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렸다는 정통성과, 스페인과 이탈리아 독일 프로축구에서 보지 못했던 박진감과 속도감으로 축구팬들의 혼을 쏙 빼고 있다. 프리미어리그 애찬론자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두가 축복받는 축구의 '파라다이스'로 그 곳을 상정하고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축구 종가'라는 자부심도 프리미어리그에 '절대선'의 권한을 부여할 순 없다. 어쩌면 더 밝고 화려할수록, 그 빛에 가려진 그늘은 더 짙어진다. 7, 8월의 강렬한 태양 때문에 그 무렵 만들어진 그늘은 더한 깊이를 가지듯 말이다.
얼마 전 영국 언론은 '쩐의 전쟁'을 방불케했던 2007년 여름 이적 시장을 결산했다. 영국의 회계법인 '딜로이트&투쉬'는 최근 '프리미어리그 20개 구단을 비롯해 잉글랜드 1∼4부 리그 팀들이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지불한 이적료를 모두 더해본 결과 작년(3억 파운드)보다 60% 넘게 증가한 5억 파운드를 돌파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정확한 몸값 총액은 5억 3100만 파운드(1조 113억원)였다. 이같은 통계를 세분화하면, 올 여름 가장 많은 돈을 쓴 구단은 박지성이 속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로 5100만 파운드(970억원)이고, 그 뒤를 리버풀(5000만 파운드·951억원) 토트넘(4000만파운드·761억원)이 이었다. 맨유의 이적료 총액은 잉글랜드 축구 전체의 10%에 달하고, 프리미어리그 12개 구단이 이적료를 2000만 파운드 넘게 썼다는 분석도 나왔다. 또 이번 시즌 선수 평균 이적료는 400만 파운드(76억원)로 지난 시즌보다 50만 파운드 올랐다.
최고의 빅리그답게 돈을 쓰는 것도 통이 크다. 이같은 돈으로 스페인 국가대표 페르난도 토레스와 네덜란드 신성 라이언 바벨(이상 리버풀)을 데려왔고, 포르투갈의 '제2의 호나우두' 나니와 안데르손(이상 맨유)이 올 수 있었으며, 프랑스 미드필더 플로랑 말루다(첼시)의 영입이 가능했다.
'딜로이트&투쉬'는 지난 시즌에 비해 2억 파운드 이상 몸값 총액이 오른 것은, 해외 자본의 대거 유입에 따른 클럽간 경쟁과 기하급수적으로 오른 중계권료에 힙입은 바 크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같은 '돈의 잔치'로 프리미어리그의 성장과 팽창이 거론될 때, 몇몇 비판론자들은 그 이면을 직시하며 다른 해석도 내놓았다. 한 때 웨스트햄 감독까지 역임했던 트레버 브루킹 잉글랜드축구협회(FA) 축구발전 이사는 "5억 3100만 파운드의 이적료 총액 중 절반은 해외 클럽으로 들어갔다.
해외 선수를 데려오면서 잉글랜드 선수들이 각 클럽 라인업에 끼어드는 비율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지난해 프리미어리그 클럽 선발라인업의 약 40%가 잉글랜드 선수였다면, 올해는 3분의1(33%)로 줄어들 것같다"며 "지난해 독일월드컵을 보면, 우승했던 이탈리아는 세리에A 클럽의 선발 라인업의 70%를 자국 선수로 채웠다.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리그는 60% 정도의 비율로 자국 선수가 중용되고 있다. 클럽의 자국선수 비율이 줄어들면 선택할 수 있는 풀이 자연스레 좁아지고, 이는 국가대표팀 전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례로 지난달 11~12일 치러진 2007~2008시즌 프리미어리그 개막전 10경기에서 선발출전한 잉글랜드 선수들은 37%였다. 81명의 잉글랜드 선수들이 개막경기에 선발출전했는데, 이 수치는 15년 전 184명에 비하면 두 배 이상 줄어든 것이다. 최근 K리그에 외국인 공격수를 중용하는 풍조 때문에 한국인 킬러가 사라진다는 지적과 맥락이 비슷하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 언론 '인디펜던트'는 여름 이적 시장에 귀중하게 모셔온 선수들을 대신해 프리미어리그에서 소리 소문없이 클럽에서 빠져나가고 사라진 선수들을 조망했다. 매시즌 많은 선수들이 엄청난 몸값으로 환영받으며 입단하지만, 이들에게 자리를 내주면서 초라하게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게 있다는 지적이었다. 8월 이적시장에서도 수많은 선수들이 불확실한 미래를 안은 채 떠나갔다.
