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월 만의 경기였다. 링에 올랐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 긴장하지 않고 몸을 푸는 데 집중했다. 정재광 선수를 상대로 작전은 이미 정해놨다. 1라운드를 시작하기 전 상대를 노려본 건 기선제압의 의미는 아니다. 원래 어떤 상대를 만나든 쳐다보는 편이다. 키가 커서 내려다보니까 거만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웃음). 자신감이 있다는 걸 표현할 필요는 있다.
초반에는 그런 신경전이 있는 법이다. 물론 경기 시작 전 링에 올라가 상대와 인사는 한다. 그리고 동작을 크게 한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 자신감 있는 동작을 하면 관중도 좋아한다. 사실 팬들이 많고 적고를 떠나 링 위에서는 어차피 상대와 내가 경기를 하는 게 아닌가. 관장님과 주변에서 도와주시는 분들만 경기장에 오셔도 감지덕지다.
정재광을 상대해 보니 어땠나. (정)재광이 형의 경기 녹화 테이프와는 달랐다. 재광이 형은 커버도 튼튼하고 잽을 이용해 거리를 좁혀나간다. 짧은 연타 연결을 많이 했다. 그런데 나와 경기에선 안쪽으로 파고 들었다. 처음에 잽을 강하게 때렸는데 잘 들어갔다. 팍팍 꽂히는 느낌이 손 끝을 타고 전해졌다. 나는 잽을 많이 내면서 상대를 살핀다. 이 경기도 그랬다. 기회가 많이 보였다. 경기를 앞두고 준비했던 게 훈련할 때는 잘 안 나왔는데 경기에 들어가니 잘 나왔다. 어퍼컷도 그랬고 전체적으로 준비했던 것의 70-80% 정도 나온 것 같다.
(정)재광이 형이 6라운드 때 피를 많이 흘려 의료진이 상태를 살폈다. 이후 강하게 나올 걸 예상했다. 접전을 피하지 않고 부딪쳤다. 재광이 형도 피하지 않았고 그래서 난타전이 됐다.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2번 날렸다. 재광이 형이 로프에 등을 기대고 반동으로 나오려는 순간 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날릴 때가 됐다. 그래서 펀치를 날렸고 그게 주효했다.
WBA 타이틀 도전 자격을 얻게 됐다. PABA 2차 방어전을 잘 마쳐 다행이다. 나나 관장님은 세계챔피언을 목표로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훈련을 그렇게 해 왔다. 관장님께서는 바쁘신데도 매니저까지 맡아 이것저것 다 챙겨주신다. 부모님께도 감사 드리고 관장님께도 마찬가지다.
복싱이란 어떤 의미인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전부다. 복싱을 안 하면 할 게 없다. 아침을 먹어도 점심을 먹어도 복싱을 위해 먹는 거다. 아침운동도 저녁운동도 복싱을 위해 한다. 쉬는 것도 복싱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한다. 늘 내 장점과 단점을 어떻게 살리고 보완할지 고민한다. 모든 게 복싱에 맞춰져 있다. 내일 당장 경기 일정이 잡혀도 뛸 수 있을 컨디션을 만들려고 한다. 여자친구도 당분간은 사귀지 않을 생각이다. 세계챔피언이 될 때까지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겠다. 운동하는 건 당연히 힘이 든다. 그게 정상이다. 인생은 거저 먹는 게 아니지 않나. 힘든 걸 얼마나 참느냐가 중요하다.
아침에 로드 워크를 한다. 낮에는 잠깐 잠을 잔다. 오후에 체육관에 가서 관장님과 함께 기술훈련을 한다. 오후 7시나 8시께 집에 돌아온다. 자기 전에 줄넘기와 섀도 복싱 그리고 샌드백을 때린다. 매일 반복한다. 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평소 연습량이 링에서의 승패를 좌우한다.
