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금산 백암사 원문보기 글쓴이: 賢功(현공)
송광사에서 선암사는 거리로는 6키로미터정도 떨어져있다. 그런데 그 거리는 조계산을 넘었을 때의 거리다 보니 차를 타고 이동하면 사십여분 이동해야 한다. 고속도로를 거쳐서 산길을 가야하는 길은 불편은 하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길을 가는 평화로운 여정이다. 송광사근처에는 조암호가 있어서 호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드라이브 코스이다.
선암사는 태고종총본산이며. 대한불교 종계종 21교구본사이기도하다그렇지만 이곳에는 이름난 문화재가 많다. 그렇기에 몇십년전에는 조계종과 태고종이 사찰을 차지하려고 폭력배를 동원해서 싸운 곳이 바로 이곳 사찰이다. 선암사 역시 입구에서 대웅전까지는 한적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따라 올라가는 길을 자랑한다. 오르는 길에 딱다구리가 나무를 파는 소리가 목탁소리처럼 들린다. 입구를 따라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십여분 가면 아름다운 승선교의 모습이 떠오른다. 선암사의 풍경중에 가장 아름다운 승선교의 모습과 승선교에서 바라보는 강선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찰 입구에서는 삼인당아라는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연못안쪽으로 섬의 모양을 조성하였고 그 물이 흘러가는 곳도 아름답게 조성하여 찾는 이를 기분좋게 만든다. 그곳에서 다시 올라 일주문에 이르는 길에도 평화롭고 고그넉하다. 일주문을 지나면 범종루를 거쳐서 대웅전 마당에 이르는데 공사중이어서 그 길은 막혀있고 옆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가면 대웅전에 이르게 된다. 양옆으로 탑을 세웠고 옛 건물들이 옛모습을 간직하고 아지자기 배치되어 있다.
송광사의 넓은 마당에 비하면 답답해 보이지만 마당에서 느껴지는 것은 편안함이다. 송광사 대웅보전앞에 눈에 거슬리게 만든 푯말들도 보이지 않아서 왠지 이곳은 나그네들에게 평안하게 쉬어 가라고 절마당을 내어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대웅전 뒤에도 팔상전, 조사전, 불조전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어서 그 공간역시 편안함을 느끼게 만든다. 오래된 목재 건물들이 거대한 크기가 아닌 작은 크기로의 배치에서 느껴지는 편안함과 아름다움은 어느 사찰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것 같다.
그 뒤로는 원통전과 첨성각이 배치되어 있는데 가운데 사각형의 연못이 조성되어서 아름답다. 연못앞에 서있는 커다란 나무와 그 옆에 의자가 언제라도 이곳에 머물며 가라는 듯 있어서 가려는 발걸음을 계속 잡는다. 그 뒤에도 뒷마당의 공간을 지나면 응진전과 달마전의 전각과 공간도 아름답다. 아기자기 배치된 공간속에서의 편안함은 선암사를 찾는 이들을 기억하게 만들고 진한 여운을 갖게 만드는 절이다. 선암사의 뒷간도 특이하다. 이층으로 목재로 만든 건물에 볼일을 보면 아래에 쌓이게 되는데 톱밥이나 나뭇잎을 쌓아 냄새도 없다.
사찰을 찾아 돌아다니다 보면 발길을 돌리기 어렵게 만드는 사찰들이 있다. 이름나 있는 큰 사찰인 경우도 있지만 작은 규모의 사찰인 경우가 더 많다. 선암사는 이름나 있는 큰 사찰 중에 발길을 잡고 계속 머물고 싶은 생각을 갖게 만드는 절이다. 겨울에 와서도 이렇게 보기 좋은데 봄가을의 모습은 어떠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음에도 이렇게 불쑥와서 편안하게 머물다 가고 푼 생각을 갖게 한다.
