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현대아산이사회 회장 정몽헌(鄭夢憲, 1948.9.14~2003.8.4) 투신자살
대북송금 및 비자금 150억원 조성 의혹과 관련해 검찰의 조사를 받아오던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2003년 8월 4일 새벽 서울 상계동 현대사옥 12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투신 자살했다.
정 회장의 사무실에서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과 부인·자녀 앞으로 남긴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주기 바랍니다. 명예회장님께서 원했던 대로 모든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A4용지 4장짜리 유서가 발견됐다.
정 회장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故정주영 회장의 5남으로 연세대 국문과를 수석으로 입학한 후 1975년 11월 현대중공업 차장으로 현대그룹에 입사했다. 정 회장은 지난 1982년 현대전자를 만들었고, 같은 해 현대상선 비자금 사건으로 수감됐을 때는 사식을 거부해 아버지로부터 “역시 내 아들”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정 회장은 아버지의 신임을 바탕으로 1998년 형인 정몽구 회장과 함께 현대그룹 공동회장이 됐고, 금강산 관광을 주도하면서 유력한 후계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99년엔 반도체 빅딜로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정몽헌 회장의 전성기가 활짝 열리는 듯 했다.
그러나 현대계열사간의 세력다툼이었던 소위 ‘왕자의 난’을 치른 정 회장은 2000년 6월 현대아산 회장에 취임하면서 대북사업에만 전념했다. 당시 현대 비자금 150억원 의혹을 수사해 오던 대검 중수부가 그의 죽음 이틀 전인 8월 2일 정 회장을 검찰에 소환해 12시간 가량 조사를 한 것으로 밝혀지자 정 회장이 선친인 정주영 전 명예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대북사업과 관련, 국민적 평가가 엇갈리는 것에 대해 고민하다 이날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붉어졌다.
이 사건은 김대중 전 정권의 대북비밀송금 사건과 관련해 정경유착의 폐단에 대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98년] 박찬호, 미프로야구 내셔널리그 7월 투수부문 최우수투수로 선정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7월의 최우수투수로 뽑혔다. 미국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1998년 8월 4일 박찬호가 ‘이달의 투수(Pitcher of the month)’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박찬호는 1996년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지 2년 만에 메리저리그 특급투수로 공인받게 됐다.
박찬호는 7월중 6게임에 등판, 42와 2/3이닝을 던져 4승 무패, 방어율 1.05를 기록했으며 삼진 34개를 잡고 25개의 안타를 내줬다. 특히 최근 2경기는 각각 8이닝동안 2안타 1실점의 빼어난 호투를 했다. 박찬호는 지금껏 단 한번도 ‘이달의 선수’는 물론 ‘이주일의 선수’같은 개인상을 받지 못했다.
‘이달의 선수’는 메이저리그를 연중 취재하는 전국의 신문-방송 기자들이 투표로 결정한다. 한편 ‘7월의 최우수타자’엔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블라디미르 게레고가 뽑혔다. /조선
[1992년] 영화 <하얀 전쟁>, 도쿄국제영화제서 최우수작품상 최우수감독상 받음
하얀 전쟁 [White Badge] -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참전 병사들의 비극을 통하여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영화.
정지영이 감독하고 안성기, 이경영, 심혜진 등이 출연하였다. 안정효(安正孝)의 자전적인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병사들이 겪는 후유증을 통하여 전쟁의 참상을 되돌아보는 작품으로, 상연시간은 124분이다.
베트남에서 촬영한 최초의 한국영화이다. 당시로서는 국내 영화사상 최고액인 20억 원의 제작비를 들였다. 제29회 백상예술대상 남자연기상, 제38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남우주연상, 제31회 대종상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조연남우상·각색상, 제13회 청룡영화제 조연상·촬영상을 수상하고, 제5회 도쿄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감독상·도쿄시장상을 수상하였다.
[1986년] 독립기념관 화재
←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1986년 8월 5일 오전, 하늘에서 본 독립기념관 본관 기념당.
준공을 불과 11일 앞둔 1986년 8월 4일 밤 10시경 독립기념관 본관건물인 기념당 천장에서 불이나 천장부분을 태우고 5일 새벽1시30분쯤 불길이 잡혔다. 이 불로 독립기념관은 8월15일 개관이 무기한 연기됐다. 불이 번지는 순간을 본 목격자는 5차례의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기념당 중앙의 북서쪽 지붕에서 솟았다고 말했다.
