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점순 시 모음 75편
가나다순으로 편집/그도세상 김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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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월
이점순
달의 어깨가 춥다.
세상의 시간에서
서슬 실린 삶
남매를 쫓던 호랑이에게
동아줄은 없었듯이
내게도 없는가
노숙에 지쳐 낙엽처럼 가벼운
네 숨소리
내 숨소리
세상엔 없을 소리를 끌어안고
누런 夕刊 밑에서 신음한다.
지구를 열 번은 돌았을 객쩍은 상념들
‘없음’으로 털어 내고
바람도 헛돌고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는
13월
빈들에 서 있다.
안개 속달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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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갱년기
이점순
쉰 일곱 해를 맞아
텅 빈 희망에 얹혀 있다.
물기 없는 오늘에
떨림이 사그라진 그대의 손길에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것은 화한 불기.
49
굼뜸에 대한 연민
가을 하늘 구름이 고냥 제자리에 있기에,
산허리 동자 꽃 날만 바라는 양 고개를 내밀기에
모두가 항시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건듯 분 바람 다시 오고
내 손짓 아니 해도
해도 달도 모자람 없어
늘 만족한 귀족이었습니다.
맑고 아름다운 젊음
무심함에도 떠날 줄 모르고
아니
떠나리라 생각도 아니 했습니다.
게으른 오만에 누워 발끝만 사뭇 까닥거렸습니다.
요천수2) 아래 바윗돌 자갈 되고 모래 된 일
오, 나의 민민憫憫함이여!
내민 손 맞잡기가 귀찮아
눈만 찌긋 입만 쫑긋 마음만 내밀었더니
여린 사랑에 내려온 새 동아줄
멀거니 바라만 보다 놓쳐 버린 풍선이 되었습니다.
2) 요천수 : 남원 광한루 앞을 지나는 섬진강 상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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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래의 꿈
이점순
게딱지같은 등걸에
꽃이 피기를
딱
한 송이만 피어지기를,
눈물이 나도
딱 한 방울만
한 쪽 눈에서만,
떠남 그 어처구니에
딱 열흘만 아프고
가슴이 이내 비워지기를.
깊은 고요는 귀를 멀게 하고
숨소리도 내겐 없는데.
헛헛해 진 마음
파도에 쓸려 버리고
지느러미 펴고 하늘로 갈까보다.
날아서 갈까 보다.
아
이제 그만 바다를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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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추잠자리
이점순
돌무덤의 오래된 영혼
굽은 허리 돌아누울 즈음
사랑 보듬으려
바위에 앉는다.
쫑긋쫑긋
햇살 한 조각 갉아먹는다.
뜨거운 한숨으로
데워진 바람은
산자락에 쭈그려 앉아 쉰다.
자갈자갈
도랑물 구르는 소리
자갈자갈 아이들 웃음소리
무명실에
꼬리 물린 내 사랑
가슴에 달아드릴까
수줍어 타버린 날개
고백 못 한 눈만 커지고
돌무덤 가에서 선회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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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곡두
이점순
병신년 정월 말날
육십에 처음으로 된장을 담고
꽃샘추위가 밤에 풀려
고된 몸이 오히려 잠을 이긴 밤
뜬금없이
걱정 많은 아버지 소리가 들립니다.
날렵하고 정정하신
콧날이 오뚝한
엄한 중에 속정 많은 울 아버지
머릿속에서 보입니다.
좀 더 상냥하지 못했던 것이
묵은 체증처럼 갑갑한 이 밤
손에 닿을 듯
눈에 보일 듯
귓가에 들릴 듯
제 생전에 잊히잖게
가끔
그리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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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리움
이점순
아버지……
엄마……
사는 게 버겁다 피부를 콕콕 건드릴 때면
문득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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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길
이점순
누군가는 잘도 간 길이
내 앞에선 뚝 떨어져 버티고 있습니다.
문짝 없는 기차의 맞바람에
또 길을 잃고
절망의 손사래가 허허롭게 흐느낍니다.
들꽃에게도 골바람에게도
제 가는 길이 하나이건만
열도 되고 백도 되는 숱한 내 길
차라리 어둠이라면
하얀 초롱 꽃 빛으로 가련마는
백 갈래 길 우에서 오늘도 서성입니다.
길속으로 나는 갑니다.
허방다리 삶에
행여
그대 인적 느껴지면
물잠자리 고 여린 날갯짓처럼
한 살이 끈을 물고
허위허위 그 길을 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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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까치 밥
이점순
까치를 불러놓고
감나무가 옷을 벗는다.
부끄럼 없이 스스럼없이
한 삼십 년은 같이 산 것 마냥
옷을 벗는다.
늦가을 해 저문 냉기가 코끝에 싸한데
외씨버선 하나만 남겨 두고
옷을 벗는다.
엊그제 해산한 닭사리댁 작은 며느리 젖가슴 같은
잘 익은 홍시 하나 입에 물려주고
파르르 오르가슴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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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꼭두서니
이점순
꼭두서니 붉은빛
모시에 물을 멕여
오월 파란 하늘에 널자
연두 벌판 부끄러워 달음질로 숨는구나.
꼭두서니 붉은빛
입술에 바르고
물오른 버들가지 풀피리 불어보자
종달종달 종달새 구름 뒤로 숨는구나.
꼭두서니 붉은빛 가슴에 품어
봄비 그친 광한루 대수풀에서
그대 만나 눈을 보자
내 볼이 부끄러워 석양으로 숨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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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꽃물
이점순
단물은 우리에게 다 주시고
쓴물만 남은
어머니 손톱.
간드랑간드랑
봉선화 꽃물이
제비마저 날아가 허전한 하늘
우두커니 떠 있는
야윈 초승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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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말고 나
이점순
열 두어 살 소녀 하나가
말 탄도 안 하고
화도 못 내게 실실 웃으며 어깃장을 놓고 있다.
복장이 터져서 가슴만 치다가 날이 밝았다.
만사에 휘둘려진 나라고 한탄을 하며
내가 사는 저의가 무어냐고
시간만 나면 물었다.
말마디에 내가 서럽고
말마디에 내가 송곳을 꽂는다.
밤하늘엔 별도 많아
다디단 바람도 쉼 없이 불어와 어루만져 주지만
자꾸 말라 가는 가슴에 비릿한 한숨만 뿜는다.
나를 버릴까
나를 주울까
단잠을 잃고 자는 잠 속에
열 두어 살 그 소녀의 눈 속에 내가 웅크리고 있다.
나오지도 못하고 날이 밝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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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날개 돋던 하루
이점순
꿈속의 키스로
오월의 영산홍
허공을 잡아 흔들고.
