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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는 말은 ‘성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5)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는 말은 ‘성장’을 더 접근하는 말입니다. |
그래서 저는 ‘성장해야 할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장’을 ‘믿음’으로 보고 ‘성장하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장(믿음)은 몇 가지 필수 요건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성장의 필수 요건으로 성장하는 믿음의 의미를 상고하려고 합니다.
1. 성장해야 할 원인(배경)
성장의 첫 번째 필수 조건은 성장해야 할 원인 곧 그 배경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성장을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장해야 할 이유가 분명 있는 것입니다. 과일 나무는 주인이 심어주었기 때문에 성장해야 합니다. 아이는 부모가 낳아 주셨기 때문에 성장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도 성장해야 할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장해야 할 요소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요소는 성장해야 할 대상입니다(:13절). 여기 ‘우리’, ‘다’는 성장하는 대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다’는 복수적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그래서 성장해야 할 대상은 특별한 한 두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성장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저와 여러분 모두가 성장의 대상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목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저도 성장하기 위해 성경을 보며 기도하며 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설교 준비만을 위해 성경을 보며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요소는 성장해야 할 원인입니다(:13절).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런데 창조주되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힘쓸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 때문에 믿음이 성장해야 할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15절)은 성장의 모델을 예수 그리스도로 예시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성장해야 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입니다. 결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장해야 하는 근본적 원인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로 하나 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하나는 ‘우리’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하나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는 ‘우리’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2. 왜 성장해야 하는가? (성장의 필요성)
성장의 두 번째 필수 조건은 왜 성장해야 하는가? 곧 성장해야 할 필요성입니다. 여기 두 번째 필수 조건인 성장의 필요성은 첫 번째 필수 조건인 성장해야 할 원인하고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믿음이 성장해야 할 필요성은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 필요성은 믿음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특징은 성장입니다. 그리고 성장은 가장 행복감을 선물로 주기도 합니다. 식물(생명체가)이 자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병이 들어 있거나 죽어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체는 어떻습니까? 태어난 지 2-3개월 된 아이를 보면 이목구비와 상관없이 정말 예쁩니다. 특히 눈은 수정같이 밝고 더 없이 예뻐 보입니다. 그러나 이 예쁜 모습만 보기 위해 아이에 성장을 원하지 않는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1년 돌때가 되면 아이는 걷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1년 아이가 성장하지 않고 여전히 3개월 때의 예쁜 눈을 가진 상태로 있다면 이것은 부모의 행복이 아니라 근심거리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1년 된 아이는 1년 된 아이답게 성장해야 합니다. 2년 된 아이는 2년 된 아이답게 성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정상적인 생명체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명’이라고 말할 때, 똑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보편적으로 ‘거듭남’ 혹은 ‘새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가 새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면 반드시 걸맞게 성장해야 합니다. 여타의 생명처럼 우리의 믿음도 자라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이든지 병든 믿음인 것입니다. 십년을 믿어도 똑같다면 이것은 병든 믿음이든지 죽은 믿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생명인 것이 분명하며, 성장해야 하는 필요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더더욱 분명해 집니다. 야고보서 기자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할 때, 생명 없는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특히 13절과 15절은 믿음의 성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 성장해야 하는가? 두 번째 필요성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13절)
‘온전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의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은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믿음의 분량, 곧 믿음의 수준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믿는 것’과 ‘아는 일’ 두 가지 대조를 통해 믿음의 성장에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대조는 용어적 대조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라고 해도 전혀 틀린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믿는 것과 아는 일이라고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단회적 의미로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한 번이면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매일 매일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는 일은 한 번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는 일이 한 번으로 되는 것이라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일은 매일 매일 계속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믿는 것과 아는 일이라고 완전히 다른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용어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런 놀라운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은 표현, 곧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두 번째 대조는 우선순위의 대조 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것이 먼저 입니까? 아는 것이 먼저입니까? 보편적 상식으로는 믿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교육의 형태나 세상의 지식은 바로 이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교육(지식)은 논리적으로 알아야 만이 믿습니다. 절대로 먼저 믿고 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육(지식)은 믿는 것보다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관계는 아는 것보다 믿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믿는 것을 아는 일보다 우선시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믿음을 우선시 한 것은 글을 쓰는 편리성 때문이 아니라 의미적으로 우선이기 때문에 먼저 언급한 것입니다.
