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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28)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간 다윗왕
중국 명나라 시대에 큰 도둑 떼가 국경에 몰려들었다. 왕양명(1472-1528)은 황제의 명령으로 국경 마을로 떠났는데 도둑들은 산속 깊이 숨어 있고 좀처럼 쉽게 정벌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도읍에 있는 왕양명의 제자들이 학문을 게을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왕양명은 즉시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무리 험한 산속에 버티고 있는 도둑이라도 무찌르기를 계속하면 결국 정벌하게 된다. 그러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도둑은 완전히 무찌르기가 정말 어렵다.” 스승의 편지는 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다시 마음을 잡고 열심히 공부에 정진했다고 한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유혹의 연속이다. 왕양명은 안 될 일인 줄 알면서 하는 것, 열심히 해야 할 때 피우는 게으름, 이런 것들이 모두 마음속의 도둑이라 했다. 그는 이 도둑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남의 것을 탐하거나 옳지 못한 행동을 하고 그저 혼자만 잘 먹고 잘살려는 이기적인 욕심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왕양명은 항상 곧은 마음으로 자신 속의 도둑을 물리쳐야 한다고 가르쳤다.
다윗왕은 어느 날 밤에 궁전을 거닐다가 멀리서 목욕을 하고 있는 여성을 발견했다. 그 여성은 밧 세바란 여성인데 이미 결혼한 유부녀였다, 그의 남편은 충신 우리야였다. 그런데 다윗은 부하를 시켜 여성을 데려와 정을 통했다. 다윗은 부하 우리야를 죽이기 위해 꾀를 냈다. 다윗은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곳에 보내 결국 그를 죽었다. 그후 다윗은 우리야의 부인을 아내로 삼았다. 다윗은 탐욕에 눈이 멀어 부하를 일부러 죽게 하고 그 아내마저 차지하는 죄를 지은 것이었다.
하느님은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냈다.
“어떤 성에 부자와 가난한 이가 살았습니다.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많았지만 가난한 이에게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잣집에 손님이 왔는데, 부자는 자기 양이 아까워서 가난한 집의 새끼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저런 세상에 그런 파렴치한 놈이 있단 말인가?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소리를 지르며 흥분한 다윗을 보고 나단은 결정구를 날린다. “그 파렴치한 놈이 바로 임금님입니다. 임금님은 충신 우리야를 죽게 하고 그의 아내를 차지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임금님은 그 일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하느님은 마치 대낮처럼 그 일을 온 천하에 비출 것입니다.“
다윗은 나단의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하느님께 큰 죄를 지었소.” 다윗왕은 나단에게 즉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다.
이스라엘 역사상에서 위대한 성군으로 존경받는 다윗왕도 예상외로 죄를 많이 지었다. 그러나 다윗이 위대한 것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회개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진솔하게 뉘우칠 줄 알았던 다윗,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순수한 그의 믿음을 높이 존경하는 것이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성경 속 기도 이야기] (1) 이사(移徙)하면서 바치는 기도
솔직하게 마음 열고 하느님과 친해지는 시간
※ 이번 주부터 ‘성경 속 기도 이야기’ 기획을 시작합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전 교수인 서울대교구 신정훈(미카엘) 신부가 성경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기도를 바로 알고 행할 수 있도록 돕는 자리입니다.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올 연말까지 기도에 대해 여러분과 생각을 나눌 신정훈 미카엘입니다. 지면을 통해서나마 여러분과 생각을 나눌 수 있음에 감사드리고 글에 대해 궁금한 점이나 의견 주시면(shinmichael@hanmail.net) 짧고 부족하지만, 여건이 허락하는 한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언젠가 어느 신자분이 “어떤 기도가 올바른 기도입니까?”하며 여러 번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끝까지 저는 그분에게 시원한 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분은 어려운 문제를 안고 계셨고, 올바른 기도를 드리면 그 문제가 즉시 풀어지리라 여기셨던 듯싶습니다. 명의의 한 수에 깊은 병이 씻은 듯이 나는 것처럼 기도를 문제의 해결 도구로 삼고자 하는 생각은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사람은 그분을 찾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안에 이미 하느님의 부르심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기쁜 일, 또 슬프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 활동하시도록 합니다. 기도에서 각 사람이 처한 상황과 그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기도의 구체적인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기에 우리는 성경을 따라가면서 기도를 배우고자 합니다. 칼 라너 신부님은 어떤 이에게서 하느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넘쳐나는 것이 곧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하느님과 가까워질 것입니다.
