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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설명 |
소재지 : 서울 관악구 신림 6동 57-1
1831년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나서 모방 나 신부는 1836년 1월 12일 입국하고, 샤스탕 정 신부는 1837년 1월 15일에 입국하고, 제 2대 조선 교구장 앵베르 범 주교는 1837년 12월 18일에 입국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조선에 주보 성인을 무염 시태 성모마리아로 정해 줄 것을 1838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41년 8월에 무염시태 성모를 조선 교회 주보로 모시되 지금까지 모셔오던 성 요셉(북경교구의주보성인) 성인을 함께 기억하도록 허락하였다.
앵베르 범 주교는 1839년 9월 21일 순교 당시 43세, 샤스탕 정 신부와 모방 나 신부는 35세였다. 모방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지 3년 8개월만에, 샤스탕 신부는 2년 8개월만에, 앵베르 범 주교는 입국한지 1년 9개월만에 순교하였다. 이 성직자들의 시신은 3일 동안 형장에 그대로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사장에 묻혔다. 순교 한지 나흘 째 되던 날 박 바오로와 이문우 요한 등 7․8명의 교우들이 합심해서 순교자의 시체를 훔쳐내고, 20일 가량 지나서 유해를 궤에 넣어 서강대학교 뒤 노고산에 임시로 매장했다. 그리고 4년 후 유해를 훔쳐낸 교우 중 박 바오로가 자기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옆 삼성산으로 이장했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에게 알려주었다. 병인박해 때 박순집의 가문에서는 16위의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정 신부, 나 신부, 범 주교는 1925년 7월 25일 시복 되었고, 1984년 5월 6일 여의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성가 285. 103위 순교 성인
성인 :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불란서 새남터 1839/9/21 43세 군문효수)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조선 대목구 제 2대 교구장이며 주교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조선대목구 초대 교구장인 소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만주 땅 밸리구라는 교우촌에서 요동 통과를 위한 북경 주교의 보증서를 기다리다 뇌익혈로 1835년 10월 20일 43세의 나이로 선종 함으로서 조선 제 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837년 5월 14일 사천 교구장 퐁타나 주교 집전으로 주교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 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모방 신부(1836년 1월 12일 입국) 샤스탕 신부(1837년 1월 15일 입국)와 더불어 교구 설정 7년, 교회 설립 54년 만에 비로소 선교 체제를 갖추게되었다. 범 주교는 수개월 간 조선말을 배우고 교우들의 고명을 들었으며 성체(聖体) 배령(拝領)과 세분 성직자의 손으로 수천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렇게 새로이 태어나는 조선 교회는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에 신자 수가 늘고 윤리 중심적 신앙에서 복음적인 신앙으로 달라지기 시작하였고 1839년 초에는 신자 수가 8천여 명을 넘게되었다. 또한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이재의, 최형, 이문우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몸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고 사제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박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돈에 눈먼 배교자 김순성으로 인해 자신의 거처하는 집이 알려지게 되자 피할 곳도 없으려니와 혹 피한다하여도 수많은 교우들에게 화(禍)가 미칠 것을 염려해서 자헌(自献)하여 포청에 갇히셨고 모방 나 신부, 샤스탕 정 신부에게도 서신을 보내 자헌치명(自献致命)할 것을 권유하고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요한 10.11.) 라는 성서 말씀대로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 땅에서 순교한 최초의 주교요 조선 제2대 교구장은 나이 43세였으며 조선에 입국한지 불과 1년 9개월 만이었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中권369~73, 375~9, 381~3, 457~9, 下권13~5, 339, 390) (103위순교성인들의생애3172)
성인 : 모방 나 베드로(불란서 새남터 1839/9/21 35세 군문효수)
한국 이름은 나백다록(羅伯多禄)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1836년 1월 봉황성에서 조선 교우 정하상, 조신철 등 5명의 교우를 만나 상복(喪腹)차림으로 변장하고 무사히 관문을 통과 입국하였고 그 달 12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조선말을 배우면서 교우촌을 찾아 성사를 주었고, 또한 외방 전교회의 기본 방침에 따라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그 해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여항덕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서양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앵베르 범 주교에 이어 자수하였다. 1839년 9월 홍주에서 샤스탕 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35세였고 한국에 입국한지 3년 8개월 만이다.
모방 신부가 조선 입국 때 착용한 방갓 차림의 상복은 한불 수호조약이 비준되고 1887년 신앙의 자유를 얻을 때까지 프랑스 성직자의 죽음을 피하게 하는 구명복 구실을 했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中권253~4, 282~4,324~5, 358~61, 381~3, 下권148~9, 407) (103위순교성인들의생애3권192)
성인 : 샤스탕 정 야고보(불란서 새남터 1839/9/21 35세 군문효수)
중국 대륙과 만주를 헤매면서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샤스탕 정 신부는 한국 이름이 정아각백(鄭牙各伯)이고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이다. 1827년 1월 파리 외방전교회 사제가 된 샤스탕 신부는 1837년 1월 15일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모방 나 신부와 함께 신유박해로 인해 산간 벽지로 숨어든 교우 촌을 찾아 성사를 거행하였다. 그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그 당시 풍습에는 상주에게 말을 걸지 않는 풍습이 있었음) 험한 산길을 걸어야 했고 먹을 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소금에 절인 야채나 씨래기 국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두 신부님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 해가며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이 땅에 물들였고 샤스탕 신부는 교우들에게 어려운 때를 당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편지를 남기고 앵베르 주교 모방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35세였고 이 땅에 들어 온지 2년 8개월 만이었다.