조사결과 직접적인 화인은 전기배선공사의 부실로 인한 과전류였지만 준공을 1년이나 앞당기는 등의 졸속이 빚은 '인재'였다. 온 국민의 성금으로 지어졌던만큼 기념관의 화재는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화재사건으로 사무처장 등 관계자가 사퇴하고 화재에 직접 책임이 있는 6명이 구속 기소됐다. 독립기념관은 그 후 1987년 8월 15일 개관했다.
[1980년] 국보위, 사회정화책 발표
1980년 8월 4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를 발표하고 대대적인 군경 합동 검거작전에 돌입했다. 이는 사회정화책의 일환으로 각종 사회악을 단시일 내에 효과적으로 정화하고 사회개혁을 이루겠다는 명분 아래 진행되었다. 검거 대상은 폭력배와 사회풍토 문란사범으로서, 1981년 1월까지 4차에 걸쳐 6만 755명이 체포되었다. 피검거자들은 보안사령부 요원, 중앙정보부 요원, 검사, 경찰서장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A·B·C·D의 4등급으로 분류되었다. A급 3,252명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B급과 C급 3만 9,786명은 각각 4주 교육 후 6개월간 노역을 하고 2주 교육 후 훈방조치되었으며, D급 1만 7,717명은 경찰에서 훈방되었다. 이들의 교육을 담당한 곳은 군부대 내에 설치된 삼청교육대로, 헌병들이 연병장을 둘러싸고 감시하는 가운데 교육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교육 대상자 가운데는 억울하게 검거된 사람들이 많았으며, 교육 중 가혹행위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1988년 정기국회에서 이들 가혹행위에 대한 국정감사가 이루어졌다./브리태니커
[1977년] 세계최대 단일공장 남해화학 여수공장(7비) 완공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비료 공장은 1930년에 건설된 흥남의 질소 비료 공장이다. 이어 삼척과 순천(평남)에 석회 질소 공장, 인천에 과인산석회 공장, 인천에 과인산석회 공장, 목포에 염화칼륨 공장이 건설되어 국내 수요량을 충당하였다. 광복 후에는 수요량을 수입에 의존하다가 1961년 충주 비료 공장이, 1962년 나주에 호남 비료 공장이 건설되어 비료 공업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비료 공업의 발달은 1967년 나주에 호남 비료 공장이 건설되어 비료 공업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비료 공업의 발달은 1967년 울산에 영남 화학과 한국 비료가, 진해에 진해 화학이 건설되어 요소 비료와 복합 비료를 대량 생산 하면서부터 그 외에도 충주와 나주의 비료 공장이 확장되고, 동해(석회질소), 단양(석회질소), 부천(용성인비), 장항(용성인비)에 비료 공장이 건설되어 비료의 자급 기반이 마련되었다. 또 1977년에는 여천에 남해 화학이 건설되면서 우리나라는 비료 수출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공장은 단일공장으로서는 세계최대규모(요소33만톤, 복합비료70만톤)를 가지고 있어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비료의 과잉 생산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비료의 생산량은 1979년 390만톤으로 절정에 달했는데, 1980년에 나주 비료 공장, 1983년에는 충주 비료 공장을 차례로 폐쇄하여 그 생산량을 줄이고 수출 비율을 40%로 늘려 시설 과잉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화학 비료의 주원료는 나프타이므로 나프타를 생산하는 울산, 여천등 석유화학 중심지에 대규모의 비료 공장이 입지하고 있다.
[1964년] 월남파병안 국회 통과
1964년 8월 4일 이른바 월맹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이를 이유로 월맹에 보복을 선언하고 대월남전을 본격적으로 확대했다.
미국은 이보다 훨씬 전인 7월초에 한국에 대해서 월남전에 참여해 줄 것을 요구했다. 1965년 1월초부터 한·미·월 세나라가 한국군을 월남에 증파하는 문제를 협의한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1월 8일 국무회의는 공병과 수송부대, 자체방위병력 등 2천명을 월남에 증파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6월 키 월남수상이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1만5천명 규모의 한국전투부대를 월남에 파병해 주도록 요청했으며 한국정부는 7월 2일 해병1개 연대와 육군2개 연대를 월남에 파견하는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키로 결정했다.
이런 정부의 결정에 야당과 학생들은 반대 데모를 벌였고, 민중당 국회의원들은 7월 16일 일괄사퇴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투부대 파월동의안은 8월 13일 야당의원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파월육군전투부대(맹호부대)와 파월해병대(청룡부대)는 9월 25일부터 월남전선에 투입됐으며 정부는 10월 12일 서울 여의도에서 30만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대대적인 파월장병 환송식을 거행했다.
