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천하의 어떤 일이든지 꼭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러면 안 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오직 의만을 따를 뿐이다.”라고 하셨다.
○ 適, 專主也. 『春秋傳』曰“吾誰適從” 是也. 莫, 不肯也. 比, 從也. 適이란 오로지 주장한다는 것이다. 춘추전에 이르길, 나는 누구를 오로지 따를 것인가? 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다. 莫은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比는 따른다는 것이다.
左傳 僖公五年 晉侯使士蔿爲二公子築蒲與屈 士蔿退而賦曰 狐裘厖茸以狐腋爲裘 貴者之裘也 厖茸亂貌 言貴者之多也 一國三公(蒲屈大都耦國 故獻公與二公子鼎立爲三公) 吾誰適從(言城不堅 則爲二公子所怨 堅之則爲國仇 不忠無以事君 故不知所適從) 좌전에, 희공 5년 진나라 제후가 士蔿로 하여금 두 공자를 위하여 蒲성과 屈성을 신축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사위는 물러나와 賦를 지어 말하길, ‘여우 가죽옷에 어지러이 새털이 돋아나서, 한 나라에 삼공이나 있으니, 나는 누구를 오로지 따라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여우 겨드랑이 털로 가죽옷을 만드니 귀한 사람의 가죽옷이다. 厖茸은 어지러운 모습이니, 귀한 사람이 많다는 말이다. 포성과 굴성은 큰 성이라 도성에 버금갔으므로, 그래서 헌공은 두 공자와 더불어 정립하여 삼공이 되었다. 성을 견고하지 짓지 않으면, 두 공자에게 원망을 받을 것이고, 견고하게 짓는다면 나라의 원수가 되어 불충하게 되니, 임금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에, 오로지 따를 바를 알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
2 | 謝氏曰: “適, 可也. 莫, 不可也. 無可無不可, 苟無道以主之, 不幾於猖狂自恣乎? 此佛ㆍ老之學, 所以自謂心無所住而能應變, 而卒得罪於聖人也. 聖人之學不然, 於無可無不可之間, 有義存焉. 然則君子之心, 果有所倚乎?” 사씨가 말하길, “適은 된다는 것이요, 莫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어서, 진실로 도로써 그것을 주장함이 없다면, 거의 미쳐서 발광하고 스스로 방자한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이것은 불교와 도교의 학문이 마음이 그쳐서 머무는 곳이 없어도 능히 임기응변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결국은 성인에게 죄를 짓는 까닭이다. 성인의 학문은 그러하지 않아서, 해도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사이에서, 합당함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즉 군자의 마음이 과연 치우치는 바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朱子曰 義是吾心所處之宜者 見事合恁地處 則隨而應之 更無所執也 義當富貴 便富貴 義當貧賤 便貧賤 當生則生 當死則死 只看義理合如何 주자가 말하길, “義라는 것은 내 마음이 대처하는 바의 합당함이다. 일을 마땅히 이렇게 처리해야 함을 알아보았다면, 곧 그에 따라 응하고서, 더이상 집착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義에 비추어 마땅히 부귀하게 살아야 한다면 곧바로 부귀하게 사는 것이고, 의에 비추어 마땅히 빈천하게 살아야 한다면, 곧바로 빈천하게 사는 것이며, 마땅히 살아야 한다면 살고, 마땅히 죽어야 한다면 죽는 것이다. 그저 의리상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지만 살펴볼 뿐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道是體義是用 聖人之學 以道爲主而隨事汎應 有義存焉 處物爲義 心無適莫 只看義合如何 雖若有所倚而實無所倚 道義變動不居 未嘗有所倚著 故也 無適莫而不主於義 則猖狂妄行 無適莫而義之比 則步步著實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道는 體이고 義는 用이다. 성인의 학문은 道를 주체로 하여 일에 따라 널리 대응하므로, 義가 여기에 보존되는 것이다. 외물에 대처함이 義가 되니, 마음은 꼭 해야 할 것과 莫해서는 안 될 것이 없이, 그저 義에 비추어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지만 살펴보는 것이다. 비록 치우친 바가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치우친 바가 없는 것이다. 원래 道義란 변동하여 어느 한 곳에 있지 않으므로, 일찍이 치우친 바가 없기 때문이다. 適과 莫이 없으면서 義에 주안점을 두지 않는다면, 미쳐 날뛰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고, 適과 莫이 없으면서도 義를 따른다면, 걸음걸음마다 착실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心不可先有所主 當於事至物來 虛心觀理 惟是之從而已 老主虛佛主空 自謂無所住著 似乎無適莫 然無義爲之據依 故至於猖狂自恣 問吾儒異於二氏者 何在 曰 吾儒則見虛空中辟塞 皆是實理 故未應則無思無爲 而此理已具 已應 則無適莫而惟義之從 쌍봉요씨가 말하길, “마음에 먼저 주인으로 삼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일에 당하고 외물에 이르러서, 빈 마음으로 이치를 살펴보고는, 오직 옳은 것을 따를 따름인 것이다. 노자는 虛에 주안점을 두었고, 부처는 空에 주안점을 두었으면서도, 스스로는 그쳐서 멈춘 곳이 없다고 말하니, 마치 꼭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義를 근거하고 의지할 것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미쳐 날뛰고 스스로 방자한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묻기를, “우리 유생들이 저 둘과 다른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우리 유생들은 곧 虛와 空 안의 쌓이고 충만함이 모두 실제적인 이치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대응하지 않았다면, 생각함이 없고 행함이 없어도 이미 이러한 이치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고, 이미 대응하였다면, 適과 莫이 없으면서도, 오직 義만을 따를 뿐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東陽許氏曰 無適莫者 有義爲之主 無可無不可者 義在可則可 義在不可則不可爾 心無主者 應事 則可亦可 不可亦可也 何獨應變不同於聖人 其應常亦未嘗有同也 동양허씨가 말하길, “適과 莫이 없는 것은 義를 주체로 삼음이 있고,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는 것은 義가 가함에 있으면 가하다는 것이고 義가 불가함에 있다면 불가하다는 것일 따름이다. 마음에 주안점을 둠이 없는 것은 일에 대응함에 있어, 가함도 역시 가한 것이고, 불가함도 역시 가한 것이다. 어찌 유독 應變함에 있어서만 성인과 다르겠는가? 그 일정함에 대응함에 있어서도, 역시 일찍이 같은 바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