복싱을 시작하기 전에는 어땠나. 평범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길거리에서 싸워본 적은 없었고(웃음).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IMF로 실직하셨다. 그때 철이 좀 들었던 것 같다. (정)재광이 형과 경기를 치를 때 부모님은 체육관에 오시지 않았다. 부모님이 오고 안 오고는 중요하지 않다. 나를 생각해주는 게 더 중요하다. 어머니가 요새 몸이 좋지 않으셔서 걱정이다. 어머니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경기장에 오지 않으셨다. 이해한다. 서운한 생각은 없다. 아들이 맞는 걸 보고 싶지 않으신 거다. 트럭 운전을 하는 아버지는 바빠서 체육관에 오지 못하셨다.
돈 문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씀씀이가 헤프지 않아 돈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다. 헝그리 정신으로 하는 거다(웃음). 돈 보고 운동을 시작한 건 아니다. 생활하는 데 지장은 없다. 아버지가 일을 하셔서 복싱에만 전념할 수 있다. 한 길만 갈 것이다. 세계챔피언 벨트가 최우선이다. 존경하는 선수는 토마스 헌스(미국)다. 헌스의 전광석화 같은 원투 스트레이트와 링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는 나를 복싱으로 이끌었다. 주변에서는 내가 어리다고 하는데 부담은 없다. 나를 인정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기대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운동해야 한다. 세계타이틀에 도전할 자격을 얻었는데 아직 정해진 게 없다. 경기 일정은 관장님께서 챙기시기 때문에 내가 말할 상황은 아니다.
운동하면서 어려웠던 적은. 무척 많아서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경기에서 질 때가 힘들다. 지금까지 5번 졌다. 질 때마다 배우는 것도 있지만 좌절감을 느낀다. 복싱선수에게 1패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5번 아픔을 느꼈는데 그때마다 관장님도 같이 가슴 아파하시고. 관장님은 나를 잘 잡아 주셨다. 같이 운동하기 편하다. 나는 인내심이 좀 있는 편이라서 참으면서 운동하는 스타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장점은 스트레이트가 좋다는 것이다. 팔이 길어서 같은 체급의 선수들보다 유리한 면이 있다. 단점은 아직 근력이 부족한 것이다. 기술적으로 미완성이고 마음에 안 드는 게 아직 많다.
솔직히 가끔 술 한잔 마시고도 싶고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여름휴가를 안 간 지 3년째다. 명절 때 경기일정이 잡히면 집에도 못 간다.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고. 관장님도 나와 같은 생활이시다. 늘 최선을 다 하시니 나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자신과의 싸움 아니겠는가. 복싱 자체가 그렇다.
정재광과 경기를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정)재광이 형을 상대로 원했다기보다 관장님이 재광이 형을 꼽았다. 2005년 당시 페더급에서 가장 인기 많고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재광이 형이었다. 재광이 형이 타이틀을 반납하고 은퇴를 선언해서 다시는 링에서 못 볼 줄 알았다. 그런데 관장님이 “정재광을 꺾어야만 네 입지를 다질 수 있다”고 말씀 하셨다. 재광이 형 은퇴 후 내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때 재광이 형을 목표로 삼고 열심히 훈련하고 준비했는데 무산돼 아쉬웠다. 잠정 챔피언이 된 뒤 태국에서 시리언 콘도와 결정전을 치르기로 했는데 그 선수가 경기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때 재광이 형의 복귀 소식이 전해졌다. 관장님이 그 소식을 듣고 내가 확실한 챔피언이라는 걸 복싱팬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하셔서 이번 경기가 열리게 됐다. 사람들끼리 몇 마디 나눠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재광이형은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성실하고 남자다운 분이신 것 같다. 경기가 끝나고 인사를 드렸는데 같은 복싱인으로 느끼는 게 많았다. 지난 2년 동안 링에 오르지 못했지만 체육관 사범으로 계속 활동하셨다.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SPORTS2.0 제 59호(발행일 07월 09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