선암사 일주문
승선교를 제대로 보려면 계곡으로 내려가야 한다. 사진 찍기 좋은 너럭바위에서 보면
다리 밑으로 보이는 강선루(降仙樓)와 승선교가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강선루는 작은 개울 위에 지었는데 왜 멀쩡한 자리를 두고 위태로운 자리에 지었을까?
혹시 멋을 아는 스님이 그림과 같은 구도를 위하여 터를 잡은 것은 아닐까!
대웅전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선문이면서 천태종 사찰인만큼 쌍탑가람제를 중심으로한
가람배치가 이절 구조의 기본이다.
내 등뒤로 당연히 똑같은 탑이 하나 더있다.
***조계종과 태고종
1962년4월 자정과 쇄신을 앞세운 비구측 스님들은 기존의 대처측 스님들과 종단을
이끌수 없다고 판단하고 단독으로 대한불교조계종을 발족했다.
이때 조계종은 기존 불교와 차별화되는 새 종헌을 채택하면서 보조국사 지눌을 종조로 삼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원래 고려말 이후부터 태고 보우스님을 종조로 받들어 왔다.
한편 대처측 스님들은 1970년 태고 보우스님을 종조로 하는 한국불교태고종을 세웠다.
이것이 오늘의 조계종과 태고종이다.
조계종 종정이었던 성철스님에게 열반전에 우리의 종정은 누구입나까 라고 물었더니
"두말없이 태고스님이다"라고 분명히 하셨다고 한다.
이것이 불교계의 현실이다.
****송광사와 선암사
조계종의 근본사찰이 서울의 조계사이고 태고종의 근본사찰은 선암사인데,
이 선암사와의 소유권을 놓고 법정분쟁이 30년이 넘게 진행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선교는 양종체제로 정리된다.
이곳은 이 양종체제의 대본원임을 밝히고 있다.
선암사의 승탑밭은 조선후기(19세기)에서 20세기초의 승탑13기가 모셔져 있다.
본래의 승탑은 돌거북받침에 용머리지붕으로 장식하는 것이 기본적인 전통이지만
이곳의 승탑은 기본전통에서 해방되어 민화를 보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순천 선암사 승선교(順天 仙巖寺 昇仙橋.보물 제400호.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48-1 선암사)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놓인 다리가 승선교이다.
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아래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그 짜임새가
정교하여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무지개 모양으로 건설한 양식은 곧 벌교홍교(보물 제304호)와 같은데, 2개가 모두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양식상 공통점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돌을 쓴 방식이나 마무리수법이 오래된 양식이며, 그 구조 또한 보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미루어 영조 때에 만들어진 벌교홍교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출처 : 문화재청)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승선교는 보물 제400호이다.
***조계산 자락의 송광사는 통도사,해인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보(三寶)사찰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통도사는 불보사찰,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판이 모셔져 있는 해인사는 법보사찰,그리고 한국불교의 승맥을 잇고있는 송광사는 승보사찰이라고 한다. 법정스님도 인정한 한국불교의 정신적 지주인 보조국사 지눌스님도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羽化(우화):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 간다는 말.원래 羽化登仙의 줄임말이다. 내 마음 속에 우화각은 언제나 송광사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건축물로 새겨져 있다. 송광사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다 녹아들어 함축된다. 현판 뒤로는 과거 오랜 세월동안 이곳을 다녀간 시인,묵객들의 작품이 걸려있다. 도착한 시간이 촬영지점에서는 역광으로 카메라의 한계와 기술부족을 극복하지 못하여 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담아오지 못하고 현판만 담았다.
아~이 아름다움이여!들어가도 나와도 좌우 어느쪽으로 돌아도 송광사 경내는 한치의 빈틈도 없는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송광사는 카메라 앵글을 어디에 두어도 그림이 된다.
사찰을 수호하는 사천왕문의 사천왕상. 사찬왕의 표정이나 모습이 다른 절보다 그로테스크하다.