[1953년] 덜레스(Dulles, John Foster) 미국 국무장관 내한
한.미상호방위조약 - 미 국무부는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한국 정부의 북진 정책을 포기하도록 종용하면서 정전협정체결 및 수락 이후에도 미국은 미국과 필리핀, 미국과 일본, 앤저스(ANZUS)조약과 같은 상호방위조약 및 동맹조약을 한국과 체결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휴전 이전에 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앞세워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미국이 한국이 요구하고 있는 휴전이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공산군측이 방위조약체결로 휴전협상을 결렬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휴전회담에서 미국이 공산군측에 대하여 유리한 입장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휴전회담의 타결 가능성이 확실시되자, 정부는 종래의 휴전반대 태도를 바꾸어 휴전협정에 동의하되, 그 선행 조건으로 한미방위조약 체결은 물론, 한국군 증강을 위한 지원 및 소련의 침략행위에 대비하여 미 해군의 한국해역 봉쇄, 그리고 공중방위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 등을 요구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촉구하기 위한 압력조치의 하나로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 과정 이에 당황한 미국 정부는 1953년 6월 25일 미 대통령 특사로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를 급파하여 이 대통령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즉, “미국은 전후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경제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정부 당국은 구체적인 현안문제는 로버트슨 특사와 토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미간에는 “정전 후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며 미국은 한국에 장기적인 경제원조를 제공하되, 1단계로 2억 달러를 제공한다. 미국은 한국군의 20개 사단과 해.공군력을 증강시킨다”라고 합의하였다.
이에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인 1953년 8월 4일 조약 체결을 위하여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8명의 미 고위사절을 대동하고 내한, 한국 대표와 상호방위조약에 대한 초안을 검토하기 위한 회합을 가졌다. 1953년 8월 8일 합의를 이룬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는 중앙청에서 한미상호방위 조약 원안에 대해 가조인했다.
[1950년] 낙동강 방어선 구축
6.25사변 당시 북한공산군의 남진을 막아낸 낙동강일대의 방어전투. 북한 공산군의 남침 1개월이 되는 1950년 7월말, 공산군은 영덕ㆍ안동ㆍ상주ㆍ진주를 잇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지연작전을 펴는 가운데 8월초 낙동강선까지 물러나서 '부산교두보(釜山橋頭堡)'라고 불리는 동남부 일원으로 방어선을 축소하기로 하였다. 이 방어선은 동서 80㎞,남북 160㎞로, 서북 첨단의 왜관을 기점으로 하여 동해안의 영덕에 이르며, 서쪽은 낙동강 본류를 따라 남강과의 합류지점인 남지읍(南旨邑)에 이르고, 다시 함안 진동리(鎭東里)를 거쳐 진해만에 이르고 있었다. 이 방어선 안의 지역은 연합군의 보급기지인 부산으로부터 마산ㆍ대구 ㆍ영천ㆍ포항 등의 전방지역에 이르는 방사형(放射形)의 병참선이 발달되어 보급과 병력이동에 유리하였고 기동 예비대를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자유자재로 투입하여 효과적인 역습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즉, 최소의 전투력으로 최대의 방어효과를 거둘 수 있는 내선작전(內線作戰)의 이점을 살리기에 적합한 범위였다. 그러나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의 돌파에 대비하여 그 후방에 또 하나의 예비 방어선을 마련하였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명령에 따라서 미 8군 공병참모인 데이비드슨이 경상남북도 경계를 이루는 산맥과 밀양 북쪽의 유천(楡川)과 그 서쪽의 무안리(務安里)를 거쳐 마산 동쪽의 고지들로 이어지는 총길이 90㎞의 '데이비드선'을 구상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8월 3일까지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한 뒤, 8월 4일 새벽 낙동강 방어선으로부터 철수를 완료하였다. 이때부터 국군과 미군은 작전책임 구역을 분담, 국군은 왜관으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낙동강방어선의 북쪽을 맡고, 미군은 왜관으로부터 진해만에 이르는 서쪽을 맡아 전쟁 발발 이래 처음으로 어깨를 잇댄 연결전선을 형성하였다. 한편, 북한 공산군은 8월초까지 1개 전차사단과 9개 보병사단을 낙동강전선에 투입했으며, 또 다른 3개 보병사단이 뒤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낙동강전선의 공방전은 8월초에서 9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는데, 국군과 유엔군은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방어병력을 적시 적소에 집중하여 방어선을 고수하였다. 8월중 마산 방면에서는 북한 공산군 제 6사단의 공세를 미 제 25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된 킨(Kean) 특수임무부대가 선제 역습으로 저지하였고 창녕에서 남지사이에 형성된 '낙동강 돌출부'에서는 미 제24사단이 북한공산군 제 4사단의 공세를 막아냈으며, 대구 서남으로부터 동북쪽에 이르는 외곽전선에서는 국군 제 1사단과 미 제 1기병사단이 북한 공산군 수 개 사단의 공격을 차단하였다. 포항-기계(杞溪)-안강(安康)을 잇는 동부전선에서는 국군 제 1군단 예하의 제 3사단ㆍ수도사단이 일진일퇴의 격전을 치르며 북한공산군의 전선 돌파를 분쇄하였다. 또한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는 국군 제 1사단이 북한공산군의3개 사단을 저지하는 '다부동전투'를 벌였다. 특히 미공군은 8월 16일 B-29폭격기 98대로 왜관 전면의 공산군 지역에 960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이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9월에 들어서서도 북한공산군은 낙동강의 모든 전선에 걸쳐 맹렬한 공세를 취하였으며, 특히 영천일대에서는 북한공산군 제15사단이 국군의 전선을 뚫고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국군 제 8사단은 제 2군단 예하 부대의 지원을 받아 이를 섬멸함으로써 개전이래 가장 큰 전승을 기록하였다.