손바닥만 한 창과
그만큼의 햇살과
그리고 그만큼의 바람과
그리하여 그만큼의 상념想念
해금의 현에서 춤추는 담홍의 오후
뒤축 닳은 구두처럼 기우뚱한 세상
허리 굽힌 검봉나비
‘이상’의 간지러운 겨드랑이 새에서
탈피를 한다.
자잘한 햇살 아래
수줍은 입술을 너에게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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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낮닭
이점순
해 떨어지면
지나가는 차도 없고
강아지도 잠잠해지는
1990년 외궁마을
여름의 한낮,
햇살도 나른한 그림자 마당에 드리우고
일없는 뻐꾸기
마을 한 바퀴 회돌 즈음
활자 냄새 알큰한 신문 눈가리개하고
도수 높은 낮잠에 취해 비틀거릴 때,
게으른 낮닭이 통성으로 판을 벌인다.
덜 익은 고추잠자리도 어우르던 그 오후.
15층 꼭대기가 허여멀건 오늘
문득 그립다.
쫄랑쫄랑 구름 쫓는 저 바람에
- 잘 있느냐
葉書라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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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내 마음의 담쟁이
이점순
풀벌레 소리 자지러지는 산자락에도
구름 닿지 못하는 하늘 밖에도
내 그리운 너는 없고.
깃 사이로
여린 외로움 날리고
하늘은 더 멀어져 가는데
수런대는 갈대밭
속 깊은 강물은
의지意志 없는 나를 안고 흐르네.
무서리로 설운
내 마음 넝쿨손
바람으로 떠돌
네 영혼의 그림자에나마 닿을 수 있다면
강줄기 따라 스러지는
한 줌 모래여도 좋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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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너무 멀다
이점순
너무 멀다.
詩 하나를 염원하고 밤을 새운다.
냉골 하늘가
덩그렇게 어머니를 앞세워 보기도 하고,
내 맘 어딘가에 있을 지난 사랑 헤적여 보고,
언제 이 나이가 됐나 사는 것에 나약해져
합장한 두 손 파르르 떨리던 쉰 살 넘어가던 어느 날
누군가를 위한 것도 아닌 나를 위한 것도 아닌
그저 침묵의 기도를 한
그 마음도 다시 꺼내어 보고,
책장에 갇힌 시인들 눈을 마주쳐 보기도 하다가,
악성 코드로 신경을 거스르는 자판기
쪼잔한 소갈머리로 손가락질만 해댄다.
벽시계는 아침을 열고
성급해진 마음에 제목도 없는 빈 화면에 한 줄 썼다.
아!
시 한 줄이 너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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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눈 오는 밤
이점순
그대가
기억 속에 없어
그리움도 없는 줄 알았어요.
어둔 창 밖에서
아프게 우는
싸락눈을 보기 전엔.
따라락따라락
가슴을 뜯는 유리창의 설움에
붉은 눈물 눈동자에 괴고
가새다리 껴안은 이 밤
그리움도 같이 안겨 옵니다.
산그늘 가벼워진 시간이 되면
기억에 없던 그대처럼
그리움도 가벼이 날아가 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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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단풍
이점순
뺨이
잘크라질 듯
그대의 입맞춤
혼몽한 부끄러움
자그르르
붉은 웃음이 흔들립니다.
갱년기 앓는 여인의 열병처럼
속살까지 붉어집니다.
하늘마저 태울까 저어한 바람
슬쩍 건드리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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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달
이점순
아쉬워,
왔다 갈 적마다 아쉬워
마른 손 길게 흔드시는 어머니
들어가시라 손짓하고
한참을 달려가는데
그래도 또 아쉽다
어머니 눈길이 따라오신다.
진득한 눈물
눈꼬리에 매달려
반은 감긴 눈
동산에 한 마장쯤 올라
온몸으로 염원하는 사랑
우리 가는 길에
등불로 밝혀 주시네.
들어가시라면 산 뒤로 숨고
그러다 어느새
우리 앞 바투 서 계신
흰 머리칼 반인데
여직 내가 아가인 어머니
오늘 등불이 유난히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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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달팽이
이점순
더딘 시간을
온 힘으로 밀어
오늘도 지나간다.
한숨 잠으로 피로를 재울 시간이다.
바람이 부나 보다.
별이 지나 보다.
이슬에 함초롬한 아침이 되나 보다.
발이 무거운 나그네는 다시 등짐을 채비한다.
‘한 줌 흙으로도 남지 않을 육신
바람의 기억으로도 남지 않을 이름
나는 무엇을 바라고
아등바등하는가’
오늘 화두로 길 위의 길을 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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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담
이점순
흙담이 삭아
바람의 여린 한숨으로도
비틀 녹아.
바람 찬 북문이 열려 감이 안 된다는
그래서
자라지 못하고 나이만 들어버린 감나무에
버팀목 같은 흙담 한 모퉁이
바람도 막아주고 햇살도 받아주고
감은 없어도 잎은 해마다 푸르다.
엄마……
어머니 가시고 북풍 같은 세상 뜰에 어느 날
생각도 뭣도 아무것도 모르겠고
퍼질러 앉혀진 몸이 일어나기 힘들어
그대로 누워서 하늘만
‘아가 내게 기대렴’
바라보기에도 부스러질 작은 등을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을 한 보따리 풀고
내어주신다.
그리운 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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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담쟁이
이점순
소록도 검시실 서러운 벽을
담쟁이 고운 잎이 바람에 펄럭인다.
조막손이를 하고
떨어진 발가락을 언 땅에 묻고
천형의 섬으로 내동댕이쳐진 흐트러진 육신
열여섯의 작은 마음이 칠순으로 그 고비를 넘어 버렸다.
세상은 바뀌어 사람들이 오고
사람을 구경하고
사람과 말을 하고
사람이라 불려진다.
그래도 서러워 눈빛을 하늘에 단다.
사람과 다른 형질로 맞는 뭇매
우리 밖 사람을 구경한다.
우주 밖 사람으로 유성이 된다.
다만
내 안의 나만이 존재할 뿐.
섬에 갇힌 바다를 바라만 볼 뿐.
바람은 천형을 두려워 않고 손길을 주고
천형을 함께 하는 담쟁이 푸른 잎이
오늘 씩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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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더하기 빼기 그리고
이점순
나에게서 너를 더하고
나에게서 너를 빼고
구름에서 하늘을 더하고
구름에서 하늘을 빼고
단풍에서 가을을 더하고
단풍에서 가을을 빼고
내 손목을 쥔 그 마음을 더하고
그 마음을 빼고
오늘밤도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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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동문원
이점순
사람 사는 일에
오만가지 사랑이 있겠지만
슬쩍
따순 손 내밀어
보이잖게 온기를 나눠주는
미소 고운 한 사람
부처님의
지그시 내려감은 미소를 염화시중하며
오는 보살
가는 중생 가림 없다.
