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호수/모윤숙
호수 밑 그윽한 곳
품은 꿈 알 길 없고
그 안에 지나는 세월의 움직임도
내 알 길 없네
오직 먼 세계에서 떠온 밤 별 하나
그 안에 안겨 흔들림 없노니
바람 지나고 티끌 모여도
호수 밑 비밀 모르리
아무도 못 듣는 그곳
눈물 어린 가슴 속같이
호수는 별 하나 안은 채 조용하다
=한국 대표 명시 3, 빛샘=
모윤숙/毛允淑
출생: 1910년 3월 5일 함경남도 원산시
사망: 1990년 6월 7일 (향년 80세) 서울특별시
학력:-
원산보통학교 (졸업)
함흥영생보통학교 (졸업)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 제적)
이화여자대학교 (문학 / 명예박사)
함경남도 원산시에서 모학수의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 모씨이고 원적지는 평안북도 정주군이다.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영문학 전공) 선과로 입학했으나 2학년 때 제적됐다.
이광수의 소개로 만난 안호상과 결혼하였지만 딸 경선을 낳고 바로 이혼하였으며 1990년 서울특별시에서 80세의 나이로 별세할 때까지 평생 홀몸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초기 작품인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은 '일제 치하에서 민족적인 진로를 모색하는 의미와 정열적인 삶을 추구하는 시인의 지향'이 엿보인다지만 이런 해석은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다.
모윤숙의 친일 행위는 유명한 편으로 학병 지원 글을 많이 쓰고 다녔는데 특히 매일신보 기사글 찾아보면 고정 필진급. 당시 모윤숙과 함께 친일 반민족 행위에 앞장섰던 여성계 지도자들이 박마리아, 김활란, 노천명 등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여성 친일파들은 광복 이후 일제히 반공을 부르짖으면서 독재 정권의 앞잡이가 되었다.
1940년 11월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맡아 1943년 4월까지 활동했다. 1941년 1월 『삼천리』에 시 「지원병에게」, 5월 『매일신보』에 시 「아가야 너는-해군 기념일을 맞이하여」를 발표했다. 같은 해 9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채권가두유격대’를 꾸려 ‘애국채권’을 팔 때 종로대원으로 참가했으며, 조선임전보국단의 경성지부 발기인 겸 산하 부인대의 간사를 겸임했다. 같은 해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사업부 부원을 맡았고,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도 전사(戰士)다」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1942년 2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의 군복 수리 근로와 조선임전보국단과 국민총력 경성부연맹이 주최한 ‘저축강조 전진 대강연회’ 연사, 5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주최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 12월 ‘대동아전(大東亞戰)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회’에 참여했다. 1943년 3월과 8월 작사한 군국 가요 「군국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희망」이 방송되었고, 8월 경성부와 대일본부인회 경성지부가 공동 개최한 부인계발강연회에 ‘시국에 처한 부인의 각오’란 주제로 강연했다. 같은 해 11월 12일자 『매일신보』에 시 「내 어머니 한 말씀에」를 발표하고,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선전 선동하기 위해 조직한 전위여성격려대의 강사로 활동했다. 1945년 7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후신인 국민의용대의 경성부 연합 국민의용대 결성식에 참석했다.
1948년 제3차 UN 총회 한국 대표로 참가해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는데 사실 모윤숙이 제대로 활동한 것은 이승만 지지를 위한 로비 활동이었다.
1948년 당시 남한 단독 정부를 반대하던 인도의 외교관 벵갈릴 크리슈난 크리슈나 메논과 교제하면서 이승만 지지 측으로 회유시켰다. 모윤숙은 이에 대해서 "만일 나와 메논 단장과의 우정 관계가 없었더라면 단독 선거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계셨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라고 했고 메논은 이 심정 변화에 대해서 "외교관으로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이성(reason)이 심정(heart)에 의해 흔들린 것은 내가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 단장으로 있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의 심정을 흔들었던 여성은 한국의 유명한 여류 시인 '매리언 모(모윤숙)'였다."라고 표현했다. 이후 "건국의 아버지는 크리슈나 메논이고 건국의 어머니는 모윤숙이다"라는 비웃음이 당시 세간에 퍼졌다.
6.25 전쟁이 지속 중이던 외국인 대상 사교클럽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것이 1951년 이승만의 지시로 만들어진 '낙랑클럽'이다. 모집 조건은 영어 능통한 이화여자전문학교 출신자였고 총 100여 명 정도가 소속되었으며 이들은 이화여자전문학교 혹은 숙명여자전문학교 출신으로 영어 능통자라는 조건 때문에 당시 고관들의 부인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본문에서 언급되는 전숙희의 책에서도 이야기가 나오고 모윤숙 자체도 인정한 내용이다. 모윤숙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중심 인물이 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 부인 허숙자 등으로 총재는 김활란, 회장은 모윤숙이었다. 이후 낙랑클럽에 대해서 '부인들의 민간 외교'라는 주장도 존재하지만 낙랑클럽에 소속되어 있었던 김수임을 변호하기 위해서 전숙희[13]가 쓴 책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서도 낙랑클럽은 유사 매춘 단체에 가깝게 묘사되는데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를 읽어보면 오히려 자선에도 참가한 우익 고위층의 사교클럽으로 묘사되어 있다. 단적으로 지나친 로비 문제와 김수임 사건 관련으로 낙랑클럽을 조사한 미군 CIC도, 당시 조사 보고서에서 낙랑클럽을 '로비를 위한 고급 호스티스 단체'로 규정해 버렸다.
이후 이 2가지 사건은 스캔들 차원에서 다루어졌으며 쉬쉬 되었으나 뉴라이트 관련 출판사인 기파랑 출판사에서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을 출판하면서 대놓고 민간 외교로 격상시켜 버리기도 했다. 물론 모윤숙 본인은 논개 드립을 치면서 미인계를 포함해서 모두 민간 외교로 싸잡아서 인정했다. 물론 기파랑 책에서는 미인계 운운은 안 나오고 순수한 문학적이고 문화적이며 로맨틱한 교류에 대해서만 주로 언급된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1990년대 한국군에 배포된 수양록 2페이지에 실려 있기도 한데, 모윤숙의 친일 전적을 아는 신병들은 신병교육대에서 수양록을 받고 충격을 받았다. 이 시가 '육군 명예의 전당'에도 있어서 '철거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2005년 나왔고 결국 2006년 철거되었다.
<나무위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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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에 뜬 별이거나
가라앉은 별이거나
곱게 하나 주워
가슴 깊이 갈무리하는
그런 시간을 기다려 봅니다.
=적토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