(믿음에는 세 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는데, 다음에 믿음의 원리에 대해 설교하려고 합니다)
세 번째 대조는 단회성과 연속성 의미의 대조입니다. 첫 번째 용어적인 대조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확실한 다른 대조를 보입니다. 믿는 것은 한 번이지만, 아는 일은 계속적인 연속성을 말합니다. 여기 ‘일’은 이론이 아니며, 반드시 행동을 동반할 때 성립되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일이란 의무성, 전문성, 책임성을 동반한 행동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일은 연속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데는 지나칠 정도로 극성을 부리는 양상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아는 일에는 무지할 정도로 부족합니다. 그래서 엉터리 그리스도인들이 많으며, 이단사이비가 난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필요성은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알게 모르게 항상 우리를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사자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에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아니면 이미 유혹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유혹을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들의 특성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14절)
어린 아이의 특성 중에 하나는 유혹에 잘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이 유괴 사건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 유괴 사건이 자주 발생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순진하기 때문에 앞뒤 상황 판단을 잘 하지 못하고 범인의 달콤한 유혹의 말에 쉽게 넘어 갑니다. 따라가면 어린이는 바로 유괴가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왜 믿음의 사람들이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아는 것 같은데 모르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믿는 것과 아는 일에 대해 대조하고 있는 것’에 다시 한 번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는 것은 일회성으로 끝나지만, 아는 일은 연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아는 일’을 ‘아는 것’으로 해석하며 그대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는 일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이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결코 미래 종말에 있을 일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사라진 법궤의 행방’을 다시 기억해 보십시오. 2500년 만에 사라진 법궤를 찾았다는 말은 얼마나 감동적이며 감격적인 교훈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위치와 법궤가 은밀하게 보관되어 있는 동굴과는 거의 일직선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가 법궤에 뿌려지기 위한 통로를 형성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라는 설은 구속사적으로도 얼마나 감동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라진 법궤를 찾았다는 것은 속임수요 간사한 유혹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 심지어는 목회자까지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설교에 인용하고 있으며, 동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유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2000년 전에 이미 이런 현상을 보고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순진한 어린 아이들이 유혹에 쉽게 빠진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성장의 목표 (성장의 표준)
성장의 원인과 성장의 필요성이 있다면 다음은 성장의 목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믿음의 성장의 목표는 더욱 그러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어디까지 성장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장의 목표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15절)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 ‘그’는 13절에 밝히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자랄지라.’는 성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장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의 경주의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2) |
그리고 ‘범사’는 항상(언제나)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하루만 자라고 말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사람처럼 어느 정도 자라면 성장이 멈추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채소처럼 어느 정도 자라면 상품가치 때문에 뽑아내다 파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것처럼 믿음의 성장도 범사에 성장해야 합니다.
:1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은 오늘 본문의 시작합니다. 이것은 성장의 목표를 염두하고 시작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성장의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거룩성, 진실성과 같은 성품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불교는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믿음의 경주나 믿음의 성장의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가? (성장의 방법)
어떤 방법으로 성장해야 하는가? 즉 성장으로 가는 길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을 아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일이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첫 번째 요건이며, 방법이며, 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장에 관한 주제를 다루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아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째는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은 성경이며,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양식을 먹어야 예수님의 대해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영적 양식’입니다.
육신은 식물(음식)을 먹어야 성장합니다. 반대로 음식을 먹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면 육신이 성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나 영의 양식인 말씀(성경)을 먹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첫 번째 요건은 성경인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먹어야 합니다. 마치 하루 세 끼 밥을 먹듯이 말입니다. 아이가 편식하면 제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영적 양식인 성경도 마찬 가지로 편식하면 제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신약을 좋아하기 때문에 구약은 거의 보지 않고 신약만 보고 있다면 이것은 편견이 아니라 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시편(잠언)을 좋아해서 시편(잠언)을 자주 보는 것도 편식입니다. 나는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고난의 관한 말씀을 즐겨본다는 것도 편식입니다.