이렇게 하여 낙동강을 사이에 둔 1개월 반에 걸친 공방전은 결국 북한공산군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으며,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개시와 더불어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반격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북한공산군의 주력을 무찌르고 6.25사변 발발이래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는 발판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950년] 다부동 전투(~24일)
6.25 당시 낙동강방어전투 중의 하나. 1950년 8월 3일부터 시작된 북한 공산군의 낙동강 전선에서의 공격은 대구를 주목표로 하여 2개 사단의 병력으로 대구 서남쪽과 서북쪽을 위협하는한편, 왜관 북쪽에서 낙동강을 넘어온 1사단ㆍ13사단ㆍ45사단의 3개 사단은 8월 14일부터 대구 분지의 북쪽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수암산(秀巖山)ㆍ유학산(遊鶴山)ㆍ가산(架山)등의 고지를 공격하였다. 이지역의 방어를 맡고 있던 국군 제1사단은 험한 지세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전선을 고수하였다. 이때 다부동일대의 협곡에서는 일곱 차례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북한 공산군의 주력부대에 타격을 가하였다. 8월 24일을 넘어서면서 북한공산군의 공세는 누그러지기 시직하였으며,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대구의 북쪽과 서쪽에서 철통 같은 방어태세를 유지하였다. 1981년 정부는 유학산 기슭의 다부동에 전적비를 세워 국군 제 1사단의 전공을 길이 증언하게 하였다.
[1947년] 중앙방송국 프락치 사건
1947년 8월 4일 남로당계 방송국 직원 14명이 수도관구 경찰청에 의해 검거됐다. 이들은 중앙방송국을 적화선전도구로 삼으려다 발각된 것이다. 사건이 발표되자 시청자들도 그동안 중앙방송국의 방송내용이 이상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 우익인사의 방송이 중간에 자주 끊겼던 점, 소련 스티코프의 방송내용이 원문과 달랐던 점에 대해 시청자들은 그때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경찰조사결과 배후에는 남로당 서울시 당부 김원복과 문학가 동맹원 박설 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조선
[1944년] ‘안네의 일기’ 저자 안네 프랑크 가족 독일군에 체포
1944년 8월 4일 이른 아침 네덜란드 암스텔담시 프리센가 263번지,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차가 멈춰섰다. 밀고자의 정보에 따라 책장의 숨겨진 문 뒤에 방이 있는 것이 발각돼 오토 프랑크 등 유태인 두 가족 8명과 은신 생할을 도와줬던 네덜란드인 두명이 연행됐다.
프랑크 일가 4명은 9월 6일 다른 유태인 1015명과 함께 화물차에 실려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 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즉각 선별 작업이 벌어져 15세 미만 어린이와 노인 등 549명이 당일 가스실에서 학살됐고, 나머지는 남녀별로 수용됐다. 아버지 오토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남았고, 안네와 언니 마고 등은 인근 인종절멸수용소를 거쳐 독일의 베르겐 벨젠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베르겐 벨젠은 극히 불결한 상태여서 티푸스가 만연해 있었다. 언니 마고가 영양부족에다 티푸스까지 겹쳐 1945년 3월 먼저 죽었고, 몇일 후 안네도 뒤따랐다. 혹독한 추위였지만 티프스에 따른 전신 발진과 고열로 옷을 모두 벗은 채 죽었다고 한다.