님에게 주어 진 시간도
내게 주어 진 시간도
한 치 偏愛가 없지만
요모조모 쓸모 있게 시간을 조리하는 님
나는 늘 시간이 없다 늘 시간이 남아돈다.
허공을 도는데...
오늘도 동문원엔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게 담은 밥
구수히 내민 하얀 미소 퍼진다.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빗어 올린 머리
생기 돋는 세월에 우담바라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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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들꽃이기를
이점순
산자락들이
차암 고요타고 느껴질
그때에,
하늘에서 그냥
툭 떨어진 구름 그 한 조각으로
외발자전거 만들어
산으로 들로 쏘다니다가
땀 한 줄 등으로 흐르고
슬쩍 배가 고파오면
다람쥐네 알밤 하나 얻어먹고
토끼네 샘물 한 바가지 떠먹고
달빛에 농익은
패랭이 향이나 되고 싶다.
별빛에도 부끄러워 고개 돌리는
여린 들꽃이나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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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딱지
이점순
예습
- 날 잡힌 죽음 앞에 올 고통을 위해
한 갑자를 살아온 몸에
자잘자잘하게 굵직굵직하게
스며드는 삶의 노고
미간만 살짝 찡그리며 참아 본다.
종이에 베인 상처
내게, 네게 베인 상처
넓게 안아가며 참는다.
눈물나게 감사한 일
눈물나게 서러운 일
철철이 나눠주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음유하던 밤
삶의 고단을 이기지 못해 나를 찢는 밤
수행자처럼 묵묵함으로 인고하고
봄비의 포근함으로 감싸 안으며
나로 인해 아팠을 당신
나로 인해 서운했을 당신들에게
가슴에 손을 얹고 오늘부터 자숙을 한다.
그 날,
그 날을 대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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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막걸리
이점순
지구 심장에서 끌어올린
성수聖水
여든여덟의 생애에 국麴 여인을 만나
서로를 탐닉하듯
깨지며 넘어지며 환호하며 울부짖는
이렛날을 보내고
명상에 젖는다.
눈을 감는다.
콧길을 열어 깊은숨을 넘긴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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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모습
이점순
갸름하게
눈을 모아
파란 하늘
파란 구름
파란 바람을 본다.
디딤이 높은 토방에서 가끔
어머니는 어머니가 그리울 때
갸름하게 눈을 모아
세상의 파란 것들을 보시곤 했다.
파란 바람이 겨드랑이를 타고 오는 걸 즐기려
두 팔을 벌리시던
어머니 내 어머니가 보고 싶은
난
거울을 본다.
저쪽에서
두 팔을 벌리며 파랗게 웃고 있는 어머니가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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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몫
이점순
새집처럼 높게
그래야 오는 걸 빨리 볼 수 있으니.
새집처럼 성글게
그래야 멀리서도 목소릴 먼저 들을 수 있으니.
방호벽 같은 문고리를 잡고
목마른 그리움에 눈가는 붙어 있었어.
한 번쯤은 번쩍 치켜떠보지만
무거운 그리움
무게가 너무 힘들어.
‘살아보니 암것도 아녀……’
너무 힘들게 살지 말라는 유언 같은 암묵暗默
그 말씀이 아니어도 힘들지 않게 사는데
정말 아무렇지 않은데
가끔은 이렇게 내 마음의 문고리를 잡고
높지도 성글지도 못한
내 몫으로 남겨진 그리움
그리움이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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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몸살
이점순
동방삭이 세월만큼의 기다림이면 될까.
숨결이라곤
햇살로도 비출 수 없을 만큼 다함인데.
터 없이 떠돌던
눈물을 발아래 보낸다.
낙엽 되지 못하는 은행나무
늦가을 도시의 휘황한 밤하늘
별인 양 반짝임에
정신이 아득한데
오늘도 또 기다림
하늘을 딛고 선 발바닥
몽롱한 귀 울음
삼십구도 오부짜리 밤을 지새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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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무더위
이점순
바다가
졸졸졸
내 몸 곳곳에서
도랑물처럼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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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무제
이점순
참 오래인 거 같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
살아오면서 좋든 싫든 나를 관통하고 지나간 사연과
사건들
그 사건들 속에서
나를 아프게 했을 것들과
내가 아프게 했을 것들의
그 오만 것들이 오들오들 멍으로 나를 누른다.
참 오래도 살아왔다
오늘이 어제처럼
어제가 내일처럼 오래도 살아왔다
기억도 없다
지금을 견뎌내는 내 시간들은 순간으로 기억이 없다
나를 버린 순간의 시간들
내가 버린 찰나의 기억들
구름 뒤에서 자잘하게 부서져 퍼지는 햇살의 영광을
감은 동공으로 인내한다.
참 오래인 거 같다 나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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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밤꽃
이점순
유월 산등성이
바람난 여인의 치마 속에서
허옇게 웃고 있다.
제가 더 부끄러운 바람
숨소리를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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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배가 아픈 날
이점순
생시처럼 배가 아파
울다 잠이 깨었다.
새벽 한기 앉은 마루에서
아직도 아픈 것 같은 배를
끌어안았다.
이럴 땐,
껄끄럽던 어머니 따순 손이
참 좋은데
말끔히 배도 낫고
스륵 잠도 드는데
한잠 잘 자고 일어났던
어린 날이 그리워
내 손으로
어머니 흉내를 내 보았다.
껄끄럽지도 따숩지도 않아
아직도 아픈 것 같은 배에
잠든 남편 손이라도 얹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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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보자기 열두 장
이점순
어머닌
꽃무늬가 알록한 손수건을
싸고 또 싸서
보자기만 열두 장이다.
일흔 여덟 번째 당신 생애의 겨울
햇살 좋은 마루에서 보신 신문도
열두 번쯤 개켜 장롱에 모셨다.
스물 두 해째도 새아기인 내게
마흔 살 아버지를 소개하시며
수줍은 주름살이 살짝 웃고
세숫물에 걸레까지 빨아 주셨다는
상큼한 신혼 얘기
허리 늘어진 치마에 꼭 매단 아버지 넥타이
생각이 잠시 바람을 타고 들에도 다녀오시고
긴 굴을 무섬증 없이 헤매시고
구름 한 점 뜯으시더니……
그러구러 삼 년
꿈에 어머니 오셨는데
물만 한 잔 드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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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봄
이점순
시린 귀를 움켜쥐고
깨금발로 남쪽만 바라보는
노숙의 버드나무
불귀의 객처럼 떠돌던 막 추위가
애먼 짓으로 된서방 노릇을 톡톡히 한다.