가람들과 조계산의 능선이 조화를 이루며 같은 동선으로 흐른다. 절과 주위 산과의 동선이 하나의 하모니로 연출되는 것은 내가 보기에 변산의 내소사, 해남 두룬산 의 대원사 그리고 이곳 조계산 송광사이다.
호남의 사찰에는 이런 아름다움과 정겨움이 넘친다.
늦가을나목,일월비비추는 더욱 관능적이고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裸身을 뽑내는듯하다.
송광사의 3대 볼거리의 하나인 천자암 쌍향수 나무 송광사의 곱향나무 쌍향수 (松廣寺의곱향나무雙香樹) - 천연기념물 88호 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보조국사(普照國師)와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나란히 꽂은 것이 뿌리가 내리고 가지와 잎이 나서 자랐다고 한다. 담당국사는 왕자의 신분으로 보조국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나무의 모습이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 절을 하고 있는 듯하여 예의 바른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한제국 마지막황제인 고종의 최후 불사이며 황제의 친필편액이다.
문신이 허리를 굽히고 서잇는 것이 송광사 관음전의 특징이고 한국의 법당에서 유일하다.
관음보살옆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상징하는 해와 달의 그려져 있는 벽화가 판대기로 가려져있다.
불이문은 사찰에 따라 해탈문 또는 극락문 이라고도 한다. 불이문은 곧 불국토를 만나는 곳이며 이 문을 지나면 불국토가 열린다는 뜻이다. 불이문은 不二 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둘이 아닌 하나의 경지인 불국토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 곳은 들어가는 자와 앉아 참선하는 자, 중생과 부처, 나고 또 죽는 것, 번뇌와 보리, 세간과 출세간, 그리고 법계의 실상이 둘이 아닌 것을 깨달아 부처의 경지에 들어가는 관문이다. 그러므로 몇 가지 조형물을 통하여 무명에 빠진 중생들에게 불국토가 어떤 곳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불이문을 지나면 사찰의 최종 목적지인 불국토를 상징하는 법당이 나온다. 법당을 장엄하게 느낄 수 있도록 불이문은 누각으로 조성하였다. 법당으로 가기 위한 통로를 누각으로 만들고 그 아래 통로는 좁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밝은 빛을 통제하고 계단을 오르면서 조금씩 법당을 보여주다가 마지막 계단에 올랐을 때 밝은 빛이 한꺼번에 쏟아지듯 법당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조성 되었다. 특히 이런 구조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영주 부석사이다. 영주 부석사는 범종각부터 시각적인 효과를 주었고 종루 계단을 다 올라와서 오른쪽으로 약 45°방향으로 불이문이 보이도록 조성하였다. 다시 불이문에 이르면 법당 위만 멀리서 조금씩 보이다가 마지막 계단에 오르면 장엄한 무량수전이 펼치도록 조성되어있다. 그러므로 불이문에서 바라보는 그 빈 마당 공간은 사찰 문화의 꽃이며 동양 문화의 진수이며 4천5백년 불교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불교 사찰은 바로 불이문에서 법당을 바라보는 이 빈 공간을 보여주기 위해 배려된 곳이며 사찰을 조성한 대사(큰스님)들은 이 공간을 남기기 위해 모든 지식과 능력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선암사 보다는 다소 떨어진다 해도 송광사도 사계절 내내 꽃과 꽃나무열매가 수없이 피고진다.
이런저런 생각속에서 길을 걸으며 어느새 너덜을 지나고 문득 눈부신 빛내림이 던지는 송광사 굴목재 이정표를 만난다.
배도 고픈데~발도 아픈데~ 여기서 보리밥집은 20분이라는 반가운 안내표지도 보이고~
1970년 초여름 어느날 긴머리 수염에,훤칠한 체격,낡은 작업복에 고무신 차림의 기인이 이곳에 나타나 안식처로 삼고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곳 사람들은 그를 배도사하고 불렀다. 그러나 이곳에 정식으로 대피소를 짓고 배도사대피소로 명명한 것은 1983년이라고 한다.