※ 세분 성직자의 유해는 처형 된지 20일이 지나서 7, 8명의 교우가 목숨을 걸고 시신을 빼내어 노고산에 4년 간 매장하였다가 삼성산(三聖山)으로 옮겨 모셨고 1901년 박순집 베드로의 고증으로 명동성당 지하 묘소에 모시게됐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中권287~90, 324, 343~50, 355~60, 518) (103위순교성인들의생애3권206)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편지 |
說明 |
소인 프란치스코와 다른 조선 교우들은 비록 불쌍한 죄인에 지나지 않사오나 고통으로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주교님 앞에 이마를 조아리며 삼가 이 글월을 올립니다.
저희들의 죄가 크기 이를데 없어 주님의 은총을 잃었사오니 슬프고 가슴아픈 일이 오며, 저희들의 죄로 인하여 우리 영신의 아버지를 죽음의 길로 보냈나이다. 슬픔과 조심으로 인하여 어떤 이들은 흩어지고, 어떤 이들은 종교적 감정이 아주 꺼졌거나 약해졌나이다. 저희들이 열심과 능력으로 얼마간의 도움이 되던 사람들을 잃은 지 벌써 10년이 되었나이다.
저희는 끊임없이 엄중한 감시를 받는 까닭에, 겸손된 청원을 더 일찍 주교님께 올릴 수가 없었나이다. 구세주 오시기를 그렇게도 열망하던 고대의 성인들에 대한 말씀과 열렬한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시는 우리 구세주의 인자하심에 대하여, 성전이 가르치는 육신의 일에 있어서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 사이에 정확하고 틀림없는 관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는 주님을 감동시켜 허락하심을 받는 확실한 방법임을 넉넉히 증명하여 주시나이다.
끝 갈데까지 다간 저희들의 죄악이 하도 크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 죄악들이 하느님의 인자하신 은총을 가로막고 그 흘러내리는 길을 끊어 놓았음을 겸손 되이 인정하나이다.
하느님의 공의 하심이 놀랄 만큼 무섭게 폭발하여, 저희들은 갑자기 벼락을 만나, 겁에 질려 숨을 곳을 찾아 내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었사오며, 맹수의 공격을 받아도 목자가 없으므로 도망하다가 길을 잃고, 의지할 곳도 아무런 구원의 길도 없는 가축 떼와도 같이 되었나이다. 저희들의 죄악이 아니면 이러한 재앙의 원인이 무엇이겠나이까. 저희들의 이 몸은 몹시 조여들고 정신은 심한 고통으로 아득하여졌사오며, 그 괴로움은 저희들의 창자 속까지 스며들어 피눈물을 자아내나이다. 그러나 저희들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무한히 더 크시옵니다. 아아 바라옵건대 주님께서는 당신 공의의 매를 멈추시고, 저희들을 더 용납하시어 저희들의 회개를 기다려 주셨으면! 아 저희가 빠져 들어간 이 참혹한 지경에서 놓여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하여, 구원의 손을 빌려 주셨으면! 눈물과 통곡은 걷잡지 못 하옵고 주야로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이것이옵니다. 저희가 이내 죽음을 당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오직 미사 성제에 참여하고 저희 죄를 고백하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이오니, 그런 다음 곧 죽는다 하더라도 저희들은 만족하고 기뻐 용약(踊躍)하겠나이다.
한편 천주의 성모께서, 예전에 피로써 배교 문서에 서명하였던 어떤 죄인의 청을 들어 주셨음을 생각하고, 또 신앙 없는 어떤 임금이 성체를 모셔 옴으로써 기적적인 감동을 입어 갑자기 입교한 것을 생각하오면, 저희가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하더라도 인자하신 성모님께서 차차 하느님의 의노(義怒)를 푸시고, 그 공의의 결과를 누그러뜨리시어, 저희들로 하여금 칠 성사에 참례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구세주의 오상(五傷)에 안전한 피난처를 얻을 수 있게 하여 주실 것을 저희들은 바라나이다.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저희들의 목자의 발아래 엎디어 바라옵건대 맡으신 바 무거운 직책을 깊이 생각하시어, 저희 죄를 봄으로 인하여 아픔을 꿰뚫고 머리를 찍어누르는 괴로움에 감동되시고, 예외적인 동정의 결과로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저희들에게 성사의 구원을 마련하여 주옵소서. 이를 위하여 저희들은 온 인류에 공통되는 구원의 은총에 의탁하오며,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영광으로 그것을 바라나이다. 아멘
많은 사람들이 주님 따르기를 힘써, 은총의 도우심으로 그들의 공로를 순교로 완성하였나이다. 선교사가 동방에 오시면 1791년에 순교한 윤지충(尹持忠) 바오로로 시작하여 모든 순교에 대한 사적을 수집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나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말씀은 세세 대대로 내려오며, 그대로 채워져야 할 것이 온데, 지금 저희들 나라에서 그것이 증명되나이다.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대가집 양반이나, 고관들의 자손이나, 혹은 현재 관직에 있는 분들 중에도 천주교에 대하여 호감을 가진 사람을 얼마간 만날 수 있나이다. 그러나 이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승진하고자 하는 욕심에, 남의 조소 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나이다. 부자들은 황금에 대한 목마름으로 양심의 소리에 눌리어 버리나이다. 천주교 쪽으로 돌아서서 정의를 찾는 사람들은 가난과 곤궁에 찍어 눌리고, 아무 재원이 없는 사람들 중에 있나이다. 하기는 이 나라의 풍습에 따라 모든 종류의 상업과 조합에는, 이단과 부정행위가 너무 많아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려고 생각하는 교우들은, 그런 사정으로 인하여 못하게 되나이다. 그래서 부유하던 교우들이 가난하게 되었고 가난한 교우들은, 동냥질을 하고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어, 목숨을 이어 나가기에도 천하에 없는 고생을 하게 되나이다. 그러하오나 그들이 원망을 하거나 불평함을 듣지 못하나이다. 그들은 천주교를 봉행할 수 있기 위하여 떠돌아다니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나이다. 이것이 저희들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겠나이까. 이것은 의심 없이 저희들을 위하여 대신 기도하여 주시는 천사와 성인들과 온 성교회가 보호하여 주시는 덕이옵니다.
