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군은 드물게 아름다운 해안선을 가진 고장이다. 짙푸른 바닷물과 크고 작은 섬, 모래사장, 자갈밭, 유유히 떠가는 어선, 그리고 무엇보다 수평선을 짙은 실루엣으로 장식하는 방풍림으로 남해의 해안선은 말 그대로 그림 같은 절경의 연속이다.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 중 한 사람으로서 남해도에 유배왔던 자암 김구는 이곳 풍경에 감탄, '한 점 신선이 사는 섬-일점선도(一點仙島)'라고도 했다.
남해를 사랑하여 여행 왔다가 아예 눌러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어떤 이는 남해도를 일러 보물섬이라고도 한다. 기실 자연 경관의 밀도가 남해만큼 높은 곳도 다시 없을 것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에서도 핵심을 이루는 금산, 남한 최고의 방풍림 물건리숲,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멸치를 잡아올리는 원시 그물 죽방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독특한 농촌 풍경을 보이는 가천 다랭이마을, 울창한 편백숲이 기막힌 남해편백 자연휴양림, 아름드리 노거수가 어울린 고찰 용문사, 그리고 해변가 짙은 숲그늘과 맑은 물, 완만한 수심의 일급 해수욕장인 상주·송정 해수욕장 등 일급 경관지만 짚어도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그간의 남해대교에 보태어 작년 4월 창선·삼천포대교가 놓이며 남해도를 들고 나기는 한결 편해졌다. 무더위로, 불경기로 가슴 답답한 이 7월, 시원스레 남해도를 한 바퀴 돌아보자. 7,8월이면 바닷물에 몸 한 번 담그어보기를 빠트릴 수 없고, 곳곳마다 일미의 먹거리가 있으며, 느긋이 앉아 노을 바라기를 해보고픈 조망처가 또한 사방에 자리했으니 제대로 즐기자면 꽉 채운 2박3일로도 부족한 데가 남해도다.
그러니 가능하면 첫날 금요일 일찍 출발, 창선·삼천포대교 건너 창선도 서안의 노을부터 본다. 그후 창선교 건너 죽방렴에서 갓 잡아올린 멸치회나 멸치조림으로 저녁식사 후 숙소로 든다.
둘쨋날은 아침 일찍 남해 최고의 명소 금산 정상에 올라 일출을 본다. 정상 직전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으며, 한 바퀴 돌아보는 데는 2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이 날 물미 해안도로를 따라 돌며 물건리 방조림, 편백휴양림, 해오름예술촌 등을 들러본다. 시원한 숲은 자꾸만 발길을 잡거나 달콤한 낮잠을 유혹할 것이지만, 오후 6시 전에 상주 해수욕장에 다다라야 한다. 기막힌 포인트를 잡아 석양을 보여주는 러브 크루즈가 6시에 출항하기 때문이다.
세쨋날은 오전 일찍 설흘산행 후 가천 다랭이논, 용문사, 구미숲, 충렬사 등 남해도의 서쪽 명소들을 둘러본 뒤 남해도 서안을 따라 드라이브하며 올라가 남해대교로 빠져나간다. 시간이 좀 남으면 남해군 지정의 갯벌체험장(관음포, 둔촌, 문항 갯벌)을 들러본다.
제1일 왕후박나무, 죽방렴 멸치 맛 보고 편백휴양림 막영
남해도는 전남 여수반도와 동서로 마주하고 있는 357㎢의 커다란 섬으로, 한국에서 네 번째로 크다. 이 남해도와 창선도, 그외 조도, 호도, 노도 3개의 유인도와 63개의 무인도까지 모두 68개 섬이 합쳐져 남해군이 됐다.
창선교로 연결된 남해군 제2의 섬 창선도까지 놓고 한눈에 조망해보면 남해는 H자 형태를 이루었다. 그 H자 모양의 남해 땅 왼쪽 위로 73년 남해대교가 놓인 데 이어 오른쪽 끝 위로 작년에 창선·삼천포대교가 연결되며 보물섬 남해 탐승이 한결 쉽고 다양해졌다.
남해도는 국내 섬 가운데 산지의 비율이 가장 높은 섬이다. 보물섬 남해의 가장 큰 비밀은 여기에 있다. 산에서 평야를 거치지 않고 곧장 바다로 떨어진 급사면이 오랜 세월 대양의 조탁을 받으며 아름다운 굴곡과 단면을 가진 해안선이 형성된 것이다.
