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28.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예레18,18-20 마태20,17-28 - 이수철 신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 나라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좀처럼 길이, 빛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을 주는 지도자들도 참 보기 힘듭니다. 국내 사정이나 정치사정은 더욱 그러합니다. 극한 대결과 분열상태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진리를 또 확인하게 됩니다. 과연 인류는, 역사는 진보하는가? 때로는 회의하기도 합니다. 저절로 묻게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음입니다. 강론 제목이자 답은 단 하나로 요약됩니다.“종과 섬김의 영성으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해마다 이때쯤 맞이하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참으로 회개와 더불어 깨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시인은 그의 대표적 <자화상>이란 시에서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八割)이 바람”이라 했습니다. ‘바람’으로 상징되는 시련과 고난을 극복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저는 바람을 산으로 바꿔 “요셉수도원에서 36년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불암산”이라 주저없이 고백합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지금도 여전히 되뇌는 고백입니다. 산은 한결같은 정주의 상징입니다. 제가 쓴 무수한 시중 불암산이 대상인 경우도 참 많습니다. 불암산을 볼 때마다 저절로 떠오르는 시편 121장입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님한테서.”(시편121,1-2) 여기서 오랫동안의 삶을 되돌아 보면 힘들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고 말그대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고백대로 살아온 느낌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란 예감이 듭니다. 18년전 2006년 봄철에 써놨던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해마다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늘 거기 그 자리 그대로의 정주의 불암산이다”-2006 봄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한 것은 여기 살면서 답답하고 막막한 적은 있었어도 “실망, 원망, 절망”의 삼망은 결코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믿음과 희망, 사랑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놀라운 책을 구입하여 읽고 있습니다. 70대 후반의 어른과 30대 초반의 손자뻘 후배가 나눈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라는 대화집입니다. 손자뻘 되는 청년의 서문 일부를 나눕니다. “할아버지뻘 되는 정성헌 선생님을 대할 때마다 저는 끝없는 낙관에 놀랍니다. 젊은이들은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오히려 미래를 준비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10년이 남았다’면서 저를 다그치시죠. 따르고 싶은 어른이 생기니 앞길이 보입니다. 저는 고작 6년차인데 선생님은 지구 생명 살리기 운동만 60년 하셨습니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역설적이게도 먼저 태어나신 선생님에게서 저의 미래를 봅니다.” 절망이 대죄입니다. 제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지론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게 대죄이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하는, 참으로 탄력좋은 파스카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바로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가 복음의 예수님이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 구원의 표지가 됩니다. 사면초가의 절망적 상황에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두분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에 답을 줍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예레미야의 절박하고 간절한, 한결같은 기도가 답입니다.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 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보소서.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기도는 하느님 향한 영혼에 창문을 내는 것입니다. 햇빛같은 은총이, 시원하고 향긋한 바람같은 성령이 들어오지 않는 창문없는 방같은 영혼이라면 얼마나 답답할까요? 오래전 써놨던 “좋은 창 지닌 방하나만 있어도”란 시가 생각납니다. “방에 있는 TV, 그림, 사진... 대부분이 군더더기 쓸데없는 짐 이보다 더 좋은 임만드신 창문밖 하늘 풍경, 살아 있는 그림 늘 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 부러울 것 없겠네.”-2005년 봄 영혼의 방에 하느님 향한 창을 내는 일이 바로 기도입니다. 사면초가의 위기상황에서 우리를 끄집어 낼 수 있는 분은 전능하고 자비하신 주님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역시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세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말마디에서 보다 시피 예수님은 부활의 희망에로 활짝 열린 문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공동체안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늘 외로웠고 고독했으리란 생각이듭니다. 말그대로 오합지졸의 공동체, 동상이몽, 동문서답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를 만나러 매일 외딴곳을 찾았던 듯 싶습니다.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도 동참하거나 공감하는 이들 하나도 없고 심지어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두 아들이 예수님의 나라가 들어설 때 예수님 자리 양쪽에 있게 해달라는 청을 합니다. 모두가 철부지들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응이 극히 침착합니다. 제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좌절하거나 흥분함이 없이 부인과 문답을 나누셨고, 아마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었을 것입니다. 새삼 예수님의 내공이 얼마나 깊은지, 바로 하느님 향한 신뢰와 희망의 반영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도 제자공동체의 유일한 대안이자 처방은 “종과 섬김의 영성”뿐임을 천명하십니다. 형제들의 공동체에서 군림과 세도는 일체 배제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왔다.”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어원도 같으니 섬김의 종입니다. 이에 영감받은 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는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 정의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믿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섬김의 직무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할 수 있으며, 영성이 있다면 섬김과 종의 영성뿐임을 깨닫습니다. 학교, 병원, 식당처럼, 주님의 교회나 수도원도 예외없이 서비스업에 속합니다. 저는 서비스업의 3대 요건에 늘 유의하곤 합니다. 첫째 사람이 친절하며 좋아야하고, 둘째 실력이 좋아 유능해야 하고, 셋째 안팎의 환경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렇게 서비스업의 삼박자를 갖출 때 손님들도 끊임없이 줄을 이을 것입니다. 사람이 친절하고 좋아도 실력이 없어 무능하면 서비스업에 실격입니다. 그래서 저는 때로 우리 요셉수도원이 서비스업의 3대 요소를 갖췄는가 점검해 보곤 합니다. 일례로 의사가 사람만 좋고 실력이 없어 무능하다면 정말 쓸모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나 건물이 아닌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섬김과 종의 영성으로 무장하여 당신의 서비스업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성 베네딕도 수도회 태능 성 요셉수도원/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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