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딱새의 눈물 비겁한 뻐꾸기의 민낯
— 은혜를 짓밟고 자기 둥지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에게
전홍구
자연에는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삶의 방식이 있다.
뻐꾸기가 그렇다. 제 몸으로 둥지를 짓지 않고 제 알을 정성껏 품지도 않으며 제 새끼를 제 손으로 기르지도 않는다.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놓고 떠나는 것이다. 그 알을 품고 기르는 수고는 고스란히 다른 새의 몫으로 남겨둔 채 말이다.
뻐꾸기는 딱새의 둥지를 이용한다. 딱새는 제 둥지에 들어온 알이 자기 알인 줄 알고 정성을 다해 품는다. 무엇이 제 알이고 무엇이 남의 알인지 알지 못한 채 제 몸의 온기로 생명을 깨우고 제 사랑으로 어린 새의 배고픔을 달래준다. 그것이 딱새의 본성이다.
속이려는 마음도 없고 대가를 바라는 계산도 없다. 그저 제 둥지에 놓인 생명을 제 자식처럼 돌볼 뿐이다.
그런데 자연의 이 기묘한 생존 방식에는 더욱 잔인한 장면이 뒤따른다. 뻐꾸기 새끼는 먼저 부화된 뒤 아직 어린 몸으로 딱새의 알이나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기를 한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생명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마침내 둥지에는 뻐꾸기 새끼 하나만 남는다. 딱새는 자기 새끼들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 채 제 몸집보다 훨씬 큰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 제 새끼를 잃은 줄도 모르고 남의 새끼를 살리기 위해 날마다 종일 날갯짓한다.
물론 뻐꾸기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인간처럼 은혜를 알고도 저버리는 도덕적 판단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자연의 생존 방식이다. 뻐꾸기에게 인간의 윤리와 의리를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장면을 바라보면서 좀처럼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자연의 생존 방식에서 인간 세상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도 딱새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가진 것이 넉넉하지 않아도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젊은 시절에는 후배를 가르치고 직장에서는 동료의 실수를 감싸 주며 사업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에 빠진 이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한다. 누군가 능력이 부족하면 곁에서 도와주고 누군가 넘어지면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운다.
그들은 도움을 주면서도 훗날 그 도움을 갚으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베푼 일을 자랑삼아 떠벌리지도 않는다. 어려운 사람 하나가 제힘으로 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딱새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그렇다. 부모는 자식이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자신의 것을 내준다.
밤잠을 설쳐 가며 아이를 돌보고 먹을 것이 부족하면 자기 몫을 줄여 자식의 밥그릇을 채운다. 아이가 아플 때는 대신 아파 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아이가 넘어지면 자기 무릎이 깨진 것처럼 마음 아파한다.
학교에서는 스승이 그렇다. 제자가 잘되기를 바라며 자신이 아는 것을 아낌없이 가르친다.
직장에서는 이름 없이 일하는 선배가 그렇다. 후배가 실수하면 함께 책임지고 후배가 성장하면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사회에서는 이름 없는 봉사자들이 그렇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어도 이웃의 어려움을 살피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
그들은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딱새의 둥지를 제 것으로 삼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서 남이 쌓아 놓은 터전 위에 올라서는 사람, 다른 사람이 흘린 땀과 눈물로 얻은 성과를 자기 공로인 양 내세우는 사람 어려울 때는 간절하게 손을 내밀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도움을 준 사람을 모르는 체하는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겸손한 얼굴로 다가온다. 상대방의 호의를 고맙게 여기며 자신에게 기회를 준 사람을 은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은 마음을 놓는다. 내가 조금 더 도와주면 저 사람도 언젠가는 제힘으로 일어설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본색이 드러나기도 한다.
도움받던 사람이 어느새 도움을 준 사람의 자리를 차지한다. 함께 이룬 성과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을 키워준 사람의 수고를 하찮게 만든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누구의 희생 위에 세워졌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체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남의 자리를 차지한 뒤에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과 지혜만으로 오늘의 자리에 올랐다고 자랑한다. 남의 손으로 지은 집에 들어가 살면서도 자신이 집을 지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딱새의 둥지가 떠오른다.
물론 인간 세상의 모든 성공을 남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누구나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개척할 권리가 있다. 도움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도움을 준 사람 역시 상대방의 인생을 소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유와 배은망덕은 다르다. 독립과 배신도 다르다.
자신을 도와준 사람과 다른 길을 걷더라도 고마움을 기억할 수 있다. 은혜를 갚을 형편이 되지 않더라도 감사의 말 한마디는 건넬 수 있다. 자신이 이룬 성취를 자랑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함께한 사람들의 수고를 인정할 수 있다.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평생 남의 그늘에 머무는 일이 아니다. 자신을 키워준 그늘을 잊지 않는 일이다.
