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역 / 범준 유인술
한창 때인 스물 후반에서 서른 전후 때쯤 마산에서 생활할 당시의 이야기 두 자루다.
보령제약 건풍제약 마산 판매대행사에 취업하고 7일간을 꼬박 교육을 빡세게 받았다. 그 교육이란 것의 내용인 즉선, 약국을 방문하면 다른 제약사의 영업사원보다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 방법들이다. 예를 들면 사모님이 업고나온 애기가 코 흘리며 아무리 못 생겼어도
“자라면 크게 한 자리 할 녀석입니다.”
마음에 없고 사실이 아니더라도 칭찬해서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더하여 약사와 상담 할 때도 약사의 왼편쪽에 서서 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부담을 덜 준다는 것이다. 복장은 최대한 깔끔하게 차려 입고 멋있게 고급 메이커로 입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약사와 다방을 함께 갈 때면, 마담이나 종업들한테도 관심 집중의 대상이 되도록 대화와 분위기를 리드해야 한다.”
라고 귀가 아프도록 강조했다. 이렇게 받은 교육을 실제에 적용 해보니 재미있는 말을 한 번 더 듣고 싶다고 다방 마담이 내실로 들어오라고 해서 비빔밥을 먹는데 여기서도 예외 없이 한바탕 재미있게 웃기며 맛있게 먹었다. 그럭저럭 자주 대하다보니 사이가 가까워졌다. 그렇게 되니 돈을 차용해달라고 할 때도 있었다. 또 밀양읍내에 내로라는 약국의 약사는
“너무 정확하게 출장 나오시니, 감동 받았소. 이렇게 확실한 청년이니 중매를 서겠소.”
라고 등을 밀었다, 결국 대부업계에서 알아주는 사장 댁의 외딸을 소개 받았다. 그녀가 마산에 나를 만나러 오게 됐다.
“오빠가 해군 장교라 예”
“와, 훌륭한 오빠 두셨네요.”
“그런데 예, 우리 함께 진해로 놀러 가 예.”
그렇게 일사천리로 일이 성사되었지만 아쉽게도 내 환경과는 경제적 수준이 너무 차이가 났다.
“아, 미안하지만 나는 댁의 짝이 되질 못합니다.”
라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런 나를 보고 그녀가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때만 해도 밀양에서 마산까지는 아주 멀게 느껴졌던 때였다. 아마도 까닭도 모르고 내가 무척 무례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도 그렇게 단칼에 그녀와의 관계를 끊은 것을 후회를 한다.그 뒤에도 어떤 약국 사모님은 점심식사를 가족들과 함께 하자고 불러서 은근히 조카딸과 합석시키기도 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내 처지라 모두 거절하고 말았다 .
내가 맡은 영업 구역이 넓고 멀어서 1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여인숙을 자주 이용했는데 옆방에서 들리는 교성소리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장거리 출장은 진주와 삼천포, 하동, 남해, 충무, 거제 등이 주 무대였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 있다 .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밀양 출장을 마치고 피곤에 지쳐서 마산행 기차를 타려고 대합실의 나무 벤치에 반은 조는 생태로 있었다. 밤 8시 열차로 기억된다. 그때 한 아가씨가 바로 뒤 벤치에 얌전히 앉았다. 곁눈으로 보아도 호감이 가는 인상이다. 염치고 뭣이고 용기를 내서 다짜고짜로 말을 걸었다 .
“저 , 실례지만 어디까지 가세요?”
그랬더니 그녀도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
“마산까지 가는데요.”
“나도 마산까지 갑니다. 우리 동행이네요 .”
그래서 마주 앉아 가게 되었다. ‘이건 찬스다. 내가 배운 영업 실력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그녀를 끌어갔다. 그녀도 내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며 즐거워했다. 종착역인 창원역에서 내리니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늘 준비해서 다닌 덕분에 우산을 펴고 마산행 버스를 놓칠세라 뛰어가려는데 그 아가씨가 팔짱을 끼면서 우산 안으로 쏙 들어 왔다.
“저랑 같이 가요.”
내심 무척 놀랐다.‘혹시 유흥업소에 나가는 아가씨가 아닐까?’라고 의심도 했다. 결국 버스를 함께 탔다 .
“이렇게 신세를 졌는데 다음에 차 한 잔 살게요. 연락처 주실래요?”
그녀의 즉석 제의에 가방에 있는 메모지를 급하게 꺼내서 전화번호를 적어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눈치껏 재빨리 전했다. 그리고 ‘이제 됐다!’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먼저 내리고 난 후, 나는 신마산 종점에서 내렸다. 일단 주소까지 주고받았으니 계속 만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리고 빨리 만나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이튿날부터는 매일 경리아가씨한테 묻기 일쑤였다.
“나한테 전화 온 것 없소?”
라고 물었지만 1주일이 지나도 그녀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조급하고 불안해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밥맛을 잃을 정도였다. '혹시 내가 준 쪽지를 잃어버렸나?' 혹은 '혹시 괜히 한 번 한 소리에 내가 너무 들뜬 것은 아닐까?' 별 생각을 다했다.그러면서도 차츰 그녀의 존재를 잃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경리아가씨가 무심한 듯 나를 불렀다.
“유 선생 , 전화 받아 봐요!”
“누, 누군데요?”
“처음 듣는 아가씨 목소리인데요.”
이런, 의자에 발이 걸려서 넘어지려는 것도 아랑곳 않고 아가씨의 손에서 빼앗다 싶게 전화기를 넘겨받았다.
