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원벽 金元璧 (1894 ~ 1928)】 "연희전문학교 3.1운동 학생단 시위 주도"
황해도 은율군(殷栗郡) 이도면(二道面) 별기리(別岐里)에서 아버지 김태석(金泰錫)과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모는 천주교 신자였고, 부친도 조모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여 황해도 안악군 교동교회 목사로서 시무했다.
1909년 기독교 북장로회에 입교하였으며, 황해도 재령에서 명신(明新)중학교 3년 과정을 마치고 1914년 서울로 와서 장로교에서 세운 경신학교 4학년으로 전학한 뒤 기독교청년회관(YMCA) 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에 들어가 졸업한 후 2년간 소학교 교사를 하다가 다시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하였다. 1919년 연희전문학교 3학년 졸업반이었을 때, 1월 27일 저녁 7시경 박희도가 경성부 관수동 144(현 종로구 관수동) 화교촌에 있는 중국요리점 대관원에서 서울의 각 전문학교 대표자 모임을 열자, 주익(朱翼)·윤화정(尹和鼎)·전수학교의 윤자영(尹滋瑛)·경성의학전문학교의 김형기(金炯璣)·보성법률학교의 강기덕(康基德)·공업전문학교의 주종의(朱鍾宜)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주익이 유럽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으며,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약소국들이 독립할 수 있다고 신문에 났으니 독립운동의 좋은 기회인데 어떤가 하고 독립운동 문제를 제기하여 논의하였다.
2월 3, 4일경 강기덕과 김형기가 방문하여 독립운동 결심을 말하며 기독교청년회 참여 의사를 타진하였고, 강기덕이 그 후 2, 3차례 더 방문하여 설득하자 2, 3일 숙고한 뒤에 독립운동에 참여할 결심을 했다.
2월 10일 월요일 세브란스병원 안 예배당에서 음악회가 있은 후 이갑성(李甲成)이 자신의 집으로 김원벽·배동석·김형기·이용설·한위건·윤자영 등 학생대표들을 불러 모았다. 이갑성은 학생들에게 독립운동 계획을 물었다. 또한 파리강화회의와 그곳에 파견된 한국인 대표에 관한 런던 타임즈 보도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2월 12일 수요일과 2월 14일 금요일에도 학생단 대표 모임이 세브란스병원 이갑성 사택에서 열려 학생단 독립운동 협의를 진행하였다.
학생 측의 「독립선언서」 는 그와 함께 강기덕·한위건·주익·윤자영·김형기가 상의하고, 특히 선언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주로 그와 강기덕·한위건·주익이 상의한 후 주익이 만들기로 했다. 주익의 선언서는 김원벽이 승동예배당의 홍병덕(洪秉德)에게 부탁하여 인쇄하여 배포하기로 했다. 그는 승동교회 면려회 회장이었다. 김원벽은 민족대표와 단일화 결정이 있은 후 선언서 원고를 태웠다고 했으나, 법정에서 증제 408호로서 인쇄된 학생단 선언서가 증거로서 채택되어 제시된 것으로 보아 학생단 선언서가 인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월 17, 18일경 청년회의 간사 박희도로부터 천도교·예수교 측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는데, 서로 연락 기관이 없으니 별도의 연락이 있기 전까지는 학생 측만의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학생단 독립운동을 계획하기 위해 2월 20일 인사동 승동교회에서 학생 대표들이 모였다.
학생단은 천도교와 예수교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추진한다는 소문을 듣고, 인사동 승동교회에 수시로 모여 운동 방략을 협의하였다. 김원벽이 박희도에게 갔더니 별도의 학생단 시위 계획을 만류하며, 하나의 운동에 두 가지 선언서가 있는 것은 우스운 일이므로 자기들의 계획에 학생 측도 합동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학생 측 대표자들에게 그 말을 전하며 의견을 구하였다. 학생단은 그것에 동의하여, 민족 대표 독립 선언과 별도의 독립 선언을 포기하고 운동의 일원화를 결정하였다. 전문학교 학생단의 제2회 독립운동은 3월 5일로 결행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그 결과를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2월 25일 민족 대표 독립 선언과 일원화 결정 이후 학생 측은 제2차 학생단 독립운동 협의를 위해 정동예배당의 이필주 목사 사무실에서 모였다. 이 자리에 주종의·최순택(崔淳鐸)·이용설·강기덕·한창환(韓昌桓)·윤자영·전성득·한위건 등과 함께 모였다. 여기서 3월 1일 탑골공원에는 가급적 중등학교 학생을 참가시키도록 하고, 다음에는 각 전문학교의 대표자가 주최하여 독립운동을 하며, 제2차 학생단 시위 일시는 3월 1일의 독립운동 상황을 보고 정할 것을 상의하였다. 학생단은 제2회, 제3회로 뒤에도 계속하여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주요한 간부는 뒤에 남겨 두고 계속해서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방법을 취하였다.
2월 26일경 정동예배당에서 그를 포함하여 공업전문학교의 김대우·전수학교의 김성득(金性得)·보성학교의 강기덕·의학전문학교의 이용설(李容卨)·전수학교의 윤자영 등이 모여 3월 1일 이후의 학생단에 의한 후속 독립운동에 대하여 상의하였다. 이날 모임에서 3월 1일의 독립운동과는 별도로 그 뒤에 학생만의 운동을 할 것을 결정하였다.