나는 요즘 세상을 바라보며 이름 있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할 때가 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많은 이의 박수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과연 누구의 손을 잡고 그 자리까지 왔는지 잊어버리는 사람이 없는가.
처음부터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누군가의 가르침이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의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실패했을 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가능성을 알아보고 기회를 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공한 뒤에는 과거의 은인이 불편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자신이 초라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 자신이 도움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자신의 성공이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을 멀리하기도 한다.
은혜를 기억하면 자신의 부족했던 시절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의 공로를 인정하면 자신의 영광이 줄어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사람의 도리를 잃었고 많은 것을 얻었으나 감사하는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나는 그 성공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 묻고 싶다.
그가 오늘 누리는 영광은 정말 자기 혼자 만든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이름 없이 흘린 땀과 눈물 위에 세워진 것인가.
나는 특정한 사람의 이름을 들어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이름을 밝히는 순간 글이 한 사람을 공격하는 일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고발하고 싶은 것은 한 개인의 이름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한 사람의 민낯이다. 은혜받으면서도 은혜를 부끄러워하고 남의 희생으로 일어서면서도 그 희생을 지워 버리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사회의 병폐가 된다.
공동체를 위해 일한 사람보다 공을 가로챈 사람이 더 큰 보상을 받고 묵묵히 책임을 다한 사람보다 남의 성과를 자기 것으로 포장한 사람이 더 많은 박수를 받는다면 누가 기쁜 마음으로 남을 돕겠는가. 누구나 딱새처럼 정성껏 알을 품기보다 뻐꾸기처럼 다른 새의 둥지를 찾아다니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의 신뢰는 무너진다. 선의는 어리석음으로 취급되고 정직한 사람은 손해 보는 사람으로 밀려난다. 사람들은 도움을 주기 전에 상대방의 속셈부터 의심하게 된다.
따뜻한 손길이 줄어들고 서로를 이용하려는 계산이 늘어난다.
한 사람의 배은망덕은 그 사람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선의를 베풀려는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은혜를 짓밟는 행위는 개인의 도덕성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와도 관계가 있다.
나는 딱새가 불쌍하다.
자기가 품은 알이 누구의 알인지 모른 채 온몸으로 생명을 지켜낸 딱새 자신의 새끼들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더 큰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 딱새 마침내 자신이 키운 새가 떠나고 나면 텅 빈 둥지를 바라보아야 할 딱새가 안쓰럽다.
그러나 딱새의 잘못은 아니다.
남을 믿었다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다. 정성을 다했다는 것이 어리석음의 증거일 수도 없다. 사랑을 주었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손가락질받아야 할 사람은 부모와 스승과 봉사자들이 아니겠는가.
잘못은 선의를 베푼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의를 이용해 놓고도 아무런 책임과 감사도 느끼지 않는 태도에 있다.
그렇다고 모든 도움을 거두어들이자는 뜻은 아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딱새의 마음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손길 없이는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따뜻한 믿음 하나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서로를 돌보지 않는다면 세상은 더욱 차가워질 것이다.
다만 이제는 착한 딱새의 마음을 지키는 지혜도 필요하다. 선의가 악용되지 않도록 살피고 도움을 주되 상대방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돕고 공동체의 성과가 특정한 사람의 욕심에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착한 마음과 분별하는 지혜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은혜는 사람을 영원히 빚진 자로 묶어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이 제힘으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은혜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날아오른 뒤에도 그 첫 날갯짓을 도와준 손길을 기억한다.
나는 그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믿는다.
이제 글을 마치려 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딱새는 자기가 키운 새가 뻐꾸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원망할 수 있을까. 자연은 그저 자연의 법칙에 따라 흘러갈 뿐이지만 인간에게는 기억할 수 있는 양심이 있고 잘못을 깨달을 수 있는 이성이 있으며 받은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도 사람이 딱새보다 못한 삶을 산다면 무엇으로 사람의 가치를 말할 수 있겠는가.
높은 자리는 언젠가 내려와야 하고 박수 소리는 언젠가 멈추며 이름을 새긴 명예도 세월 앞에서는 희미해진다. 그러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베푼 진심과 그 진심을 기억하는 마음은 오래 남는다.
나는 세상이 성공한 사람의 이름만 기억하는 곳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 성공을 위해 묵묵히 알을 품었던 사람 자신의 몫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 이름도 없이 곁을 지켜 주었던 사람의 수고도 함께 기억하는 곳이기를 바란다.
뻐꾸기에게는 살아남는 본능이 있을 뿐이지만 사람에게는 은혜를 기억해야 할 양심이 있다.
다른 새의 둥지를 빌려 날아오를 수는 있어도 그 둥지를 지켜 준 마음까지 짓밟고 날아오르는 사람이라면 높이 날았다는 사실보다 무엇을 밟고 날았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오늘 내가 딱새의 둥지를 바라보며 세상에 묻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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