안네의 아버지 오토는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키자,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사업을 재개했다. 오토는 끈질긴 조사 끝에 베르겐 벨젠에 있었다는 간호사에게서 아내와 딸 자매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미프 히스 부인은 살아돌아온 오토에게 안네의 일기를 전해주었다. 안네의 일기는 50여개국에서 번역돼 5천만부 이상이 팔렸다.
[1930년] 세계 첫 슈퍼마켓 뉴욕 변두리에 등장
← 유통혁신으로 가격파괴를 주도하며 세계사에 등장한 세계 최초의 슈퍼마켓 ‘킹 컬렌’
뉴욕시 변두리 퀸즈의 자메이카 거리. 번잡한 쇼핑가에서 몇블 럭 떨어진 한적한 이곳, 어제까지 헌 차고였던 낡은 건물엔 ‘킹 컬렌’이란 빨강 글씨 간판이 드높이 매달렸다. 2백평이 넘는 매장은 골목 골목 선반이 줄을 이뤘고 그 위엔 통조림과 빵, 과일 등 식품이 넘쳐났다. 손님들은 점원의 안내없이 스스로 필요한 물건을 찾아 바구니에 담았다. 장보기 역사를 새로 쓰게 된 순간 이었다. 미국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슈퍼마켓’은 대혁신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큰 변화였다.
창업자 마이클 컬렌은 상점에서 잔뼈가 굵은 사업가였다.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18살부터 상점 점원으로 일해온 그는 대공황과 대도시화, 자동차의 대량 보급이란 시대 변화에서 소매 상점의 일대 혁신 중심어를 찾아냈다. 값싸게, 빠르게, 대량 구매를! 손님과 물건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을 철폐하라! 컬렌의 아이디어는 명확했다. ‘가격 파괴’란 말은 이때 이미 등장했다. 켈런은 스스로를 ‘가격파괴자(price wrecker)’라고 불렀다. 가게 넓이를 당시 식품점 평균보다 3배 이상 확대하고 셀프 서비스로 점원수를 대폭 줄여 상품가격을 확 낮췄다. 판매 이윤도 낮췄다. 자동차를 타고 와서 한번에 많이씩 사가라고 매장보다 더 넓은 주차장 (parking lot)을 만들었다.
창업 2년 만에 킹 켈런은 미국 최대 슈퍼마켓으로 성장했다. 종업원 서비스가 없는 ‘노 프릴(장식없는)’ 상점으로 빅 베어가 뒤이어 등장했고, 식품 뿐 아니라 자동차용품, 문구류, 그릇, 생활용품, 라디오까지 파는 대형상점들이 1930년대 중반까지 미국 전역에 생겨났다./조선
[1926년] 윤심덕ㆍ김우진, 현해탄에 동반 투신자살
극작가 - 김우진(金祐鎭)
1897. 9. 19 전남 장성~1926. 8. 4 현해탄.
호는 초성(焦星)·수산(水山). 1920년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연극인. 우리나라 최초로 연극에 있어서 표현주의극이 가장 알맞은 창작방법이라고 내세웠다.
장성군수였던 성규(星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세 때 어머니를 잃고 복잡한 가정 속에서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를 남달리 사랑한 아버지는 엄격한 유가적 법도에 따라 가르쳤다. 목포공립심상소학교 고등과 1년을 마친 뒤,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업을 이어받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마모토[龍本] 농업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잠시 귀국해 정점효와 혼인했다. 일찍이 16세 때부터 단편〈공상문학〉을 썼던 그는 문학에의 꿈을 꺾을 수 없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1919년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들어가 희곡을 전공했다. 이때 영국의 사회개혁 사상가 쇼(G. B. Shaw), 스웨덴의 표현주의 극작가 스트린드베리(J. A. Strindberg)의 희곡에 심취했고, 니체·마르크스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졸업논문은 쇼를 주제로 한〈인간과 초인〉이었다. 재학중이던 1920년 조명희·유엽·홍해성·고한승·김영팔 등과 '극예술협회'를 조직했다. 1921년 '동우회순회연극단'을 만들어 국내에서 40여 일 동안 문화계몽운동을 벌였으며, 이때 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우에노[上野] 음악학원에서 성악을 공부하던 윤심덕을 만났다. 대학 졸업 후 가업을 이어 상성합명회사 사장이 되었으나, 아버지와 잦은 마찰을 일으켰다. 1926년 마침내 가출, 일본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돌아오던 중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성악가, 배우 - 윤심덕(尹心悳)
1897 평양~1926. 8. 4 일본 겐카이나다[玄海灘].
