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 천사 기념일
축일:10월 2일
수호천사 守護天使
(custos angelus. guardian angel)
하느님의 명에 따라 사람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천사. 하느님의 섭리는
피조물을 통하여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부모를 통하여 자식을 기르고 스승을 통하여
학생을 교육시키는 경우가 그 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각 사람들에게 날 때부터
수호천사 하나씩 정하여 주어 사람을
보호하게 하였다(마태 18:10).
또한 국가나 교회 같은 단체에도 수호천사를
준 것 같다(다니 10:21-12:1, 출애 23:20).
수호천사는 사람이 가는 길마다 지켜 주고
(시편91:11) 사람의 시중을 들어 주며(히브 1:14)
기도를 하느님께 전달해 준다(토비 12:12).
그러므로 각 사람은 마치 성조 야고보가
마지막으로 자손들에게 강복할 때
"모든 어려움에 서 구해 준"(창세 48:16)
천사를 불렀듯이 수호천사의 도움을 구하며,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도록 마음속으로
권고하는 그의 말을 듣고자 노력해야 한다.
교회에서는 10월 2일에 수호천사를 기념하는
축일로 지내고 있다.
이는 일찍이 교황 글레 멘스 10세가 규정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1667년 교황 글레멘스 9세는
9월 첫 주일을 그 축일로 정한 적이 있고
13세기 스페인에서는 3월 1일에 그 축일을
지내기도 하였다. (가톨릭 대사전에서)
9월29일에 지내는 대천사들의 축일에는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천사들과 만나
어우르게 된다.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은
천사들의 핵심 소명이다.
오늘 입당송과 영성체송에서는 하느님을
계속해서 찬미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과
교회의 가장 기본 사명이다.
그러나 오늘 지내는 수호 천사 기념일에는
천사들의 또 다른 역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수호 천사들은 사람들을 곁에서 지켜 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놀라운 섭리로
긴 여행길에서 선조들을 인도하거나
하느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그 백성을 지켜 주려고 파견되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려 준다.
그리고 오늘 화답송은 "주님께서 너를 두고
천사들을 명하시어,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셨도다."(시편 91,11) 하고 노래한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는
천사들의 도움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품위를 말씀하시면서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마태 18,10)고 선언하신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수호 천사는 바로 이러한 기도에 응답하는
하느님의 힘이다. 우리는 천사들의 끊임없는
보호를 받아 현세의 모든 위험을 이겨 내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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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레오데가리오(Leodegarius)
축일 10월 2일
성 레오데가리우스(또는 레오데가리오)는
클로테르 2세(Clotaire II)의 궁정에서 자랐고,
그의 삼촌인 푸아티에(Poitiers)의
디돈(Didon) 주교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는 디돈 주교에 의해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은 후
651-653년경에 막센티우스(Maxentius) 수도원의
원장이 되어 그 수도원에 성 베네딕투스
(Benedictus)의 수도규칙을 도입하였다.
이 시기에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겸손한 영혼을 가진
사제로서 생활하였다.
그가 궁정에 자발적으로 갔는지 소집되어 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655년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 2세(Clovis II)가 사망하고 훗날
클로테르 3세가 될 아들이 아직 어려 왕비인
성녀 바틸다(Bathildis, 1월 30일)가 섭정을 할 때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왕비를 보좌하였다.
663년에 오툉의 주교로 임명된 후에도
그는 여왕을 계속 도왔다.
당시 오툉 교구는 완벽한 무질서 상태였다.
2년 동안 주교가 없었고 그 전에는 두 명이
주교좌를 놓고 서로 다투기까지 하였다.
그 중 한 명은 살해당했고 다른 한 명은
권력의 남용으로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래서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마을의 성곽과
주교좌성당을 재건하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설교를 통해 평화와 화합으로 이끌지 못하는 이는
정의와 두려움을 통해서 평화에로 이끈다.”
라는 속담이 있었다.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매우 엄격한 주교라는
평을 듣곤 했지만 교구를 분열시켰던 파벌싸움을
화해시키고, 개혁 정책을 도입하여 모든 수도원에
성 베네딕투스의 수도규칙을 도입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유명해졌다.
성녀 바틸다가 섭정에서 물러나고 클로테르 3세가
죽자 그는 궁정 대신이었던 에브로인(Ebroin)이
후원하는 티에리(Thierry)의 동생인 어린
칠데릭 2세(Childeric II)를 왕으로 지지하였다.