나이 마흔의 야곱은 형 에사우를 피해 부모 집을 떠나 먼 고장으로 가면서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창세 28,20-22) 야곱의 기도는 여러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아직 하느님과의 관계가 깊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야곱은 하느님을 ‘당신’으로 표현하면서 그분과 친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야곱은 되돌아오는 길에 형이 장정 사백 명과 온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하느님을 찾습니다. “저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저의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 ‘너의 고향으로, 너의 친족에게 돌아가거라. 내가 너에게 잘해 주겠다.’ 하고 저에게 약속하신 주님! 당신 종에게 베푸신 그 모든 자애와 신의가 저에게는 과분합니다. 사실 저는 지팡이 하나만 짚고 이 요르단강을 건넜습니다만, 이제 이렇게 두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제 형의 손에서, 에사우의 손에서 부디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가 들이닥쳐서 어미 자식 할 것 없이 저희 모두를 치지나 않을까 저는 두렵습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너에게 잘해 주고, 네 후손을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처럼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이 두 번째 기도는 하느님의 약속 말씀으로 시작하고 맺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야곱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그 안에서 위안과 도움을 찾는 야곱은 이전에 비해서 훨씬 더 하느님과 친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 기도가 야곱에게 힘을 줍니다.
학교나 일자리 등 많은 이유에서 우리는 삶의 터전을 옮깁니다. 낯선 환경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그분에게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고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다”는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를 그분께 가까이 이끕니다.
[성경 입문] (9) 말씀의 예술가들
예술을 뜻하는 영어 ‘Art 아트’의 어원은 라틴어 ‘Ars 아르스’입니다. 그런데, 이 아르스는 보통 예술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의미보다 훨씬 광범위한 포괄적인 뜻을 지닌 말입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예술이라는 단어의 뜻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① 기예와 학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 ②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 공간 예술, 시간 예술, 종합 예술 따위로 나눌 수 있다. ③ 아름답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기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오늘날 ‘예술’이라는 단어는 두번째 의미로 많이 사용되지만, 본래는 세번째 의미가 훨씬 더 일반적인 의미였을 것입니다. 라틴어 성경의 ‘Ars 아르스’에 대응하는 그리스말 성경의 어휘는 ‘τέχνη 테크네’입니다(1열왕 7,14; 지혜 13,10; 14,19; 17,7; 사도 17,29; 18,3; 묵시 18,22 참조). 현대에 흔히 사용하는 Techno 테크노, Technology 테크놀로지라는 용어가 여기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고대에는 예술가와 장인(匠人)의 경계가 오늘날보다는 훨씬 모호했다는 말입니다. 예술과 기술의 구분이 없던 옛사람들의 통념 속에서 한 분야의 장인들은 모두 예술가였던 셈입니다. 오늘날에도 기막히게 놀라운 장인의 솜씨를 보면 “와, 완전 예술이네~!”라는 감탄이 자연스레 나오듯 말입니다. 제게는 평생을 철과 씨름하며 철공소를 운영하신 아버님의 철물 제품들도, 하루 종일 도서관 구석에 앉아 준비한 연구성과를 풀어내시는 교수님들의 흥미로운 강의 내용도, 시골 본당의 주방을 책임지셨던 지리산 할매들 손맛이 밴 나물무침도 같은 감동과 감탄을 자아내는, 그 자체로 예술이었습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도 수많은 예술가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예술가들은 전승의 전달자들인 이야기꾼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문자로 남긴 성경의 저자들과 편집자, 필사자들입니다. 인쇄술이 발명된 뒤에는 미려한 활자들을 만들어냈던 이들과 그 활자들을 활판에 올려놓았던 식자공(植字工) 같은 기술자들도 지금의 성경이 있기까지의 위대한 예술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펼칠 때마다 저는 그 이름없는 장인들을 떠올려 보곤합니다. 특히, 도서관과 박물관에서 마주했던 고대 필사본들은 늘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필경사들 뿐 아니라, 그 필사본 양피지를 아름답게 장식했을 중세 수사님들의 손놀림과 펜 자국, 붓 자국을 담고 있는 색 바랜 잉크에 매료되어 누렸던 호사를 잊지 못합니다. 이런 장인-예술가는 타고난 자질과 오랜 숙련과정을 통해서 완성되었고, 그들은 평생을 하느님 말씀의 전달이라는 사명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어디 말씀의 텃밭에 이런 장인들만 있었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 그들보다 훨씬 값진 장인-예술가들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했던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직접 접하기 힘들었던 시대에, 전례에서 귀담아 들었던 성경 말씀 한 구절을 자신의 삶속에 녹여냈던 수많은 신앙인들이 그 말씀밭을 지키고 일군 진정한 예술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거룩한 일상이야말로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 빛나는 예술이었습니다. 