적당히 허기진 상태로 보리밥집까지 지근의 이런 산길을 간다는 것은 콧노래를 절로 나오게한다.
해가 벌써 기울고 이제 보리밥집을 서둘러 떠날때다.
어두워 지는 밥집을 돌아 나오는 산길은 쓸쓸하다. 그러나 오늘은 어느 날보다 복된날.비록 맑은 새소리 다 숨을 때지만 마음속으로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산은 눈치챘을 것이다.
어두운 땅거미가 내려앉는 시각에 나는 다시 선암사 경내의 臨仙橋에 이른다.
***조계종과 태고종 1962년4월 자정과 쇄신을 앞세운 비구측 스님들은 기존의 대처측 스님들과 종단을 이끌수 없다고 판단하고 단독으로 대한불교조계종을 발족했다. 이때 조계종은 기존 불교와 차별화되는 새 종헌을 채택하면서 보조국사 지눌을 종조로 삼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원래 고려말 이후부터 태고 보우스님을 종조로 받들어 왔다. 한편 대처측 스님들은 1970년 태고 보우스님을 종조로 하는 한국불교태고종을 세웠다. 이것이 오늘의 조계종과 태고종이다. 조계종 종정이었던 성철스님에게 열반전에 우리의 종정은 누구입나까 라고 물었더니 "두말없이 태고스님이다"라고 분명히 하셨다고 한다. 이것이 불교계의 현실이다. ****송광사와 선암사 조계종의 근본사찰이 서울의 조계사이고 태고종의 근본사찰은 선암사인데, 이 선암사와의 소유권을 놓고 법정분쟁이 30년이 넘게 진행되고 있다.
다시 날이 바뀌어 11/15의 화요일이다.평일 오전의 선암사로 가는 길은 너무나 호젖하다. 우리나라의 산사는 진입로부터 시작된다.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선교는 양종체제로 정리된다. 이곳은 이 양종체제의 대본원임을 밝히고 있다.
선암사의 승탑밭은 조선후기(19세기)에서 20세기초의 승탑13기가 모셔져 있다. 본래의 승탑은 돌거북받침에 용머리지붕으로 장식하는 것이 기본적인 전통이지만 이곳의 승탑은 기본전통에서 해방되어 민화를 보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신라말이나 고려초의 승탑은 대부분 팔각당 형태로 경내 뒷쪽에 모셔져 있다.
산사로 들어가는 양쪽 길가에 놓인 두장승은 길게 늘여드린 수염,치켜 올라간 눈섭, 이빨을 모두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표정이 해학적이다. 진짜는 절내의 박물관에 모셔져 있고 이것은 모조품이다.
승선교를 제대로 보려면 계곡으로 내려가야 한다. 사진 찍기 좋은 너럭바위에서 보면 다리 밑으로 보이는 강선루(降仙樓)와 승선교가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강선루는 작은 개울 위에 지었는데 왜 멀쩡한 자리를 두고 위태로운 자리에 지었을까? 혹시 멋을 아는 스님이 그림과 같은 구도를 위하여 터를 잡은 것은 아닐까!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놓인 다리가 승선교이다. 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아래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그 짜임새가 정교하여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무지개 모양으로 건설한 양식은 곧 벌교홍교(보물 제304호)와 같은데, 2개가 모두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양식상 공통점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돌을 쓴 방식이나 마무리수법이 오래된 양식이며, 그 구조 또한 보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미루어 영조 때에 만들어진 벌교홍교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출처 : 문화재청)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승선교는 보물 제400호이다.
승선교 전에 모양이 같은 작은 승선교가 하나더 있다.
역광과 사진미숙으로 승선교와 강선루를 같이 못잡고 이렇게 별도로 올린다. 선선이 내려와 노니는 누각이란 뜻이라서 그런가? 측면 기둥중에 하나가 계곡에 빠져있는 것이 특이하다.멋과 여유를 아는 스님의 구도로 만든 작품이 라고 생각된다.
