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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철이요?”
“맞다, 백승철. 그런데 그 선수, 왜 갑자기 사라졌죠?”
K리그 팬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내용이다. 275만 명의 총관중으로 경기당 평균 1만 5천여 명을 끌어 모았던 1998년 K리그. 축구팬들에게 가장 짜릿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시즌이다. 수많은 명승부가 쏟아져 나왔고 이동국, 안정환, 고종수의 맹활약과 그 뒤를 따르는 정광민, 박성배 그리고 포항의 백승철이 있었다. 백승철은 이동국, 안정환과 함께 1998년 신인이다. 1998-99년 시즌 56경기(32경기 교체)에 출전해 20골과 4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최문식, 고정운, 자심, 박태하 등 내로라하는 공격형 미드필더와의 경쟁에서 거둔 성과이기에 더욱 값지다.
“그동안 내가 봤던 선수 가운데 발목 힘이 가장 강한 선수였다. 그리고 골결정력도 대단히 뛰어났다. ” 당시 포항 지휘봉을 잡고 있었던 박성화 전 청소년대표팀 감독의 말이다.
백승철, 그는 일찌감치 프로축구판을 떠나 현재 인천 운봉공고 코치로 일하고 있다. 11월의 첫날 운봉공고 뒤뜰의 낡은 숙소에서 그를 만났다. 오전 수업이 끝난 축구부 아이들이 인터뷰를 하고 있는 그를 창 밖에서 힐끗힐끗 쳐다보더니 ‘오~’ 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 애들은 제가 누군지 잘 몰라요. 그래서 신입생들에겐 1998년 울산과의 플레이오프 1차전 테이프를 보여주죠. 그러면 절 보고 지금처럼 ‘오~’하면서 놀리곤 합니다. 하하.”
플레이오프 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게 포항과 울산의 1998년 플레이오프 1,2차전이다. 경기 막판 서로 골을 주고받으며 숨 막히는 승부가 펼쳐지던 1차전 포항의 홈경기. 종료 직전 유럽축구에서나 볼 수 있던 대포알 중거리포가 터졌다. 백승철의 슈팅이었다. 극적인 3-2 승리를 일궈낸 포항은 2차전 울산 원정에 나섰다. 포항은 후반 중반 울산 김현석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나 박태하의 동점골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며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눈앞에 뒀다. 그러나 종료 직전 세트피스 상황에서 골문을 비우고 공격에 나선 울산 골키퍼 김병지에게 믿을 수 없는 헤딩 결승골을 내주고 승부차기에 들어가 1-4로 졌다. 이때가 대부분의 축구팬이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이다.
당신을 기억하는 팬들이 아직도 많다. 은퇴 후 인터뷰가 종종 있었나?
대한축구협회에서 한번 온 적이 있고, 이번이 두 번째다.
박성화 감독이 당신의 발목 힘에 대해 많은 칭찬을 하던데 감독님은 영남대학교에 다니던 무명선수인 나를 세상에 알려주신 분이다. 그분을 봐서라도 끝까지 재활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됐다.
첫 시즌에 12골을 기록했다. 교체출전이 많았는데 대단한 기록이다.
처음엔 워낙 쟁쟁한 선배들이 많아서 주전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야, 너 언제 골 넣을 거냐?” 라고 농담 삼아 얘기하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골을 넣었던 것은 후반기부터였다. 감독님이 나를 중용하기 시작했고 출전시간도 많아졌다.
팬들은 1998년 플레이오프에서 나온 중거리 슈팅으로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
1998년은 내게 꿈 같은 해였다. 정말 즐겁게 축구를 했다. 약간 아웃사이드로 발등에 걸린 슈팅이었다. 잊지 못할 순간이다. 스포츠신문 1면에도 나오고 정신없었다. 그때 부모님이 서울 중곡동에서 조그만 식당을 하고 있었는데 나 때문에 장사가 꽤 잘 됐었다.
중거리 슈팅에 자신이 있었나?
고등학교 때 하프라인에서 슈팅을 하는 연습을 했다. 무릎이 아닌 다리 전체를 이용해서 차는 연습이었고 속도를 유지한 채 낮게 깔아 골문까지 가게 하는 슈팅훈련이었다. 슈팅력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부상은 언제 당했나.
1998년 포항 소속으로 활약할 때의 백승철(왼쪽).(사진 제공=포항 스틸러스) |
1999년이었다. 부천 SK와의 경기였는데 그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했다. 슈팅할 때 약간 땅을 차서 드롭성으로 들어간 골이었는데 경기가 끝나고 나서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대학교 때 인대가 살짝 늘어나 본 이후로는 부상이라는 것을 모르고 선수생활을 했기 때문에 왼쪽 무릎이 약간 뻐근한 감은 있었지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무릎이 퉁퉁 부어 있었다. 병원에 갔더니 반월판이 약간 찢어졌다고 하더라. 그리고 무릎에 찬 물을 뺐다. 의사가 3주에서 한 달 정도 무조건 쉬라고 했다.
그런데 경기에 계속 투입됐다.
욕심이 화를 불렀다. 다쳐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한 일주일 쉬니까 괜찮은 것 같았고 팀도 후기리그 막판에 플레이오프 진출 경쟁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라 출전하게 됐다. 일주일 쉬고 8게임을 뛰었다. 시즌이 끝나고 병원에 갔더니 반월판은 완전히 찢어졌고 십자인대와 무릎 전체가 모두 약해졌다고 하더라.
재활을 잘하면 어느 정도 치유되지 않나.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독일에 가서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재활만 했다. 그때 가장 미안했던 분은 부모님이다. 어머니가 식당에 오는 손님들이 왜 요즘은 내가 안 나오느냐고 계속 묻는다고 하더라.
재활할 수 없다는 것은 언제 알았나.
독일에 자비로 한번 더 재활하러 간 적이 있다. 그때 통역해 주는 분이 어느 날 갑자기 표정이 변하더라. 내가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운동하면 휠체어를 탈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담담했다. 그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일본에 가서 3개월 정도 재활을 한번 더 시도한 적이 있다. 테이핑 치료법이 유명하다고 해서. 일본에 있을 때는 괜찮아지는가 했는데 모두 소용없더라. 그 이후로 축구라는 운동 자체를 포기하고 매일 술만 마셨다.
운봉공고 코치는 언제부터 했나.
이제 4년째다. 여기 감독 선생님이 예전에 프로팀 스카우트로 계셨을 때 나를 데려가려고 했던 분이다. 코치 생활을 하면서 차근차근 지도자 수업을 쌓고 있다.
K리그에서 뛰고 있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프로에 있는 후배들 가운데 힘들어서 (축구)못하겠다고 불평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축구선수는 공을 찰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그 사실은 축구를 그만두고 나면 알 것이라고.
요즘 어린 후배들은 어떤가.
우리 때보다 개인기가 좋아졌다. 단지 정신력이 부족한 게 흠이다.
SPORTS2.0 제 24호(발행일 11월 6일) 기사
장지현 기자
첫댓글 장지현 기자면...그 espn 맨유경기 해설해주시는 분인가??ㅋㅋ통통하신분
스포츠 2.0 ㅎㅎㅎ
플옵에서 프리킥을 이어받고 한명 제치고 때린 중거리슛 난 아직도 잊지못해요 ㅠㅠㅠ
정말...;;; 아쉬운 선수.. 계속 성장 했으면 이동국 백승철 후덜덜 투톱을 보유할 수 있었는데..;; 좋은 코치 되시길!! 백승철선수!! 당신은 이미 제 마음속의 레전드입니다!!
정찬우 닮으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