그 고귀한 아름다움에 날개를 단 말씀은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하느님께서 선포하시는 성경 말씀은 새로운 삶의 장인-예술인들의 삶 속에서 명작으로 거듭납니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하느님 말씀의 향기를 퍼뜨리는 바로 그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삶의 대가들입니다. 사목자로서 특히 본당에서 저에게 많은 감동과 영감으로 가르침을 주셨던 많은 ‘말씀밭의 예술가들, 삶의 대가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유년기 고향인 나자렛의 회당에서 있었던 일(루카 4,16-30)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자렛 회당에서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시자 이사야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봉독하신 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하시니, 마을 주민들이 처음에는 그 은총의 말씀에 놀라며 감탄하지요. 하지만 이내 그들은 어릴 때부터 보아온 “요셉의 아들”(22절)이 무슨 권위로 그런 말을 하느냐며 의심하고 분노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구약 시대에 보여준 이가 있습니다. 바로 기원전 7-6세기 활동한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의 고향은 아나톳인데요(예레 1,1), 예레미야도 아나톳인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당했습니다(11,18-23). 주님의 이름으로 전한 그의 메시지가 아나톳인들에게 못마땅하게 들리기도 했겠지만, 아마 혼인도 안 하고 평생 홀로 사는 예레미야(16,2)가 집안과 고을의 명예를 실추시킨다고 여긴 탓도 컸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와 예수님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죄 없이 타인을 위해 고통을 감내한 점,
독신을 유지한 점,
‘강도들의 소굴’처럼 타락한 성전을 꾸짖고 그 파괴를 예언한 점(예레 7,11.14; 마태 21,13; 23,37-39 등)이 그렇습니다.
자신이 전한 메시지 때문에 재판에 넘겨져 사형 선고를 받게 된 점도 같습니다.
구약 시대에 종교 지도자들이 예레미야의 성전 파괴 예고를 듣고 분노해 그를 사형에 처하려 했다면(예레 26,8-9.11), 신약 시대에 유다 기득권층은 예수님을 최고의회와 빌라도에게 넘겨 십자가형을 선고 받게 하였습니다(마태 26,57-66; 27,1-2.11-26). 이때 예수님께서 고발당하신 이유 가운데 하나도 성전을 두고 하신 말씀(61절)이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다는 점에 있습니다.
거짓 증언을 해서라도 예레미야를 해치려 한 구약 시대 기득권층의 음모(예레 18,18: “혀로 그를 치고”)는 신약 시대 종교 지도자들이 간교한 말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 한 일(마태 22,15)에서 되풀이됩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 양”에 견준 예레 11,19은 ‘고난받는 주님의 종’에 대해 말하는 이사 53,7에 반영되고, 사도 8,32.35에서는 예수님과 연결되기에 이릅니다. 이런 공통점을 감안하면,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예수님이 당신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예레미야”를 언급한(마태 16,13-14) 배경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오랜 세월 쌓아 올려 자신 있게 내세우는 지식이 오히려 자신을 속이고 남도 해칠 수 있음을 깨우쳐 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성경, 다시 보기] “빠라끌리또 성령”
믿을 교리가 실려있는 사도신경에서 성부와 성자에 대한 설명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많이 알아들을 수 있게 되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성령을 믿으며”라는 말씀만 있습니다. “신앙 고백”, 흔히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성령은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라고 읊으며 믿으라고 하지만, 우리는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하느님이신지 쉽게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령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다른 말로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는데, 그 단어가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5번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요한 14,16.26; 15,26; 16,7 1요한 2,1).
이 단어를 라틴어 번역(Vulgata)에서는 그냥 음역하고 있습니다 - 빠라끌레뚜스(Paracletus).
영어권: 킹 제임스 - 위로자(Comforter), 굿 뉴스 성경(GNB) - 협조자(Helper)
독어권: 통일번역 - 조력자(Beistand) 또는 - 협조자(Helfer)
중국어: 호위사(護慰師) 또는 - 보혜사(保惠師)
일본어: 변호사(辯護師)
개신교: 관주번역(1961년) - 보혜사(保惠師), 새 번역(2001년) - 보혜사(保惠師)
가톨릭: 공동번역 - 협조자, 200주년 – 협조자,
신약성서(1962년) - 바라글리도,
성경(2005년) - 보호자
가톨릭 성가(성가 번호 142~150)에서는 성령을 “위로자”로 노래하는데, 아시다시피 우리 가톨릭 성가는 대부분 라틴어 성가(소위 말하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번역하여 노래하는 것으로, 라틴어 가사에서는 희랍어 “파라클레토스”를 그냥 음역하여 “빠라끌레뚜스”라고 하며, 그것을 우리말로는 주로 성경에서는 “협조자”, 성가에서는 “위로자”로 번역하고 있고,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빠라끌리또 성신”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는 자주 이렇게 불렸습니다.