본관은 파평. 호는 수선(水仙). 1918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에서 1년 간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그해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했으며, 1921년 동우회에서 주최한 국내순회공연에 참여했다가 김우진을 만나게 되었다. 1922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조교로 1년 간 근무한 뒤, 1923년 귀국했다.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선생으로 있으면서 극예술협회 등의 연극공연에 출연해 풍부한 성량과 뛰어난 외모로 이름을 떨쳤고, 1925년 김우진의 권유로 토월회 무대에도 섰으나 연기력이 부족해 그만두었다. 당시 성악만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어 대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방송에 출연하거나 레코드를 취입하기도 했다. 1926년 여동생 성진의 미국유학길을 배웅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닛토[日東] 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하고는 귀국길에 김우진을 만나 겐카이나다에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 이는 신극운동 때의 유명한 연애사건으로, 박승희는 이들의 사랑을 주제로 한 〈사(死)의 승리〉를 토월회 재기공연 때 발표하기도 했다. 이바노비치 작곡인 〈도나우 강의 푸른 물결〉에 자신이 직접 노랫말을 쓴 〈사(死)의 찬미〉는 그녀가 죽고 난 뒤 더욱 유명해진 노래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 ‘전쟁’선언 후 7월 31일. 독일군대가 총동원령을 낭독하자 긴장된 분위기의 베를린 모습.
사라예보 사건(6월 28일)은 문명세계 유럽을 죽음과 파멸로 몰아넣었다. 1914년 8월 4일,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영국도 같은 날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연쇄폭발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러시아에 선전포고(6일)를 하자 영국과 프랑스도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12일)로 맞섰다. 가장 평화스러운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유럽이 전화(戰禍) 속으로 휘말려든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큰 형님 독일을 과신하고 세르비아를 침공(7월 28일)했지만 세르비아 뒤에는 동방의 거인 러시아가 버티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 역시 러시아와의 `3국협상`으로 전쟁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1차대전은 19세기까지의 낭만적인 전쟁 모습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기동전이 참호전으로 바뀌면서 4개월이면 족할 줄 알았던 전쟁은 4년으로 늘어났고, 신무기와 독가스는 9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조선
[1914년] 영국, 대 독일 선전포고
1914년 8월 4일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이에 대항해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1914~18년 유럽 국가 대부분과 러시아·미국 등이 동맹국과 연합국으로 나뉘어 싸운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으로 촉발되었다. 1910년까지 3국동맹, 3국협상 등의 동맹 형식으로 세력이 나뉘어 있던 유럽은 사라예보 사건으로 결정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조건부 최후 통첩을 보냈으며 7월 28일 마침내 선전포고를 했다. 뒤를 이어 러시아가 7월 30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항해 총동원령을 내렸고, 이에 반발한 독일이 러시아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다. 유럽을 주도하던 강대국들이 속속 전쟁에 뛰어드는 상황에서 8월 3~4일 밤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영국도 독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영국은 세르비아나 러시아·프랑스 등과 특별한 우호관계가 있지는 않았지만 벨기에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다. 결국 유럽 내에서 시작된 전쟁은 세계 각국이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전쟁은 동맹국의 패배로 끝났고, 4개의 거대한 제국(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이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브리태니커
[1901년] 암스트롱 Louis (Daniel) Armstrong 출생
← 암스트롱
1901년 8월 4일 태어남 / 1971년 7월 6일 죽음
암스트롱은 미국의 대표적인 재즈 음악가이자 트럼펫 연주자이다. 가수로서 레코드를 취입하고 영화에도 출연했으며 코미디언으로도 활약했다. 그는 기존의 앙상블 위주의 재즈 전통에서 벗어나 훗날 재즈 스윙 필링이라고 알려진 즉흥적 리듬 연주를 대중화시켰다. 또한 노래 가사를 줄이고 대신 의미 없는 음절을 반복함으로써 기악 즉흥연주와도 같은 느낌을 살린 '스캣'이라는 창법을 고안했다. 이 독특한 창법을 이용해 많은 노래 음반을 취입했으며, 이는 다른 가수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1925~28년 그는 자신의 밴드인 '핫 파이브', '핫 세븐'과 함께 재즈사에 남을 만한 탁월한 음반들을 취입했다. 그의 연주는 악기의 넓은 음역을 이용한 아름다운 음색과 선율 변주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재즈로 끌어들였다.