여린 햇살을 가리기도 하고
귀 잡은 손 겨드랑이 간질이고
재 넘어가는 된바람을 불러 머리칼을 휘날리고
신음으로도 울지 못한 가난한 모든 이들의 설움
땅속으로 울려
몇 날은 족히 남은 시간이건만 봄님이 급한 채비를 한다.
인해전술의 눈발도
심통 사난 바람도
오지랖 넓은 먹구름도
떼쟁이 아들 어르는 어머니처럼 안아 다독여주고
잰걸음으로 달려와
가난으로 든 한기寒氣 가난으로 든 설움
한 번의 입맞춤으로 다 녹여 준다.
가난한 이에 먼저 오는 성자聖者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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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봄 까치 꽃
이점순
메리 독구 쫑
수줍게 지나간
봄햇살 넉넉한
키 작은 골목 모퉁이
넘실넘실
백만 송이로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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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봄바람
이점순
산마루엣 구름
그 끝에 그네 매어
단옷날 춘향이 되어 볼까나
갑사댕기 고운 머리
허공에 날리면서.
꽃인 줄
눈먼 나비
날 쫓아온다면
한들한들
쌍그네나 타면 좋겠네.
☆★☆★☆★☆★☆★☆★☆★☆★☆★☆★☆★☆★
《38》
봄이 오면
이점순
나무꾼의 선녀처럼
들판 아지랑이
하늘로 오르고
그동안
산비탈 미끄럽다 못 온
그대 오려나.
대밭에서 쉬던 바람
행장 꾸리면
기다림에 섧던 마른 눈물 훔치고
민들레 한 광주리
술을 빚어
꽃송이 하나
애잔한 마음 더하여
노오랗게 익은 술
내 한 잔 치리라.
☆★☆★☆★☆★☆★☆★☆★☆★☆★☆★☆★☆★
《39》
부유
이점순
하루살이도,
가슴에 새긴 사랑
묵언 삼 년 수행 끝나던 날
임의 가슴에 안겨
달빛 아래에서 숨지는데.
땅속 같은 그대 그림자
석삼년
기다림
그 끝자락에서 종내 홀로 스러지다.
매미가 울 마을 초입 가로등
바람도 그저 단숨에 지나가고.
차가운 그대 가슴 언저리에서라도
내 마지막 숨을 쉬었더라면
아-
묵은 기다림 섧진 않았었겠다.
☆★☆★☆★☆★☆★☆★☆★☆★☆★☆★☆★☆★
《40》
새 가는 곳을 그리워하며
이점순
간밤 꿈에도 오시잖은
어머니의 당신當身
하늘 반쪽 바람도 반만
잔솔 우거진 당신 가슴에
새 한 마리 숨겨두시고
야윈 검지로
방바닥만 토옥 톡 두들기십니다.
노을 비낀 산마루에
눈길을 두고
당신 그립단 말 대신
뜨거운 새 날려보내고
오늘 더욱 허전한 한숨
삼실 세 가닥 심지를 꼬아
들기름 잔에 불을 붙이면
가물가물 꺼질 듯 밤을 새니라.
내가 그 심지 같구나.
어머니는 세 가닥 심지 같은 목소리로
시인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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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새조개의 환상
이점순
이름 값을 못하는 슬픈 현실
회삼물灰三物 움막에서
- 갈매기나 되어 날아 볼까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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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서커스 소녀
이점순
그녀는 지구처럼 제 몸을 말았다.
별 하나 두고 온
푸른 고향을
뼈 없는 몸통에 안고
제 꿈의 크기를 재지 못하고
객석의 눈동자로 눈금을 삼아
오늘을 저울질하는가
어느 흐린 날
소쩍새의 울음이 울대를 넘지 못하듯
하늬바람 어부의 돛에서 방황하듯
소녀의 눈동자는 숨죽여 웃는다.
애잔한 연기는 끝나고
사슬 같은 박수에
우렁잇속 별빛 하나
하늘 없는 허공에 날려보낸다.
지구가 그녀를 말아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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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섬
이점순
된더위, 무서리
지나쳐 버린 흔적
작은 눈물 한 방울 성엣장 되어
또다시
진달래는 앵 돌아서고
하양 나비는 이슬 한 모금으로 지구를 돈다.
지쳐 스러질 사무침의 부스러기
하늘의 난동으로 바람은 울고
여운으로 떠돌던 지난해 매미 소리
헤집은 땅속
깊숙이
더 깊숙이
내려다본 뗏장 구름
그 위에 나
그 속에 나
아니
그냥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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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수첩手帖
이점순
버릴 것 좀 버리자고
책장을 뒤집고, 서랍을 헤집고
묵은 책 먼지가 매콤하다.
소월이며 영랑이며
박경리며 최명희며
버리지 못하고 제자리에 넣는데
뽈그름한 작은 수첩
어린 내 필적
소심한 시어
진지한 낙서
밤을 잊은 그대에게 주소
내 친구들의 주소와 이름과 생일과 지금은 바뀐 전화
번호가 빼곡한
애기 손바닥만 한 빨간 수첩
잊어버린 시간을 옴쓰라기 간직한 수첩을 보니
큰 골 작은 골 넘느라 뒤를 보지 못한 내가 있네.
웃음도 눈물도 많았던
장마 비린내를 즐기던
광한루 층계참에 청춘을 새겼던
내 친구들은 잘 지내시는가?
바람이 주는 대숲 소리에
춘향가를 벗 삼아 이 밤 편히 주무시는가?
암것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채울라
가슴을 가득 채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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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쉰둥이의 철학
소망
이점순
평균으로 내가 살 수 있는 날을 팔십 잡고 시간으로 따
져 보았다
일만 팔백 시간!
이 시간들이 가는 것일까, 오는 것일까
맞이하는 것일까, 보내는 것일까
그동안 생일은 몇 번을
만나고 헤어지게 될 사람은 몇 명일까
내가 미워하고 나를 험 잡을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골짜기 옹달샘에서 태어난 시내는 바다에 이르고
숱한 시내와 어우러져 자신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또 다
른 나를 이룬 바다에서 어떻게 견디며 살까
어제 흐렸던 하늘이 오늘은 하! 눈이 부신데
어제 울던 뻐꾸기 오늘은 없는데
상사화의 붉은 꽃은 스러져 가고 마음만 함께한 그대는
오늘 오는가.
