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내용 - 수치심을 지닌 삶, 하느님 계약의 충실성
혼인에 관련된 논쟁거리가 오늘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혼인성사를 특별한 하느님의 계약으로 받아들이고 그 성사적 지위를 지키려고 하는 이유는 오늘 예수님이 혼인에 대한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흔히 말하길 혼인은 하나의 사회적 계약이라고 말합니다. 이 계약이라고 하는 건 상호 인격적 신뢰를 바탕으로 2사람이 쌍무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을 계약이라고 하죠.
만약 어느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그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그런 관계의 계약이라면 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상호 인격적인 것이 아니라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계약이 되겠죠. 유대인들은 당연히 지금 우리 사회도 그런 아픈 시대를 거쳤지만 가부장적 사회 구조 안에서 여성의 인권이나 여성의 존재를 남성의 도구로 사용했던 그런 시대적인 흐름을 생각한다면, 언제든지 이유만 있다면 아내를 버려도 된다는 유대인들의 입장은 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멀지 않은 우리 할아버지 세대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또 그런 역사를 경험해 본 적이 있죠.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풀 수 없다는 가르침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선 안 된다는 얘기를 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혼인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하겠습니까? 차라리 혼인하지 않는 게 낫겠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이건 말을 뒤집으면 언제든지 내가 원하면 아내를 버릴 수 있는 남자만의 특권을 내가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얘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질문을 듣고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세요. 그래서 혼인은 우리 가톨릭 교회에서 사랑하는 남녀가 자연적인 사랑의 유대관계를 맺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정서적 표징으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데에는 그들이 인격적으로 서로를 헌신하고 또 성실하게 서로를 존중하고 또 신의를 지킬 것을 약속할 수 있는지를 충분히 배려하고 또 검토해서 그들에게 혼인의 지위를 인정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가 혼인에 관해서는 굉장히 엄격한 규정들을 갖는 이유는 바로 그런 자격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이고 또 그 계약의 신성성을 우리가 지키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기도 해요. 그런데 이 혼인의 문제는 단순히 그냥 한 남녀 간의 결합으로 끝나는 건 아닙니다. 오늘 길게 들으신 에제키엘 독서의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정말 사랑하는 한 여인처럼 그 어린 시절 핏덩어리였던 어린아이를 정말 손수 몸수 우리가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듯이 그렇게 성장시켜주는 그 긴 여정을 아주 지적이고 또 아주 섬세하게 표현을 했죠.
그래서 그 아름답고 가장 화려한 한 여인을 만들어낸 하느님의 정성을 이스라엘이 불륜을 통해서 계약을 깨뜨린 이 아픔의 상처를 고발하는 그런 글로 되어 있어요.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돼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그렇게 성장되는데 있어서 하느님께서 주신 무한한 축복을 상기시켜주는 거죠. 그런데 그들이 결국 우상에 빠져서 당시 자신을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 하느님을 저버리고 이방신에게 자신의 몸을 바친 이스라엘의 불륜의 역사를 아주 예리하게 비유적으로 그렇게 징벌하시고자 하시는 거죠.
그러나 그러한 계약이 하느님 앞에 큰 상처가 될 수는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그 계약을 기억하시고 다시 영원한 계약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 사랑으로 다시 품어주신다는 말씀을 하세요. 그럴 때 그렇게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아무런 조건도 없는 무한한 자비의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언젠가는 그들이 하느님께 얼마나 큰 죄를 지었고 또 하느님이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를 깨닫게 되면 니가 걸어온 길을 기억하고 수치스러워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 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실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우리 개인의 인생 역사를 이렇게 길게 들여다보면 항상 평탄한 것만 있는 건 아니죠. 내가 잘 나가고 또 남들한테 인정받을 때에는 그 모든 것들이 내 힘으로 된 것처럼 우리는 세상을 그렇게 바라봅니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의 시간을 거치고 내가 어느덧 문득 성장하고 지금의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되돌아보면 하느님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그렇게 감추어 주시고, 또 그 성장을 통해서 인내해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죠. 그래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의 죄과를 되돌아볼 수 있는 이 수치심에 대한 아주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치심을 잃었다는 건 자신이 받은 은혜와 또 은덕을 되살려 깨닫지 못하는 가장 나약한 인간의 표상이죠. 이건 우리 개인의 인생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국가 인류의 역사까지도 확장할 수 있어요. 인류가 과거 전쟁과 폭력의 역사를 가진 그런 안타까운 역사에 대한 제 성찰을 통해서 어 그 과거를 수치로 느낄 수 있을 때 그 과거 역사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어제가 광복절이었지만 너무나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그런 마음들은 역사에 우리가 당한 숯이 국권을 침탈당하고 수탈당했던 아픈 역사들 또 우리가 약자로서 약소국으로서 유린당한 모든 인권을 한순간에 잊고 망각하려고 하는 그런 시대 정신은 수치심을 잃은 우리 민족의 민낯이죠. 그걸 여지없이 우리 사회가 보여주고 있어요.
비근한 예로 제가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느낀 거지만 독일 사회는 인류 역사 안에서 특히 20세기의 가장 수치스러운 국가였습니다. 두번에 걸쳐서 세계 전쟁을 일으켰고 온통 서구 사회를 혼란에 빠트린 전쟁 주범 국가였죠 그러나 2차 대전 이후에 독일은 나치 히틀러가 범죄한 수치스러운 역사를 철저히 인류 앞에서 죄책 고백을 했어요. 그리고 그 모든 나치와 관련되어 있는 자신들의 전쟁에 많은 상처들을 철저하게 떼어내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죠. 그래서 모든 나치에 협력했던 이들에 대한 어 비판과 또 그들의 부역자들을 처벌하고 또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는 끊임없는 사회적 성찰을 지켜왔어요.
그것이 독일 사회가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국가로 꼽히게 된 이유이기도 해요.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교육 과정 안에서 모든 청소년 교육과 학교의 공교육 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경쟁은 야만이다”라는 이 가장 단순하고도 명확한 원리를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들의 야만성이라는 게 인간을 우열로 나누고 그리고 열등한 사람을 철저하게 짓밟는 강대국의 그런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학교 교육에서 경쟁 교육을 다 포기한 거예요.
모두가 자신들의 다양함과 또 자신들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 발휘할 수 있는 그런 교육 시스템을 만들고 어떤 경우에도 경쟁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사상을 버리려고 노력했던 거죠. 그게 지금의 독일 사회를 성장시킨 힘이라고들 얘기해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한반도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그리고 치욕스러운 역사를 치유하지 못했죠. 그리고 끊임없이 그런 친일의 또 국가적 그런 이익을 위해 기회주의에 빠져있던 그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또 그들만의 수치심을 왜곡하고 감추기 위해서 이 세력의 힘을 동원하고 있는 현실을 느낍니다. 분명 그 잘못된 역사는 수치심을 잃은 그런 역사에 대한 과오로부터 징벌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오늘 예수님의 복음 이야기와 또 에제킬 예언사의 이야기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무엇을 우리가 진짜 소중하게 여겨야 할지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수치심을 진정 죄책 고백과 용서로 성장시키고 또 이 사회 현실에서 올바른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또 세상에 올바른 정의를 세우기 위한 삶을 지향하고 있는지 한번 되돌아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멘.
송용민 신부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