“누, 누구세요?”
내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
“저 지난 번 메모지 받은 미스 박이예요 ”
“지금 어디세요? 마산시청 앞 정류장이라고요?”
“예, 시청 앞 정류장 맞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지금 나갑니다.”
대뜸 택시를 잡아타고 내달렸다.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기차와 버스에서 본 인상과는 많이 달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훌쩍 키가 컸다. ‘마산에도 이런 미인이 있었나?’ 할 정도로 미모가 출중했다. 타고 왔던 택시를 이용해서 북 마산에 있는 시민극장 부근의 이름난 다방으로 갔다. 그 당시에는 마산에 분위 있는 카페가 없는 때였다.그녀는 마산 시청 건설과 직원이었다. 온전히 양부모 슬하에 오빠가 한 분 있는 다복한 가정의 재원이었다. 마산 시청에 근무한다하니 약 십년 전 나도 세무과와 시정과에서 사환으로 있었으니 야간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생각이 났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학교는 마산 여고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은 여러 환경상 포기하고 취업했다고 했다.
“퇴근 후에는 주산 학원에서 수업을 받는답니다.”
생각보다 더 괜찮은 아가씨라 마음이 흡족했다. 며칠 후에 하도 보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 .
“오늘 저녁 식사 어때요?”
“어떻게 하지요. 오늘 학원수업이 있는데”
“그러면 마칠 시간에 학원 앞에서 기다리겠소.”
그런데 그녀가 수업 중인데도 일찍 나왔다.
“나 기다려도 되는데”
“그쪽에서 기다리신다는 데 어떻게 수업을 더 받을 수가 있겠어요?”
하며 배시시 웃는 모습에 내 가슴이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미리 봐 둔 선창가의 유명 중화요라 집으로 갔다. 큰 독방을 주었다.
“이 집에서 제일 맛있는 요리를 시키세요.”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나는 짜장면 먹을게요.”
라고 했다. 우리는 맛있게 먹으며 주로 학교 다니던 때의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일을 계기로 우리는 시간을 내서 자주 만났다.
그리고 무더운 한여름이 왔다. 하루는 가포 해수욕장에 기기로 하고 버스를 탔다. 그녀는 커다란 밀짚모자에 간단한 옷차림으로 시선을 집중 할 정도로 튀어 보였다. 촌놈이 보트를 처음 타는 것인데다 초보여서 보트가 뒤집어져서 옷이 쫄딱 젖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고 또 웃었다. 궁여지책으로 바로 뒷산에 가서 일부 옷을 벗어 한참 말려서 급한 대로 입었다. 유명한 함흥 냉면집에서 점심을 먹고 진해탑으로 갔다. 그때 갑자기 전문 직업 사진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잠깐만 포즈를 취해 주시겠습니까?“
갑작스러워서 난감했지만 그녀 혼자서 혹은 함께 손을 잡고 뒤로 몸을 젖히기도 꾸부리기도 하며 꽤 여러 장면을 찍고 진해 관광도 한 후에 돌아왔다. 그런데 우리의 교제를 막으려고 오빠가 술집에서 만나자고 했다. 만나자서 대뜸 겁박하는 말투로 들이댔다.
“선생과 여동생과의 만남은 오늘부터 끝내 주세요.”
“왜요? 뭐가 문제가 됩니까?”
“이보세요. 동생은 스물 한 살이고 선생은 서른 살이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만한 나이가 무슨 문제가 될까요? 서로가 사람이 좋고 마음에 들어서 교제하는 것인데 더구나 결혼을 약속한 것도 아니고 …”
술을 약간 강제로 권하며 분위기를 만들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무튼, 안 된다면 안 되는거요!”
끝내 막무가내로 화를 내며 나가 버렸다. 그 일이 있은 뒤로는 만남이 소홀해지고 나도 그녀를 놓아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판매 대행사를 사퇴하고 합천 고향으로 가서 박정희 대 김대중 대선 선거 유세자로 목에 피가 날 정도로 5일장이며 시골 마을까지 구석구석을 열심히 다녔다. 그렇지만 김대중 후보가 약 50만 표 차로 낙선하고 말았다. 그래서 곧 이어지는 총선에서 야당 후보를 지원해서 5전 6기로 당선시켰다. 그 공으로 고맙다고 광화문 국희 사무처에 발령을 내주었다.
그 후로 그녀의 소식이 궁금하고 보고 싶기도 했지만 더는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 지방 신문 광고란에 그녀가 경남 미스 선발 대회에서 미스 선으로 당선 된 것을 알았다. 그리고 기사에 의하면 모 은행에 특채됐다고 했다.
이제 아련한아름다운 한 폭의 추억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만나면 직접 축하해 주고 싶다고 하면 아마도 욕심이 지나치다고 할 것이다. .
* 범준 유인술
1942년 경상남도 합천 産
현재 광주문인협회 회원
뉴 스타트구절초 향기 자문위원
첫댓글 안타까운 옛사랑의 추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첫 이야기는 짧지만 상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킨 이야기라 작가의 인성이 잘 드러나고 있어서
동감하는 부분입니다. 그때 그 시절에 그런 처지였다면 아마도 나 자신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참으로 순고하면서도 가슴저린 이야기입니다. 사랑하고 싶지만 그것을 막는 더 큰 장애 때문에
포기해야만 하는 사랑의 아픔이 다 읽고 나서도 여운으로 남습니다.
*작품 감상 잘 했습니다. 더 많이 읽고 습작하시어 좋은 수필가로
거듭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