[1900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어머니 엘리자베스(Elizabeth, The Queen Mother) 출생
← Elizabeth, The Queen Mother
1900. 8. 4 ~ 2002. 3. 30
영국 왕 조지 6세의 아내(1936~52). 스트래스모어 킹혼 백작 14세인 클로드 조지 보스 라이언(1944 죽음)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보스 라이언가(家)는 스코틀랜드의 왕 로버트 1세의 혈통을 이어받았음을 주장할 수 있는 가문이다. 그녀는 1923년 4월 26일 조지 5세의 둘째 아들인 요크 공작 앨버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영국의 왕자를 외국의 왕녀와 결혼시키는, 오랫동안의 관례에서 벗어난 범속한 출발이었다. 1936년 12월 11일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고 남편이 조지 6세로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조지에게 적절한 예고나 준비할 여유를 주지 않고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이유로 에드워드 8세(퇴위 후 윈저 공이 됨)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녀는 딸을 2명 낳았는데, 큰딸은 나중에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된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1926 태어남)이고, 작은딸(1930. 8. 21 태어남)은 스노든 백작부인이 된 마거릿 로즈 공주이다. 1952년 남편이 죽고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하자 공식적으로는 엘리자베스 왕후 폐하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는 왕가 일원으로서 국민의 큰 인기를 얻고 많은 존경을 받았다.
[1875년] 안데르센 사망
←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4.2~1875.8.4)
1875년 8월 4일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까지도 감동시키는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이 생을 마감했다. 안데르센은 코펜하겐근처 오덴세에서 가난한 구둣가게 아들로 태어났다. 안데르센은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하는 아버지밑에서 문학작품을 자주 접하며 그의 재능을 자연스럽게 키워갔다. 그는 배우가 되기를 원해 15세때 코펜하겐으로 떠났으나 꿈을 이룰 수는 없었다. 몇 번의 좌절 끝에 안데르센은 코펜하겐 왕립극장 단장인 요나스 콜린을 만나 슬라겔세와 헬싱고르의 라틴어 학교에서 공부했고 코펜하겐대학도 졸업할 수 있었다.
1835년에는 이탈리아 여행을 소재로 한 ‘즉흥시인’이란 작품이 독일에서 좋은 평을 받으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835년 ‘어린이들을 위한 옛날 이야기’란 동화집을 발표하면서 동화작가로써 데뷔하게 됐다. 그 후 안데르센은 130여편 이상의 동화를 남겼다. 1846년 자서전 ‘나의 생애 이야기’를 발표했다.
안데르센 동화는 휴머니즘과 자연스러운 이야기 전개, 뛰어난 상상력을 특징으로 한다. 안데르센은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해외여행을 즐기며 그의 생애를 보냈다. 안데르센은 그의 고향에서 명예시민으로 추대되기도 했으며 그의 장례식에는 덴마크 전 국민이 상복을 입을 정도로 덴마크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대표적 저서로 ‘인어 공주’ ‘미운 오리새끼’ ‘벌거숭이 임금님’ 등이 있다.
[1859년] 노르웨이의 작가 함순(Hamsun, Knut) 출생
← 함순
1859. 8. 4 ~ 1952. 2. 19
노르웨이의 소설가. 본명 크누트 페데르손(Knut Pederson). 그도브란스달 출생.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출생하여 3세 때에 로포텐제도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곳 극북(極北) 지대의 황량하고 신비적인 대자연 속에서, 목동(牧童), 구둣방 견습공, 행상인 등 갖가지 직업에 종사하면서 문학에 뜻을 두었다. 17세 때에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쓴 소설 《베르겔》을 자비출판(自費出版)하였으나, 극도로 생활이 곤궁하여 두 번이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아야 하였다. 그러나 다시 귀국하여 미국 문명을 격렬하게 비판한 팜플렛을 출판하여 약간의 주목을 끌었다.
1890년에 《굶주림 Sult》을 써서 전유럽을 깜짝 놀라게 하였는데 그 내용은, 젊은 문학청년이 굶주림에 시달려 환각을 일으킬 정도의 상태에 빠지면서도 고고(孤高)함을 잃지 않고 오슬로의 거리를 방황하다가 마침내 고국을 버리게 될 때까지를 묘사한 것이다. 그 사소설적(私小說的)인 제재(題材)와 강렬한 문체미(文體美)가 종래의 자연주의나 사회문제 소설과는 날카롭게 대립되는 것이었다. 그후 《신비(神 )》(1892), 《목신(牧神)》(1894), 《빅토리아》(1898), 《가을의 별 아래에서》(1906), 《최후의 기쁨》(1912), 등의 작품에서 고독한 방랑자의 애환을 격조 높은 시적(詩的) 문체로 묘사하였는데, 《시대(時代)의 아이들》(1913), 《세게르포스의 거리》(1917) 등에서는 근대사회를 통렬히 비판하는 것으로 내용이 바뀌었다.