남해군에만 유난히 많은 방풍림도 실은 이러한 지형적 특성에 기인한 것이다. 그나마 집을 짓거나 작물을 가꿀 완경사의 땅은 바닷가 바로 옆이니 해안을 따라 두툼한 방조림(防潮林)을 조성해두는 일은 긴박한 생존의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 그 방조림들이 절경 남해를 이루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아름다운 보물섬 남해'의 높은 성가는 또한 해안선에 바투 다가든 채로 구불구불 이어간 해안도로 덕도 크다. 산의 급한 가풀막과 깎아지른 해안 절벽 사이의, 공사해 나아가기에 가장 쉬운 선을 따라 낸 차도는 애초 의도한 바 없을 터이지만 한국에서 첫손 꼽히곤 하는 절경의 드라이브 코스로 부상한 것이다.
산비탈이 가파르게 바다로 떨어지며 이룬 깊은 굴곡의 해안선, 울창한 방풍림, 그리고 그 해안선과 방풍림과 먼 수평선과 섬들이 한눈에 조망되는 총연장 302km의 해안도로, 이 세 가지가 어울려 남해를 보물섬이 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서울에서 남해도를 찾아가는 가장 빠른 경로는 경부(혹은 중부)고속국도~비룡 분기점~대전남부순환고속국도~산내 분기점~대전·통영간 고속국도~진주 분기점~남해고속국도~사천 나들목을 빠져나와 사천시쪽으로 남하,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너는 것이다. 3번 국도를 끝까지 따라 내려가면 창선·삼천포대교로 이어진다. 막히지만 않으면 4시간여 만에 남해도 안에 들 수 있다. 그러므로 해가 긴 7월에는 점심 식사 후 오후 1,2시경 출발해도 창선도 서안의 독특한 노을 풍광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창선·삼천포대교는 4개의 작은 섬들을 징검다리 딛듯 연결한 것이다. 각 섬 간의 교량 이름이 삼천포대교, 초양대교, 늑도대교, 창선대교, 단항교로 각각 다르며 통틀어서 창선·삼천포대교로 부른다. 총연장 3.4km의 이 다리는 매일 밤 환하게 조명을 밝혀 그만으로도 큰 볼거리로 인기를 끌고 있다.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너 창선도에 들자마자 우회전, 1024번 지방도를 따라 1.5km쯤 가면 해변가에 왕후박나무가 있다. 이 거목을 우선 보고 창선도 서안을 따라 내려간다. 해안가 바로 옆까지 완경사로 넓디넓게 펼쳐진 초록의 계단식 논들과 그 뒤에 넓게 펼쳐진 바다는 다른 섬지방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창선도 서안만의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창선도와 남해도를 잇는 창선교 양쪽 지족해협에는 길쭉한 나무 기둥들을 V자 형으로 촘촘히 박아 세운 죽방렴들이 뵌다. 이 죽방렴에서 잡아올린 멸치로 졸임이나 구이를 해서 파는 죽방렴횟집에서 저녁식사 후 남해 편백휴양림으로 가 숲속 막영을 하거나 아니면 남해도 곳곳에 자리한 전망좋은 업소로 가서 묵도록 한다. 7월엔 금요일 밤이라도 사전 예약을 해두어야 한다.
왕후박나무
보기 드문 상록활엽수 거목
남해도의 어느 마을을 가든 반드시 눈에 띄는 것이 거대한 당산나무들이다. 따스한 남녁 해안가 땅이어선지 모두들 엄청나게 크고 수형도 아름답다. 그중 남해가 가장 자랑하는 것이 창선면 단항 마을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299호 왕후박나무다. 수령이 500년이 넘었고, 높이 9.5m, 밑동에서 뻗어오른 줄기가 11가닥이며, 한 쪽에서 다른 쪽까지 길이가 21m의, 마치 우산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단아한 모습이다.
거목이라면 소나무 아니면 느티나무나 은행나무가 대부분인데, 이것은 상록활엽수인 왕후박나무여서 더욱 소중하다. 옛적에 단항 마을의 한 어부가 잡아온 커다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씨앗을 심은 것이 자라서 이렇게 커졌다는 전설이 얽혀 있다. 주민들은 음력 섣달 그믐에 정성스레 이 나무에서 동제를 올린다.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1.5km쯤 가면 커플모텔(055-867-7227)이라는 조망과 시설 모두 좋아뵈는 모텔이 도로 아래쪽으로 뵌다. 이 모텔 옆 콘크리트 포장길로 100m쯤 내려가면 왕후박나무가 반긴다.