2월 28일에 승동예배당에 경성의학전문학교·전수학교·공업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보성상업법률학교·연희전문학교 그리고 중학 정도의 학교인 고등보통학교·경신학교·중앙학교·보성보통학교·배재보통학교·양정고등보통학교·선린상업학교·약학교·중동야학교·보급학관·여자고등보통학교·이화학교·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배화여자학교·정신여학교 등의 대표들이 모였다. 대표자의 성명은 경성의학전문학교 김형기·전수학교 김성득·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김문진(金文珍)·보성전문학교 강기덕·공업전문학교 김대우(金大羽)·연희전문학교 김원희(金元熙) 등이었다. 그 밖에 전수학교의 윤자영·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이용설(李容卨)은 책임을 져야 할 간부는 아니었지만 이 운동에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중등학교의 대표자들은 강기덕이 주로 담당해 접촉했는데 중앙학교의 장기욱(張基郁)·고등보통학교의 박쾌인(朴快仁)·경신학교의 강우열(康禹烈)은 대표자가 아니었으나 해당 학교의 운동을 이끌었다. 이날 모임에서 다시 각 전문학교의 대표자와 주목 받고 있는 사람은 3월 1일의 독립운동에 참가하지 않도록 할 것과 중등학교 학생 등이 폭력으로 나오지 않도록 주의할 것, 선언서를 될 수 있는 대로 다수의 사람들에게 배포하도록 할 것, 그리고 선언서는 강기덕·김문진 등이 중등학교의 학생으로 하여금 배포할 수 있게 준비할 것 등을 정하였다. 그 자리에 강기덕이 이갑성으로부터 선언서를 가져왔다. 선언서는 정동교회로 가져가서 각급 학교 대표들에게 배부되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독립 선언이 있었고, 전날 밤 갑자기 독립 선언 장소가 태화관으로 바뀌는 바람에 탑골공원의 학생, 시민들은 별도의 독립 선언식 후 시가행진에 나섰다.
3월 4일 각 학생 대표들은 배재고등보통학교 기숙사에 모여, 3월 5일의 독립 만세운동 계획을 재확인하고 오전 9시 남대문역(현 서울역) 광장으로 집결할 것을 정하였다. 3월 5일 남대문역 앞 시위에는 고종의 국장에 참가하고 귀가하기 위해 역으로 모인 일반 시민과 시내에서 참여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합류하여 군중 수가 수만 명에 달했다. 이날 시위는 강기덕과 함께 인력거를 타고 대열의 선두에서 지휘하였다.
오전 9시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이라 쓴 깃발을 들고 만세를 외치면서 수만 명이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고 있는 남대문역으로 나아갔다. 학생들은 독립을 고취하는 내용의 각종 인쇄물을 나누어 주었다. 시위대가 남대문 부근까지 진출하자 경찰대의 강력한 저지를 받았다. 이를 돌파하려 할 때 본정(本町)경찰서 응원대가 기습하여 강기덕과 다수의 인원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러나 경찰 저지선을 돌파한 일대는 남대문시장에서 조선은행 앞을 지나 종로 보신각으로 향하고, 남대문에서 대한문 앞, 무교동으로 진출한 일대와 보신각에서 합류하면서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였다.
3·1운동과 3·5 학생단 시위운동의 주도자로 붙잡혀 징역 2년을 받았으나 재판과정이 길어져서 실제 복역은 거의 3년이나 되어 1922년 1월에야 풀려났다. 이후 연희전문학교의 사무직원으로 2년간 재직하였다. 1923년 연희전문학교 제5회 졸업식이 끝난 후 동문회가 결성되었을 때 제1회 동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에는 언론인이 되어 시대일보사에서 2년 동안 일하는 한편 잡지 『신생활』발간에 참여하였다. 민족회사인 대광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또, 물산장려와 수출, 필수 소비품의 수입 사업을 위해 조합 형식의 기업을 설립하는 일에 최창선·민강·방규환·신장희 등과 함께 경영진으로 참여하였다.
대중 강연을 통해 「생존적 요구는 종교상 가치라」(안악읍예수교회, 『동아일보』 1921.12.10), 「인류 생존의 요구」(동창포교회 강습회, 『동아일보』 1921.12.16), 「시대의 변천과 여자활동」(안악여자청년회 강연, 『동아일보』 1921.12.19), 「우리의 사명」(학생계 속간기념강연회, 『동아일보』 1922.2.17), 「기독교의 진리와 현대교육」(예수교청년회연합회기념강연회, 『동아일보』 1922.4.22), 「현대와 기독교」(승동면려청년회강연회, 『동아일보』 1922.6.16), 「월야의 하몽」(중앙예배당강연회, 『동아일보』 1922.6.23), 「조선 청년의 급선무」(인천헐법청년회 납량강연, 『동아일보』 1922.8.9), 「현대문명과 인류의 행복」(상동예수교청년회 강연회, 『동아일보』 1923.4.3), 「생의 의의」(종교예배당 일요강연회, 『동아일보』 1923.10.7), 「페스탈로치 교육사업」(폐스탈로치 기념강연, 『동아일보』 1927.2.21) 등 기독교적 가치관과 청년 교육에 힘썼다.
1928년 병에 걸려 4월 9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시대일보 경영에 대한 일제 측 보고(1924. 9. 25) [판형1] |
김원벽 별세 보도(『동아일보』 1928. 4. 12)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