사업에 재주가 있던 교우들은 1801년 대 박해 중에 모두 죽었나이다. 형벌을 면한 사람이나 숨어 있던 사람들은 겁에 질려 마음이 허탈하다시피 되었나이다. 그들은 모든 가산과 가진 물건들을 다 잃고, 겨우 동냥질로 목숨을 이어나가게 되었나이다. 자족할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나이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하니, 여러 사람들의 뜻이 변하여 겁이 많고 의심이 많게 되었나이다. 그러하오나 그 심한 풍파가 지난지도 10년이 되어, 사정이 달라지고 위험이 덜하게 되었나이다. 차차 용기가 소생할 수 있고 일이 다시 시작될 단계에 이르렀나이다. 만약에 저희들이 성사의 은혜를 받는다면, 천주교는 오래지 않아 새로운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이제 저희들은 재능 있는 분들을 모시지 못하고 오직 순박하고 우둔한 자들 밖에는 없나이다. 저희들은 소원을 가져 보기는 하옵니다 마는 아무런 계획도 수립할 수 없나이다. 일을 처리할 만한 사람을 만난다 하여도, 저희들의 집은 텅 비었고 주머니에는 돈이 없고, 어디에다 손을 내밀어야 할는지 모르오니 울고 신음하고 탄식하는 것 밖에는 또 무엇을 할 수 있겠나이까.
저희들이 10년 전부터 아무도 북경에 보내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나이다. 저희들은 헛되이 머리를 쳐들고, 발을 돋우고 북쪽을 우러러보면서 울며 탄식하였나이다. 저희들은 길이 어렵다고 멈추어 서지는 않았을 것이 오며, 생명이 위험하다고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나 대표들이 북경에 가자면 노비로 소요되는 몇 백 량의 돈을 모을 수가 없었나이다. 처음에는 사방에 수비대를 만들어 나라를 감시하였나이다. 순찰꾼들이 많기가 마치 수풀 속에 나무가 빽빽히 들어찬 것 같았사오며, 국경 지대의 아주 작은 마을에도 전시하의 큰 읍내 모양으로 물샐 틈 없이 지키나이다. 그러던 것이 얼마 전부터 이 엄중한 경계가 좀 풀려 행동할 만한 사태에 이르렀나이다. 그러하오나 한편으로는 저희가 너무 곤궁하여 아무런 재력이 없고, 또 한편으로는 서로 뿔뿔이 헤어져 있어서, 함께 모여 저희들의 소원을 실천에 옮길 수가 없었나이다. 고통에 부대끼고 고뇌에 가득찬 가슴을 안고, 저희들은 할바를 몰라 오직 탄식만 할 뿐이었나이다.
온 나라가 대 박해에 참가하여 어느 좌 중에서나 박해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나이다. 훌륭한 교리와 교우들의 좋은 모범을 모든 사람이 보고 듣고 하였사오며, 교우들의 비장한 설교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나이다. 사람들은 천주교가 세속 학식보다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를 듣고 놀라며, 교우들이 서로 사랑함을 감탄하며, 거의 누구나 그것을 보고 감동하였나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의 죽음을 억울한 것이었다고 비판하며, 살아 남아있는 이들을 동정하고 있나이다. 과연 천상의 광명은 꺼질 수가 없고 양심의 소리는 덮어 누를 수가 없사옵니다. 이런 감정은 모든 사람이 다같이 가지고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나 성사가 마련하여 주는 구원이 없으므로, 안으로는 의지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조소와 천대의 대상이 되고, 눈앞에는 끊임없이 죽음과 형벌이 아른거리면서 밖으로는 압박 밑에 있나이다. 마음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나 무모한 결심을 할까 겁내며, 무엇을 하여야 할지 듣기를 원하오나 아무도 일러주는 사람이 없으므로 참으로 불쌍한 처지에 있나이다. 그러하오나 지금 좋은 기회를 얻었사오니, 주교님은 저희들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거절하지 마옵소서.
1805년 북경에 혹독한 박해가 일어나서, 성당 문이 엄중히 폐쇄되었고 많은 교우들이 사형을 당하고, 서양 선교사들이 옥에 갇히셨다는 소문을 저희들도 들었나이다. 저희들은 이 소식을 듣고 놀랐사오며 지극히 쓰라린 괴로움을 받았나이다. 지금까지 이 풍문의 진위를 밝힐 길이 없어 저희들은 대단히 불안해하고 있나이다. 그러하면 저희들은 크게 위로가 되나이다. 북경 교회 자체가 지극히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고, 저희들의 외부 사정도 지극히 큰 비밀을 요구하는 만큼,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하는 것이 상책일는지 일러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저희들은 주의 도우심을 간구 하오며 아울러 주교님께서는, 저희들이 처하여 있는 무서운 처지에서 저희들을 구해 내는데 가장 유효한 방법을 생각해 내시기를 간절히 비나이다.
