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ife-2018년 4월 25일의 일기, 통일 이용소에서
“최, 최, 최...”
그렇게 성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 이름을 또 까먹은 것이다.
나와는 점촌초등학교 동기동창인데도 그랬다.
벌써 몇 번째 반복되는 건망증이다.
말이 동기동창이지, 사실은 초등학교 때 그 친구와 어울려 논 기억이 내게는 하나 없다.
내 나이 스물여섯일 때에 검찰수사관이 되어 서울에 터전을 잡고 난 이후로는, 내 고향땅 문경 점촌을 한참을 찾지 않았었다.
그랬기에 일부러 만나는 친구가 아니고는, 학창시절을 함께 했던 고향 친구들의 이름과 모습이 내 뇌리에서 하나둘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 그러한 처신이, 내 나이 50대 후반으로 접어들어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검찰에서 떠날 때까지 30여 년 이상을 계속됐으니, 이제는 동기동창 친구들의 대부분이 낯설어지고 말았다.
내 그 즈음에 고향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서울남부지방법원 소속의 집행관으로 일하면서, 시간적 여유도 생겼고, 또 돈도 좀 여유로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고향을 찾기 시작하면서, 이런 자리 저런 자리에서 그 친구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얼굴로 봐서는 낯이 익은데, 동기동창인 줄은 모르고 만났다.
딱 보기에 선배 같은 분위기여서, 깍듯한 존댓말로 대했다.
그렇게 두어 번 만났을 때의 일이다.
내 초등학교 중학교 동기동창인 권만식 친구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하는 말이 이랬다.
“가, 선배 아이라. 우리 초등학교 동기라. 최연호라고....”
그래서 내 그동안 선배로 알았던 그가, 초등학교 동기동창인 최연호 친구인 것을 알았다.
“하이고, 미안해. 내 너무 무심했었어. 앞으로는 안 까먹고 잘 기억할게.”
그렇게 사과를 하고, 새롭게 우정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때 알게 된 것이, 최연호 그 친구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만 마치고 나서는, 더 이상 진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대신에 고향땅 문경 점촌의 어느 이용소에서 이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그 덕에 이발 기술을 배워 ‘통일 이용소’라는 이름으로 이발관을 차려서, 한 평생 이발로 먹고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 이름을 안 까먹겠지 했다.
아니었다.
그때뿐이었다.
몇 달 뒤에 만나면, 또 까먹고 또 까먹고 했다.
“친구야! 이름 또 잊어 먹었다. 뭐꼬?”
그럴 때마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그렇게 그 이름을 다시 물어봐야 했다.
고마운 것은, 내 그렇게 이름을 까먹고 또 까먹고 해도, 그 친구는 전혀 섭섭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 이름을 안 까먹을까 궁리를 한 끝에, 내 ‘이거다!’하면서 생각해낸 것이 그 친구의 이발관에서 이발을 한 번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깊어지면, 그 이름을 안 까먹겠다싶었다.
그래서 지난해 겨울에 우리들 모교인 점촌초등학교가 자리 잡은 그 언덕길에서 시내 쪽으로 들어가는 내리막길 오른쪽 길가에 자리 잡은 그곳 ‘통일 이용소’를 들러 내 생전 처음으로 그 친구에게 내 머리를 맡겼다.
또 한 번 더 들르면 더 확실하게 그 이름을 기억하겠다싶어서, 이날 이발을 끝나고 난 뒤에, 이발 비용계산을 하면서, 다음에 한 번 더 할 비용 12,000원을 선금으로 미리 계산을 했었다.
엊그제인 2018년 4월 25일 오후 6시쯤의 일이었다.
서울 서초동 우리 법무사사무소 ‘작은 행복’의 일거리 하나를 들고 내 고향땅 문경의 문경등기소를 찾게 된 김에, 그 이발관을 찾았다.
선금으로 계산해놓은 그 이발을 할 작정에서였다.
그래서 차를 몰아가는데, 그 친구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최’라는 성만 기억이 나서, 그렇게 우물쭈물 그 성만 입에 올리고 있는데, 옆자리 아내가 ‘연호’라는 이름을 불러준 것이었다.
내 그동안 그 친구 이름을 까먹었다고 다시 알고 하는 과정에서, 아내는 그 이름을 딱 마음에 새겨놓은 것이었다.
‘최연호, 최연호, 최연호.’
이발관에 들어나는 그 잠깐 사이에 혹 또 잊어 먹을까봐, 그렇게 이름을 외우면서 그 이발관으로 들어섰다.
“최연호! 선금 준 이발 하러 왔다.”
내 그렇게 외치다시피 했다.
“좋아. 내 딱 기억하고 있어.”
최연호 친구의 응대가 그랬다.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그 모습이 참 고맙고 편했다.
슬슬 흥이 나고 있었다.
결국 몇 곡 노래로 이어지고 말았다.
누가 듣든 말든 그냥 불렀다.
내 쪼대로였다.
그러나 내 나름으로는 최연호 그 친구에게 좀 더 다가가고픈 마음에서 그리 노래를 부른 것이었다.
저녁나절, 통일 이용소에서의 해프닝이었다.
첫댓글 이발 하믄서 노래?-그래!^^잘한다!
기부이 좋흔께로 노래가 나오겠제-친구가 머리 실실 간지러주이-기부이 한창이다~비젼 잘한다!^^
최연호 친구가 알랑붕알도 잘까넹!^^
그기다 화답,-항구의 일번지-좌우지간 여러가지로 찍는다~
노래하며 이발하며 참으로 좋긴 좋구나 기분이 좋아서 노래가 나오겠지...
통일 리발관이라 이발하러 각야하는데... 다 빠지고 깍을머리가 없어 대머리는 반값에 리발가능한가 모르겠네..
최연호 리발사사장님이라 이억해두고 원섭이 이름팔아서 가까이 갈수도 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