그러다가 또 그의 거작으로 꼽히는 《흙의 혜택》(1917)에서는 다시 일전하여, 홀로 황야를 헤치고 들어가서 농장을 개척하는 어떤 농부의 생활을 장려(壯麗)한 서사시적 필치로 그려내어 제1차 세계대전에 시달리던 전유럽 사람에게 새로운 복음서로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하에서는 영미풍(英美風)의 민주주의를 혐오한 그가 히틀러에게 동조한 일이 있었고, 전후(戰後)에는 그 때문에 오랫동안 전범(戰犯)으로서 감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석방된 후의 그는 다시 20세기 노르웨이의 국보적 작가로서 후대(厚待)를 받았다. 192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805년] 아일랜드의 수학자, 물리학자 해밀턴(Hamilton, William Rowan) 출생
← 해밀턴
1805. 8. 4 ~ 1865. 9. 2
영국의 수학자·이론물리학자. 아일랜드 더블린 출생.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통하였다. 백부(伯父)의 외국어 교육으로 13세 때에 이미 10여 가지 외국어를 익혔다고 한다. 수학에 흥미를 가지고 뉴턴·라그랑주·라플라스 등의 저서를 읽어, 대학 입학 당시에는 이미 수학을 거의 통달하였으며, 또 광학계(光學系)에 관한 뛰어난 이론과 아이디어를 창안하였다.
1824년 더블린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 27년 재학 중인 칼리지의 천문학 교수로 선임되었으며, 던싱 천문대장을 겸하였다. 이듬해 《광선계의 이론》 제1부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해밀턴의 특성함수(特性函數)를 도입한 것으로, 광학계에 대한 일반적인 대수적 이론을 세운 것이며, 기하광학(幾何光學)의 기초이론이었고, 후년의 역학이론을 출발시키는 기본이 되었다. 이어 원뿔굴절[圓錐屈折]을 예견하였는데(1832), 이것은 H.로이드에 의하여 싫증되었다.
그 무렵부터 광학을 도입한 역학의 모든 분야에 이를 확장시키려는 시도에서 특성함수를 사용한 빛의 전파(傳播)와 질점(質點)의 운동을 통일, 34년 변분원리(變分原理)라고 하여 ‘해밀턴의 원리’를 확립하였다. 또한 ‘해밀턴의 정준운동(正準運動) 방정식’을 수립함으로써, 해석역학(解析力學)의 기초를 확립하기도 하였다.
한편, ‘4차원법’을 착상하여 그 이론의 전개에 노력하였고, 이론물리학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용성을 밝히려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의하여 대수계(代數系)에 대한 다양한 길이 열렸고, 그 후의 대수학 및 물리학에 대한 응용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워즈워스·콜리지 등과도 교유하였다.
그 밖에
2002년 곤살로 산체스데 로사다, 볼리비아 대통령 당선
1999년 치사율 80% 에볼라 바이러스 독일서 첫 출현
1997년 세계 최고령자 프랑스의 잔 칼망 할머니 122세로 사망
1996년 남산 안기부청사 철거
1996년 일본 국민배우 ‘남자는 괴로워’의 아쓰미 기요시 사망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 폐막, 한국 종합10위
1996년 이봉주 선수,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서 은메달 획득
1995년 정보화촉진기본법 공포
1984년 정부, 여성차별철폐 유엔협약 비준키로
1984년 우루과이 민정이양 합의 발표
1983년 이탈리아 첫 사회당 정부 수립
1982년 내무부, 1983년부터 의무경찰제 실시 발표
1978년 경북도 교사자격증 부정사건. 8명 구속
1975년 이태영변호사, 막사이사이상 수상
1970년 키엠 월남수상 내한
1967년 박춘우 유괴살인사건 범인 검거
1964년 미군기, 월맹기지 폭격
1960년 민주당 신구파 결렬
1957년 전국에 수해(사망 247명, 이재민 6만여명)
1949년 그리스, 대한민국 정식 승인
1948년 신익희 국회의장 피선, 김약수 부의장 피선
1931년 미국의 의사 다니엘 윌리엄스 사망
1930년 임시정부, 국무원 개편, 국무령 김구
1919년 불가리아 공산당 결성
1916년 미국,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 매수조약 성립
1914년 미국, 1차대전에 중립선언
1906년 영국 정치가 러틀랜드 사망
1897년 일본 정치가 고토 쇼지로 사망 -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
1896년 전국을 13도로 지방행정제도 개혁
1792년 영국 낭만파 시인 셸리 출생
1789년 프랑스, 국민의회가 봉건제 폐지를 선언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반군 토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