대 박해가 있은 뒤로 천주교에 관한 것은, 그 법규와 교리가 모두 온 나라안에 알려졌나이다. 조상과 우상에게 제사 지내기를 금하는 법규를 숨기고 감추려 하여도 소용이 없사옵니다. 대제와 소제를 명하는 법규로도 교우를 알아볼 수 있나이다. 그러한데 천주 십계의 첫째 계명과 교회에서 엄히 명하시는 것으로 말씀하오면, 비록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어기면 아니 되겠지만, 대재와 소재를 명하는 법규는 그와 달라서 가끔 관면이 내리는 것을 저희들은 보았나이다. 길을 나선 사람들과 하인들이 전반적인 관면을 얻을 수 없겠나이까.
포청에 압수된 성서와 성물들은 불꽃 속에 사라졌나이다. 금부에 있던 것은 궤 속에 잠가 보존되었사오며, 선교사와 저희가 위에 말씀한 일이 있는 황사영(黄嗣永) 알렉시오의 글도, 그와 같이 되어 이것들은 모두 왕궁에 들어가 있나이다. 교우들이 온전하게 건진 성서는 거의 없나이다. 지금은 단편과 따로 떨어진 몇 장 밖에는 얻어 볼 길이 없나이다. 신부님의 상본 책과 성작도 모두 없어졌나이다. 그 책 중에서 겨우 조그마한 것 두 권만이 어떤 여 교우의 손에 보존되어 있나이다. 저희들이 본 중국 책들은 대판이어서 감추기가 어렵나이다. 주교님께서 그 책들을 작은판으로 찍게 하신다면 저희들에게 보내시기는 더 쉬울 것이고, 저희들이 숨겨 두기에도 수월하겠나이다. 이 청을 고려하여 주시기를 청하나이다.
성사를 받을 길이 전혀 없는 저희들이어서 임종시에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옵니다. 전대사가 붙어 있는 성물을 가질 수가 있다면 저희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저희들의 신, 망, 애, 삼 덕을 굳게 하는데 도움이 되겠나이다.
주교님과 모든 연락이 두절된 지가 10년이 되므로 저희들은, 교황 성하의 성함도 알지 못하고, 교회를 다스리시는 것이 몇 해 째나 되는지도 모르나이다. 또 북경 교회의 신부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오며, 주교님 밖에 성직자가 몇 분이나 계신지, 중국 교회의 발전이 어떠한 것인지, 천주교가 공공연히 전파되고 행하여지는 나라가 동양에 몇이나 되는 지도 모르나이다. 이 여러 가지 점에 대하여 상세한 것을 좀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나이다.
박해 때에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저희들 중에는 1800년에 북경 천주교회와 비밀히 교섭된 사정을 잘 알지 못하나이다. 그래서 대충 이야기 할 뿐 자세한 내용은 하나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나이다, 그들은 10년이 지난 뒤에 큰배가 오기로 되었다는 것과 남경에 여러 도당들이 크나큰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을 전하여 주었사오며, 북경 교회의 여러 신부들이 동방으로 와서 우리의 구령을 위하여 일하기로 결심하였었다는 말도 하였나이다. 그러하오나 대 박해로 인하여 저희들은 그 선교사들을 영접하러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극히 쓰라린 고통을 겪었사오며, 그 신부님들이 어떻게 되셨는지를 몰라 근심하고 있나이다. 만일 주교님께서 그분들을 몸 성히 있게 하셨으면, 저희들이 북경에 보내는 대표들을 만나보시고 아마 전에 약속하신 것을 이행할 마음이 생기리라고 믿나이다. 저희들은 그분들에게 간청하오며 마치 어린아이가 젖을 갈망하듯 간절히 바라나이다. 저희들은 땅에 엎디어 오직 하나밖에 없는 우리가 의탁할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무엇보다도 간절히 비나이다. 저희들은 구원의 말씀이 별똥같이 빠르게 저희들에게 이르러, 저희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새로 부어 주실 것을 신부님들의 덕과 열에 기대하나이다. 북경에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는 집들 가운데 어떤 집 가까이 있는 가게를 수리해 놓는다면, 저희들이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일이 수월하게 되겠나이다. 이런 편의를 보아주시기를 겸손 되이 청하나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신부님과 많은 교우들이 사형을 당한 후, 저희 조정에서는 그 사정을 중국 황제에게 토사진문(討邪秦文)으로 품신 하였나이다. 북경 교회에서도 이에 대하여 약간 들으셨으리라 생각되나이다. 그들은 배교자이며 천주교를 팔아먹은 자들로, 이런 방법으로 충성심을 드러내어 무슨 상금이나 받으려고 생각하는 자들이옵니다. 주교님은 그들의 악의를 알아보시어 거기에 속아넘어가지 않으셨으리라 믿나이다. 주교님과 저희들 사이에 연락이 막히는 경우에는, 북경 시내에 있는 교우집 하나를 정해서 거기서 만나는 것이 적당치 않겠나이까. 저희 임금님의 병환이 대단히 중하시어 기력이 쇠진한 것 같고 약석(薬石)이 아무 효력이 없나이다. 저희는 본교회(북경교회)에 청하오니 저희 임금님을 보호하시고, 건강을 도로 주시기를 천주님께 청하여 주옵소서.