딱지 같은 욕망이 엉겨 붙은 채 그대로 나인걸
멀리서 뻐꾸기 한가로울 때
소나무 등걸에 한 마리 백로 황혼에 불그레 질 때
내 소망하는 노래 한 구절 흥얼거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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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시골집
이점순
도시바람에 정처 모르고 떠돌다
사람멀미에
그들 사는 모습에 게염 부려4)
행색이 꼬질해진 여자는
그래도 살아있는 염치에 버스를 타지 못했다.
터미널은 막차를 보내고 하루 치 피곤을 털며 문을 닫
는다.
그녀만큼이나 꼬질한 가방도 피곤하다.
빈손이 부끄러워 산 고급한 과자가 그녀의 손에서 꼬질
해 진다.
부지런한 하루는 해뜨기 전에 또 시작이 되고
다시는 오지 않겠다며 뱉은 침이
마당에서 시퍼런 눈으로 기다리고 있을 것에 몸부림치며
다섯 대 중에 두 대는 가고
앙다문 입술 새로 여린 한숨 보내고
버스를 탄다.
지금쯤 점심 자시고 마루 한가운데에서 오수를 즐기시 겠나.
낫자루 슥삭슥삭 날을 세우시겠나.
울타리에 심어 둔 봉선화는 올해에도 겹겹이 올라와 있 겠나.
속절없이 버스는 빨리도 달린다.
4) 게염 부려 : 몹시 시새워하거나 욕심을 부리다
산등성이도
들녘도
넉넉한 품새로 웃어 준다. 그녀를 반긴다. 아니다 별일
없이 다녀온 하루 나들이처럼 평온하다.
그때는 어린 강아지가
이젠 다섯 마리 어미가 되어 꼬리를 흔든다,
컹
식구가 왔다고 안방에 대고 소리한다.
마루에 괸 먼지가 일어난다.
잔손질이 부족한 마당 풀들이 일어난다.
봉선화는 애 저녁에 없다.
잘 댕겨 왔나? 밥은 먹었나?
덜 익은 고추잠자리가 마당을 휘돈다.
들큼한 바람이 콧등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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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시(詩)를 써야 시인(詩人)
이점순
시인이라고
천지사방에 알려놓고선
잠만 잔다.
적어도 시인이라면
고뇌에 찬 밤을 새워 눈은 충혈이 되고
봄 햇살에 나부끼는 바람
그 바람에도 철학적 상념으로
가슴은 저려야지 않을까.
밤 소쩍새 울기도 전에
시인이라고 천지사방에 알려 놓고선 잠만 잔다.
희망이라는 실낱을 부여잡듯이
단어 한 자라도 떠오를까
그래도 꿈속을 헤맨다.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어둠에서 더 어둠으로 떨어지며
걸인의 동전 그릇이 된다.
지하철 중간 참 계단에서
불쌍한 모습의 동전 그릇이 된다.
베푸는 손길이 던져준 한 푼의 단어
한 푼어치의 글을 쓰고
시인이라고 천지사방에 알려놓고선
또
잠만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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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시처럼
이점순
철학이 담뿍 담긴
나를 쓰고 싶었다.
애국이든 정념이든
살점으로 새겨진 숱한 인생사를 보면서
그 한 부스러기라도 얻어
내게 붙이고 싶었다.
올해에도 여전히
하늘 높은 매미가 운다.
짙푸른 울음을 토한다.
갑작스레
일상의 일탈이 철학일까 마는
매미 울음 드높아 현기증에 시달려도
어제 같은 오늘을
해마다 맞이하는 것
마음 맞는 살점들이
내일도 웃어주는 것
오!
자그마한 시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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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아버지
이점순
묵정 밭에 외롭던 곰솔
바람으로 날아온 지혜의 씨알
하늘바라기로 의지 삼아
호미로 가래로 환웅의 터를 짓고
여섯 개 마차에 해를 달고
자갈 고른 고운 길로 고삐를 트신다.
무서리로 갈라진 손등
비막이 눈 막이 온 사랑을 주시고
하늘을 가릴 마음 천둥을 뉘일 웃음
단신의 몸으로 너끈하셨다.
그러나
겨자씨만 한 사랑이었노라
지리산 육모정에서
술잔에 고개 숙이시더니
초여름이 비를 타고 오던 날
그 비로 여행을 떠나신 묵정밭 아버지
곰솔로 그림자 내시고 지금도 웃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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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어머니
이점순
“아무려니 꽃이나 될까?”
여린 바람에도 외로운 낙엽
낙엽보다 마른
젖가슴
그래서 더 진한 그리움
숨소리는 자꾸만 여위어 가고
당신의 당신當身이 남긴
꼬리 긴 혼불의 끝을 보시고
오히려 미소를 지으십니다.
깜짝
반가운 미소를 지으십니다.
하늘 바람에 이제 막 날개를 말리려는
나비의 작은 흔들림 같은 손을 잡아 보다가
돌아서서
용광로에 한 방울 회한悔恨을 떨어뜨립니다.
지난해 낙엽은
햇살과 바람에 묻혀
향기로운 꽃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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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어쩌끄나 아가
이점순
어쩌끄나 아가
아가 어째야 쓸거나
봄바람이 모질게 분다.
너무나 모질어서 하늘은 낮게 앉아 울고
파도는 더 깊이 들어가 우는구나!
아가 아가 어쩌끄나
잠시라도 무서웠을 네 심정
나는 생각도 못하겠구나.
범고래 한 마리
휘파람 같은 한숨을 내려놓더니
검은 바다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걸보고 눈이 뜨였다.
철렁한 등골을 맘속으로 다 잡으며
오늘은 묵은 청소를 부질없이 해 댔는데……
아가 아가 어째야 쓸거나
너를, 나를 어째야 쓸거나
우리는 인자 어쩌끄나.
(2010년 3월 백령도 해군선 침몰 사건으로 떠난 우리
의 아들들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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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얼음새 꽃
이점순
겨울의 꼬리
산등성이 나지막이 햇살을 담뿍
영혼을 흡입하며 한 송이 얼음새 꽃
잘 견딘 혹한의 바람참에
마음이 흐뭇하다.
남들은 봄을 맞아 피어난다지만
얼음새 꽃 나는
늦은 겨울을 즐기려 핀다.