육신의 양식이나 영적인 양식이나 골고루 섭취하지 않는 것은 바른 식사 방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을 먹으면서 유의할 것은 편식입니다. 편식은 금물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다양하게 섭취해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영적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부지런히 먹으며 영양을 섭취해야 합니다. 말씀을 매일 읽고 묵상하며 먹어야 합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계속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음식 먹을 때 그 음식의 성분과 구조를 다 알고 먹는 것이 아니라 먹다보니 알게 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을 사모하고 묵상해야 합니다(신6:6-9).
둘째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 기도는 범사에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는 ‘영적 호흡’입니다.
육신에서 생명을 가장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실상은 호흡입니다. 식사는 몇 끼 안 해도 죽지 않고 삽니다. 그래서 40일 금식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호흡은 3분 동안 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이 만큼 호흡은 생명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반면에 기도가 영적 호흡이라고 했을 때 이런 의미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호흡을 하지 않으면 육신은 더 이상 살 수 없고 죽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나 영의 호흡은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는 존재론적(탄생, 사역, 신성과 인성 등)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면, 기도를 통해서는 실제론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는 편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균형 있게 골고루 섭취해야 합니다.
셋째는 봉사하는 것입니다. 여기 봉사는 주님의 교회와 선교, 복음을 위한 봉사를 말합니다. 그래서 봉사하면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봉사는 ‘영적 운동’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많이 섭취하고 호흡을 정상적으로 하여도 적당한 운동을 하지 않으면 비만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비만은 다른 합병증을 유발하는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적당한 운동은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와 마찬 가지로 영적 운동인 봉사를 감사와 기쁨 마음으로 잘 감당하면 섬김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며, 영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육신은 비만에 시달린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나 영적인 운동을 하지 않으면 영적 비만에 걸린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은 인체의 3대 필수 영양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일인 영적인 3대 필수 영양소는 ‘말씀, 기도, 봉사’입니다. 여기 ‘필수’라는 말은 반드시 섭취하되 균형 있게 섭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을 균형 있게 섭취하듯 ‘말씀, 기도, 봉사’도 균형 있게 섭취해야 합니다.
2) 사랑과 참된 것을 범사에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일이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첫 번째 요건이라면, 두 번째 요건은 ‘사랑과 참된 것을 범사에 행하는 것’으로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율법을 재해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사랑은 성경 66권에 모든 사랑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참된 것’은 진실, 공의와 정의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참된 것에 반대말은 거짓입니다. 거짓은 어둠으로서 빛이 되신 예수님과 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진실을 전제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범사’는 항상 혹은 언제나입니다. 제한이 없는 시간, 곧 때를 말합니다. 믿음은 오늘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며, 기분이 좋을 때만 성장하는 것은 더욱 아니며, 환경에 따라 성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범사 즉 항상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15절에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은 사람처럼 어느 정도 자라면 성장이 멈추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채소처럼 어느 정도 자라면 상품가치 때문에 뽑아내다 파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것처럼 믿음도 오늘이나 내일 범사에 성장해야 합니다.
3) 좋은 목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일이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첫 번째 요건이라면, 두 번째 요건은 ‘사랑과 참된 것을 범사에 행하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요건은 ‘좋은 목자를 만나 지도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느 때보다 영적으로 혼란의 시대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이단들이 난무하고 있으며, 엉터리 같은 동영상들이 인터넷에서 판을 치고 있으며, 잘못된 종말론은 종말의 소문을 퍼뜨리며 혼동과 두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쁜 목자는 이러한 혼란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조합니다. 그리고 양들을 혼란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좋은 목자는 혼란을 분별하여 양들을 우물이 있는 초장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좋은 목자를 만나는 것은 믿음을 성장하는 세 번째 요건인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준비하던 설교를 잠시 멈추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고민했던 것은 ‘나는 좋은 목자인가?’였습니다. 한참 동안 고민을 해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제가 나쁜 목자라면 좋은 목자를 찾아 언제든지 떠나도 좋다는 것입니다.