교황 성하께 글월을 올리는 것은 저희들 처지에 크게 지나친 일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저희들이 처하여 있는 사정으로는 달리 할 수가 없었나이다. 저희들의 편지를 번역하시어 교황 성하께 보내 주시기를 주교님께 청하나이다. 이것은 저희 비천한 가운데에서, 천주의 지상 대리자시요 우리 행복의 원천이 되시는 그 어른께 드리는 효성의 조그마한 표적이옵니다. 저희들의 사정이 그 어른께 소상히 알려져서 저희들에 대하여 동정심을 갖게 되시기를 바라나이다.
아뢸 말씀은 아직 무한히 많사오나, 그것을 지필로 다 옮길 수가 없나이다. 편지를 가지고 간 사람이 어느 정도 보충하여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저희들을 생각 하사, 빨리 결정을 내리시고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과 구속의 공로로 인하여 주교님의 강복을 저희들에게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아멘-
1811년 12월 18일
수리산 담배골 성지
성지 설명 |
☏ 031-449-2842
031-441-3531
소재지 : 안양시 안양 3동 담배골
안양 수리산 담배골은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해 왔다고 해서 담배골이라고 부른다.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좁다고 하여 병목안이라 불리던 수리산 골짜기는 박해 때 외계와 단절된 피난처 구실을 해 왔었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사목활동을 했던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성인의 묘가 수리산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최경환 성인은 원래 청양 다락골에서 3대째 신앙을 지켜 왔다. 그는 서울의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 길을 나섰다. 또 경기도 부평을 헤매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안양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이 골짜기에서 담배를 재배하며 박해를 피해 들어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이끌고 회장직을 맡아 열심히 선교 활동을 하였다. 여기서 그의 장남 최양업(崔良業)이 신학생에 발탁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에게 시달렸다.
1839년 기해박해 때 배교자 김순성의 안내로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에게 잡혀가 그 해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 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인 이성례 마리아는 음력 12월 27일 당고개에서 처형되었다.
어린 아들들은 어머니의 참수형 당할 날짜를 알고 4형제가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와 돈을 가지고 희광이를 찾아가서 어머니가 고생을 덜하게 단칼에 베어 달라고 사정을 했다. 이에 감동한 희광이는 칼을 잘 갈아 다음날 약속을 지켜 주었다. 먼발치에서 어머니의 순교 장면을 바라보던 아이들이 저고리를 벗어 하늘로 던지며 “우리 엄마 천당 갔네, 우리 엄마 천당 갔네.” 하며 울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성가 55. 착하신 목자
성인 : 최경환 프란치스코(청양 포청옥 1839/9/12 장독)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친인척 관계
성 명 |
관 계 |
순 교 일 |
성별 |
형 지 |
시복시성 |
나이 |
최경환 프란치스코 |
본인 |
1839/ 9/12 |
남 |
옥사 |
성인 |
34세 |
이성례 마리아 |
아내 |
1840/ 1/31 |
여 |
당고개 |
시복시성청원자 |
37세 |
최양업 토마스 |
큰아들 |
1861/ 6/10 |
남 |
문경병사 |
시복시성청원자 |
신부 |
이존창 루도비꼬곤자가 |
처조부 |
1801/ 2/28 |
남 |
공주 |
순교자 |
50세 |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은 충청도 홍주(洪州) 지방 다락골(지금의 忠南 青陽郡 化城面 農岩里)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이미 3대째 천주교를 믿어왔고 성장해서는 이존창의 후손인 이성례와 결혼하였다. 박해 시대에 드러내놓고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웠으므로 여러 교우 촌을 전전하면서 신앙 생활의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다녔다.
또한 장남인 최양업을 신부로 만들기 위해 불란서 선교사 모방 나 신부에 의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보낸 일로 그 당시 공갈배들의 훌륭한 미끼였다. 그는 관가에 고발당하지 않으려면 돈을 내라는 협박의 시달린 끝에 가족들을 설득하여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춘천(春川) 경기도 부천(富平)을 거처 외계와 단절된 피난처 과천(果川)의 수리산(修理山 일명 병목골 또는 담배골)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하였다.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하고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동리 교우와 가족 등 40여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기록에는 체포라기보다 스스로 순교의 각오로 포졸들을 기다렸고 새벽에 들이닥친 포졸에게 “어찌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좀 쉬었다가 떠납시다.” 라고 말했다. 그는 교우 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교우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한편 그의 부인 이성례 마리아는 포졸들에게 식사를 권했다.