땅 새새에 비수 같은 얼음이 철망처럼 얽혀있어도
천년의 바위가 머리를 누르고 바람이 혹한으로 맴을 돌
아도
옅은 한 줄기 햇살만 있다면
도도滔滔한 삶의 지표로 찬란한 봄을
가슴 가득 안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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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옛집
이점순
마당에서 바쁜 어머니 그림자
그 치맛자락에서 비잉빙 돌던
어린 날 샘가, 낮아진 담장, 귀 떨어진 흙벽
헤집고 들어온 한 가닥 햇살
낯설게 웃고
어머니의 늙은 고쟁이
우울하게 서성이던 바람 얼음물에 헹궈 널고
마음 시린 나도 걸쳐 널었다.
꼭지만 덜렁 남은 까치 밥
꼭지만 덜렁 달린 엄마 젖가슴
높아진 하늘에 덜렁 걸린 창백한 낮달
야윈 툇마루
지난 일기 통통거리며 먼지를 풀썩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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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오늘
이점순
오늘 치 피곤을 맨 방바닥에 눕히고
잠들자 했다.
네가 사는 시간이나
내가 사는 시간이나
얼추 비슷할 진데
1월 보일러 꼭지는 늘 외출에 머물러 있는
맨 방바닥에 누인 내 피곤은 기력이 없다.
허둥지둥 요즘 내 맘이다.
나를 쫓는 것이 무엇인지
기우뚱기우뚱 걷는 물팍이 내달음질이다.
공간을 반 접어 냅다 걷는다.
무엇에 눌려 허공에서 익사하냐
가끔은
두렵지 않다고 팔 벌려 맞겠다던 죽음인데
빨강 신호등을 읽지 못한 순간
죽음 같은 숨 막힘에 벌벌 떨며
문득 서러움으로 목이 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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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옥정호
이점순
하늘을 삼키고
구름도 삼키더니
뉘엿대는 가슴
밤 내내 되새김질한다.
되새김으로 흐른 물안개
섬 되어 떠돌고
말갛게 토해낸
햇살
야윈 뺨이 곱다.
텃새
물길을 그으며 선회하고
하늘 머금은 붕어섬
오늘 한가롭다.
옥제玉帝도 계시고
용왕龍王도 사시는
옥정호 물결이 짙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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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용담
이점순
밤새
바람을 만난 댓잎은 비를 만든다.
용담호 마지막 잎새인은
여름가뭄에 비틀어진 호수
정을 두고 온몸으로 운다.
안간힘으로 운명을 쥔다.
잎새인은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리며 호수 너머 붉은 하늘을 덧
댄 구름
구름을 본다.
가슴 같은 땅을 치며 텅텅 울리는 가슴을 치며
늙은 아버지가 다진 땅을 말아 쥔
용담 마른 호수를 본다.
모두 떠나도 떠날 수 없어
가지랑대 끝에서 파르르 힘을 쓴다.
떠나는 바람에 비벼진 댓잎비
마지막 잎새인을 알지 못한다.
밤새 바람을 만난 댓잎은 비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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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울음
이점순
내 눈은
슬프지 않아도
눈물이 자꾸만 난다.
하늘 가
바람 끝 저수지
메마른 눈물,
찔레, 꽃피우려던 가지
봄 햇살에 눈물,
진달래, 꽃 진 고운 땅에
붉은 울음,
깊은 산비탈에 수꿩
꿔-엉 빈 귓바퀴를 돌며
산 벚
구름 되어 고운 구름 되어
슬프지 않아도
울음 되어 내린다.
울음길을 막아도 울음이 난다
슬프지도 않은 내 울음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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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日常
이점순
깊지 않은 산골 아침은
엊저녁 울다 만 산비둘기의 여운이 스며있다.
쉰 일곱 해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아침,
오늘도 아침은 온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시계에 맞춰
조물조물 아침을 끼워 본다.
빗금처럼 실비가 내리면 나도 조물조물 아침에 끼워 볼까
희부윰한 아침으로 풀길이 보이면
호미 하나 들고 밭으로 간다.
아직
산골 생활에 내 손길이 여물지 않았지만,
흙에 나를 비빈다.
사는 것에
느닷없는 그리움에
몸서리가 날라치면
질끈 동여맨 허리띠를 풀고
가까이 나를 보는 하늘을 본다.
단장端裝 늦은 구름 하나 수줍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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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작은 돌 하나 입에 물고
이점순
육십을 면전에 두고
서리꽃 핀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골 진 손등이야 하릴없는 웃음으로 넘겨보지만
동냥 귀에
참지 못한 말말께나 흘리면서
이 사람 저 사람 홀리며 나불거린다.
그대 행여 내 말에 반분이 나면
소맷자락 긴 옷으로 나를 숨기고
나풀나풀 떨어지는 꽃잎으로 어깨춤을 춰라
산을 넘는 두루미는
말을 좋아해
자갈자갈 허공에 입을 벌리면
멀리서 산 독수리 날아와 냉큼 잡아 배를 채운다.
젊은 두루미 또 자갈거리지만
경험 많은 늙은 두루미
작은 돌 하나 입에 물고 산을 넘는다.
침묵으로 한세상을 또 산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말을 하는 중생의 업이여
작은 돌 하나 입에 물고
훨훨 하늘을 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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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작은 숲
이점순
어둠을 가장한
어둠 속에서
여린 숨결 잃지 않은
百날 같은 오한의 몸부림
햇살은
색소폰의 여음
달팽이관 끝에서 줄을 잡고
聖水로 흘러와
자줏빛 영혼으로 돋았습니다.
날랜 바람
흔적 없는 키스를 퍼부어 놓고
숲을 이뤘습니다.
고구마 싹이 돋았습니다.
오롱조롱 들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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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잠들지 못하는 나무
이점순
약간의 어지럼을 즐기며,
부러
한 움큼 뿌린 별무리 마냥 네게서 빛나고 있었다.
밤마다 더 교태를 부리며 하늘을 향해 웃고
긴 허리를 작은 천 하나로 감출 여유도 없이
울면서 웃고 있었다.
해는 지려하고
모두 동안거로 분주한데
세상은 눈멀어
하여,
같이 할 수 없는 설움으로 울면서 웃고 있구나.
네온의 유혹이
갈 바 없는 바람이
소스라친 사람의 웃음이
너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가?
나는 네게 죄스럽다
재우지 않는 고문으로 피를 말려
서리가 허연 길 위에서 새파랗게 떨고 있는 너를
내 차가운 가슴으로 안아 주리라.
사랑합니다. 엄마!
어렸을 적부터의 기억은 책을 가까이 하시고
우리에게도 책을 많이 읽도록 권해주셨지요.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책 사주시는 건 아끼지 않으셨고,
제가 세 살 때 한 표현으로 시인이 될 것이라며 좋아하셨는데
시인은 되지 못했지만 덕분에 저는 지금도
독서가 일상이 되어있음에 참 감사합니다.
