 천하 제일의 협객으로 그의 열전 내용도 오나라에 귀의하기 전의 무용담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오나라에서 오래 활약하지 못하고 단명했던 점때문에 인물의 성격상 따로 분류된
듯 합니다. 당시 그의 행적들은 춘추전국시대 수많은 사람들의 무용담에 오르던 여러 협객들의 고사를 많이 떠오르게 하며 단순한 무장 이상의 역사적 비중을 지닌 인물이죠. 장흠의 경우는 워낙에 수전에 능했기에 오나라에서 중임되었으며 다소 건달 기질이 넘치는 오나라 무장들 중에서(감녕, 반장이 대표적...) 참 신사적인 풍모를 풍기는 대인배였죠. 오나라 무장들은 위나 촉처럼 딱 이렇다할 임팩트는 적으면서도 다들 뚜렷한 개성이 넘친다는 점이 특색인데요, 오나라의 구조적 특징상 이들은 스스로의 단독 부대를 꾸리며 전선에서 활약했기에 그런 점이 더욱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상관의 통제하에 철저하게 움직이는 FM 군인보다
실력을 바탕으로 이리저리 고용된 용병 군인들이 영화에서 봐도 더욱 개성있는 괴짜들로 묘사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봐도 좋겠네요.
허슬님 말씀처럼 본래 함에 봉하는 물건의 경우 그 사물의 이름에 쓰인 한문으로 내용을 전달합니다. 당귀의 귀가 귀의하다의 귀와 한문이 같지요. 저는 본래 의도와 다르게 인물형에 맞게 해석해 적었습니다.
첫번째 태사자의 일화에서 적장의 손을 맞춘 것은 엄백호와 싸울 때는 확실하지만 엄백호는 아니였던걸로 기억합니다. 집에 있는 황석영의 삼국지 찾아보니 그냥 엄백호의 부하장수라고만 나오는군요...아무튼 태사자는 정말 용맹하고 신의 있는 남자다운 장수였던것 같습니다. 소패왕 손책과의 일화, 북해에서의 일화 등을 볼 때 용맹으로는 관우 장비에 버금가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합니다. 정봉은 좋은 장수였지만 한나라의 대장군으로 군의 전권을 잡고 있을 장수는 아니였죠... 군의 일부를 맡고 선봉을 맞아 싸우는데에는 뛰어난 장수이지만 대군을 이끌고 한군의 장으로서는 부족한 장수였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촉의 요화와 비슷한 장수가 아닐까싶네요.
정봉은 삼국연의에서 너무 빨리 출연하는 바람에 요화와 비스무레한 이미지가 되버렸는데요 실제 그는 연의에서 단짝 친구로 나오는 서성보다도 한창 후배의 장수입니다. 연의에서는 적벽대전부터 나오는데 그때로 나이를 고증해보면 10대 후반 무렵이죠. 오나라에 10대때부터 활약한 장수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나 정봉전을 봐도 이전 시기의 활약에 대한 언급이 적고 오나라 후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니 연의에서 정봉을 서성과 나란히 언급하는 건 다소 핀트가 안맞습니다. 뭐 시기를 잘 타서 크게 출세했고 그 출세 때문에 결국 자손들이 몰락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오나라 후반기에 군권을 장악했던 인물이죠. 이전 오나라의 도독
들과 비교해보면 국량이나 재주가 조금 부족한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많이 과소평가된 인물은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주 활약 무대가 너무 후반기다보니...
실제로 아흔살까지 살아 오나라 멸망 10년 전까지 수명을 유지했던 장수가 있긴 하죠.
연의에서 서성과 정봉이 세트로 나와서 그렇지 사실 서성과 정봉은 아예 연배가 다른 장수이죠...저도 연의만 봤을 때는 같은 연배인 줄 알았는데 삼국지 게임을 하면서 출생연도를 보고 정봉이 한참 뒷 연배라는 걸 알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제가 정봉을 요화에 비교한 것은 얇고 길게 가서 그런게 아니라 총대장의 명령에 따르는 한군의 장수나 선봉으로는 훌륭하지만 전군의 장수, 한나라의 대장군으로는 능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삼국시대 후기에 촉과 오의 장수 부족 덕분에 자신의 능력보다는 높은 자리에 오른 점 때문에 비교했습니다.
오나라에서 장수한 인물로 여대 말고 또 누가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오나라 멸망 10년전까지면 270년까지 산 셈인데...
정봉이랑 여대를 제가 멋대로 합쳤었네요. 답변해드릴려고 찾다보니까 정봉의 사망연도아 여대의 나이를 섞어서 가상인물을 만든 거라는 생각이 확 왔습니다. -_-'' 죄송합니다. 정확히 알릴려고 쓰는 글인데 헛소리를 썼네요.
아, 아닙니다. 헷갈릴 수도 있죠...^^;
감녕은 정말 소규모 전투에선 절대 지지 않을듯 일화중 가장 재밌습니다.. 정찰나온 손견을 오의 정찰병인줄 알고 죽였다는 설이나.. 황조를 추격해온 능조,능통,여몽을 상대로 싸워 능조를 죽인고 남은 두장수가 후퇴한 일이나.. 합비에서 장료의 100기병에 기습을 당하자 100보병으로 위의 명마100기를 약탈한 일화.. 관우는 무신 감녕은 투신..
손견을 감녕이 죽였다는 설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손견이 죽은 해(193년)에 감녕은 유언의 부하로 서촉에 있었으며, 194년 유언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유장이 뒤를 잇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해서 형주로 달아났다는 기록이 유언전 주석에 있죠. 그 주석에 나온 감녕이란 인물의 행적을 따져보면 우리가 알고있는 감녕이 확실합니다. 즉 손견 사망시 서촉에 있었던 감녕이 그를 쏘아 죽일 순 없는 노릇이죠. 손견전의 기록에도 황조의 부하들에게 저격당해 죽은 것으로 나올 뿐입니다.
여몽에대해서도 좀 써주세요
근데 얘네들도 오호대장군 급은 아니지 않나요?? 무용실력등등이...물론 오나라에서의 지휘는 막강했지만......
촉한은 소수정예고 오나라는 평준화라는 인식이 있는데, 대체로 소설에서 생긴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촉이 사람들중 핵심전력들은 유비가 개인적으로 거둔 인맥이고 오랜시간 경영하면서 유비에게 쓰인 사람들이라 몇명에게 집중적으로 공적이 몰려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소설의 가공을 거치면서 심화된거죠. 물론 관우와 장비가 당대의 으뜸가는 용맹으로 유명했지만, 관우가 안량의 목을 따내기 이전부터 태사자의 명성은 전국에 드높았습니다. 진수의 평에는 조운과 황충등이 옛적 관영과 하후영의 무리와 같다고 적었는데, 주태나 감녕등도 같은 범주의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