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진실을 알고 나면 참 우습기도 하지
김옥균 등 개화파의 혁명인 갑신정변이 일어난 뒤 우리나라 첫 우표가 도안되어 일본 인쇄소에 주문이 들어간다. 당연히 우리 태극문양이 들어가고, 나라 이름 '대조선'이 들어갔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니 어쩌니 아무리 떠들어봐야 그건 다 헛소리고, 조선에는 인쇄술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근대인쇄술이 앞선 일본에 주문을 넣은 것이다. 금속활자 만들면 뭐하나, 고려시대에는 불경 몇 권 찍고 끝나고,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자들이 사서삼경이나 찍어내다가 치워버린 것을. 한글 발명하면 뭐하나, 갑오경장이 있던 1894년에서야 겨우 수구세력들을 물리치고 공용어로 쓰이는 것을.
정말로 웃긴 것은, 우리나라 국기가 조선을 대표하여 사용된 것이 1875년 2월 11일인데 중간에 중국 태극으로 바뀐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역관 오경석이 고종의 허락을 받아 조일수호조약이 이뤄지던 강화유수영에 내건 것이 1875년이다.
하지만 정세가 변해 청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속국 눈치보느라 슬그머니 4괘가 들어간 태극이 나왔다. 이게 조미조약 때 쓰이고, 박영효도 쓴다. 이게 일본, 미국, 프랑스, 영국으로도 전파되고, 지금도 기록이 남아 있다. 나름대로 청나라 눈치도 보고, 자주 정신도 드러낸 타협이다.
개화파들이 이처럼 태극기 제정에 앞장서는 사이 당시에도 척화비나 때려박고 청나라 힘 빌려 권력 자치하려던 역적 중 역적 민자영(고종 이재황의 부인) 등 수구세력들은 어떡하든 청나라에 붙어 비빌 궁리만 하였다. 개화파들은 청나라가 망해간다는 걸 다 알아 일본, 미국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이 성리학자들은 죽어도 중국만 믿으려 했다. 지금의 이재명, 문재인당처럼.
1884년 12월 4일,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이때 일본에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제작을 일본 인쇄소에 주문했다. 세계최초 금속활자는 어디 가고 하필이면 일본에 인쇄 주문을 넣은 것이다.
하지만 민자영 등 민씨 세력은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갑신정변을 뒤집어 엎고, 개화파들을 사흘만에 때려잡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그야 다시 청나라 속국이 됐지. 개화파 손을 잡았던 고종은 또 바보가 되고.
당시 청나라 앞잡이가 된 민비 민자영 일당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나? 시아버지 잡아가게 한 건 놔두고, 위에 있는 사진이 개화파들이 고종의 명을 받들어 일본에 제작 의뢰한 우표다. 그런데 이 우표가 조선에 도착할 때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아는가? 바로 아래 사진이다.
위 두 사진에서 어떤 차이가 보이나?
뭐 좀 이상하지 않나? 저게 무슨 태극이야 싶을 것이다.
그렇다. 개화파는 우리 태극을 그려 넣었고, 민씨 일당 수구세력들은 유교 태극을 그려넣었다. 민자영을 따르는 수구세력들이 바로 유교 성리학자들이고, 사대모화주의자들이다. 이 사람들이 명나라나 청나라 사자가 오면 머리 찧으며 맞이하던 영은문파고, 조선을 개혁하자던 개화파들이 독립문파다.
이게 오경석이 조일수호조약 때 처음으로 쓴 최초의 태극기다.
이 태극과 저 우표 속의 유교 태극을 보자.
이게 유교 태극이다.
뭔 소린가 싶은 사람들이 99.9%일 줄 안다. 그렇다. 태극은 중국 것이 아니다. 신라, 백제에서 먼저 나온 것이다. 태양의 황도를 그린 문양이고, 24절기 모양 따라 ~ 이렇게 굽은 것이다.
한참 뒤에 중국에서 비슷한 문양이 나오지만, 그건 어안이라는 점 두 개가 찍힌 도교 태극이고, 이건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전혀 다른 그림이다. 당시 실제 발행된 우표(오른쪽)에 있는 그림이 바로 유교에서 말하는 태극이다. 도교 태극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중국은 도교가 아닌 유교가 더 높고, 조선 수구세력들도 다 유교 편이니까.
그러니 제발이지 대한민국 태극기의 태극이 주역에서 온 것이라는 망언 좀 하지 말라. 주역은 이런 태극을 쓴 적이 없다. 당황스러우면 지금이라도 좀 찾아보든지.
* 그런데 왜 독립문 태극기에는 점이 찍혔는가.
나중에 갑오개혁으로 다시 한 번 개화파들이 재집권하면서 모든 것을 되돌려 놓았다. 공자 주자만 찾던 수구세력들을 몰아내고, 한글을 공용어로 정하고, 양력을 쓰고, 여러 가지 개혁안을 추진했다. 유교 태극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 태극이 다시 나타났다.
그러면서 청나라에서 벗어나 대한제국으로 우뚝 서자는 독립신문이 나오고, 이들이 사대모화주의자들이 굽실거리던 영은문을 때려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그런데 설계는 파리 개선문 따라 잘 되었는데, 이런 건축을 누가 해봤어야지, 결국 청나라 노동자인 쿨리들이 몰려들었는데, 이놈들이 아는 건 도교태극 밖에 없어서 그냥 본능적으로 중국인들이 신앙처럼 받드는 도교 태극인 줄 알고 무심코 점을 찍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안된다. 당시에는 워낙 높아서 눈에 잘 안보이니까 그랬다 치고, 지금은 사진 보면 도교 태극이 분명한데도 문화유산청이고 문화부고 아무도 관심이 없다. 아직도 민자영 귀신 따라다니는 사대모화주의자, 수구 세력, 셰셰 세력이 많아서 그렇다. 셰셰 놈들은 아무리 얘기해도 귓전으로 흘려듣더라구.
뭐 언젠가는 누군가는 고쳐주겠지. 난 힘들어 목청 안높일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