결국 칠데릭 2세가 왕위에 올랐고 에브로인은
뤽세이유(Luxeuil)로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삭발 수도사가 되었고, 칠데릭 왕의 조언자가 된
성 레오데가리우스의 신랄한 반대자가 되었다.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많은 일들을 엄격하게
처리하면서 불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의 높은 지위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칠데릭 왕이 그의 삼촌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비판하여 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어느 부활절에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되는 부활 대축일 미사에
칠데릭 왕을 초대했으나 왕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왕은 술에 취한 상태로 와서
큰 소리로 무례하게 소리를 지르며 미사를 방해했지만
왕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왕의 분노를 피해 도망가기로 결정했으나
오래지 않아 붙잡혀 궁정으로 소환되어 재판을 받고
675년에 뤽세이유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675년 칠데릭 왕이 살해당하자 그의 후계자인
테오도릭 3세(Theodoric III)는 성 레오데가리우스와
에브로인을 다시 궁정으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에브로인이 오툉을 공격하였을 때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마을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항복하였다. 결국 그는 에브로인에 의해
눈이 두 눈이 뽑히는 등 잔혹한 형벌을 당한 후
숲으로 쫓겨났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는 굶주림 속에서 죽어갔으나
그를 지키던 경비병이 불쌍하게 생각하여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치료하고 돌보아주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은 에브로인은 몇 년 후
칠데릭 왕이 성 레오데가리우스와 그의 형
성 게리누스(Gerinus, 10월 2일)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왕에게 주장하였다.
결국 성 게리누스는 돌에 맞아 죽었고,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고문을 당한 후 불구자가 되어
노르망디(Normandie)에 있는 페캉(Fecamp)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그가 자신의 형 성 게리누스의 죽음에 관해
어머니께 보낸 편지가 전해지고 있다.
2년 후 에브로인에 의해 궁정에 소환된 그는
주교좌에서 축출되었고, 그의 무죄 주장에도 불구하고
적대자들에 의해 아르투아(Artois) 부근의 숲에서
살해되었다. 로마 순교록은 그를 복자와 순교자로
호칭하고 있고, 성 레제르(Leger)로 널리 알려져
공경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그에게 이러한 영예가
부여되었는지에 대해 학자들은 많은 의심을 갖고 있다.
예술 작품에서 그는 눈이 도려내어지고 송곳으로
뚫린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는 시각 장애인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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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리무스(Primus)
성 키릴루스(Cyrillus)
성 세쿤다리오(Secundarius)
축일 10월 2일
성 프리무스(Primus)와 성 키릴루스(Cyrillus)
그리고 성 세쿤다리우스(또는 세쿤다리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초기 박해 중에
시리아(Syria)의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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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레제르(Leger)
축일 10월 2일
성 레제르는 663년에 오툉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아주 엄격한 주교로
소문이 났다. 그러나 그는 뜻하지 않은
정치극에 휘말리게 되어 주교좌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적들로부터
살해당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순교자로도 공경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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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엘레우테리오(Eleutherius)
축일 10월 2일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이 불탔을 때
니코메디아(Nicomedia)의 군인이던
성 엘레우테리우스(또는 엘레우테리오)와
몇몇 신자 군인들이 방화범으로 고발되었다.
이들은 모두 잔인한 황제의 명에 따라
죽음을 당하였는데, 어떤 이는 칼로 또
다른 이들은 화형으로 또 그 나머지는
바다 속에 밀어 넣어 죽였다.
엘레우테리우스는 그들 가운데 유일한 장교였기
때문에 황제는 일부로 그를 천천히 죽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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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제리노(Gerinus)
축일 10월 2일
성 게리누스(또는 제리노)는
성 레오데가리우스(Leodegarius, 10월 2일) 주교의 형으로
궁전 행정관인 에브로인(Ebroin)의 명령에 의해
프랑스의 아라스 근교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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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Thomas)
축일 10월 2일
영국 잉글랜드(England)의 헤리퍼드의 주교이며
토마스 켄틀루프(Thomas Cantelupe)라고도
불리는 성 토마스는 노르만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서 헨리 3세의 무관인
바론 윌리엄 켄틀루프의 아들이다. 그는
잉글랜드 버킹엄셔(Buckinghamshire)에서 태어나
삼촌인 우스터(Worcester)의 월터(Walter)
주교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 후 토마스는
부친과 함께 1245년의 리옹 공의회
(Council of Lyon)에 참석했는데, 아마도
그 이후에 사제로 서품된 듯하다. 그 후
그는 오를레앙(Orleans)과 파리(Paris)에서
법률을 공부하였고, 옥스퍼드(Oxford)에서는
교회법을 교수하였으며 1262년에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정의와 융화를 바탕으로 직무를
수행하였으나 시몬 드 몽포르
(Simon de Montfort)의 죽음을 계기로 파리로
은퇴하였다가 1274년에 헤리퍼드의 주교로
착좌하였다. 그는 교구의 개혁을 조심스럽게
단행하였고, 속권에 의해 유린된 교회의
권리를 회복시켰으며 참으로 지혜롭게 교구를
지도하였다. 그의 만년은 주로 캔터베리
(Canterbury)의 대주교인 토마스 존 페크햄
(Thomas John Peckham)과의 교회법적 논쟁으로
보냈는데, 1282년에는 그 대주교에 의하여
파문 처분을 당하였다. 토마스는 이 사건을
교황에게 상소하기 위하여 로마(Rome)로
가던 중 몬테 피아스코네(Monte Fiascone)에서
서거하였다. 그는 1320년에 교황 요한 22세
(Joannes XXII)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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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테오필로(Theophilus)
축일 10월 2일
불가리아 태생의 성 테오필루스(또는 테오필로)는
소아시아 지방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성화상 반대론자인 이사우리아(Isauria) 왕조의
레오 황제의 정책을 공공연하게 반대함으로써
황제에 의해 추방되었고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