'인디펜던트'는 '지난 시즌 막판에 (1부에서 4부까지 프로리그를 기준으로) 천진난만한 어린 선수들부터 노쇄한 노장들까지 750명의 프로 선수들이 방출됐다. 이 리스트에는 전직 잉글랜드 대표를 지냈던 로비 파울러(32·리버풀→카디프), 테디 셰링엄(41·웨스트햄→콜체스터), 앤드루 콜(36·포츠머스→선덜랜드)도 포함돼 있다. 2002월드컵 당시 폴란드 수문장으로 한국과 맞섰던 예지 두덱(34)도 리버풀을 떠나 이번 시즌에는 스페인 레알마드리드의 벤치워머로 이동했다'며 뜨거웠던 이적 시장 뒤로 냉랭했던 방출 시장을 적시했다.
그래도 이름값 있는 노장이나 유망한 떡잎을 가진 어린 선수들은 한단계 낮은 리그 또는 클럽으로 옮겨가며 재도전할 기회라도 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선수협의회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방출된 750명의 선수 중 아직도 팀을 찾지 못한 프로선수가 196명에 이른다. 방출 선수 중 4분의1 가량이 직업을 잃을 처지에 놓였다'고 집계하며 '축구는 어린 선수들에게 꿈의 무대가 아니라 엄혹한 산업일 뿐이다'고 푸념했다.
프리미어리그만 보더라도 이번 시즌 이적시장에서 방출된 선수는 모두 87명이었지만 이 중 27명이 팀을 찾지 못하고 은퇴 기로에 서 있다. 이 중에는 10대 선수들이 갈 길을 찾지 못한 경우도 있어 꿈을 키워야 할 무렵의 선수들이 축구화를 벗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활발한 이적을 통해 팀을 쇄신하고, 또 그래야만 살아남는 게 승부의 세계다. 전력의 유지를 위해 일정 부분 방출되는 선수들은 불가피하다고 볼 수도 있다. 물의 흐름처럼 들고 나는 선수들 속에서 옥석을 가릴 수 있고, 팀에 맞는 최적의 조합을 꾸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냉엄한 시장의 원칙이 적용되는 잉글랜드에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선수들은 어디로 갈까. 그나마 잉글랜드는 프로리그가 1부에서 4부까지 운영되고 있어 프리미어리그에서 꿈을 키우다 여의치 않으면 2부(챔피언십)에서 다시 선수생활을 하면서 재도전할 수 있어 다행이다. 프리미어리그에서 방출된 선수는 대부분 같은 리그의 하위팀이나, 2부리그로 소속을 옮겨 뛸 수 있는 곳에서 진가를 높이는 데 주력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K리그는 어떠한가. 아직 하위리그 체제가 갖춰지지 못하면서 프로를 떠난 선수들은 곧장 은퇴를 생각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몇몇 프로선수들이 2부격인 내셔널리그로 옮겨가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또는 재도전을 노리지만 이는 일부에 국한돼 있다.
9월 현재 K리그에 등록한 선수는 모두 539명이다. 지난해 515명에 비해 조금 늘어난 데는 신인 선수 87명이 가세한 게 크다. 그러면서도 올 한 해 자유계약으로 풀리거나 임의탈퇴로 K리그를 떠난 선수는 48명이나 된다. 이중에는 이름이 좀 알려졌던 이성재(울산) 이상헌(인천) 등이 자유계약으로, 조세권(전남)이 임의탈퇴로 K리그를 떠났다. 소리없이 떠나는 이들은 어디로 가는지…. 한국에도 그들을 받아줄 튼실한 안전판이 생길 날은 언제일까 생각해본다
첫댓글 오광춘의 사커프리즘이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