아침을 먹고 나서 포졸들은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와 아들 5형제(희정 15세 선정12세 우정9세 신정6세 세 살짜리 젖먹이)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다 옥에 가두었다. 옥에 갇힌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걸러 한번씩 태형과 주리를 트는 고문에 뼈가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증인들에 의하면 그는 태형 340대와 곤장110대를 맞았다고 한다) 그래도 신앙을 굽히지 않자 판관은 마지막으로 배교를 강요하며 치도곤 50대를 쳤다. 옥에 돌아온 최경환은 최후의 순간을 직감하고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 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내가 옥안에서 죽는 것을 원 하시니 천주의 성의(聖意)가 이루어 지이다.” 하는 말을 남기고 1839년 9월 12일 35세의 나이로 옥사 순교하였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中권429, 430, 433, 474, 513 415) (103위순교성인들의생애1권282)
시복시성청원자 : 이성례 마리아(청양 당고개 1840년 1월 31일39세) 참수
이성례 마리아 친인척 관계
성 명 |
관 계 |
순 교 일 |
성별 |
형 지 |
시복시성 |
나이 |
이성례 마리아 |
본인 |
1840/ 1/31 |
여 |
당고개 |
시복시성청원자 |
39세 |
최경환 프란치스코 |
남편 |
1839/ 9/12 |
남 |
옥사 |
성인 |
36세 |
최양업 토마스 |
큰아들 |
1861/ 6/10 |
남 |
병사 |
시복시성청원자 |
40세 |
이존창 루도비꼬곤자가 |
조부 |
1801/ 2/28 |
남 |
공주 |
순교자 |
50세 |
이성례 마리아는 교회 창립 초기에 내포 지방의 사도였던 이존창(李存昌)의 손녀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하였다. 18세에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결혼하여 여섯 아들을 두었다. 청양 다락골에서 박해를 피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서울과 춘천, 그리고 부평으로 피해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안양 수리산에서 살다가 남편과 40여명의 교우들과 함께 포졸에게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본래 부모와 어린이를 함께 투옥시키는 예는 국법에도 없었으나, 이 집은 열다섯 살에서 세 살 된 막내 스더왕까지 함께 갇혔다. 또한 국법에 없다 하여 아이들의 밥은 나오지 않았으므로, 어쩌다 밥 한 덩어리가 생기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어머니는 굶었다. 더러운 감방에서 아이들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는 어머니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때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모진 형벌 끝에 옥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성례 마리아는 어떻게 해서든지 목숨을 부지하여 아이들을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배교하고 감옥에서 나왔다(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 그러나 그의 아들 최양업 도마가 신학생으로 마카오에 보내진 것이 탄로 나서 다시 형조로 이송되었다. 옥에서 정하상의 동생 엘리사벳과 현석문의 누님 분다 등 여교우들이 간곡하게 죄를 기워 갚으라고 권고하였다(최바리시오이력서). 마리아는 다시 열렬한 구변으로 관장 앞에 자복하고 치명 예비로 지내고 있었다. 이때 세 살짜리 막내 스더왕은 유두가 끊겨 굶어죽고 말았다.
밖에서 문전걸식을 하던 둘째 아들 희정 야고보는 어린 동생들과 함께 다니다가 어머니가 갇혀 있는 옥에 찾아와 창살을 붙들고 목메어 불렀다. 그러나 이성례 마리아는 다시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 돌아앉았다. 일찍 철이 난 희정 야고보는 어린 동생들을 달래며 발길을 돌렸다. 거지로 떠돌아다니던 4형제는 어느 날 부잣집에서 얻은 인절미를 식지 않게 가슴에 품고 옥에 찾아와 어머니에게 넣어 주었다. 어린 아들의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는 그 떡을 목이 메어 어떻게 넘겼겠는가?
하루는 야고보가 찾아오자, 아들의 머리를 빗겨 주면서 “아무쪼록 어린 동생들을 사랑으로 보호하고 어려우면 친척집에 가서 지내다가 마카오에 간 네 형이 신부가 되어 돌아오면, 너희들이 고생을 면할 것이니 그때까지만 참고 지내거라. 그리고 며칠 있으면 엄마가 치명 당할 것이니 그 날은 여기에 오지 말아라.” 하고 당부하며 흐르는 눈물을 삼켰다.
어린 야고보는 가슴이 막히고 슬프기 그지없었지만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희광이를 찾아갔다. 한 푼, 두 푼 동냥한 돈과 쌀자루를 희광이에게 주면서, 고생을 많이 한 우리 엄마가 순교할 때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에 보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희광이도 감동하여 밤새 칼을 갈아 이튿날 당고개 형장에서 약속을 지켜 주었다. 먼발치에서 장렬하게 순교하는 어머니를 바라본 네 형제는,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 장면을 보고, 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면서 “우리 엄마 천당 갔네, 우리 엄마 천당 갔네” 하며 울었다.
이성례 마리아는 39세로 순교하였지만 인간적인 모성애로 한번 배교한 것 때문에 성인품에 오르지 못하였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중권432, 434, 531)
성가 62.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최경환 이성례 부부 순교 |
說明 |
파리의 르그레조아 신부에게
공경 하올 신부님
배론에서 1855년 10월 8일
금년에는 신부님들한테서 아무 편지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연락원들이 상해(上海)로부터 소식을 전할 배를 왜 하나도 만나지 못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연락원들을 배에 태워 보냈었습니다. 그들은 상해에서 나오시는 베르뇌(Berneux,張敬一) 새 주교님을 영접하는 동시에 신부님들의 소식과 새로 나오실 선교사들의 소식 등을 알아보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 배가 강남서 나오는 교우 배를 만났습니다만 그 강남 배를 통해 주교님 일행이나 편지들을 실은 배가 오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배는 연락원들을 강남 교우 배에 옮겨 실은 후, 서양에서나 중국에서 전하는 아무 소식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신부님들이 편안히 계시기를 바라며 또 우리 연락원들이 강남까지 무사히 도착해서 새 주교님과 다른 선교사들을 무사히 모셔 오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편안히 있습니다. 금년은 태풍이 불어서 불쌍한 우리 교우들에게 큰 고통이 되었습니다. 우리 신부들에게도 하느님께서 큰 즐거움을 내리셨으니 많은 새로운 형제들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내가 영세 준 숫자만 해도 대인 1,24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통한 일도 있었습니다. 영세자들 중에 양반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처음에는 가장 열성 있고 굳세어 보였습니다만 지금은 가시덤불이 무성해져서 숨막혀 시들어 졌습니다. 양반 족속의 사람들은 대개가 한가로운 생활을 합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또 처자들이 굶어 죽어도 절대로 일은 하지 않고, 불의와 사기와 착취 등으로 살아갑니다. 노름과 음주와 방탕에 빠져 있습니다.
저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면 그런 방탕한 생활이 금지되고 또 정직한 직업을 가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곧 먹을 것이 없게 되고, 또 먹을 것이 없으니 이전의 못된 버릇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전보다도 더 나쁘게 됩니다.