강선루를 내려와 승선교를 통하여 오르는 명칭에서의 상징적 의미가 크다. 강선루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길은 두번을 휘감고 돌다가 가파른 경사를 이룬다. 일주문까지의 길이 여느 사찰에서는 보기 드물게 길고 일주문을 지나면 큰 범종루가 압도하듯 다가온다. 이를 樓下進入이라고 하는데 전라도 지방의 사찰에서는 이러한 누하진입이 드물다. |
여기서 부터는 누구라도 말에서 내려야 한다.
차몰고 경내까지 들어 오듯이 그때도 말타고 경내에 진입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일주문 양쪽으로 담장이 연결되어있고 돌계단으로 층계가 연결되어있다.
단층 막배기와집 형태로 실질적인 이사찰의 경역이 시작된다.
대웅전 내부는 단청을 한 우물천장이며 굵은 대들보를 용모양으로 장식했다.
한마리는 여의주를, 한마리는 대들보를 물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고 재미있다
밥통 안에 모셔진 아기스님의 모습이 너무 해맑고 귀엽다.
무쇠솟에서 밥이 다되면 여기에 퍼 담았다. 말하자면 밥통이다
달마대사가 조사로 모셔져있다.
팔작 지붕은 지붕 마루마다 망와라 하여 도깨비 모양의 암막새를 얹는다. 망와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귀면에 가까우나 뒤에 점차 약화되어 왔으며, 곳에 따라서는 태극이나 주역무늬가
새겨진 것을 쓰기도 한다.
근래에는 사람 얼굴모양의 것을 많이 얹으며 단지 꽃잎을 양각한 것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망와는 잡귀를 물리쳐 준다는 속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22대 정조대왕이 후사가 없자 선암사 눌암대사에게 100일 기도를 부탁하여 순조를 얻게
되었는데,뒤에 순조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인" "천" "대복전"이란 친필현판을 하사
하였다.
그 현판은 현재 이건물의 내부에 걸려있다.
이것이 순조대왕의 친필이다.
이보다 더 화려한 나무문이 있을까?! 정말 소중한 우리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선암사에는 종횡의 동선체계에 막힘이 없다.
교차부를 가급적 피하고,특히 오르는 흐름체계가 고려되었으나 횡방향의 흐름도
소홀히하지 않았다.
절의 소유권는 조계종이,거주권(?)은 태고종인 이상한 동거로 절의 재정이 별로 좋지 않은듯~
입장료 수입만으로 재정의 대부분을 꾸려 간다는데 송광사에 비해서 주차료는 무료이고,입장료도
저렴하며 점심식사하고 가라고 스님들이 길을 막고 권유한다.
가난한 동네에 정이 깊다는 말이 호남의 사찰에서도 더욱 딱 들어 맞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그렇다.
수백년된 와송이 아름다운 자태를 뽑내고있다.영험한 소나무라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설도~
무량수각-선암사의 서북쪽에 위치한 교육원으로 옛날에는 천불전으로 불렸다.
글씨체의 아름다움이 무량하다
스님들의 선방이다.화보에서 많이 본 적이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생긴 화장실 건물로 꼽힌다.
가운데 넓은 공간을 경계로 남녀 화장실이 좌우로 나뉘어있다.
영월 보덕사 해우소와 함께 문화재로 지정된 뒷간이다.
선암사 뒷간은 안으로 들어가 볼일을 봐야 제맛을 알수있다
남녀용 각각 8칸으로 나뉜 화장실은 안에 뚫려있는 창살사이로 경내가 다 보인다.
그러나 밖에서는 안을 볼수가 없다.현판을 반대로 읽으면 "깐뒤'가 된다.
마침 비구니 스님 한분이 일을 보러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행장을 챙기는 모습은
아름답고 경건다.ㅋ
깐뒤 여기서 씻는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시인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