이제 문제가 되는 이 단어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분석해 보겠습니다. “파라”라는 말은 “나란히” “곁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영어 “파라렐(Parallel) 독어 ”파라렐레(Parallele)가 파생되어 나왔습니다. “클레토스”는 “칼레오(καλεω)”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칼레오”는 부르다는 뜻이고, “클레토스”는 과거분사로 동명사 주격입니다. 뜻은 “불린 자”이니, “파라”와 합치면, “옆에 불린 자”가 되겠습니다.
고급 식당에 가면, 손님 식탁 옆에 서서 손목에 흰 수건을 두르고 기다리고 있다가 손님이 부르면 달려와서 손님을 도와주는 사람을 “웨이터(Waiter)”라고 부릅니다. 성령의 역할이 바로 이 “웨이터”의 역할을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 생전의 가르침이나 말씀을 우리가 알아듣도록, 우리와 머무르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요한 14,17.26 참조).
그러면 성령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우리를 도와주시는 역할이라면, 나와 우리를, 신앙인을 도와주는 협조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분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꼭 같은 흠숭과 찬양을 받으실 신이심을 잊지 않는다면, 쉽게 그분을 비서 역할인 협조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어느 학생에게 “네 보호자를 불러오라” 하면 우리는 먼저 누구를 생각합니까? 당연히 부모님이지요. 그 부모님은 늘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만 하면 항상 곁에서 도와주시는 영원한 보호자이십니다.
[성경, 하느님의 말씀] 머지않아 떠나야만 하는 것들을 격렬히 사랑하라
‘손에 쥐다’ ‘손에 넣기 위해 무언가를 한다’와 같은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손은 인간의 소유를 가리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한다면 그 정도를 논함에 있어서 만인에게 공평하고 정당한 선이 있을까요? 손에 쥐려고 하는, 소유하려 드는 우리의 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현인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지요. 품팔이꾼은 자기 일에 대한 정당한 삯을 받기 위해 고역과 고통으로 그득한 인생을 살며(욥 7,1-6) 지혜로운 이는 자기의 결실을 어리석은 이에게 무상으로 넘겨주기도 합니다(코헬 2,12-26).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는 정당하다 여겨질 수 있는 소유조차도 영원하지 않으며 무의미하게 스러져 갑니다. 그 자체로 유한할 수밖에 없는 소유가 인간 본연의 한계에 대한 또 하나의 표현인 셈입니다.
한편으로, 이 본연의 한계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 분수에 맞지 않는 과도한 무언가를 손에 쥐려 드는 것, 끝없이 팽창하는 소유욕. 이를 표현함에 있어 마르 1,32에 나오는 질병과 마귀에 관련된 표현들을 차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 ‘병든 이’ ‘마귀 들린 이’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병을 소유한 이” “마귀에 소유당한 이”로 직역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과도하게 손에 쥐려 하다 보니 병까지 손에 쥐는 것, 그러다 마귀의 손에 스스로를 넘겨주는 것, 이것이 한계를 상정하지 않는 소유의 결말이라 하겠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셨다.”(마르 1,35) 주님의 기도하시는 손은 병까지 손에 쥐려 들고 마귀의 손도 잡는 우리의 손과 다릅니다. 주님의 기도 손은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하느님의 손이면서 동시에 한없이 비어있을 수밖에 없는 손입니다. 세상 창조와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끄신 아버지 하느님의 전능한 손을 닮아 있지만 동시에 그 전능하심을 세상의 구원과 복음화에 모두 내주시는 손이기 때문입니다(마르 1,38-39). 이러한 당신 손이 극명하게 드러난 자리가 십자가상입니다. 못에 관통 당한 그분의 구멍 난 손은 그 무엇도 움켜쥘 수 없는 손이지만, 바로 그 손이 죄에 물든 온 세상과 인류를 감싸 안으시고 포용하십니다. 무한히 비우시기에 무한히 지니실 수 있는 당신 손의 신비는 그저 소유하려 들며 병들게 되고 그로 인해 신음하는 우리의 손을 펴서 편안하고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손을 맞잡는 일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적인 무소유를 지향하면 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는 각자 분수에 맞게 소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주어집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작은 손에는 누군가를 담아내야 할 당위와 책임이 부여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기 손에 쥐어져 있는 존재를 한없이 아끼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 자기 손에 쥐어진 존재조차도 언젠가는 수증기처럼 떠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 떠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구속을 야기하는 순간, 우리의 손은 병과 마귀를 움켜쥐게 되겠지요. 수난 길에 들어서시는 주님을 꼭 붙들어 두려 했고 그로 인해 사탄에 비견된 베드로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마태 16,21-23).
16~17세기의 시인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73번 행 마지막 구절입니다. “머지않아 떠나야만 하는 것들을 격렬히 사랑하라.” 우리의 손이 주님의 손을 닮아 한없는 자유 가운데에 있는 격렬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