지금까지 정부는 우리 교우들에 대해 침묵을 지킵니다. 왜냐하면 더 중요한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왕의 조상들의 여덟 개의 묘를 이장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관들의 말이 묘 자리가 불길하여 후손들이 영달하지 못하므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지관들에 의해 새로 지정된 묘 자리는 어느 읍내가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그곳 주민들이 쫓겨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몇 달 전에 이미 죽은지 오래된 현 임금의 고조부 벌되는 사람을 추존(追尊)하느냐, 안 하느냐의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 고조부는 당파 싸움에서 역적으로 몰려 그의 부친이 살아 있을 때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처형에 동의했던 대신들의 후손들이 현정권의 요직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조상들이 무죄한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사후 복직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먼저 주장한 자는 귀양을 갔고, 나머지 1,000여명은 벼슬자리를 잃었습니다.
최근에 한가지 법을 정하였는데 교자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사형에까지 처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우스꽝스러운 법 때문에 어떤 사람은 목숨을 잃었고, 어떤 사람은 귀양을 갔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반대에 부딪쳐 이 법이 흐지부지되고, 몇 달 전부터 마음대로 교자를 타고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신부님은 이따위 정치인들이 다스리는 정부가 어떤 것이고, 또 그 백성들이 얼마나 불쌍한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보내신 마지막 편지에 나의 부모님, 즉 최 방지거와 이 마리아의 순교 행적에 대해 자세히 보고하라 하셨습니다. 부모님들의 체포, 형벌, 문초, 치명 등에 관한 경로를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증인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벌써 신부님께 보고한 것보다 더 자세한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부친 방지거와 같이 체포되었다가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그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방지거가 형벌을 당한 후 반은 죽어서 감옥으로 옮겨졌습니다. 차츰 정신을 되찾고 신음하는 소리를 하며, 같이 체포되었다가 형별을 못 이겨 배교한 자들에 대해 아주 마음으로 슬퍼하였습니다. 마지막 형벌을 받은지 사흘 후 같이 잡힌 동료에게나는 오늘 죽을 겁니다. 목이 아주 마르니 마실 것을 좀 찾아 주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또 물을 마신 후 다시 한번 배교자들에게 동정하는 말을 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게 운명하셨다고 합니다.
모친 마리아에 관하여는 아무 증언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형벌을 받을 때 유일한 증인으로 남아 있었던 아들 야고보를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십자가에 동여 매여 차에 실려 형장으로 떠나려 할 때 유일한 증인으로 남아 있던 아들 야고보를 내보낸 것은 그 광경을 서로 바라보다가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했던 때문입니다. 다만 마리아가 감옥 하인 하나를 가르쳐 예비시켰는데, 영세는 못하였으나 그가 형장에까지 따라가서 마리아가 흔연한 낯으로 형벌 받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고, 또 그 이야기를 아들 야고보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부모들의 시체는 다 찾아서 아들과 친척들이 장사 지냈습니다.
그러나 모친 마리아의 시체는 같이 참수된 동료 치명자들과 함께 묻혔으며 또 외인들이 무서워서 밤중에 외인들 무덤 가운데 묻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 무덤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부친 방지거는 교우들 무덤 사이에 똑똑히 구별할 수 있게 묻혔습니다.
신부님께서 또 다른 순교자들과 기타 주목할 만한 사건을 적어 보내라 하셨습니다. 이런 사건에 대해 글로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들이 있으나 충분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신부님께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이후 정확한 사실이 있으면 보고하겠습니다. 새 주교님 오시기만 초조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아무 것도 청구하지 않겠습니다. 저번에 청구한 것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도착하면 다른 물건들을 또 청구하겠습니다. 기도 중에 나와 나의 불쌍한 교우들을 잊지 말아 주시기 부탁합니다.
최 도마 올림
미리내 성지
성지 설명 |
☏ 031-674-1256-7
소재지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 141
미리내는 안성에서 북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에, 은하수처럼 아름다운 개울이 있다는 뜻으로 미리내라고 한다. 이곳에는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어머니 고 우르슬라, 김 신부에게 사제 서품을 준 제 3대 조선 교구장인 페레올 고 주교의 묘도 여기에 있다.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여기에 뭍인지 50년 후인 1896년에 본당이 설정되었고 신자 수는 1천 6백여 명이었다.
페레올 고 주교는 김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듣고 “과연 그에게는 어떤 일이든지 맡길 만 하였고, 그의 성품이나 일하는 태도와 지식 등 어느 모로 보든지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를 잃은 것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할 재앙이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조정에서조차 외국 문물에 능통하고, 박학 다재한 그의 재능을 대신들까지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김 신부는 희광이 칼 앞에서도 태연하게 “이 모양으로 있으면 칼로 치기 쉽겠느냐?” 하고 묻고 “자 준비가 되었으니 쳐라.” 하고 말했다. 국사범으로 처형된 다른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 신부는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게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꾼이 지켰다. 이민식과 신자들은 김 신부가 치명한지 40일만에 파수꾼의 눈을 피해 시신을 찾아내어 150리나 되는 험한 산길을 밤에만 운구하여 일주일만에 미리내에 도착했다. 이민식 원선시오는 미리내에 도착하자 날이 밝아 콩밭 골에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을 감추고 숨어 있었는데, 밭주인이 일꾼을 데리고 와서 밭 한쪽에서부터 콩밭을 매며 오는데 신부님의 시신을 감춘 지점에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이민식 원선시오는 숨어서 묵주 기도를 바치며 성모마리아에게 열심히 기도하였다. 이때 난데없는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밭주인은 콩밭 매기를 중단하고 일꾼들과 비를 피해 마을로 내려갔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 바로 햇빛이 나고 날씨가 좋아졌다.