꽃과 같은 마음과 풀잎 같은 손으로 담아내신 앨범 같은 글들~!
엄마가 자랑스럽습니다.
사랑스런 딸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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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장구벌레
이점순
아파트 마당이 가로등 밑에서
함박눈을 먹는 양이 게검스럽다.
요런 날에 또
모기가 잉잉거린다.
동면 들어간 모기 약으로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손바닥을 탁탁 털고 자리에 누웠는데
잉잉 모기가 또 운다.
손전등까지 대동하여 찾아봤지만
흔적도 없다 잉잉 우는 모기는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봤는데
모기가 잉잉
잉잉 더 운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봤더니
달팽이관 저 속에서
장구벌레 한 마리,
사는 게 왜 그러느냐고
매가리 없는 내가 싫다고
잉 잉 잉 눈물도 없는 것이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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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전국 노래자랑
이점순
우리의 첫 아버지 어머니
그들의 삶에도
노래와 춤이 땅을 울리고
하늘을 기쁘게 하였더란다.
오천 년을 흘러온 그 열정
너른 들에 모였다.
삶의 온갖 조화로
우주를 건너온
아주 큰 웃음보따리
폭포수 아래 득음의 각혈
칠 년은 족히 웅크리다 터진
매미의 힘찬 날갯짓처럼
잘남도 못남도 없다
우리는 한 통속이다.
어깨통에 이는 바람
세상을 넘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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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점순이
이점순
세상에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 성정에 맞게 이름이 있다.
하늘, 바람, 별
그리고 나 이점순.
이름이 부끄러워서 아버지가 죽도록 싫었다.
아름다울 미가 들어간 친구들
진실할 진자가 들어간 친구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자기 소개하는 자리도 싫었고
김유정의 동백꽃을 배우던 국어 시간도 싫었다.
점자가 들어간 글자는 다 싫었다.
어느
붉은 노을이 이뻤던 오월
나를 점순이로 만들어 놓으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느
밤이 깊도록 엄마와 언니와 내 딸이 이름으로 웃음을
그치지 못했는데
그 웃음을 귓전에 남겨두고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그냥 나를 점순이로 남겨두고
곱지 않다 하여 개명을 요구하던 어느 문학단체
아버지 손에서 쓱 나온 이름이기에
어머니 입에서 늘상 불린 이름이기에
마지막 내 비석에 새겨질 이름이기에
당당히 거부
찬바람 꼬리에 내 이름을 달고
하늘로 둥실 띄워 보낸다.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열심히 사는 나를 보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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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창
이점순
참 오래 전에,
누워서 보는 창이 있었다.
지붕을 오달지게 뚫어
해님도 굽어보고 달님도 굽어보고
구름도 갸웃 그냥 가지 않던
비도 다녀가고
눈도 다녀가고
고물대는 열두 개 다리가
별이 되고 바람이 되던
아버지가 주신 하늘,
우리의 하늘이
그대로 가슴으로 내려앉던
뼘으로 하늘 따먹던
아버지의 창이 그리워
앉아 보는 창을 누워 보았다.
그리움이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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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촛불
이점순
만백성은 운다.
통곡의 벽을 넘지 못한 소리 없는 아우성을 껴안고
어둠에서 빛나리라 소원을 하며
별을 하늘로 띄운다. 날린다. 흘려보낸다.
이 땅,
갑과 을이 생긴 이 땅
변화의 물결을 순응하지 못하는 갑
변화의 물결을 순응시키지 못하는 을
팽팽하지 못한 줄다리기는
졸면서 꾼 꿈처럼
이 땅의 자식들을 갑과 을로 나누어 놓는다.
눈물로 파인 고랑을 타고
하늘의 마음은 무너지고 황량해지고
높새바람 이는 소리에 산새는 날아가 버리고
재를 만들지 못하고
촛불은 꺼진다.
만백성의 눈물이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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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춘설春雪
이점순
병술이놈 장가도 잘 갔지!
얼굴 곱지
손끝도 야물다고
제 엄니 자랑단지 넘쳐나던데
이월 초나흘
복사꽃 뺨을 지닌 예쁜 딸 낳아
술 한 잔 샀다.
사실 우리끼리니 하는 말이지만
병술이놈 좀 난봉이여?
그 중에 춘설이랑 여간 애틋하잖았는가?
그 정을 어찌했을까 몰라.
그러나
지난날은 지난날,
지어미만 사랑하는 수원앙의 화신,
병술이네 집에선
따스한 불빛
더없이 정겹건만
옛 여인
회한의 눈물 앙가슴을 적시고.
힘없는 사립문 모질게 열어
티도 없는 마당을 휘몰아치더니
남이 된 사랑의 행복을 엿듣는다.
서리서리 한숨으로
다시 오라 내게 오라 애원을 해도
병술이 요지부동이라
마음이 아려서
머릿속까지 차버린 눈물
밤 내내 흘리니 마당 가득이어라
“여보, 우리아기에게 선물이 왔어요.”
꽃숭어리로 맺힌 눈이
햇살에 흐르고 있다
무렴한 병술이
아랫목 이불을 끌어안는다.
☆★☆★☆★☆★☆★☆★☆★☆★☆★☆★☆★☆★
《68》
친구
이점순
몇 번을
마음을 열었다 닫았다.
너를 생각하면,
햇살이
버드나무에서 일렁이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가슴에선
박하향이 난다.
어느 날 후울쩍
반딧불이처럼,
숲엔지 하늘엔지
아니
바람인지 별인지
마음에만 보이는
네가
그립다
버드나무에 여린 물빛이 흐른다.
또 돌아온 이 봄에
☆★☆★☆★☆★☆★☆★☆★☆★☆★☆★☆★☆★
《69》
카네이션
이점순
단물 짠물 다 훑어내고
마른 가슴 흔적으로 남았다.
몇 마디 말씀에 버캐 얹힌 입꼬리는
비들비들 소금밭 되어
당신 가슴으로 쓸려 산이 되었다.
그립달 것도 아쉽달 것도 없다는 세상
그저 흘러간 것 같으시다는 팔십 동아줄
손바닥 물기 마르고 팔뚝 근육도 말라
줄 잡힌 손이 자꾸만 미끄럽다고
우시며 웃는다.
초승달 같이 웃으며 우신다.
엊저녁에도 맘 시끄런 꿈꾸시고
하얗게 돋은 아침
유리창 꽃무늬 틈새로 맞이하신다.