죽방렴 멸치
참멸치는 1kg에 수십만 원 호가
멸치 중에 죽방렴(竹防簾) 멸치는 가격이 1kg에 수십만 원을 호가한다. 이 엄청나게 비싼 멸치의 생산지가 남해 창선교 일대 지족해협이다. 일반 멸치 중 비싼 것이라 해도 1kg에 몇 만 원 선인 것에 비하면 정말 엄청난 가격이 아닐 수 없는데, 맛이 얼마나 좋은지 생산되기 무섭게 바로 다 팔려나간다고 한다.
죽방렴 자체를 사고 팔기도 하는데, 하나에 무려 2억 원 넘게 거래된다. 물론 더 이상 설치도 못하게 한다.
죽방렴이란 대나무로 그물의 발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 말로, 1700년대 후반의 화가 김홍도의 그림에도 죽방렴이 나오는 등, 죽방렴의 역사는 최소 수백 년을 거슬러 오른다. 지족해협에 모두 23개가 놓여 있으며, 그외 사천 앞바다에 몇 개 더 있을 뿐이다. 긴 대나무를 촘촘히 박아 50~100m 길이로 V자의 긴 울타리를 세우고 그 끝부분에는 어항처럼 둥글게 울을 두른 다음 그 안쪽에 그물을 댄 것이 죽방렴이다. 대나무발로 만든 커다란 어항인 셈이다. 조류의 방향이 바뀌면 V자 끝의 그물이 서로 맞붙어서 멸치가 빠져나가지 못한다(드물게는 작게 벌어진 틈으로 멸치 떼가 몽땅 빠져나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든 멸치를 긴 족대 같은 그물로 한데 훑어 몰아서는 떠올리는 것이다.
죽방렴 멸치가 맛있는 것은 이렇게 고스란히 살려 잡은 멸치를 떠내자마자 바로 삶아서 말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죽방렴에 잡힌 멸치라고 모두 고가인 것은 아니다. 배에 기름이 낀 큼직한 '기름치'는 맛이 떨어져서 횟감, 아니면 멸치젓 재료로나 쓴다. 4월 들며 기름치가 서서히 줄어들다가 6월 말경부터 본격적으로 진짜 죽방렴 멸치인 참멸치가 들기 시작한다. 그것도 거의가 알이 든 암멸치여서 한결 맛이 좋다는 것이다. 멸치는 떠올려 나오자마자 설설 끓는 가마솥 물에 바로 삶는다. 깨끗한 지하수 바닷물에 질 좋은 해남 천일염으로 간을 맞추어 삶아서는 곧바로 건져내어 햇볕에 말린다.
6월5일, 지족해협 죽방렴횟집 주인이자 3대째 대물려 죽방렴을 해오고 있는 김경식씨(47)는 큼직한 바구니 3개가 그득하도록 멸치가 잡혔는데도 심드렁한 표정이다. 모두 기름치이고 하루에 20박스씩 건져낼 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잡어와 꼴뚜기 처럼 작은 오징어인 호르기 등속을 골라내던 김씨는 이것이 참멸치라며 한 마리 보여준다. 기름치보다 몸집이 한결 작고 피라미처럼 말갛다. 이곳 죽방렴에는 이런 참멸치 중에도 암컷이 90% 이상이어서 한결 맛이 뛰어나다고 한다. 도매시장으로 나갈 새도 없이 서울 단골들과 직거래로 판다.
"기름치라고 맛이 없는 게 아녜요. 참멸치에 비해서 그렇다는 거지. 기름치라도 여기서 갓 잡아 올린 것은 회로 먹어도 구워 먹어도 다 맛있어요."
그러면서 김씨가 구워내 권하는 갓 잡은 기름치는 참멸치 맛이 어떤지 모르지만 이보다 더 나을까 싶게 감칠맛이 있었다. 멸치회 값은 1인당 1만 정도 잡으면 된다. 멸치찌개 한 냄비에 25,000원, 죽방렴으로 잡은 자연산 모듬회 4만~6만 원(죽방렴횟집 전화 055-867-7751).
창선교 남단에서 서쪽으로 300m쯤 가면 죽방렴의 멸치가 가두어지는 곳까지 다리를 놓아 관광객이 볼 수 있게 해두었지만, 아무도 죽방렴을 관리하지 않아 그물도 다 찢어져 있는 등 엉망이다. 죽방렴횟집에 부탁하면 혹 통통배로 멸치 뜨러 갈 때 동승시켜 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