이민식은 자기 선산에 와서 보릿짚 속에 신부님의 시신을 감추고, 밤에 나와서 현재 경당이 있는 자리에 땅을 파고 묻었다. 하관 할 때 백토로 김대건 신부의 관을 덮고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김대건 신부의 관’이란 글씨를 쓰고 그 위에 숯가루를 놓아 이름을 새기고 묘를 만들었다.
이민식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모신 자리를 아침저녁으로 보살폈다. 그로부터 7년 뒤, 페레올 고 주교가 선종 함에 따라 주교의 유언대로 그를 김 신부 옆자리에 장례 지냈다. 김 신부의 어머니 고 우르슬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둔 후 김 신부 옆에 나란히 모셨다. 그리고 미리내 성지를 만들게 한 이민식도 92세까지 장수하다 죽어서 김 신부 곁에 묻혔다.
미리내는 성모 성심 수도회와 천주 성삼성직 수도회가 있다. 이곳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유해를 모신 경당을 비롯해 주차장, 피정의 집 등이 있다.
경당에는 현재 여섯 분의 묘소와 함께 김 신부의 하악골(아래턱뼈) 유해를 모시고 있다. 두개골은 서울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성신교정) 성당 안에 안치돼 있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103위성인 기념 대성당도 지어졌다. 또 주차장 뒤에는 게쎄마니 동산도 조성되어있다. 여기 저기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피땀 흘리며 기도를 바치는 예수님, 그와 반대로 잠에 곯아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놓았다. 옆에는 수원 교구 성직자 묘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위쪽으로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가 있다.
성가 286. 순교자의 믿음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회유문 |
說明 |
이 편지는 김대건 신부가 1846년 8월말에 감옥에서 신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쓴 회유문이다. 그리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다. (성김대건안드레아신부의서한 384-387)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 지어다.
천주께서 무시지시(無始之時)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慰藉)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이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을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背主背恩)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得罪) 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
밭을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 이르러 곡식이 잘되고 영글면, 마음의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요. 곡식이 영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 빈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 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 땅을 밭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영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 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영근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로 천국을 누릴 것이요. 만일 영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는 제형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가운데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나게 하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예수 승천 후 종도 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성교 두루 무수 간난(艱難) 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조선이 성교 들어온 지 5, 60년에 여러 번 군난(窘難)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熾盛)하여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을 당하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 지심이 없으며 육정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 돌아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다 할 군난이 주명 아니면 주상주벌 아니랴. 주의 성의를 따라오매,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 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遑遑)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앗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광영(為主光栄)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는 20인은 아직 주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들의 가족을 부디 잊지 말라. 할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의 이런 난시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말고, 주야로 주우를 빌어 삼구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 광영하고 여등(汝等)의 영원 대사를 경영하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 구령사(事主救霊事)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修治)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 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矜憐)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서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 하노라.
부감목 김 안드레아.
세상 온갖 일이 막비주명(莫非主命)이요 막비주상주벌(莫非主賞主罰)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편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내 천주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말고, 큰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
잘 있거라.
김 신부 사정 정표
성가 236. 사랑하올 어머니
☞천주교 전국 성지 순례 코스☜
1. 전국 성지순례의 의미
전국의 주요 성지와 유적지를 15개 코스로 나누어 성지 안내 봉사자의 안내를 받으며, 교회사에 나타난 역사적 의미와 관련된 행적들을 묵상하고, 성직자와 신자들의 박해 상황, 서간이나 기록에 나타난 순교자들의 행적을 되새겨 보는 1일 성지순례 피정입니다.
2. 순례코스
제 1차 어농, 단내, 천진암 강학터, 남한산성 성지.
제 2차 전동성당․풍납문, 전주숲정이 성지.
제 3차 배론 성지, 묘재, 용소막성당, 부엉골신학당.
재 4차 초남이 유항검생가터. 치명자산.
제 5차 갈매못 성지, 다락골줄무덤 성지, 홍성읍성 성지.
제 6차 마원 성지, 최양업 신부 선종지, 연풍, 감곡성당.
제 7차 황새바위 성지, 수리치골, 여사울, 신리 성지.
제 8차 풍수원 성당, 마재 정약종 유적지, 구산 성지
제 9차 여산 숲정이 성지, 천호산 성지,
제10차 삼성산 성지, 수리산 성지, 미리내 성지,
제11차 배티 성지, 죽산 성지, 은이 공소, 골배마실.
제12차 나바위 김대건 신부 귀착지. 김대건신부 출생지.
제13차 해미 성지, 성거산 성지, 공세리 성당
제14차 갑곶돈대 성지, 이승훈 묘 성지, 남양 성모 동산.
제15차 대구 관덕정 성지, 한티 성지, 신나무골 성지,
부록 명동성당, 서소문,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성지.
3. 준비 사항
◉ 안 내 : 한국순교자 현양회 성지안내 봉사자회
◉ 출발 도착 : 매월 3번째 주일 사당역 1번 출구 아침 8시출발․오후 8시 도착예정
◉ 신 청 : 본당 또는 단체별로 버스 1대 40명 기준
◎ 순교자현양회 주소 : 서울 중구 명동 2가 1번지 가톨릭 회관
◎ 안 내 전 화 : 순교자현양회 사무국 02-2269-0413~4 F 02-2269-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