오월,
아버지 젯날을 손꼽아 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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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풀
이점순
따순 바람결이 아니어도
여느 연인들처럼 행복한 미소는 아니어도
나는 나를 자라게 한다.
그대
자지러진 실소를 내 온몸에 뱉어도
여린 뿌리 하나
뿌려진 햇살 따라 나는 나를 자라게 한다.
영근 꽃도 피워내고
은근한 향도 피워내고
그대의 무심한 눈길에도 아심찮은 마음으로
나는 나를 자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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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피곤한 아침
이점순
키 큰 거울 속에
낯익은
대갈장군이 서 있다.
봉황을 꿈꿨던 닭이 이제야 여의주를 토해냈네.
이제 문학세계라기보다는 체험세계로 건넌 듯한 나이에 가장 따뜻한
음성을 지닌 碧隱! 이점순 축하합니다.
삶에 지쳤던 시절에도 詩性의 끈을 놓지 않은 그대의 끈기에 존경하고
그대가 친구라는 내 울타리에 함께 있어 큰 위로가 돼.
碧隱 그대가 말했지? “사람들이 시가 곧 내 자전적인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어. 그걸 어떡하지? 그 부분이 두려워.” 난 “우리 나이에 뭐가
두려워. 그 간극을 좁혀 나가는 게 수행이지.” 이런 얘기 했었지?
碧隱! 우리 지리한 것 같았어도 훅하는 사이에 환갑 되었네. 대부분
젊었던 시절을 아쉬워하고 가는 청춘을 안타까워하는 게 정설 같지
만 유일하게 나이 듦을 아쉬워하지 않는 碧隱! 그대의 나이듦이 그대
에게 위안이 되어주길……
곰삭아 발효되어 깊은 맛이, 따뜻한 맛이 어우러진 碧隱의 시에 나
또한 큰 위로를 받네. 잉크 찍어 한 자씩 눌러 쓴 펜글씨로 끊임없이
수다를 풀었던 48년 벗으로 참! 좋았고 위로가 되었다네.
참, 서천의 바다 위 소나무 섬 사두기는 했는데 택배가 안 돼서 못 보
냈어.
아쉽네~.
계임
잘 가꾼 네 삶이 푸른 하늘처럼 높고 넓다.
거름더미 짚더미 산더미
네 삶에 풍성한 자양분이 된 먹구름 솜털구름
하늘과 별, 바람과 비……
그리고 엄마, 어머니!
내 삶에 덤으로 너를 만나서 위로가 된 시간을
돌아다보는 오늘이다.
밤새 봄비가 다녀 간 뒤 여기 하늘 높고 푸르다.
자랑스런 그대……
김 봉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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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하루
이점순
내 기준으로
오늘도 열심히 보냈다
내 죽을 때
후회가 덜 될까 하고……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이것도 저것도 했다
그런데
오늘 못해 본 것이 뭘까?
아! 독서를 못 했네.
세영이가 나 주려고 출판기념식에서 가져왔다는 『간단
한 이치』를 보다 자야겠다.
세상 살다 가는 것이 간단한 이치겠건만
복잡을 떨며 오늘도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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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헌책방 모서리에 서다
이점순
묵은 책 내음 같은 주인
TV에 눈을 달고 안중 없는 인사를 한다.
책방 왼쪽으로 건성 돌다
시인의 빙충맞은 윙크에 책장을 더듬는다.
뚝 넘어 색시 같은 웃음으로
노숙자의 노련한 손놀림으로
기억 밖의 할머니 모습으로 나를 보듬는다.
‘콩 쥐’는
지금도 쌀알을 고르고
‘술 권하는 사회’는
아직도 취해 있다.
‘-仁兄께’
절친한 누군가의 손에 쥐어졌을 ‘J교수’의 역작이
떨리는 손으로 나를 부른다.
콩고물 묻힌 떡 같은 책장을 창가에서 야금야금 먹는다.
늙은 선인장이
쾌쾌한 햇살아래 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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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화암사
이점순
완주군 화암사 산신각에는
산신님 등짐이 넘쳐나게 쌓여있다.
흰 고무신 신고 허위허위 올라온
감골 댁 소원까지 보태져
감 꽃이 흐드러지니
곶감도 잘 익어
감 내에 물들어 허옇게 분 입은
화암사 대웅전 부처님 코
선방 기둥
천 년은 헤아릴 공이도 묵묵히 참선한다.
시인이 “잘 익은” 절이라 한 마디하고
아이부터 다녀간 사람들마다 한 마디하고
할 말 없는 난 묵묵히 절 지붕만 바라다본다.
조릿대도 할 말 없어 흔들리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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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황혼
이점순
산마루 정자에
걸터앉은 태양,
왼 무릎 세우고
피로에 졸던
우리의 들무새로 평생을 하신
어머니처럼 온유하다
뜨겁지도 눈부시지도 않아.
어여쁜 내 동생!
자신한텐 인색할 정도로 아끼면서도 타인에겐 넉넉함으로 베풀며
어느 자리에서나 멋진 유머와 웃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너를 보면 기쁘고 행복하다.
두근거림, 애달픈 맘, 아련한 아픔, 또한 어릴적 조잘거림으로
쓴 네 글에 감동의 울림으로 가슴이 메어와 너를 느낀다,
나는 미소를 짓는다.
그동안 참 열심히도 살아온 네가 흐뭇하고 예쁘다.
그러나 환갑을 보내면서 육신의 편안함을 좀 더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며 앞으로 네 삶이 더 건강하고 행복하고
진정으로 복된 인생이 되길 기도할게……
사 랑 하 는 언 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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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점순 약력
문학세계 등단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 졸업
인성 전통놀이 강사
성수 주조장 운영
시집 : 《잡담》
진안문인협회 이사
주소 : 전북 진안군 성수면 관진로 802-5
우편번호 55459
이메일 (e-mail) leejs42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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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갱년기의
오묘한 표현들이
같은 마음을 들게 합니다
글이 좋아요
환갑을 보내면서
육신의 편안함을
좀 더 가져줬으면
누구나 바라는 소망이
아닐런지요
13월
이점순
달의 어깨가 춥다.
세상의 시간에서
서슬 실린 삶
남매를 쫓던 호랑이에게
동아줄은 없었듯이
내게도 없는가
노숙에 지쳐 낙엽처럼 가벼운
네 숨소리
내 숨소리
세상엔 없을 소리를 끌어안고
누런 夕刊 밑에서 신음한다.
지구를 열 번은 돌았을 객쩍은 상념들
‘없음’으로 털어 내고
바람도 헛돌고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는
13월
빈들에 서 있다.
안개 속달이 운다
덕분에요
잘 보았어요