4) 각 지체와 협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일이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첫 번째 요건이라면, 두 번째 요건은 ‘사랑과 참된 것을 범사에 행하는 것’이며, 세 번째 요건은 ‘좋은 목자를 만나는 것이며, 이제 마지막 네 번째 요건은 ‘각 지체와 협력하는 것’입니다.
:16절
사도 바울은 성장에는 서로의 협력이 필요로 하고 있는데 몸의 지체로 설명(비유)하고 있습니다. 입은 항상 먹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손발이 협력해 주지 않으면 제대로 먹을 수 없으며, 먹지 못하면 바르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몸의 지체는 독불 장군이 없습니다.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가 협력하며, 연합의 정신으로 협력할 때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공동체에서 믿음의 성장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 누구도 혼자 독불 장군처럼 해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장의 대상은 ‘우리’인 것입니다. 여기 ‘우리’ 안에는 목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목회자라고 할지라도 결코 성장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목사도 성장의 대상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장의 대상임을 노파심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각 지체의 유기적인 협력과 결합을 사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장의 협력 관계를 몸의 지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적절한 비유이며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는 비유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먹어야 예수님에 대해 바르게 알 수 있으며, 믿음의 성장도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 론>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주일학생들에게 써서 보내는 서신이 아닙니다. 어른들을 대상으로 보낸 서신입니다. 어른들은 더 이상 자랄 육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린이들에게 해당하는 ‘성장’을 의미하는 ‘자랄지라’는 말을 마치 어른들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성장’을 의식하고 편지를 써서 에베소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아이들은 성장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생 3개월째면 3개월 정도의 아이로 성장해야 합니다. 6개월이면 6개월, 1년이면 1년 된 아이답게 성장해야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3개월 정도 되면 이목구비와 상관없이 귀엽고 예쁩니다. 그러나 1년 첫돌이 되었는데도 3개월 째 어린 아이로 계속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보통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정도가 되면 부모에 근심거리 정도가 아니라 고통일 것입니다.
이와 마찬 가지로 영적인 성장 곧 믿음의 성장도 믿는 지 10년이 되었지만 그대로 있다면 영적인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께 고통을 주는 자녀가 되지 맙시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영적(믿음)성장을 어린 아이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이의 성장의 특성입니다. 둘째는 아이의 유혹의 특성입니다. 전자는 긍정적인 묘사이며, 후자는 부정적인 묘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이 두 가지 특성을 함께 공유하며 자랍니다. 영적인 요소인 믿음도 이와 똑같은 것입니다. 성장의 요소가 있는가 하면 유혹의 요소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사도 바울의 비유입니다. 너무나 실감나는 비유입니다.
말씀은 영적인 양식입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가 먼저 은혜를 받고 있으며, 목사도 성장의 대상임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영적 호흡이며 동시에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숨을 쉬며, 필요에 따라 말을 해야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화 없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 갈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만큼 자랄 수 있겠습니까?
봉사는 영적 운동입니다. 어린아이는 계속 움직입니다. 아이가 움직이지 않으면 병든 것입니다. 믿음도 성장하려면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예배 참석, 성도의 교제, 전도와 선교, 교회봉사 등은 움직이지 않고 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저는 이것을 영적 운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 기도, 봉사는 믿음을 성장시키는데 3대 필수 영양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어느 정도 섭취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영양소라는 것은 한 번이나 하루만 섭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편식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필요한 만큼 섭취하는 것이 필수 영양소입니다. 매일매일 섭취할 수 없다면 그 다음날이라도 섭취해야 필수 영양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만큼 말씀과 기도 그리고 봉사로 아는 일에도 힘을 써서 성장하는 믿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묵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